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과 행동의 괴리

 

 

요즘 나는 상담을 받고 있다. 내가 청소년 노동인권교육을 하며 떠들고 다니는 말과 경험을 통해 얻은 확신이 내 일상에서는 도통 풀려 나오질 않았다. 집에서는 오직 만 보였고 내게 부과되는 사회적인 역할들은 그저 나를 숨막히게만 했다. 그러다 보니 가족들특히 엄마와 여동생 과의 사소한 다툼이 쌓였다. 어느 순간 두려움이 커지기도 했다. 나의 생각과 행동의 괴리에 대해 내 자신이 너그러 워지지가 않았다. 《생각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라는 책도 있던데, 두 달 가까이 상담을 받으면서도 내 생각대로 살 수 없을 것 같은 두려움은 아직 남아 있다. 며칠 전 읽은 정희진의 글1)에 따르면 나는 머리(이상 혹은 희망 사항)로는 이해가 되는데 몸이 안 움직이는, “머리가 없는 사람일 수도 있겠다.

내가 살아온 동안 감당하기만 하고 꾹꾹 눌러 담았던 것들이 스멀스멀 기어 나오기 시작한 것은 올해를 시작하는 겨울이었다. 결혼하고 딸을 낳고 키우면서, 또 주말마다 만나는 조카와 부딪히면서 어린 사람을 대하는 나의 태도를 지적받기도 하고 숱하게 반성하기도 했다. ‘훈육을 왜 하지 않느냐, 육아도 공부해야 한다는 타박, ‘아이를 완전한 존재로 대한다면서 어른에게는 쉽게 못 할 상처되는 말을 아이에게 퍼붓는 건 아니냐는 지적, ‘청소년인권을 위해 활동을 한다더니 너와 가까운 아이들과의 관계는 왜 이러냐는 비난을 들었지만 그 말들을 소화하는 것이 힘들어 나도 나 자신을 비난하기 시작했다. 청소년 활동가들이 공부하고 있는 adultism 관련 문서들을 발견해 읽다 보니 나의 징후는 영유아 혐오/아동 혐오일 가능성이 높은 것도 같았다. 저 단어들에 쓰인 혐오라는 단어는 공포를 포함하는 건 아닐까, 이리저리 합리화도 해 보고 고민을 해 보아도 딱히 벗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말과 행동의 괴리로 괴로울 때마다 내가 떠올리는 이미지가 있다. 진보적인 목소리를 내는 사회 활동을 하면서 집에서는 마초적인 가부장. 결혼 전에는 함께 활동하는 동료였지만 결혼 후에는 남편의 활동을 내조만 하게 되었다는 여성들의 넋두리 속에, 줏대 있는 사람이 되라며 책을 사 주던 아버지였지만 막상 청소년운동을 시작하자 그런 건 (명문)대학 가서 하라고 격하게 반대를 해서 결국 집을 나오게 되었다는 어느 청소년 활동가의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그런 인물들. ‘운동하는 활동가라면, 진보 논객이라면 가정이나 개인적인 관계에서 가부장적 권위주의에 젖어 있어도 괜찮다고, 그건 개인적인 문제니까 우리가 일일이 지적할 순 없다고, 어떻게 사람이 완벽하겠느냐며 함께 변명해 주는 사람도 많다.

세상을 향해 민주주의와 정의를 말하는 활동가, 진보 인사의 이미지가 사적인 공간에서의 위계, 권력, 폭력을 덮어 버리는 일이 나라고 다를까 하며 털썩 주저앉곤 했다. 솔직히 좋은 의도를 내세우는 여러 조직들이(시민사회단체건 회사건 협동조합이건) 그 좋은 의도를 내부에까지 구현하지 못하는 경우는 너무 많지 않은가. 그 조직에서 노동은 존중받지 못하고, 내부적인 문제를 지적하거나 고발한 사람들은 괘씸죄로 몰려 그 조직에서 밀려나는 일이 허다하다. 보리출판사를 비롯해 그린비출판사, 자음과모음, 함께일하는재단, 평화박물관, 마인드프리즘의 노동 문제들이, 10년 전에 활동했던 100인위의 존재 자체가, 지금도 많은 조직 안에서 끊임없이 제기되는 나이차별, 성차별 사건이 그런 현실을 확인하게 해 준다.

그래서 질문을 하게 되었다. 왜 좋은 의도는 밖으로만 드러날까. 왜 안으로 스며들지 못하는 걸까. 어쩌면 이 질문이 나의 상담의 시작이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왜 내 옆의 존재들에게 그런 횡포를 부리는 건가 하는 질문. 그리고 이런 질문을 《오늘의 교육》이 구성하고자 하는 교육의 생태적 전환이라는 담론을 향해 던지고 싶었다. 교육의 생태적 전환이라는 이상이 우리가 발 딛고 서 있는 지금 여기의 사소하고 지질해 보이는 문제들을 간과하게 만들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들었기 때문이다.

 

 

교육이 대체 뭐길래

 

 

《오늘의 교육》 20155·6월호, 7·8월호 두 권의 특집을 읽으면서 우선 떠오른 질문은 왜 교육이 무엇인지에 대해 파고들지 않을까였다. 윤상혁이 <전환을 위한 사유>에서 인용한 사티쉬 쿠마르의 문장 만약 우리가 지구를 집으로 인식하지 않으면 어떻게 다룰 수 있을 것인가?”(5·6월호, 40)를 이렇게 패러디해 보고 싶었다. “우리는 교육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지에 대한 토론은 미루고 어떻게 다룰 지 말하고 있는 건 아닌가?”

