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과 행동의 괴리

 

 

요즘 나는 상담을 받고 있다. 내가 청소년 노동인권교육을 하며 떠들고 다니는 말과 경험을 통해 얻은 확신이 내 일상에서는 도통 풀려 나오질 않았다. 집에서는 오직 만 보였고 내게 부과되는 사회적인 역할들은 그저 나를 숨막히게만 했다. 그러다 보니 가족들특히 엄마와 여동생 과의 사소한 다툼이 쌓였다. 어느 순간 두려움이 커지기도 했다. 나의 생각과 행동의 괴리에 대해 내 자신이 너그러 워지지가 않았다. 《생각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라는 책도 있던데, 두 달 가까이 상담을 받으면서도 내 생각대로 살 수 없을 것 같은 두려움은 아직 남아 있다. 며칠 전 읽은 정희진의 글1)에 따르면 나는 머리(이상 혹은 희망 사항)로는 이해가 되는데 몸이 안 움직이는, “머리가 없는 사람일 수도 있겠다.

내가 살아온 동안 감당하기만 하고 꾹꾹 눌러 담았던 것들이 스멀스멀 기어 나오기 시작한 것은 올해를 시작하는 겨울이었다. 결혼하고 딸을 낳고 키우면서, 또 주말마다 만나는 조카와 부딪히면서 어린 사람을 대하는 나의 태도를 지적받기도 하고 숱하게 반성하기도 했다. ‘훈육을 왜 하지 않느냐, 육아도 공부해야 한다는 타박, ‘아이를 완전한 존재로 대한다면서 어른에게는 쉽게 못 할 상처되는 말을 아이에게 퍼붓는 건 아니냐는 지적, ‘청소년인권을 위해 활동을 한다더니 너와 가까운 아이들과의 관계는 왜 이러냐는 비난을 들었지만 그 말들을 소화하는 것이 힘들어 나도 나 자신을 비난하기 시작했다. 청소년 활동가들이 공부하고 있는 adultism 관련 문서들을 발견해 읽다 보니 나의 징후는 영유아 혐오/아동 혐오일 가능성이 높은 것도 같았다. 저 단어들에 쓰인 혐오라는 단어는 공포를 포함하는 건 아닐까, 이리저리 합리화도 해 보고 고민을 해 보아도 딱히 벗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말과 행동의 괴리로 괴로울 때마다 내가 떠올리는 이미지가 있다. 진보적인 목소리를 내는 사회 활동을 하면서 집에서는 마초적인 가부장. 결혼 전에는 함께 활동하는 동료였지만 결혼 후에는 남편의 활동을 내조만 하게 되었다는 여성들의 넋두리 속에, 줏대 있는 사람이 되라며 책을 사 주던 아버지였지만 막상 청소년운동을 시작하자 그런 건 (명문)대학 가서 하라고 격하게 반대를 해서 결국 집을 나오게 되었다는 어느 청소년 활동가의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그런 인물들. ‘운동하는 활동가라면, 진보 논객이라면 가정이나 개인적인 관계에서 가부장적 권위주의에 젖어 있어도 괜찮다고, 그건 개인적인 문제니까 우리가 일일이 지적할 순 없다고, 어떻게 사람이 완벽하겠느냐며 함께 변명해 주는 사람도 많다.

세상을 향해 민주주의와 정의를 말하는 활동가, 진보 인사의 이미지가 사적인 공간에서의 위계, 권력, 폭력을 덮어 버리는 일이 나라고 다를까 하며 털썩 주저앉곤 했다. 솔직히 좋은 의도를 내세우는 여러 조직들이(시민사회단체건 회사건 협동조합이건) 그 좋은 의도를 내부에까지 구현하지 못하는 경우는 너무 많지 않은가. 그 조직에서 노동은 존중받지 못하고, 내부적인 문제를 지적하거나 고발한 사람들은 괘씸죄로 몰려 그 조직에서 밀려나는 일이 허다하다. 보리출판사를 비롯해 그린비출판사, 자음과모음, 함께일하는재단, 평화박물관, 마인드프리즘의 노동 문제들이, 10년 전에 활동했던 100인위의 존재 자체가, 지금도 많은 조직 안에서 끊임없이 제기되는 나이차별, 성차별 사건이 그런 현실을 확인하게 해 준다.

