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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7/08/14
    '가항력적 구조'와 예수따름
    오른어깨

'가항력적 구조'와 예수따름

"빠~짝 벌때 벌어야 된 데이" 한 철 장사를 해야하는 해운대 상인이 여름 대목을 두고 하는 말이다. 올해는 특히나 '빠~짝' 벌어야 한다. 무더위가 기승한 어느 날 부산을 찾은 인파가 250만을 넘겼다는 뉴스가 나오고 "와~"하는 탄성과 함께 물장구치는 그림이 전국으로 전송됐지만 실상이 그렇지만은 않다. 요즘같이 궂은 날씨를 생각하면 그것은 반가운 '뉴스'가 아니라 오히려 약 올리고 속태우는 형세다. 한참 휴가철인 8월에 유독 부산은 비도 많이 오고 날씨도 흐리다. 그래서 장사를 더 잘 해보려는 상인일수록 더욱더 '빠~짝' 매달려야 한다. 사람이 의지를 가져도 뜻대로 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주변의 환경과 상황이 이를 받쳐주지 않아서다. 구조결정론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구조적 문제가 개인의 의지를 무력화 할 때가 살면서 참 많다는 것이다. 구조에 의해 의지의 무력화를 당한 이들은 고통을 겪는다. 혹여 같은 구조적 억압을 당했다 하더라도 그 개인에게 의지가 없었다면 고통은 그 의지의 양만큼 경감될 것이다. 당연히 그 역도 성립되는데 의지를 가진 사람일수록 구조로 인한 물리적 고통에 더해 바로 그 의지 만큼의 아픔을 추가로 겪게 되는 것이다. 의지는 아무렇게나 발휘되지 않는다. 어떤 계기에서든 행위자가 그 필요를 자각해야 발휘할 수 있게 된다. 단순한 강요로 의지를 강제할 수는 없다. 같은 수험생들이라도 스스로 공부의 필요성을 자각할 때에라야만 자신의 욕구를 제어해 가면서까지 학업에 임하게 되는 법이다. 개인적 자각이 결여된 강제된 '야자(야간자율학습)'가 실효를 거두지 못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 때 의지를 발현하기 위한 계기, 자각의 순간은 어떤 위기의식, 즉 절박함에서 온다. 목적 혹은 목표를 향한 절박함은 목표 달성의 이유를 자각하게 하고 이는 그 사람에게 가능성 여부를 떠나 여러가지 구조적, 개인적 제약에 부딪혀 볼 의지를 부여하는 것이다. 연인을 두고 온 병사의 경우, 총탄이 빗발치는 극한의 전장에서 "반드시 살아서 돌아가야한다"는 생존의 의지를 발휘할 수 있는 것은 사랑하는 이에 대한 절박함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사랑하는 이를 보아야 한다는 목적의식 보다는 그것을 이루어야 한다는 절박함이 더 큰 것인데 다음에 보아도 되고, 아무때나 만날 수 있다면, 즉 절박함이 없다면 기를 쓰고 의지를 발휘할 필요가 없어진다. 결국 절박함을 품은 사람만이 의지를 갖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앞선 진술처럼 의지를 품은 사람은 더 큰 고통을 당하기 십상이다. 더 불행한 것은 의지를 품고 고통당하는 이들이 대게 절박한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절박함도 여러 종류가 있겠지만, 그것이 생존문제와 직결된 절박함일 때는 논의의 정도가 달라진다. 고통의 깊이는 이제 생존의 문제에까지 이르기 때문이다. 의지를 발휘하는 데도 구조에 짓눌려 바로 그 의지와 절박함으로 만큼 고통에 처한 이들이 있다. 아직도 투쟁중에 있는 이랜드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그들이다. 이들의 고통은 단지 직장을 잃은 것에 있지 않다. 의지는 절박함에서 온다고 했는데, 의지를 강제할 수는 없다고 했지만 또한 불행하게도 절박함은 강제할 수 있다. 이랜드를 대표로한 이 땅의 약 850만의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살아가려는 의지로 점철된 사람들이다. 