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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개념변태왕또라이들.


 

 


대구 중앙시네마 극장앞에 걸려진 민망한 현수막은, 죽은 시체앞에 나라를 갖다바칠 무개념 변태 개또라이들의 21세기형 퍼포먼스다.

<그때 그사람들>이란 영화가 그 사람들한테는 무척 걸리는 모양이다. 명예훼손? 인권? 운운하는 소리를 하며 다카키 마사오의 졸개들은 소송을 걸었다. 그결과, 돈 6500원을 내고 들어간 극장에서 화면없이 소리만 들리는 10분을 참아야 했다.

정작 한심한 것은...

 

박정희 얼굴 들어간 몇분짜리 필름때문에 '인권'운운 하면서 소송이나 거는 철없는 작자들.

그 군바리깡패때문에 죽은 사람이 몇명인데....고작 10분에 인권운운하다니. 죽은 자의 인권? 정말 지랄 지랄 왕지랄 하는 소리다. 분명한 역사적 사실은 그 위대한 분이 짓밟은 사람들은 시간으로 계산할 수 없을만큼의 아픔을 가슴에 묻고 살아갔다.

정말 피가 거꾸로 솟는다.

정말 속이 뒤틀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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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인간을 압도적으로 사랑하시는 분.

이해할 수 없는 분.
볼수 없지만 만난 분.
사람을 바르게 사랑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신분.

바보스럽게도,
포기를 모르는 분. 거짓을 말한 적이 없는 분.
내 모든 올바른 당당함의 근거가 되는 분.
말많은 자를 전능하심으로 단 한마디도 하지 못하게 하시는 분.


그리고...

사람을 살려냄과 동시에 죽음을 요구하시는 분.

그것도 제대로, 완벽하게 죽는 것을 요구하시는 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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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르침은 영원하다.


 

 

"글이 있기 전에 말이 있었고, 말이 있기 전에 삶이 있었다"

이오덕, <삶을 가꾸는 글쓰기 교육> 中....

**

20년 전, 글쓰기 교육을 통해 암울한 시대의 희망을 아이들에게서 찾았던 고 이오덕 선생님..그분의 글이 보리 출판사에서 재출판됐다. 20년이 지나도 올바른 가르침은 사라지지 않는 다는 진실을 선생님은 지켜냈다.

올바른 삶을 산 사람은 다른 사람들의 정신들안에 나누어져서 영원히 살아간다. 선생님은 이제 가셨고, 남은 사람들 중 선생님의 삶을 선택한 사람들은 많아 보이지 않지만 선생님은 분명 철없는 청년과 또다른 늙지않는 영원한 어린이들의 정신에 나누어 살아계신다.

난 인간의 죽음을 믿어도, 가르침의 죽음은 믿지 않는다.

가르침은 영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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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승호.



 

 

한국사회에서 훌륭한 지식인은 그나마 찾아볼 수 있다.
하지만 훌륭한 인터뷰어는 찾기가 불가능하다. '매체의 과잉'이 무색한 이나라에서 제대로된 인터뷰어 하나가 없다.

그런 막막한 지형에서 지승호는 오아시스 같은 존재다.

대중들이 인터뷰를 통해서 확인하는 것은 인터뷰이(interviewee)의
본질이 아니라 인터뷰이가 가진 이미지다.
(*그런 구조속에서 정치적 이념과 인간적 매력이 혼재되고, 대중들의
정치적 분별력은 마비된다. 우리가 매체를 통해 확인되는 공인들에 대한 정보가 과연 그 사람의 세계관과 관련된 것이지, 아니면 그저 가십거리인지 생각해보시라. 우리는 안다고 믿지만 실제 아는 것은 당사자가 치밀하게 정돈해놓은 립서비스에 불과하다.)

하지만 지승호는 정확하게 interviewee자체를 대중에게 전시해낸다.
그것도 성실함과 치밀함을 무기삼아서말이다.

인터뷰가 마치 잡지 홍보를 위해 근황을 묻는 한국저널리즘 시장에서 지승호는 한국역사상 첫번째 인터뷰어로서 존재한다.

