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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분의 대상

학회 참석으로 사나흘 남한발 신문을 볼 겨를이 없었다.  겨우 사나흘이다. 그런데, 이 사나흘 신문을 보지 않는 것만으로도 나와 남한 사이에는 또 다른 시차가 생겼다.  지난 신문들을 읽으면 언제나 그렇듯이  여러가지 생각과 감정들이 교차한다.  아이유에 관한 기사가 눈에 들어왔다. 아이유 노래는 김창완과 함께 앨범을 냈다고해서 한번인가 들어봤는데, 목소리가 내 타입이 아니었다.. 그 후로 거의 들어본 적이 없다.  여하간 새로 앨범을 냈는데 그게 탈이 난 것 같다. 

 

일부에서 음원 폐기 주장과 서명운동까지 뒤따르고 있고, 그것에 대응해 아이유는 직접 '사과문'까지 올렸다고 한다.  아이유는 사과문에서 작사가로서 미숙했다고 밝혔다.  그런데 아이유의 사과문이 더 나를 더 불편하게 만들었다.  이 불편은 뭔지 나 스스로 난해해서 끄적여본다.  미숙했던 것은 '작사가로서' 아이유였을까?  도리어 작사가로서 미숙해서 이런 일이 나왔다는 아이유의 고백이 음원을 철폐하라는 주장만큼 씁쓸하다.  소비자들이 아이유가 새 앨범을 통해 꼬마 제제를 '성적' 학대를 했다는 인식은 나름(!) 바람직하다.  하지만 이런 일이 일어나게 된 더 근본적인 원인에 대한 이 집단적 침묵은 도대체 뭐란 말인가. 

 

 

이번 일로 아이유가 반성해야 하고 저항해야 하는 것은 '제제'라는 이미지에 실린 성적 학대보다 더 근본적으로 이런 창작을 할 수 있고, 그것을 음악으로 만들어내게 된 토대, 즉 남성중심사회에서 '여성'이 소비하는 방식을 저항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 테제가 구태의연한가?  나는 아이유가 새 앨범을 내놓기 전에 연애설을 흘리고, 그의 새 앨범을 통해 치르려 했던 '성인식'이 더 물린다.  

 

그렇다면, 이 뻔한 상술에 왜 유독 아이유(와 그의 소속사)마저 걸려든 것일까.  이 상술이 유통되기 때문이고 이 상술을 유통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비단 소녀시대, 원더걸스 같은 걸 '그룹'에서부터 아이유 같은 가수들에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다.  여자'애'로 태어나 앳된 이미지가 미처 마모되기도 전에 떠밀려 사회가 바라는  여'성'이 되고 여성이 되고 성적 대상에서 제외된 나이 든 여자들은 사회에서 부지불식간에 사라지고 있다.  즉, 어린 여성을 향한 집단적 숭배는 이 사회에 만연해 있는 여성에 대한 차별의 원인이기도하다.  또한 남성 중심 사회가 여성을 소비하는 방식은 여성을 성적 판타지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지난주 한겨레21에 실린 '달랑 두 편'  기사에서도 나왔듯이 한국 영화는 여성과 여성의 관계를 부정하는 방식으로도 드러내고 있다.  

 

아이유에 대한 공분이 수캐의 파렴치함보다 더 크다는 것과 여전히 미디어와 사회가 여성을 소비하는 방식도 화가 난다.  '성적 학대'를 운운하며 여전히 어린 여성을 향해 집단적 폭력이 과연 사회적 약자를 배려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을지 잘 모르겠다. 나는 오히려 제제보다는 늙은 수캐 최 씨와 그를 둘러싸고 있는 권력에 더 많은 공분이 일어나기를 바란다. 나의 제제는 걱정하지 마시라.  나으 제제는 그렇지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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