 

 

우리가 교육해야 할 생태학의 개관은 바로 그런 종류의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세월호 참사와 같은 파도처럼 넘실대며 반복되는 파국적 상황에서 살아남고, 싸우고, 연대하는 삶과 기술에 대해 가르치는 것. 그런데 그 방법이 지금의 도시적 삶에서 탈출하고, 반기술적, 반과학적 사유를 통해 아름다웠던 과거로 회귀하자는 게 아니고, 내 삶이 도시에 기반하고 있다면 바로 지금 여기에서부터 실행할 수 있는사유의도구를 손에 쥐어 주는 거라 생각합니다.- 니짱, <우리는 왜 교육의 생태적 전환을 말하게 되었는가?>, 《오늘의 교육》 5·6월호, 20

 

 

학생들은 이런 파국적 상황에서조차 같이 토론하고 길을 모색하는 동료, 동시대인이 되지 못한 채, 그들의 손에 사유의 도구를 쥐어 주고연대하는 삶과 기술을 가르쳐야하는 교육의 대상이 될 뿐이다.

과연 교육은 무엇인가? 누군가는 앞에서 가르치고 어떤 여럿은 그것을 배우는 것인가? 가르치는 사람이 없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배우는 사람이 중요한가 아니면 가르치는 사람이 중요한가? ‘교육하면 떠오르는 그림이 뭐냐고 물으면 대개 칠판이 있고 뭔가 말하는 한 사람과 그 사람에게 집중하는 여러 사람의 모습이라 답한다. 필자들의 글에서 드러나는 교육이 여전히 필자인 우리(학교에서) 누군가를 가르치거나 변화시키려는 것에 고정되어 있는 것도 이상할 게 없어 보인다.

너는 가르치고 나는 배우는 게 아니라 너랑 나랑 같이 토론하고 공부하는 교육, 배우고 싶은 것을 내가 정하고’, ‘배우고 싶을 때에 어디서나 배울 수 있는 교육, 그래서 국가와 사회가 정한 교육을 거부할 수 있는 권리도 포함되면 좋겠다. 노동권에 일할 권리와 일하지 않을 권리를 함께 포함할 것을 고민하듯이 쉬고 싶을 때 쉴 권리와 즐겁고 알차게 놀 권리도 보장하는 교육, 배우는 동안 먹을 음식, 사용하는 모든 도구, 이동에 드는 비용도 제공하는 교육을 꿈꾸고 만들기 위한 노력이 선행되어야 할 일은 아닌가 싶다.

교육이 무엇인지 파헤치고, 우리가 내면화한 교육에 대한 고정관념을 어떻게 넘어설지 먼저 얘기하지 않고 다른 얘기를 한다는 것은 순서가 뒤바뀐 것 같다. 우리가 함께 손잡고 새 하늘 새 땅을 상상하기위해 먼저 합의할 것들도 많을 것이다. 마을, 골목, 공동체는 과연 어떤 모습인지 각자 그리는 그림을 맞추는 과정이 필요하다.

 

 

가령 박복선이 처음 글에서 제시한 건 후쿠시마 등 생태적 위기, 파국이 도래하는데 이러한 현실을 사유하고 고민하지 않는 교육에는 문제가 있다는 점에서생태적 전환이 필요하다는 논리였죠. 인류의 존속 자체가 불가능한데 그걸 외면하고 있다니, 이건 죽은 교육이다.’ 거칠게 요약하면 이러려나요? - 공현, <우리는 왜 교육의 생태적 전환을 말하게 되었는가?>, 《오늘의 교육》 5·6월호, 14

 

 

도래할파국은 어쨌거나 앞으로 올 시간에 대한 얘기다. 파국이 도래하기 전까지 살아야 하는 나날들은 그냥 버티면 되는 것일까? 솔직히 한 순간도 인간답게 지내기 힘든 학교생활은 어쩌자는 것인지 궁금하다. 경쟁적인 대입 시험으로 인한 압박은 초등학교, 유치원까지 내려가고 있으며, 학생인권조례가 시행되는 곳에서도 여전히 체벌이 자행되고 있다고 밝히는 학생이 10명 중 4명이나 되고, 나머지는 대체 체벌인 벌점제에 시달린다. 학교라는 공간 자체가 갖는 감시와 통제의 시선마저 억압이 되는 와중에 교육은 인간에 대해서도 아직 끈질기게 이야기하지 않았다.

물론 정용주의 글 <‘생태적 탈근대로서 교육의 생태적 전환>(5·6월호)은 꼼꼼하게 탈근대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생태적이라는 말이 환경/생태주의의 범주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교육의 모든 부분을 다루게 될 것임을 생태적 교육학의 통합적인 세계 인식세계 내 모든 존재는 모두 연결되어 있는 상호의존의 관계 을 통해 강조한다. 하지만, 그 통합적인 세계 인식은 윤상혁의 <전환을 위한 사유>에서, “나와 지구는 분리되어 있지 않내가 바로 지구라는 인식으로 흐른다(같은 책, 42). 여기서 나는 생태적 전환이라는 말이 거대하고 거창하다 못해 위험스럽게 느껴진다. 지금 학교에서 개별적으로 맺고 있는 교사-학생의 관계 역시 사회적인 관계라고 볼 때, 교사인 내가 발생시키고 있는 지위 권력, ‘위계의 문제는 그 통합적인 세계 인식 앞에서 절대적이고 전능한 권위로 변질되기 쉽다. ― 내 말이 법/하느님의 뜻/진리가 되는 일은 그리 어려운 것이 아니다. ― ‘지구와 통합된내가 가르치는 일이 도전받을 수도 있고 어떤 오류가 있을 수도 있다는 것을, 과연 용납할 수 있을까? 비약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지만 권력 관계가 활약하는 공간은 그 어이없는 비약을 현실화하곤 한다는 걸 나는 여러 차례 경험했다.