그래서 질문을 하게 되었다. 왜 좋은 의도는 밖으로만 드러날까. 왜 안으로 스며들지 못하는 걸까. 어쩌면 이 질문이 나의 상담의 시작이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왜 내 옆의 존재들에게 그런 횡포를 부리는 건가 하는 질문. 그리고 이런 질문을 《오늘의 교육》이 구성하고자 하는 교육의 생태적 전환이라는 담론을 향해 던지고 싶었다. 교육의 생태적 전환이라는 이상이 우리가 발 딛고 서 있는 지금 여기의 사소하고 지질해 보이는 문제들을 간과하게 만들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들었기 때문이다.

 

 

교육이 대체 뭐길래

 

 

《오늘의 교육》 20155·6월호, 7·8월호 두 권의 특집을 읽으면서 우선 떠오른 질문은 왜 교육이 무엇인지에 대해 파고들지 않을까였다. 윤상혁이 <전환을 위한 사유>에서 인용한 사티쉬 쿠마르의 문장 만약 우리가 지구를 집으로 인식하지 않으면 어떻게 다룰 수 있을 것인가?”(5·6월호, 40)를 이렇게 패러디해 보고 싶었다. “우리는 교육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지에 대한 토론은 미루고 어떻게 다룰 지 말하고 있는 건 아닌가?”

 

 

우리가 교육해야 할 생태학의 개관은 바로 그런 종류의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세월호 참사와 같은 파도처럼 넘실대며 반복되는 파국적 상황에서 살아남고, 싸우고, 연대하는 삶과 기술에 대해 가르치는 것. 그런데 그 방법이 지금의 도시적 삶에서 탈출하고, 반기술적, 반과학적 사유를 통해 아름다웠던 과거로 회귀하자는 게 아니고, 내 삶이 도시에 기반하고 있다면 바로 지금 여기에서부터 실행할 수 있는사유의도구를 손에 쥐어 주는 거라 생각합니다.- 니짱, <우리는 왜 교육의 생태적 전환을 말하게 되었는가?>, 《오늘의 교육》 5·6월호, 20

 

 

학생들은 이런 파국적 상황에서조차 같이 토론하고 길을 모색하는 동료, 동시대인이 되지 못한 채, 그들의 손에 사유의 도구를 쥐어 주고연대하는 삶과 기술을 가르쳐야하는 교육의 대상이 될 뿐이다.

과연 교육은 무엇인가? 누군가는 앞에서 가르치고 어떤 여럿은 그것을 배우는 것인가? 가르치는 사람이 없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배우는 사람이 중요한가 아니면 가르치는 사람이 중요한가? ‘교육하면 떠오르는 그림이 뭐냐고 물으면 대개 칠판이 있고 뭔가 말하는 한 사람과 그 사람에게 집중하는 여러 사람의 모습이라 답한다. 필자들의 글에서 드러나는 교육이 여전히 필자인 우리(학교에서) 누군가를 가르치거나 변화시키려는 것에 고정되어 있는 것도 이상할 게 없어 보인다.

너는 가르치고 나는 배우는 게 아니라 너랑 나랑 같이 토론하고 공부하는 교육, 배우고 싶은 것을 내가 정하고’, ‘배우고 싶을 때에 어디서나 배울 수 있는 교육, 그래서 국가와 사회가 정한 교육을 거부할 수 있는 권리도 포함되면 좋겠다. 노동권에 일할 권리와 일하지 않을 권리를 함께 포함할 것을 고민하듯이 쉬고 싶을 때 쉴 권리와 즐겁고 알차게 놀 권리도 보장하는 교육, 배우는 동안 먹을 음식, 사용하는 모든 도구, 이동에 드는 비용도 제공하는 교육을 꿈꾸고 만들기 위한 노력이 선행되어야 할 일은 아닌가 싶다.

교육이 무엇인지 파헤치고, 우리가 내면화한 교육에 대한 고정관념을 어떻게 넘어설지 먼저 얘기하지 않고 다른 얘기를 한다는 것은 순서가 뒤바뀐 것 같다. 우리가 함께 손잡고 새 하늘 새 땅을 상상하기위해 먼저 합의할 것들도 많을 것이다. 마을, 골목, 공동체는 과연 어떤 모습인지 각자 그리는 그림을 맞추는 과정이 필요하다.