그 누구보다도 성실히 하루 하루, 한달 한달을 살아가는, 아니 그렇게 살아갈 수 밖에 없는 사람들이다. '비정규직'이라고 무턱대고 미화할 마음은 없다. 인간이 다 그렇듯이 우리는 자신을 누구라고 부르든 약점과 사악함으로 표출되는 비도덕성이 절박함과 성실함 속에 구분없이 섞여있는 존재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개인의 도덕성과 성실 지수와 관계없이 비정규직은 더 성실해야 하고 더 의지를 발휘해야 하는 구조속에 놓여있고, 그것은 이들을 오늘날 한국사회에서 더 큰 절박함, 즉 생존의 절박성을 강제하고 있는 것이다. 때문에 이들의 고통은 직장을 잃은 슬픔과 박탈감에 더해 삶의 의지와 현실의 절박성 만큼 가중된다. 그러나 이 고통은 더 근원적으로는 이들의 현재를 구성했던 사회 구조로부터 원인을 찾을 수 있다. 이를테면 자본주의 사회에서 알량한 자기 자본을 증식할 도구를 지니지 못한 사람들은 그것이 물려받은 유산이든, 땅문서 집문서든, 뛰어난 재능이든, 학력이든, 외모 든, 혹 그것을 교육 자본이니 문화 자본이니 하며 뭐라고 명명하든 간에, 이들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경쟁력'확보를 위한 최소한의 자본을 획득하지 못했기 때문에 불리한 구조속에 놓이게 됐다. 가일층 이들중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미 그것을 획득하기 어려운 구조속에서 살아온 사람들이 더 많다는 사실이다. 가령 이 땅에서 학력이 낮다는 것은 단지 그 개인의 열의와 학습능력의 문제만이 아니다. 그가 학업에 매진할 수 없게했던 구조적 요인을 간과해선 안된다. 몇 세대 전만해도 대학은 커녕 중학교, 고등학교를 제대로 나온 사람이 귀했던 이유가 그렇다. 먹고살기 어려운 시대에서는 아무나 학교에 갈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먹고 살만한'의 조건이 주어졌거나 '의식있는 부모'를 만나야 했다. '의식있는 부모' 또한 그 의식 형성이 하늘에서 거저 주어진 것이 아니었다. 오늘날은 거의 모두가 대학에 가는 시대가 되었지만, '학벌주의'가 만연하면서 단순한 대학교 졸업장은 그 의미(교육자본으로서의)를 상실한지 오래다. 이런 사회구조는 이들이 오늘날 비정규직이라는 또 다른 구조를 선택하도록 몰아넣었고 이 구조는 노동자로서의 처우와 근로 조건, 임금 등에서 부당함과 차별을 공공연히 자행해 더욱 집요하게 이들을 일상의 절박함, 생존의 절박함속으로 밀어넣었다. 이들의 절박함을 강제하는 것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이들의 미래를 구성하는 구조적 요건, 즉 빈곤의 악순환 문제이다. 빈곤은 단지 돈이 부족해 호의호식을 못하는 것을 말하지 않는다. 이는 상시적 위험에의 노출이며 모든 기회로부터의 소외를 뜻한다. 즉 이는 인생에 대한 개인의 선택권의 제약으로 귀결된다. 자라나는 자녀를 보며 자신들의 현재의 상대적, 혹은 절대적 빈곤에 대한 절박함 보다 이런 상황으로 몰아넣었던 그 구조가 대를 이어 반복될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더 큰 절박감을 주는 것이다. 그래도 착하고 성실한 이들은 이런 복합적 절박감(그것이 구조를 통해 상당부분 강제됐다 하더라도)을 평상시에는 '팔자려니' 탓하고 받아들였다. 절박함을 통해 발현된 의지는 예의 성실함으로 나타났고 장시간의 노동이 종아리를 뻐근하게 하고 허리를 욱신거리게 해도 고객앞에서 미소를 짓는 성실함으로 일관하게했다. 그러나 이제 구조는 가일층 그나마도 생존의 기반마저 위협했고, 더이상 '비정규직'으로도 살아갈 수 없게 만들었다. 이들의 순수한 선택으로 세워진 정부는 이들의 피같은 세금을 받아 자신의 명맥을 유지하면서도 이들을 지키고 보호하기는 커녕 도리어 그 힘으로 불합리한 구조가 존속하도록 편법의 길을 터놓고 급기야 이들을 길거리로 끄집어냈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보고 있듯이 이에 더 강해진 절박함은 더 큰 의지를 낳았고 그 의지는 이제 이 구조에 대한 저항으로 나타났다. 