물론 우리는 모두 연결되어 있다. 나의 고통과 당신의 고통이, 내가 겪은 차별의 어떤 측면과 당신이 겪는 차별이. 그래서 공감하고 연대도 할 수 있다. 밀양, 쌍용차, 용산, 강정, 세월호라는 서로 다른 사건들이 그렇게 연결되어 있음을 확인해 왔으니 우리가 연결되어 있다는 말이 자연스럽게 이해되기도 한다. 그러나 교육(혹은 국가, 종교)과 통합적 인식이 만나는 일은 좀 더 조심스러웠으면 좋겠다.

삶과 교육의 전환 국면 가운데 /우리는 어디에 있는가를 먼저 질문하고 싶었던 것도 그래서이다. 우리는 교육의 생태적 전환이라는 멋진 그림을 그리고 먼저 앞서 나가듯 도망치는 건 아닌가. ‘환경도 생각하고, 생명과 농업의 가치를 얘기하고 소비를 줄이고 풍부한 생태 감수성을 보여 주면 지금 당장은 아무도 우리를 비난하지 못할 것이다. 아무도 시도하지 않았던(?) 새로운 이야기를 시작하는 우리를 욕할 사람이 있을 리 없다. 덧붙여 사소해 보이지만 사소해서 너무 어려운 어떤 노력예를 들어 교사/부모를 위시한 어른들이 누리는 권위를 놓는다든가 나이 위계를 넘어서는 시도 같은 을 지금 좀 놓아도 괜찮을 것이다하는 생각들을 하면서 말이다.

그래서 교육의 생태적 전환이라는 말이 알리바이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알리바이는 범죄 현장과 다른 곳에 있었다는 것을 증명해 본인의 무죄를 입증하는 것을 의미하는 법률 용어지만, 비난을 피하기 위해 그럴듯하게 둘러대는 핑계라는 뜻도 함께 갖고 있는 단어다. 학교가 더 인권적인 공간이 되도록 애쓰지 않고 뭐하고 있었냐는 책임 추궁을 피하기 위한 핑계가 아닌가를 자꾸 묻고 물어야 한다. 학교에서 학생들은 또 교사들은 얼마나 인간다운 삶을 살고 있는지, 학교 안에서 생활하는 이들의 관계는 얼마나 평등한지, 학생들의 의견이 어떻게 받아들여지는지를 먼저 확인했으면 한다. 예컨대 나에게는 생태적으로 거듭나는 교육보다는 보다 평등하고 위계 권력으로부터 자유로운 교육이 더욱 매력적이다. 생태적 전환보다는 학교와 교사/가정과 부모가 일상적으로 휘두르는 권력을 어떻게 약화 시키거나 없앨 수 있는지가 더 중요해 보인다.

 

 

정희진, ‘몸의 일기’, <한겨레> 2015.8.28.

 

 

 

오늘의 교육 [28호/2015년 9·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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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5/24 06:06 2016/05/24 06:06

청소년들과 노동을 주제로 이야기 나누고 싶어 하는 비청소년 대상 교육이 최근 몇 달 동안 계속되었다. ‘청소년노동 인권교육’을 위해 같은 장소에 만나 시간을 보내고 있지만, 우리가 바라보는 길이 다른 건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도대체 청소년과 노동을 이야기한다는 것, 일하는 청소년의 인권을 말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참가자들은 주로 일하는 청소년의 ‘일하는’이라는 상태에 비중을 두고 있으면서 청소년에게 노동을 알려주고 싶은 의지가 높다. 그런데 필자를 비롯한 몇몇 교육진행자들은 ‘청소년’에 더 큰 무게를 실어(일하는) 청소년이 처한 사회적 상황을 얘기하면서 어떻게 평등한 관계를 맺을지 질문하는 것이다. 참가자와 교육 진행자들의 다른 의지는 묘하게 만날 듯하면서도 만나지 못한다. 그래서 어느 교육에서나 ‘청소년 노동 인권이라면 청소년이 노동 현장에서 당하는 억울함을 함께 해결할 방법을 고민하는 거 아니냐, 왜 나의 청소년 인권 감수성을 점검하지?’ 이런 말을 담은 표정을 만날 수 있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10년이 넘는 시간을 학교에서 지내는 동안(사실은 학교 다니기 전부터…), 청소년기를 보내는 사람들은 대부분 ‘말 잘 들어야 착하지!’ 하는 격려(?)를 받으며 자랐고, 학교의 규칙을 잘 지켜야 학생답다는 교육을 받아왔다. 그렇게 10여 년의 세월을 고분고분하게 자란 사람들이 어느 날 갑자기 일터에 가기만 하면, 자기 권리를 주장하는 노동자로 변신할 거라는 기대는 과연 합당한가? 노동법이 규율 하는 노동자의 권리가 무엇인지 아는 일이 모르는 것보다야 낫겠지만, 이 사회가 청소년을 대하는 태도가 그대로이고, 또 학교라는 괴물 같은 시스템이 버젓이 있는 상황에서, 그런 법적인 권리를 알게 하는 것으로 할 일을 다 했다고 말해도 되는가? 고민은 쉽게 가시지 않는다.

이 사회는 노동의 신성함과 가치 있는 노동을 떠받들고 있지만, 그 신성하다는 노동을 하면서 왜 많은 사람이 숱한 모욕을 당하는지는 궁금해하지 않는다. 그래서 최근 교육에서, 끝없이 질문했던 것 같다. ‘노동은 정말 신성한가?’