그는 지금 입으로 공신력있는 역사적 사료를 만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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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개혁

<새로운 개혁> 
  

  오늘날 전 세계적으로 가속화되고 있는 신자유주의의 물결은 19세기 초 전 세계를 물들였던 약탈적 제국주의와 그다지 다를 게 없다. 예수의 이름을 모욕하며 사람의 목에다 칼을 대고 개종을 요구하고 평범한 사람들을 노예로 부려먹었던 극악한 죄는, 여전히 본질을 숨기지 않은 채 계속되고 있다. 지구의 한쪽구석에서는 20만 원짜리 축구공을 차고 다니고 다른 한쪽구석에서는 그 축구공을 어린아이들이 하루에 400원의 임금을 받고 만든다. 전 세계에서 생성된 부는 20%의 사람만이 서로 나눠 먹고 나머지 80%는 점점 더 빈곤해 진다. 이제 가난이 가난을 낳고 부는 부를 낳는다. 더 이상의 수직적인 계급이동은 사라져 간다. 자선하는 일들 속의 진실함은 줄어들고, 자선은 가난을 지배하는 방법이 되어버린 지금의 시대는 평범한 모든 사람들의 정신을 좀먹는 일에 매진 중이다.

 

  그런 전 세계적인 경향은 한국에도 가장 강한 영향력을 끼친다. '세계화'의 미명아래 벌어지는 약탈은 서민의 삶을 좀먹고 가진 자들의 풍요로움을 한없이 확장시킨다. 이미 이 나라의 땀흘리는 사람들 중 60%는 고용보험의 혜택도 제대로 받지 못하는 비정규직이기에, 그들은 생존의 자리에서 악에 받히며 살아간다. 이 나라가 방글라데시보다 풍요로우면서도 행복지수가 낮은 것도 바로 현실에서 날마다 목격하는 불평등 때문이다. 한쪽에서는 '웰빙'이나 '몸짱' 하면서 기름진 삶이 행복한 것이라고 떠들어대고, 다른 한쪽에서는 한 노동자가 분신 자살하는 일이 여전히 벌어진다. 그런 극단적인 '냉정' 과 '열정'의 공존 속에서 땀흘리는 삶에 대한 모욕은 나날이 일상화된다.

 

  전 세계적인 범죄가(난 이것을 경제구조의 차원이 아닌 범죄의 차원으로 생각한다.) 횡행하는 이 현실은 대부분의 서민들의 삶을 보다 각박하게 몰아가지만 서민들 자신도 이런 구조에 대한 관심이 없다. 삶의 전장으로 내몰린 사람들이 그런 거대담론에 관심을 가지지 못하는 것을 가지고 뭐라고 할 수는 없다. 그게 그들의 잘못인가, 아니면 신자유주의의 미명아래 수혜를 노리는 사람들이 나쁜 건가? 그건 지나가던 개도 알 수 있는 일이다.

 

  무엇보다도 신자유주의가 우리의 관심을 끌지 못하는 것은 서민의 무관심 때문이 아니라 한국정치사회의 왜곡된 개혁담론에 있다. '개혁'의 본질은 지금까지 숨쉬지 못했던 민중을 정치, 사회, 경제적인 주인의 위치로 되돌리는 것이다. 무수히 쏟아지고 무수히 실패했던 정권 탓인지 이미 사람들이 '개혁'이란 말에 지쳐 보이지만, 실제 개혁이 우리를 피곤하게 하는 이유는 따로 있다. 그건 사람들이 개혁이 이뤄진 세상이나 개혁이 못 이루어진 세상이나 별반 다를 게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국민의 정부에서 노무현 정부가 가진 개혁의 스펙트럼은 IMF극복으로부터 시작해 오늘날 '친일청산과 언론개혁', '지방불평등 해소' 까지 맞닿아 있지만 그런 민족주의적인 담론들은 실제로 삶의 지배논리를 숨기는 방패로 사용된다. 그런 개혁의 과제들이 반드시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 사실이지만 개혁이 이루어진다 한들 서민의 삶이 나아지겠는가. 이 정부는 그 이상 나아가지 못한다. 여기까지다. 언론개혁과 친일청산을 통해 자신의 지지 층을 만족시키고 역사적인 흐름 속에서 도덕성을 선점하지만, 오늘날 서민의 삶을 약탈하는 경제적인 구조에 대해서는 침묵한다. 자신이 말하는 개혁이 서민들을 위한 것처럼 부풀려져 있지만 실제 서민의 삶을 바꾸는 경제적 구조는 개혁하지 않으니까 개혁의 수혜는 소수가 독점한다. 그 저급한 의도가 한국 현실정치가 공유하는 '개혁'의 실체인 것이다.

