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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음물 놀이

유명인들이 아이스버스켓을 뒤집어 쓰는 일이 유행이다. 처음에는 미국 유명인들이 물을 뒤집어 쓰고 있는 사진들이 화제가 되더니 이제는 심심치않게 한국 유명인들이 물을 뒤집어 쓴 사진이 화제다. 얼마전까지만해도 이런 사진들을 보면서 미국 어느 유명 예능 프로그램에서 유명인들 골탕먹이는 게 아닌가 싶어 대수롭지 않게 여기다가  얼마전 페이스북을 통해 비로소 이 놀이(?)가 루게릭 희귀병 환우들을 위한 국제적인 기부문화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이스버스킷의 취지는 희귀병인 루게릭 병과 환우들의 고통을 알리자는데 있는 것 뿐만 아니라 기부문화의 “즐거움”을 알리는데 있다고 한다. 그런데 정말 이들은 루게릭 병이 무엇인지 한국에 루게릭 병을 앓고 있는 이들이 얼마나 되는지는 알고 이 행사에 참여하는걸까? 유명인 아무개의 호명을 받고 또 다른 유명인으로 옮겨지는 일은 이들 사이에서 자칫 유명인사로 호명당한 것 자체가 ‘그들만의 문화’가 된 것은 아닐까? 

 

월드스타 교황님이 다녀가기 전 이 나라가 교황님의 방문을 기대했다. 온 사회가 나랏님도 수수방관하고 있는 우리들의 고통이 교황님의 방문과 함께 사라지는 ‘기적’을 기대했다. 먼 발치에서 예수님의 흔적을 쫒는 삭개오처럼 교황님의 자취를 따라 백만명이 넘는 인파들이 서울광장으로 몰렸고 교황님의 방문하는 곳, 발자취 하나하나가 뉴스거리가 되었다. 그러나 우리들이 바라던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 도리어 세기의 최고 좌파라는 교황님의 메세지는 그 울림이 깊어지기도 전에 언론과 쇼셜미디어를 통해 소비되기 급급해 그 분이 다녀가신지 일주일도 채 되지 않아 철 지난 유행가 가사처럼 흥을 잃고 있다. 

 

흔히 신은 인간이 견딜 수 있는 만큼의 고통을 준다고 한다. 이 말은 고통에 총합이 있어서 그 수치가 사라질 때까지 그저 묵묵히 시간을 견뎌내거나 주어진 가시밭길을 통과하면 된다는 것이 아니다. 인간이 한계를 넘는 고통 속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는 것은 고통이 시간과 함께 상쇄되기 때문이 아니라 고통을 겪는 이들이 내적인 변화를 겪기 때문이다. 

 

자식들이 눈 앞에서 죽어가는 모습을 본 부모들이 팽목항을 떠나 일상으로 돌아왔다고 해서 그들이 그 사건이 없었던 시간으로 돌아간 것일까? 그렇지 않다. 오히려 고통은 시간과 더불어 다른 모습으로 운동한다. 고통은 유민 아버님의 선택처럼 영원히 깨어날 수 없는 악몽을 극단적인 선택을 통해서거나 타인의 고통을 공감하는 이들의 위로 속에서 숨겨지는 것이지 고통은 아이스버스켓을 뒤집어 쓴 순간을 지났다고해서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아이스버스킷을 뒤집어 쓴 유명인들 뿐 만 아니라 가깝게 세월호 참사를 목격한 이 사회는 참사 이전과 이후 어떻게 달라졌는가. 

 

이 아이스버스킷 행사의 취지가 기부의 '즐거움'을 나누기 위해서라면 그것은 그들이 가진 것이 많아서 그것을 기껍게 나누기 때문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다른 이들과 연계되어 있기 때문에 즐겁다. 그리고 기부는 공감을 토대로 가능하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는 말 역시 인간은 다른 사람들과 지속적으로 관계맺을 때 사회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다. 타인의 고통을 마치 철지난 유행가 가사처럼 식상해하며 아직도 그 ‘타령’ 이냐는 감수성으로 교황님의 메세지가 이 사회의 불치병을 낫게하는 ‘기적’을 일으키길 두손 모으고 바라기만 하거나 얼음물을 뒤집어 쓰는 유명인의 행사가 지구를 몇 바퀴를 돈다한들, 사회의 고통은 달라지지 않는다. 오히려 고통을 겪는 이들에게 더 견고히 숨어들 뿐이다.  

 

얼음물을 뒤집어 쓰는 행사가 또 다시 유행처럼 지나갈 것이 미리 염려되는 것은 차가운 바닷물에 묻힌 사회가 그 일을 겪기 이전과 이후로 달라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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