이 교육을 기획하는 자리에서 노동의 가치에 대해 정답처럼 말하고, 위계나 속도, 경쟁을 비판하는 것에서 나아가, 일상에서 자신이 청소년들에게, 특히 자녀에게 하는 말 속에서 그런 가치들이 어그러지게 하는 발화를 하고 있지는 않나 살펴보자는 의견들이 나왔다. 돌이켜보면 청소년에게 하던 말 속에서 우리의 평소 주장과 다른 ‘나’와 ‘나의 시선(혹은 무의식)’을 쉽게 마주하게 되기 때문이다.

‘뭐가 되려고 그렇게 공부를 안 하느냐’, ‘또 쓸데없이 뭐 하고 있어?’하는 핀잔들의 행간에 담긴 이야기를 보면, ‘어떤’ 노동에 대한 평가절하가 들어있는 것도 같고, 청소년의 ‘내일’의 일을 어떻게 규정하고 또 상상하는 건지 의심스럽기도 하다

청소년 노동 인권교육 속에서 이토록 익숙한 발화에 드러나고, 또 내면화하고 있는 주류사회의 가치들을 살피는 것이 가능할지, 또 어떻게 자신의 말과 행동의 괴리를 알아차리게 할지를 고민하게 되었다. 그래서 2015년 4~5월 동안 진행된 은평지역 청소년노동인권교육 활동가 과정의 한 회차에서  ‘청소년기에 내가 들어왔던 말’, 그런데 다시 ‘청소년들에게 내가 하는 말’을 살펴보는 활동을 해보기로 했다.

누구나 청소년기를 거쳐오면서 지긋지긋하게 들었던 비청소년들의 잔소리에 숨겨진 ‘의도’는 없는 것일까? 혹은 발화자는 미처 알아차리지 못한 채 퍼뜨리고 있는 노동에 대한 ‘사회적 시선’이 있는 것은 아닌가? 이런 질문들을 바탕으로 비청소년들의 말을 조곤조곤 살펴보기로 했다. 청소년이던 내가 들어왔던 그 말을 나도 되풀이하고 있다면, 그런데도 그 말이 진리는 아닌 것 같다면, 그 핀잔들의 행간을 읽어보는 일은 재미있을 듯했다.

“너 그러다 아무짝에 쓸모 없게 된다”고 할 때 우리가 쉽게 무시하고 쓸데없다고 치부하는 많은 일은 사실 그런 대접을 받아도 되는 일이냐는 딴죽을 걸어보고도 싶었다. 이런 얘기를 나누다 보면, 동시대를 사는 비청소년인 나와 청소년이 만나온 노동이 어떻게 닮고 또 다른지 어설프게나마 확인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어찌 이리도 닮았나! “내가 들어왔던 말, 또 내가 하는 말”

참가자들은 다섯 모둠을 이루고 자리를 잡았다. ‘청소년기에 들었던 이 말, 정말 지겨웠다.’ 그리고 ‘내가 지금 청소년 및 어린 사람들에게 하는 말’을 모둠별로 나누어 5가지씩 찾아보기로 했다. 내가 들었던 말이나 지금 하는 말은 역시나 크게 다르지 않았다.

‘절~로 가! (저 멀리 가라는…)’, ‘넌 몰라도 돼’, ‘00하지 마’, ‘조용히 해’ 이런 배제하고 차단하는 말들부터, ‘공부할 때가/학생 때가 좋은 거야’, ‘다 경험이야.’ 같은 훈계,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것이. 네가 뭘 알아’, ‘나 자랄 때는 안 그랬는데, 요즘 애들은 싸가지가 없어’, ‘(어른들 말 안 듣더니,) 너 그럴 줄 알았다’와 같은 저주와 무시의 말까지, 우리는 듣고 자란 말을 고스란히 어린 사람들에게 되돌려주며 살고 있었다. 나도 듣고 살았는데, 내가 이런 말 하는 게 뭐 그렇게 문제냐고 할 수도 있었을 텐데, 다행스럽게도 화이트보드에 붙은 말풍선을 확인한 참가자들은 자신이 해왔던 평소의 말들의 민낯을 대하고는 ‘저 말들, 참 폭력적이구나…’ 하며 한숨을 쉬기도 했다. 때리지 않는다고 폭력이 아니라고 단정할 수 없듯이 ‘다 너희를 위해서’하는 말이라며 해온 말이 결과적으로 청소년을 차별하고 배제하는 것이라는 것을 발견하는 순간이었다.

 

일상적으로 뱉던 나의 말들과 결별하기

이제 스스로 다시 청소년 입장이 되어 댓글을 달아보는 시간을 가졌다. 화이트보드가 넘치게 많은 말 중에서 청소년들에게 정말 문제가 있을 것이라고 추측되는 말 5가지를 선택한 후 모둠별로 나눠 가졌다.