 

  사람들은 언제나 '체제'와 '체계'를 혼동한다. 이를테면 부시와 케리 중 누가 당선되든 미국이란 체제는 변함 없이 제국주의 본질을 고수한다. 그와 마찬가지로 한국사회의 개혁이 성공해도, 나중에 딴나라당이 집권하는 어이없는 사태가 벌어져도, 서민의 삶이 괴로움으로 치닫는 것은 변하지 않는다. 더러운 '냉정'과 불쌍한 '열정'의 동거는 멈출 기색이 없다. 그들이 말하는 개혁이 실제 우리를 속이는 개혁일 뿐, 우리 삶을 변화시키는 진정한 개혁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다시 한번 참된 개혁의 본질을 물을 줄 알아야 한다. 그저 관념적이거나 역사적 흐름만을 고려하는 것이 아니라, 이 나라의 주인인 사람이 참 주인이 되는 원칙과 모든 사람이 공유해야 하는 평등을 다시 세워야 한다. 원래는 상식이었으되, 세계관의 오염된 기울기 때문에 왼손잡이 취급받는 그런 가치들을 다시 한번 새겨야 한다. 결국 세상을 바꾸는 것, 청지기 인생으로서 이 삶 안에서 최대한 정의로운 삶을 구현해 가는 것은 '상식'이 존중되는 새로운 개혁을 고민하는 동시에 지금까지 우리를 속여온 거짓 개혁을 완강히 거부하는 데서 출발한다. 우리에겐 '새로운 개혁'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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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놈들


 

 

세상에서 분노가 사라지지 않는 것은

 

단 두 사람의 잘못된 판단때문에,

 

수만명의 사람이 제 죽음의 이유도 모른 채 죽어간다는 사실때문이다.

그 죽음의 대부분은 여자들과 아이들이다.


정말 역겨운 구토말고는 돌려줄께 없다.


나쁜 놈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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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말, 삶


 

 

 


"글이 있기 전에 말이 있었고, 말이 있기 전에 삶이 있었다"

이오덕, <삶을 가꾸는 글쓰기 교육>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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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램덩크 후일담


 

[만화풍속사]독자의 사랑에 보답하다-‘슬램덩크’후일담

[경향신문 2004-12-16 16:57]

지난주, 일본 가나가와 현에 있는 한 폐교가 갑자기 다시 학생들로 붐볐다. 이 동네를 배경으로 한, 만화 작품 한 편을 기리기 위한 이벤트가 벌어졌기 때문이다. 스포츠 속에서 우정과 성장을 나누던 멋진 학생들의 이야기가 펼쳐졌던 그 작품은 한국에서도 엄청난 붐을 몰고 온 바 있는 농구만화 <슬램덩크>(이노우에 다케히코). 이번 이벤트는 1억권 판매 돌파를 자축하는 팬서비스의 대미를 장식하기 위한 것이었다.

30여권의 시리즈로 단행본 1억권을 돌파한 것은 만화시장이 거대한 일본이라 할지라도 그 사랑의 크기가 얼마나 컸는지를 증명해 주는 하나의 척도인 셈이다. 성원에 보답하기 위해서 작가가 시작한 첫 번째 작전은 바로 일간지 전면광고였다. 광고비는 작가가 부담했다. 어느 날, 일본의 주요 종합일간지에 주요 캐릭터들이 각각 한 명씩 신문 한 면을 통째로 채우며, 멋진 모습의 스케치로 등장해서 자신의 포부를 밝혔다. 어안이 벙벙할 정도의 통 큰 팬사랑인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단지 시작이었을 뿐. 두 번째 이벤트는 온라인에서 벌어졌다. 주인공들의 농구경기 장면이 펼쳐지고, 관중석에는 관중이 가득하다. 그리고 팬들은 사이트에 등록해서, 자신의 아바타를 관중석에 앉히고 응원메시지를 띄울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즉 북산(쇼호쿠) 고교 농구부 경기의 하이라이트에 직접 가서 응원을 하는 기분을 만끽하도록 한 것이다.


그리고 이벤트의 하이라이트가 바로 지난주의 폐교 이벤트였다. 폐교에 들어가서, 23개 학급의 칠판에 만화를 그린 것이다. 작품에 등장한 매력적인 주인공들의 후일담을 23개의 근은 에피소드로 칠판위에 분필로 그려냈다. 그것도 작품의 배경이 되었던 그 동네에서 말이다. ‘마지막’이라는 이미지, 학교라는 공간, 그리고 나아가 칠판위의 분필 낙서가 가지고 있는 그 자유분방한 에너지까지. 뭐랄까, <슬램덩크>라는 작품에서 상상할 수 있는 최고의 이벤트를 펼친 것이다(공식 사이트에서 제작 동영상을 볼 수 있으며, 만화 내용은 칠판색 그대로 편집한 특별 한정판 엽서세트로 소량 상품화될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며칠간의 ‘꿈 같은’ 시간이 흐른 뒤, 칠판을 지우는 마무리까지. 작품 자체의 분위기와 주제의식과도 자연스럽게 일맥상통한다.