 

 

가령 박복선이 처음 글에서 제시한 건 후쿠시마 등 생태적 위기, 파국이 도래하는데 이러한 현실을 사유하고 고민하지 않는 교육에는 문제가 있다는 점에서생태적 전환이 필요하다는 논리였죠. 인류의 존속 자체가 불가능한데 그걸 외면하고 있다니, 이건 죽은 교육이다.’ 거칠게 요약하면 이러려나요? - 공현, <우리는 왜 교육의 생태적 전환을 말하게 되었는가?>, 《오늘의 교육》 5·6월호, 14

 

 

도래할파국은 어쨌거나 앞으로 올 시간에 대한 얘기다. 파국이 도래하기 전까지 살아야 하는 나날들은 그냥 버티면 되는 것일까? 솔직히 한 순간도 인간답게 지내기 힘든 학교생활은 어쩌자는 것인지 궁금하다. 경쟁적인 대입 시험으로 인한 압박은 초등학교, 유치원까지 내려가고 있으며, 학생인권조례가 시행되는 곳에서도 여전히 체벌이 자행되고 있다고 밝히는 학생이 10명 중 4명이나 되고, 나머지는 대체 체벌인 벌점제에 시달린다. 학교라는 공간 자체가 갖는 감시와 통제의 시선마저 억압이 되는 와중에 교육은 인간에 대해서도 아직 끈질기게 이야기하지 않았다.

물론 정용주의 글 <‘생태적 탈근대로서 교육의 생태적 전환>(5·6월호)은 꼼꼼하게 탈근대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생태적이라는 말이 환경/생태주의의 범주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교육의 모든 부분을 다루게 될 것임을 생태적 교육학의 통합적인 세계 인식세계 내 모든 존재는 모두 연결되어 있는 상호의존의 관계 을 통해 강조한다. 하지만, 그 통합적인 세계 인식은 윤상혁의 <전환을 위한 사유>에서, “나와 지구는 분리되어 있지 않내가 바로 지구라는 인식으로 흐른다(같은 책, 42). 여기서 나는 생태적 전환이라는 말이 거대하고 거창하다 못해 위험스럽게 느껴진다. 지금 학교에서 개별적으로 맺고 있는 교사-학생의 관계 역시 사회적인 관계라고 볼 때, 교사인 내가 발생시키고 있는 지위 권력, ‘위계의 문제는 그 통합적인 세계 인식 앞에서 절대적이고 전능한 권위로 변질되기 쉽다. ― 내 말이 법/하느님의 뜻/진리가 되는 일은 그리 어려운 것이 아니다. ― ‘지구와 통합된내가 가르치는 일이 도전받을 수도 있고 어떤 오류가 있을 수도 있다는 것을, 과연 용납할 수 있을까? 비약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지만 권력 관계가 활약하는 공간은 그 어이없는 비약을 현실화하곤 한다는 걸 나는 여러 차례 경험했다.

물론 우리는 모두 연결되어 있다. 나의 고통과 당신의 고통이, 내가 겪은 차별의 어떤 측면과 당신이 겪는 차별이. 그래서 공감하고 연대도 할 수 있다. 밀양, 쌍용차, 용산, 강정, 세월호라는 서로 다른 사건들이 그렇게 연결되어 있음을 확인해 왔으니 우리가 연결되어 있다는 말이 자연스럽게 이해되기도 한다. 그러나 교육(혹은 국가, 종교)과 통합적 인식이 만나는 일은 좀 더 조심스러웠으면 좋겠다.

삶과 교육의 전환 국면 가운데 /우리는 어디에 있는가를 먼저 질문하고 싶었던 것도 그래서이다. 우리는 교육의 생태적 전환이라는 멋진 그림을 그리고 먼저 앞서 나가듯 도망치는 건 아닌가. ‘환경도 생각하고, 생명과 농업의 가치를 얘기하고 소비를 줄이고 풍부한 생태 감수성을 보여 주면 지금 당장은 아무도 우리를 비난하지 못할 것이다. 아무도 시도하지 않았던(?) 새로운 이야기를 시작하는 우리를 욕할 사람이 있을 리 없다. 덧붙여 사소해 보이지만 사소해서 너무 어려운 어떤 노력예를 들어 교사/부모를 위시한 어른들이 누리는 권위를 놓는다든가 나이 위계를 넘어서는 시도 같은 을 지금 좀 놓아도 괜찮을 것이다하는 생각들을 하면서 말이다.