1. 요즘 애들은 싸가지가 없어 : 이 말은 누가 들어도 별다른 이유 없이 그냥 화가 나는 말이다… 그래서 댓글도 간단명료하다. 그런데 싸가지 없다는 평가는 나이에 따른 ‘아랫사람’에게 주로 하는 말인지라 굳이 청소년이 더 많이 듣는 말이라고 할 수 없기도 하다. 나도 가끔 듣거나 하게 되는 말인데, 음음… 이제 나(참가자 자신들)에게 말한다. “고마워, 너나 잘하셔~^^”

2. (어른들 말 안 듣더니,) 너 그럴 줄 알았어 : ‘말 잘 듣는 아이’로 살게 되면 경험하지 못할 것들을 과감하게 저질러버린(?) 분들에게 경의를 표해야 함에도, 이런 식의 말로 청소년들이 실수하고, 방황할 권리, 다양한 경험을 할 권리를 얼마나 가로막아왔던 건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 사회의 결과 중심적인 판단을 문제 삼았던 우리도 별수 없구나 하는 반성도 하게 된다. ‘점집 차리세요~^^’라는 댓글이 인상적인데, 한 치 앞의 인생을 모르기는 매한가지인데, 어른들은 모르는 게 하나도 없다는 듯이 늘 전지적 작가 시점이다.

3. 00 하지 마 : 청소년도 뭔가 알아서 할 수 있는 온전한 존재, 무엇이든 스스로 결정할 권리가 있다는 의견들이 댓글로 달렸다. 청소년의 여러 가지 행동을 금지하려는 이 말들은 정말 위험하니까 하지 말라는 말이라기보다는 어른들에게 부여될 미래의 책임을 피하고자 하게 되는 경우가 더 많다는 이야기들을 나누게 되었다. 어떤 청소년도 비청소년들에게 무언가를 대신 감당해달라고 하지 않았음에도 말이다. 청소년들을 보호하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금지하면 된다는 생각에는 청소년들이 저지를 일에 대한 책임을 그들의 부모나 교사 등 보호자를 자처하는 비청소년이 감당해야 한다는 인식이 깔렸다. 청소년을 스스로 판단하거나 그 결과를 감당하고 책임지기에 부족한 존재라고 여기고 있다는 것 아닐까? 이것도 저것도 다 하면 안 되는 청소년들의 댓글은 ‘그럼 뭐해요?’였다. 이 사회에서 청소년은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는 존재가 되어버린다.

4. 공부 안 하면 저렇게(노숙자,청소노동자) 된다 : ‘우리는 좀 달라’라고 생각했을지 모를 청소년노동 인권교육의 참가자들도 역시 사회가 만들어 놓은 경쟁, 즉 ‘성공과 실패에 대한 이미지’를 그대로 수용하고 있음을 확인한 경우다. 그만큼 자본주의는 힘이 세다. 참가자들이 청소년의 관점에서 적어 놓은 비판 댓글을 살펴보면 ‘저렇게 된다.’라 할 때의 ‘저렇게’를 해체하지는 못하고 있다. ‘공부해도 다 저렇던데, 저게 뭐 어때서, 대학 가면 잘 되나…, 너는 공부 잘해서 이 모양이셔?’. 우리가 더 주목하고 고민해야 했던 것은 ‘저렇게’로 분류되는 존재와 노동이 사회에는 물론, 우리의 인식 속에도 그대로 건재하다는 것이 아닐까.

5.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것이, 넌 몰라도 돼 : 어른들의 일이 따로 있다는 듯이 하는 말이지만, 알고 보면 별거 없다는 사실을 참가자들은 댓글로 적어주었다. 어린 너(청소년)와 말할 이유 없다는 의사표시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고, 어떤 주제로든 나이 어린 사람인 너와는 동등한 관계로 대화하지 않겠다는 거부의 말이다. 그러니까 청소년에게 하라는 공부나 할 것이지 왜 어른들의 일이라고 여겨지는 노동이며 정치며 성(性)의 영역에 관심을 두느냐는 배제의 말이기도 하다. 여느 조직에서나 권력을 쥔 사람이 정보에 대한 접근권도 갖는다는 사실은 이런 배제가 청소년들에게만 향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미 다른 권력관계(남성/여성, 상사/부하 직원 등)에서도 숱하게 경험하고 있다.

 

청소노동자와 판사의 임금이 같아진다면, 노동의 위계는 사라질까?

노동의 프랑스어 Travail는 속박과 고문을 의미하는 것처럼 노동은 힘든 게 분명한데, 왜 노동이 신성하고도 숭고하다고 추앙받고 있는지 생각해 볼 일이다. 이렇게 숭고하다는 칭송을 받으면서도 그 노동에 대한 대가를 제대로 보상받지 못하는 다양한 노동을 떠올려본다. 이반 일리치가 그림자노동이라고 이름 붙인 이 노동에는 가사, 돌봄 등 우리 사회를 존속 유지케 하면서도 임금이 지급되지 않는 모든 노동이 포함된다. 노동을 바라보는 사회의 시선이 이미 이렇게 갈팡질팡하고 있으니 청소년들이 노동에 대해 부정적으로 인식하게 되는 것은 당연하다. 게다가 자신들은 ‘노동자’가 되지 않겠지만, 또 노동은 사회를 이끄는 힘이라고 여기는 모순을 안고 사는 것이다

청소년기에 들었던 말들과 우리가 청소년들에게 하는 말들에는 청소년을 대하는 사회의 기본태도와 노동에 대한 이런 분열적인 시선들이 고스란히 들어있다. 특히 진보를 말하는 사람들마저 자녀와의 관계에서 ‘네가 정 운동을 하고 싶으면 지금은 공부하고 대학 가서 해’라고 하더라는 얘기는 너무 많이 들어서 지겨울 지경이다. 일과 노동을 대하는 우리의 인식이 분열적인 것은 우선 잘게 쪼개어 분절된 노동구조 때문일 것이고, 또 하나는 우리가 고민하는 노동이 정규직/이성애자/남성/비장애인의 임금노동을 중심으로 구성되기 때문일 것이다.