만화라는 장르가 자랑스럽게 내놓을 수 있는 최고의 필살기라면 바로 독자와의 긴밀한 호흡이다. 이번 슬램덩크 이벤트는 그 점을 명확하게 짚어준 최고의 사례다. ‘1억권 팔렸으니 이런 이벤트도 하지’라고 푸념할 것이 아니라, 이런 이벤트를 할 정도의 마인드를 가졌기 때문에 1억권 팔린다는 것을 유념해야 한다. 독자들과 작품에 대한 사랑으로 따지자면 10억권이라도 부족할 한 만화 작가의 성의에 박수를 보낸다.


〈김낙호|만화연구가·웹진 ‘두고보자’ 편집위원 (출처:http://bigmasa.jugem.jp)〉


기사제공 : 경향신문


 

**'수작'은 작가의 실력에서 나오지만

'걸작'은 작가의 실력과 정신에서 나온다.

슬램덩크가 걸작의 반열에 올라서는 이유가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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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크카랴멜과의 이별


 

 

 

 

 

 

 

 

 

파란색 크라운 '밀크카랴멜'.......

어려서부터 이 카랴멜을 정말 좋아했었다. 근데 꼭 밀크카랴멜만을 고집했다. 오리온에서 나온 사각 캬라멜은 끝맛이 텁텁하고, 수입캬라멜은 입안에 잘 달라붙는다. 게다가 절반이 초코로 이루어진 수입 캬라멜은 캬라멜 고유의 부드러운 맛이 느껴지지 않는다. '새콤 달콤'은 과일맛이라서 지나치게 천박한 맛이 강하고, 최근에 새로 등장한 '마이쥬'는 과일 맛이고 모델이 많아서 정통 캬라멜 느낌이 잘 나지 않는다.

하지만 크라운 밀크카랴멜은 다르다. 끝맛에서 우유맛이 느껴지기도 하고 입안에 들어갔을 때 혀 위에 느껴지는 무게감이 있다. 다른 캬라멜에 비해서 색깔도 비교적 밝은 편이어서 여러모로 최고의 캬라멜임이 분명하다..

그런 이유가 내가 밀크카랴멜을 좋아하는 전부는 아니다.

밀크카랴멜은 입대하기전 첫사랑으로부터 받은 선물이기도했다.잘갔다오라는 말과 함께 받은 작은 편지에는 그토록 듣기 두려워했던 말들이 적혀있었고, 내 군생활은 그리움이 8할이상이 될것임을 직감하는 순간이었다. 난 그 밀크카랴멜을 아직도 먹지 않고 간직하고 있다.

나중에 제대하고 다시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을 때, 그 사람은 내게 다시 한번 밀크카랴멜을 사줬다. 갈색 모자와 빨간코트를 입고서, 작은 손으로 내게 밀크카랴멜을 건네주던 모습을 선명히 기억한다.

추억이 회색의 필름처럼 머리속에 저장되어있다면, 그날의 추억만큼, 그 추억의 주인공은 회색추억 속에서도 원색의 화사한 옷을 입고 있다.그 사람은 대단한 의미를 담아서 건넨 캬라멜이 아니었지만 내겐 지금까지 내삶에서 받은 가장 인상적인 선물로 남아있다. 내겐 그 캬라멜이 감동이었다.

늘 겨울만 되면 한 박스씩 사놓고 먹던 밀크카랴멜이 요즘 들어서는
좀처럼 보기가 힘들다. 며칠전 집 근처 슈퍼 아줌마에게 물어보니 요즘은 아예 생산이 멈추어 버린 것 같다고 이야기해줬다. 왠지 모르는 서글픔이 느껴졌다.

그 사람과의 인연이 완전히 끝난 것처럼 캬라멜도 생산이 중단되어 버린걸까? 내가 가진 밀크카랴멜이 더이상 내게 어떤 기쁨도 줄 수 없을만큼 굳어버린 것처럼, 그토록 내 삶에 귀한 부분을 차지했던 밀크카랴멜도 이제는 사라져 버리는 모양이다.