여기서도 일관된 이들의 모습, 곧 여전한 성실함으로. 햇볕이 내리쬐고 더위에 숨이 턱에 걸릴 여름에, 피서지의 명소인 부산 땅에 기대와 달리 연일 비가 오고 날씨가 궂은 것은 분명 한 철 장사를 위해 의지를 불사르며 여름을 기다려온 해운대 상인들에겐 불행이다. 또한 그만큼 그에게 커다란 고통이다. 그러나 비가 내리고 그치는 문제는 우리가 저항할 수 없는, '불가항력적 구조'임에 틀림없다. 그 구조가 위력적이고 그것이 안겨준 고통이 그의 삶의 자리에 또 다른 절박함과 삶의 의지를 요구한대도 한 순간의 원망으로 그칠 일이다. 적어도 다음 해를 기약할 수 있고 자연과 인간이라는 구조에는 항상 또 다른 가능성이 열려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랜드 노동자들이 처한 구조는 어떤가. 비정규직이라는 구조는 현재 '또 다른 가능성'은 없다. 그러나 그것은 자연처럼 불가항력적이지 않다. 이 구조는 깨어져야 하며 더 이상 사람들의 생존의 의지를 무화시키는 고통은 중단되야 한다. 절박한 삶의 의지를 가진 이들의 성실함이 고객을 감동시켰듯이 더 절박한 의지와 더 끈질긴 성실함은 보다 많은 사람들, 더 큰 고객을 감동시킬 수 있으리라. 그리고 그것이 구조를 분쇄하는 힘이 되어 이윽고 절박함이 역전되리라. 그러나 단지 저들의 노력만으로는 불가능하다. 우리, 소위 '예수믿는' 우리, 예수를 따른다는 우리는 어떻게 할 것인가. '화려한 휴가'와 같은 역사의 비극은 과거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 영화속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세월이 지나 그때를 회상하며 후회와 참회의 눈물을 지을 수는 있지만 이는 누구든 할 수 있는 일이다. 아니 우리는 그 이상할 수 있는 일이 없다. 시간과 함께 사건의 실체도 고통받는 이도 사라졌기 때문이다. 오늘 비극과 고통이 반복되지 않도록 현실에서 분투하지 않는다면 쏟아낸 눈물은 자기만족을 위한 기만행위에 지나지 않으며, 떠들어 대는 인간애는 진정성을 확보하기 어려울 것이다. 신기한 뉴스를 보았다. 우리집 근처(인천 구월동), 평소 지나다니던 길목에 있어 자주 봐 왔던 교회의 거대한 철탑이 쓰러져 차량을 덮쳤다는 소식이었다. 물론 단순한 사고겠지만 이랜드 문제를 비롯해, 아프간 피랍과 그 저변의 배타적 선교정책, 그 이전의 사학법 개정에 대한 기독교의 입장 등 연쇄적인 소위 '기독교 문제'를 생각할 때, '우리 동네'가 뉴스에 나왔다고 마냥 신기해 하고 있을 일은 아닌 것 같다. 인터넷 포털에는 그 뉴스에 대해 한 정신없는 누리꾼이 예의 악플을 달았다. "하나님이 하셨다" 이 언술은 필경 베드로가 자신도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른 채 신앙고백을 통해 '예수의 정체'라는 진리를 밝했듯 정작 그 익명의 악플자도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면서 모종의 '진리'를 밝힌 것으로 보인다. 적어도 나에겐 기독교의 상징인 교회 첨탑이 쓰러진 이 일이 정말 "하나님이 하셨다"로 보이는 까닭이다. 한국 기독교가 무너져내린 듯한 여러 징후가 곳곳에 포착되고 있지만 정작 기독교인들만 모르고 있다. 그러나 한국 기독교가 곧 기독교 그 자체가 아니라면, 아직 이 땅엔 '한국의 길을 걷고 있는 예수' 그분이 소개되지 않았을 뿐이다. 예수를 따르고 그뿐 아니라 그와 연합한 우리는 그가 '땅의 문제'를 다루신 그 방식으로, '고통하는 이'를 대하신 그 모습으로 지금 예수의 길을 걸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쓰러져 사람을 헤치는 30미터의 십자가 철탑이 다시 세워지는 일은 없다 하더라도 사람을 살리고 고통에서 해방하는 '예수의 도'가, '예수의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다시 세워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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