비정규직 노동자의 임금과 전문직 노동자의 임금이 같아져 보상의 평등이 실현된다고 해서, 최저임금을 1만 원으로 올려 분배의 평등을 위한 실마리를 마련한다고 해서 이런 분열적인 인식에 기댄 노동의 위계를 없애는 일은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그 일을 하기 위해 받아야 하는 교육비의 부담은 누가 할 것인지, 노동을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에 대한 사회적 합의는 또 어떻게 일구어갈 것인지, 각자 하고 싶은 일을 하고, 모욕당하지 않으면서 살기 위한 사회적 안전망을 어떻게 갖출 것인지에 대한 수많은 논의도 함께 진행되어야 할 것이다.

이렇게 적어놓고 보면 청소년노동 인권교육에서 나눌 이야기는 무엇이어야 할지 여전히 풀리지 않는 숙제처럼 고스란히 남는다. 그래서 사회가 지정해 둔 자리를 벗어나려는 노력, 내가 누리는 소소해 보이지만 끊을 수 없는 권력의 힘들을 어떻게 놓을 것인지 같이 머리 맞대고 찾아보는 일에 더 큰 관심을 두자고 초대하는 일을 멈추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

 

<이 글은 인권 오름 제442호(2015.6.11)에 실린 글을 수정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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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5/24 05:14 2016/05/24 05:14

[세월호와 청소년⑤] 청소년도 '동료 시민'으로 대하는 사회 꿈꾸며

 

#0. 

가족처럼 함께 일할 분을 찾는다는 흔한 구인광고, 

이모팬, 삼촌팬을 자처하는 아이돌 팬덤, 

영화 국제시장, 드라마 응답하라 1988, 

'또 하나의 가족'을 내세우는 삼성, 

경기도 마을 돌봄공동체의 브랜드명인 '온마을 엄마품'… 

한국 사회가 얼마나 가족의 가치에 많은 의미를 부여하는지를 확인할 수 있는 몇 가지 사례들이다. 여기저기 다 가족이고 누구나 엄마, 아빠, 이모, 삼촌, 언니, 오빠, 형, 누나가 된다. 우리 가족이라는 마음으로 타인을 대하는 일이 뭐 그렇게 문제냐고 물을 수도 있다. 

그러나 남성-여성의 젠더 위계, 어른-아이의 나이 위계를 바탕으로 이루어진 가족은 불평등한 조직이다. 가족은 이런 권력 관계와 역할을 중시하면서 가족 구성원 개인을 지워버린다. 개인이 지워진다는 것은 그 가족이라는 조직 안에서는 하나하나의 개인을 온전히 존중 받아 마땅한 인간으로 대우하지 않고 주어진 역할을 수행하라는 요구만 남는다는 말이다. 이런 권력의 위계질서가 가족이라는 조직을 유지하는 뿌리가 되고 있다. 

#1.

딸을 출산한 후, 이 사회는 나에게 엄마/아내로서 역할을 잘 해야 한다고 잔소리하는 시어머니 같았다. 어디를 가도 가족이라도 되는 듯 거침없이 편하게 나를 대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딸과 함께 외출이라도 하는 날엔 특히 그랬다. '아유~ 애기 옷이 너무 얇네, 발목이 다 나왔네, 모자를 씌워야지, 안 그러면 감기 걸리는데'를 시작으로, 괜찮다고 아무리 만류해도 기어코 사탕을 손에 쥐어주는 사람, 애가 귀엽다며 쓰다듬는 사람, 덥석 아기나 나를 붙잡고 여기 앉으라고 끌어 대는 사람……. 물론 그 이들이 베풀었던 것은 호의였을 테다.

2013년 11월에 진행되었던 밀양희망버스에 나는 아이를 데리고 함께 탔다. 거기서도 숱한 '가족 같은' 사람들을 만났다. 딸이 걷고 뛰며 행렬에 함께 있으면 애기가 힘들겠다거나, 기특하다며 말을 건네고, 내 등에서 딸이 잠들면 아이를 태울 차를 마련해주려던 이들이 많았다. 고마운 마음이 들지 않았던 건 아니지만 딸이 힘들건, 지치건, 잠이 들건 간에 '아, 그냥 내버려 두지…….' 하는 푸념이 절로 나왔다. 세 살 된 여자 어린이와 동행하는, 나 같은 희망버스 탑승자는 연대하러 간 시민이 아니라 그저 엄마로만 여겨지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이들이 베풀었던 것도 역시 호의였을 것이다.

그 많은 '가족 같은'(?) 사람들을 만나면서 나에게 베풀어준 그들의 호의는 내가 바랐던 것이기보다는 그 이들이 해주고 싶었던 것일 테다. 자기 마음 편하기 위해 도와주고 싶거나 챙겨주고 싶은 마음, 아니면 누구 아이든 우리가 함께 보호해야 한다는 마음 말이다. 그저 내가 도움을 요청할 어느 때에 성심껏 대안을 고민해주는 정도의 응답이면 나는 괜찮았을 것이었다. 호의를 베풀고자 하는 대상이 정말 어떤 필요가 있을지 헤아리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 일인가 궁금했다. 넘치는 관심은 접어두고, 도움을 청하는 신호를 놓치지 않고 응답하는 사회는 정말 어려운 걸까?

2013년 12월부터 한동안 '안녕들 하십니까' 벽보가 큰 화제를 이루던 어느 날 조그만 벽보가 고대에 붙었다.