그래서 교육의 생태적 전환이라는 말이 알리바이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알리바이는 범죄 현장과 다른 곳에 있었다는 것을 증명해 본인의 무죄를 입증하는 것을 의미하는 법률 용어지만, 비난을 피하기 위해 그럴듯하게 둘러대는 핑계라는 뜻도 함께 갖고 있는 단어다. 학교가 더 인권적인 공간이 되도록 애쓰지 않고 뭐하고 있었냐는 책임 추궁을 피하기 위한 핑계가 아닌가를 자꾸 묻고 물어야 한다. 학교에서 학생들은 또 교사들은 얼마나 인간다운 삶을 살고 있는지, 학교 안에서 생활하는 이들의 관계는 얼마나 평등한지, 학생들의 의견이 어떻게 받아들여지는지를 먼저 확인했으면 한다. 예컨대 나에게는 생태적으로 거듭나는 교육보다는 보다 평등하고 위계 권력으로부터 자유로운 교육이 더욱 매력적이다. 생태적 전환보다는 학교와 교사/가정과 부모가 일상적으로 휘두르는 권력을 어떻게 약화 시키거나 없앨 수 있는지가 더 중요해 보인다.

 

 

정희진, ‘몸의 일기’, <한겨레> 2015.8.28.

 

 

 

오늘의 교육 [28호/2015년 9·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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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5/24 06:06 2016/05/24 06:06

청소년들과 노동을 주제로 이야기 나누고 싶어 하는 비청소년 대상 교육이 최근 몇 달 동안 계속되었다. ‘청소년노동 인권교육’을 위해 같은 장소에 만나 시간을 보내고 있지만, 우리가 바라보는 길이 다른 건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도대체 청소년과 노동을 이야기한다는 것, 일하는 청소년의 인권을 말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참가자들은 주로 일하는 청소년의 ‘일하는’이라는 상태에 비중을 두고 있으면서 청소년에게 노동을 알려주고 싶은 의지가 높다. 그런데 필자를 비롯한 몇몇 교육진행자들은 ‘청소년’에 더 큰 무게를 실어(일하는) 청소년이 처한 사회적 상황을 얘기하면서 어떻게 평등한 관계를 맺을지 질문하는 것이다. 참가자와 교육 진행자들의 다른 의지는 묘하게 만날 듯하면서도 만나지 못한다. 그래서 어느 교육에서나 ‘청소년 노동 인권이라면 청소년이 노동 현장에서 당하는 억울함을 함께 해결할 방법을 고민하는 거 아니냐, 왜 나의 청소년 인권 감수성을 점검하지?’ 이런 말을 담은 표정을 만날 수 있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10년이 넘는 시간을 학교에서 지내는 동안(사실은 학교 다니기 전부터…), 청소년기를 보내는 사람들은 대부분 ‘말 잘 들어야 착하지!’ 하는 격려(?)를 받으며 자랐고, 학교의 규칙을 잘 지켜야 학생답다는 교육을 받아왔다. 그렇게 10여 년의 세월을 고분고분하게 자란 사람들이 어느 날 갑자기 일터에 가기만 하면, 자기 권리를 주장하는 노동자로 변신할 거라는 기대는 과연 합당한가? 노동법이 규율 하는 노동자의 권리가 무엇인지 아는 일이 모르는 것보다야 낫겠지만, 이 사회가 청소년을 대하는 태도가 그대로이고, 또 학교라는 괴물 같은 시스템이 버젓이 있는 상황에서, 그런 법적인 권리를 알게 하는 것으로 할 일을 다 했다고 말해도 되는가? 고민은 쉽게 가시지 않는다.

이 사회는 노동의 신성함과 가치 있는 노동을 떠받들고 있지만, 그 신성하다는 노동을 하면서 왜 많은 사람이 숱한 모욕을 당하는지는 궁금해하지 않는다. 그래서 최근 교육에서, 끝없이 질문했던 것 같다. ‘노동은 정말 신성한가?’

이 교육을 기획하는 자리에서 노동의 가치에 대해 정답처럼 말하고, 위계나 속도, 경쟁을 비판하는 것에서 나아가, 일상에서 자신이 청소년들에게, 특히 자녀에게 하는 말 속에서 그런 가치들이 어그러지게 하는 발화를 하고 있지는 않나 살펴보자는 의견들이 나왔다. 돌이켜보면 청소년에게 하던 말 속에서 우리의 평소 주장과 다른 ‘나’와 ‘나의 시선(혹은 무의식)’을 쉽게 마주하게 되기 때문이다.

