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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한 편견

얼마전 오랜만에 친구를 만나서 몹시 논쟁을 벌인 적이 있다.

논쟁이라기 보다는 그저 저나에 대한 친구의 평가에 지나치게 예민하게 반응했다고 표현하는 것이 더욱 정확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 친구놈이 내게 그랬다.

 

"네 생각은 너무 편향되고, 철이 없는 것 같아"

 

그 친구는 내가 가진 생각들이 '편견' 이라며 치부했지만, 그 친구는 내가 당당해하는 편견의 깊이를 보지는 못했던 것 같다.

 

세상의 근본적인 부조리와 약자들의 연대에 관심이 없는 사람들은 언제나 왼손잡이를 그저 다른 손을 쓰는 사람으로 보지 않고 비정상적인 사람, 틀린 사람으로 보곤 한다. 세상에 통용되고 관철된 정서들이 소수만을 위한 것임을 부인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우리는 그런 세상을 뭔가 '삐딱'해 졌다고 이야기한다.

 

삐딱한 세상을 바르게 살아가는 방법은 그 삐딱한 기울기에 연연하지 않고 자신을 견고히 세우는 것이다. 삐딱한 세상에 맞추며, 인간의 인간다움을 무시하는 시선은 삐딱한 세상의 기울기가 자신의 양심과 일치하는 것이다. 아쉽게도 친구의 시선은 내게 이렇게 이야기 하고 있었다.

"네가 철이 없어서 그래~"

 

그럴수도 있다고 믿는다. 하지만 비록 멍청하고 유치하게 '인간'이니 '인간다움'이니하는 주제를 붙들고 사는 인간이지만 우리에겐 그들의 삐딱함을 분명히 볼 수 있는 지점에 서게 될 자격이 있다고 믿는다. 나는 이념에 관심이 없다. 그깟 이데올로기가 인간을 구원하는 것도 아니고, 먹물냄새나는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지적그물이 세상을 어떻게 바꿀수 있겠는가.

 

내가 집중하고 싶은 것은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인간의 상식과 명예다. 100원어치 일하고 30원을 받는 것은 분명 문제가 있다. 이들이 40원이라고 받기위한 연대는 좌파적 이념에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상식과 명예때문인 것이다.

 

내가 가진 편견은 인간의 상식과 명예와 첨예하게 맞물려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어떠한 신학적 논쟁은 진리의 큰 틀을 벗어나지 않는다면 수용하고 용납할 수 있는 것이지만, 한 사건이 만일 인간의 기본적인 상식을 위협하는 것이라면, 우리는 그것을 존중할 필요가 전혀 없는 것이다.

 

상식이 실종된 시대를 살아가는 것은 참으로 힘든 일 일지 모른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지켜나가야 할 가치들이 내게는 상식인 것이다. 결국 그리스도인의 사명은 상식을 복원하는일이다.

어려운 일이지만 우리 삶에 주어지는 소명이라면, 반드시 그것을 위해서 비장할수 있어야 한다고 믿는다.

 

친구는 내가 철 없다고 했지만, 세상의 때가 묻어가는 것을 철드는 것인 마냥 꾸며대는 협잡을 수긍할 수는 없었다. 상식을 지키는 편견이 저들에게는 철모르는 유치함이지만 나에게 있어서는 세상을 바꾸는 마지막 가능성이기 때문이다.

 

어제의 천한 것들이 내일에는 귀함받는 날까지....

사람의 사람다움이 빛나는 날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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