"너희들에게만은 인간을 가장 귀하게 여기는 세상을 물려주고 싶었는데……. 너를 키우면서 부끄럽게도 성적과 돈에 굴종하는 법을 가르쳤구나. 미안하다. 이제 너의 목소리에 박수를 보낸다 ― 82학번 너희들의 엄마가"

인터넷과 SNS에서는 온통 감동적인 응답이라는 반응이었지만, 나는 묻고 싶었다. 왜 당신이 고려대 학생들의 엄마인지, 어떤 세상이든 그것을 왜 당신이 물려주었어야 했는지 말이다. 이런 나의 반응에 몇몇 친구들은 엄마로 산다는 일이 나에게 큰 트라우마가 된 것 같다며 농담 섞인 걱정을 해 줄 정도다.

#2.

사실 나는 '세월호 운동'이라는 것에 대해 뭔가를 말할 입장이 아니라고 생각해 왔다. 세월호 참사가 발생하고 지금까지 냉정함과 이성적인 태도를 잃지 않으려고 애를 써오고 있고, 인권교육센터 '들'에서 '재난 참사를 대하는 시민의 자세'라는 문서를 토론을 통해 함께 만드는 와중에도 끝없이 세월호 참사를 슬퍼하는 것과 분노하는 것은 다른 일이라는 생각을 하며 거리감을 유지하려고 노력했던 것 같다. 게다가 세월호 운동에 함께 한 일이 있다면 아주 가끔 집회나 광화문 농성장에 배꼼 다녀오고, '존엄과 안전에 관한 416 인권선언 2차 전체회의'에 참여했던 것 정도일 뿐이니 이런 내가 뭔가 말을 보탠다는 것은 사실 염치 없는 일이다.

참사에 대한 슬픔과 분노가 어떻게 다르겠냐고 말할 사람이 많겠지만, 그 둘을 구분하는 일은 나에게 중요한 문제였다. 2014년 7월 15일로 기억되는 국회 앞 세월호 미사에 참여했을 때, 유가족 한 분이 "내 몸 같은 자식을 잃은, 팔다리가 잘려나간 듯이 자식을 잃은 나는 아무것도 두려울 게 없습니다. 뭐가 두렵겠어요?"라며 울부짖는 소리를 들은 뒤론 다른 어떤 얘기들도 들리지 않았다.

'자식 잃은 부모'의 슬픔을 나는 도저히 헤아릴 수 없을 테지만, 이 슬픔을 '부모들'의 슬픔으로만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친구들의 걱정대로 '엄마로서의 트라우마' 때문일 수도 있지만, 그 유가족의 절규는 이 사회에서 벌어지는 일에 대한 '부모/어른으로서의 책임감'을 호출하는 것 같았다. 그분의 절규만이 아니라 세월호 참사 이후 내내 인터넷에 오르는 기사나 SNS의 글들이 대부분 그랬다. 세월호 참사 이전에는 이런 어이없는 일이 없었던 것처럼 슬퍼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슬프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같은 마음으로 슬퍼할 수 없다는 판단을 했다. 고집스럽게 냉정함을 유지하려고 했고 나를 아는 한 지인은 이런 냉정함을 어색해 하며 말했다. '네가 따뜻한 사람이라는 것을 애써 부정하지 마.'

#3.

참사에 대한 슬픔과 분노를 분리해서 생각하겠다는 내 마음은 세월호 운동에서 참사의 당사자를 청소년으로 설정하고, 그 '지켜주지 못한 아이들의 죽음에 대한 미안함'과 '자식 잃은 부모의 슬픔'이 부각되고 있는 상황을 우려하는 이유와 맞닿아 있다.

세월호 참사 당사자의 대다수를 청소년이 차지하고 있기는 하지만, 476명의 탑승자 가운데에는 비청소년 탑승객, 승무원, 교사 등 다양한 사람들이 세월호 안에 타고 있었고, 304명의 실종/사망자 말고도 170여명의 생존자들이 있다. 게다가 '나도 세월호의 승객'이라며 참사를 함께 경험한 많은 시민들이 스스로를 당사자로 인식하고 있다는 것도 분명한 사실이다.

이런 상황에서 청소년을 세월호 참사의 당사자로 부르는 일은 최근 몇 년 동안 끊임없이 보도되고 있는 여러 아동학대로 인한 어린이 청소년들의 죽음을 '괴물 같은 나쁜 부모' 탓으로 돌리며 공분하는 것과도 닮아 있다. 계모/계부가 문제라거나, 가르치려고(훈육을 위해) 때릴 수는 있지만, 죽이는 것은 도가 지나치다거나, 어떻게 부모가 그럴 수 있느냐는 논란, 그래서 부모들을 교육해야 한다는 논의들은 아동 학대가 그저 약자인 어린이 청소년에 대한 폭력의 문제라서 그 가해자는 친부모, 가족, 형제자매일 가능성이 더 높다는 사실을 가려버린다. 그리고 그런 폭력으로 희생된 어린이 청소년들의 죽음 그 자체에 대한 애도도 쉽게 건너뛰거나 잊어버린다. 

비슷하게 가족 동반자살 사건들의 경우도 실상은 자녀를 '살해'하고 부모가 자살하는 사건이기 쉬운데, 이때 자녀인 어린이 청소년들은 자신의 삶과 죽음에 대한 결정권마저 없는 존재, 함께 살아가기 위한 방법을 같이 논의할 수 없는 무력한 존재, 온전한 가족구성원은 아닌 존재가 된다. 그러니까 세월호 참사에 대한 '사회적 부모들의 슬픔'은 세월호 참사 이후의 사회를 고민하면서도 청소년들을 하나의 온전한 시민으로 대하지 못하게 할 위험을 여전히 안고 있다. 세월호 참사를 애도하기 위한 청소년들의 행동은 학교에서 여전히 저지당하고 있으며, 청소년 생존자들도 자신들의 말을 할 기회를 이제야 조금씩 찾아가는 중이다.