그런데 충격적인 것은, 나와 같이 밀크카랴멜이 1981년 생이란 것이다.
같은 해인 2004년에 난 첫사랑을 완전히 잃어야 했고, 동시에 밀크카랴멜도 찾아 볼 수 없게 됐다. 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무생물과 나와의 인연은 얼마나 닮아있는지.

내 삶에 가장 중요한 소품, 밀크카랴멜...

이제는 더 이상 너를 볼 수 없게 됐구나.....

안녕...




p.s 밀크카랴멜이 사라지고나서 크라운 측은 아마도 '마이쥬'라는 새로운 제품을 런칭한 것 같다. 때가 되면 사라지고 새로운 만남을 가져야 하는 인간의 인연처럼, 캬라멜도 그런 세계가 있는 모양이다. 과거를 청승떨지 않을 만큼 자랐으니까 이제는 밀크캬라멜을 추억하면서 마이쥬를 먹어야겠지. 잘 먹어줄께..난 성장했으니까..보다 좋은 사람으로...

Nothing Lasts Forev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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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한 편견

얼마전 오랜만에 친구를 만나서 몹시 논쟁을 벌인 적이 있다.

논쟁이라기 보다는 그저 저나에 대한 친구의 평가에 지나치게 예민하게 반응했다고 표현하는 것이 더욱 정확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 친구놈이 내게 그랬다.

 

"네 생각은 너무 편향되고, 철이 없는 것 같아"

 

그 친구는 내가 가진 생각들이 '편견' 이라며 치부했지만, 그 친구는 내가 당당해하는 편견의 깊이를 보지는 못했던 것 같다.

 

세상의 근본적인 부조리와 약자들의 연대에 관심이 없는 사람들은 언제나 왼손잡이를 그저 다른 손을 쓰는 사람으로 보지 않고 비정상적인 사람, 틀린 사람으로 보곤 한다. 세상에 통용되고 관철된 정서들이 소수만을 위한 것임을 부인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우리는 그런 세상을 뭔가 '삐딱'해 졌다고 이야기한다.

 

삐딱한 세상을 바르게 살아가는 방법은 그 삐딱한 기울기에 연연하지 않고 자신을 견고히 세우는 것이다. 삐딱한 세상에 맞추며, 인간의 인간다움을 무시하는 시선은 삐딱한 세상의 기울기가 자신의 양심과 일치하는 것이다. 아쉽게도 친구의 시선은 내게 이렇게 이야기 하고 있었다.

"네가 철이 없어서 그래~"

 

그럴수도 있다고 믿는다. 하지만 비록 멍청하고 유치하게 '인간'이니 '인간다움'이니하는 주제를 붙들고 사는 인간이지만 우리에겐 그들의 삐딱함을 분명히 볼 수 있는 지점에 서게 될 자격이 있다고 믿는다. 나는 이념에 관심이 없다. 그깟 이데올로기가 인간을 구원하는 것도 아니고, 먹물냄새나는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지적그물이 세상을 어떻게 바꿀수 있겠는가.

 

내가 집중하고 싶은 것은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인간의 상식과 명예다. 100원어치 일하고 30원을 받는 것은 분명 문제가 있다. 이들이 40원이라고 받기위한 연대는 좌파적 이념에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상식과 명예때문인 것이다.

 

내가 가진 편견은 인간의 상식과 명예와 첨예하게 맞물려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어떠한 신학적 논쟁은 진리의 큰 틀을 벗어나지 않는다면 수용하고 용납할 수 있는 것이지만, 한 사건이 만일 인간의 기본적인 상식을 위협하는 것이라면, 우리는 그것을 존중할 필요가 전혀 없는 것이다.

 

상식이 실종된 시대를 살아가는 것은 참으로 힘든 일 일지 모른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지켜나가야 할 가치들이 내게는 상식인 것이다. 결국 그리스도인의 사명은 상식을 복원하는일이다.

어려운 일이지만 우리 삶에 주어지는 소명이라면, 반드시 그것을 위해서 비장할수 있어야 한다고 믿는다.

 

친구는 내가 철 없다고 했지만, 세상의 때가 묻어가는 것을 철드는 것인 마냥 꾸며대는 협잡을 수긍할 수는 없었다. 상식을 지키는 편견이 저들에게는 철모르는 유치함이지만 나에게 있어서는 세상을 바꾸는 마지막 가능성이기 때문이다.

 

어제의 천한 것들이 내일에는 귀함받는 날까지....

사람의 사람다움이 빛나는 날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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