#4.

세월호 참사에 대한 이런 고민은 내 일상 구석구석과 계속 이어지고 있다. 부모가 자녀를 키우는 게 아니라 자녀가 부모를 키워주는 것이라는 사실을 새로 배우고 있기는 하지만, 제대로 책임지지 못할 존재를 만들었다는 자괴감이 늘 나를 뒤흔든다. 자발적으로(?) 만든 '가족'이었지만, 그 안에서 나에게 부여되는 역할에 대한 억울함이 끝없이 치고 올라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찌 되었든 같이 살아야 하니까, 어린이와 함께 가족을 이루고 사는 사람으로서 돌봄, 육아의 문제를 해결하는 일은 정말 그날그날의 숙제 같기만 하다.

그런 육아의 고민에 대한 명쾌한 해답이라는 듯이 최근 몇 년 동안 회자되고 있는 말이 있으니 바로 "한 아이를 키우려면 온 마을이 필요하다."는 아프리카 속담이다. 예전에는 대가족을 이루고 살아서 자연스레 육아의 부담을 온 가족이 나누었지만, 단일 가족이 대부분인 요즘 부모에게만 몰리는 육아 부담을 지역 공동체가 함께 해결하자는 취지란다. 그래서 마을 돌봄이 중요하고, 내 자녀만 보이는 좁은 시야를 넘어 우리 (동네) 아이들 모두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함께 돌보자는 것이다.

"육아라는 절실하고 시급한 필요를 해결하기 위해 이웃과 만나고 마을을 알게 되고, 그러다 보면 그렇게 형성된 이웃 관계망이 다시 내 아이가 살아갈 삶의 공간이 된다. '내 새끼'에서 출발했지만, '우리 새끼'로 나아가고, '동네 아이들'로 확장된다. 물론 그 속에서 내 아이도 잘 자랄 것이다. 이렇듯 마을에서 함께 돌보는 공동육아는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면서 이웃과 마을을 재구성함으로써, 종국에는 "누구와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답을 찾아가게 한다." - <'내 새끼'가 '우리 새끼'로!>, 유창복 서울시 마을공동체 종합지원센터장, 2015. 05. 01, 프레시안

마을 공동체를 꾸리자고 아무리 제안을 해도 어느 부모는 그 공동체에 함께 하지 않겠노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러면 이 좋은 걸 왜 마다하느냐고 타박할 수는 있어도 억지로 그 이들을 공동체의 구성원이 되도록 강요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렇다면 자녀들의 선택권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공동체의 구성원이 온 마을 사람들이라고 하지만, 그 마을 각 가정의 자녀들에게는 선택권이 없고, 자녀는 부모의 뜻에 따라 묶음으로 움직인다고 쉽게 생각해 버린다. 그렇게 그 마을의 자녀들은 본인들은 동의하지 않은 공동체의 구성원이 되어 버리고 동시에 본인들의 의사와 상관없이 수 없이 많은 엄마 아빠들이 생긴다. 아버지, 어머니뻘/ 할아버지뻘/ 언니 오빠뻘 된다며 처음 만나는 자리에서 호칭을 정리하는 사회에서 가족 같은 연장자 앞에서 자유롭게 정당한 요구를 하는 일 동등한 관계를 맺는 일은 무척 어려운 일이다. 어디를 가도 엄마의 눈으로 지켜보는 사람들 사이에서 우리들 모두는 온전한 개인으로 존중받고 살 수 있을까.

가족주의의 시선을 담고 있는 이런 '말 잘 듣는 아이'에 대한 '운동사회(?)'의 판타지도 있을 뿐만 아니라 다양하게 변주되어 드러난다. 게다가 이게 왜 문제인지 아무도 고민하지 않아서 더욱 문제적이다. 강정, 밀양을 위시한 다양한 싸움의 현장, 광화문 세월호 농성장,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 반대 집회에 찾아가는 청소년들을 보면서 '대견하고 기특하다'고 생각하는 마음속을, 아니 고민할 시간도 없이 그냥 툭 튀어나온 호의어린 칭찬의 말 한마디를 이제는 고민해보자. 

일상적으로는 이 사회를 함께 살아가는 주체, 동료시민으로 청소년을 대하지 않으면서 필요한 때에만 '너희들의 의견도 중요하지, 한마디 해줄래?' 하며 말을 걸고는 필요한 말, 듣고 싶은 말만 골라내는 것은 제대로 듣는 일이라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세월호 기억교실 문제에 대한 논란 속에서 청소년의 입장이 없는 게 문제라는 말도 틀린 건 아니지만 흔쾌히 맞장구치기 어렵기도 하다.

온 사회, 온 마을이 다 가족이 되는 사회를 넘어서는 것을 세월호 이후의 새로운 사회를 구성하려는 노력으로서의 '세월호 운동'의 지향으로 고민하자는 신호를 보내고 싶었다. 그래서 염치불구하고 글을 써 보낸다. 어린이 청소년들에게 '말 잘 듣는 아이'가 되라고 다그치는 가족 같은 사회 말고, 우리가 만들어야 할 사회에 대해 모든 구성원이 평등하게 논의하고 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 가는 여정은 더 힘들 테지만 말이다. 덧붙여 세월호 참사의 당사자는 청소년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라는 사실을 기억하고 일상의 삶과 관계에 대해 던지는 질문들을 함께 고민하자는 요청도 함께.

 

오마이뉴스 2016.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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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5/24 05:11 2016/05/24 05: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