‘뭐가 되려고 그렇게 공부를 안 하느냐’, ‘또 쓸데없이 뭐 하고 있어?’하는 핀잔들의 행간에 담긴 이야기를 보면, ‘어떤’ 노동에 대한 평가절하가 들어있는 것도 같고, 청소년의 ‘내일’의 일을 어떻게 규정하고 또 상상하는 건지 의심스럽기도 하다

청소년 노동 인권교육 속에서 이토록 익숙한 발화에 드러나고, 또 내면화하고 있는 주류사회의 가치들을 살피는 것이 가능할지, 또 어떻게 자신의 말과 행동의 괴리를 알아차리게 할지를 고민하게 되었다. 그래서 2015년 4~5월 동안 진행된 은평지역 청소년노동인권교육 활동가 과정의 한 회차에서  ‘청소년기에 내가 들어왔던 말’, 그런데 다시 ‘청소년들에게 내가 하는 말’을 살펴보는 활동을 해보기로 했다.

누구나 청소년기를 거쳐오면서 지긋지긋하게 들었던 비청소년들의 잔소리에 숨겨진 ‘의도’는 없는 것일까? 혹은 발화자는 미처 알아차리지 못한 채 퍼뜨리고 있는 노동에 대한 ‘사회적 시선’이 있는 것은 아닌가? 이런 질문들을 바탕으로 비청소년들의 말을 조곤조곤 살펴보기로 했다. 청소년이던 내가 들어왔던 그 말을 나도 되풀이하고 있다면, 그런데도 그 말이 진리는 아닌 것 같다면, 그 핀잔들의 행간을 읽어보는 일은 재미있을 듯했다.

“너 그러다 아무짝에 쓸모 없게 된다”고 할 때 우리가 쉽게 무시하고 쓸데없다고 치부하는 많은 일은 사실 그런 대접을 받아도 되는 일이냐는 딴죽을 걸어보고도 싶었다. 이런 얘기를 나누다 보면, 동시대를 사는 비청소년인 나와 청소년이 만나온 노동이 어떻게 닮고 또 다른지 어설프게나마 확인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어찌 이리도 닮았나! “내가 들어왔던 말, 또 내가 하는 말”

참가자들은 다섯 모둠을 이루고 자리를 잡았다. ‘청소년기에 들었던 이 말, 정말 지겨웠다.’ 그리고 ‘내가 지금 청소년 및 어린 사람들에게 하는 말’을 모둠별로 나누어 5가지씩 찾아보기로 했다. 내가 들었던 말이나 지금 하는 말은 역시나 크게 다르지 않았다.

‘절~로 가! (저 멀리 가라는…)’, ‘넌 몰라도 돼’, ‘00하지 마’, ‘조용히 해’ 이런 배제하고 차단하는 말들부터, ‘공부할 때가/학생 때가 좋은 거야’, ‘다 경험이야.’ 같은 훈계,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것이. 네가 뭘 알아’, ‘나 자랄 때는 안 그랬는데, 요즘 애들은 싸가지가 없어’, ‘(어른들 말 안 듣더니,) 너 그럴 줄 알았다’와 같은 저주와 무시의 말까지, 우리는 듣고 자란 말을 고스란히 어린 사람들에게 되돌려주며 살고 있었다. 나도 듣고 살았는데, 내가 이런 말 하는 게 뭐 그렇게 문제냐고 할 수도 있었을 텐데, 다행스럽게도 화이트보드에 붙은 말풍선을 확인한 참가자들은 자신이 해왔던 평소의 말들의 민낯을 대하고는 ‘저 말들, 참 폭력적이구나…’ 하며 한숨을 쉬기도 했다. 때리지 않는다고 폭력이 아니라고 단정할 수 없듯이 ‘다 너희를 위해서’하는 말이라며 해온 말이 결과적으로 청소년을 차별하고 배제하는 것이라는 것을 발견하는 순간이었다.

 

일상적으로 뱉던 나의 말들과 결별하기

이제 스스로 다시 청소년 입장이 되어 댓글을 달아보는 시간을 가졌다. 화이트보드가 넘치게 많은 말 중에서 청소년들에게 정말 문제가 있을 것이라고 추측되는 말 5가지를 선택한 후 모둠별로 나눠 가졌다.

1. 요즘 애들은 싸가지가 없어 : 이 말은 누가 들어도 별다른 이유 없이 그냥 화가 나는 말이다… 그래서 댓글도 간단명료하다. 그런데 싸가지 없다는 평가는 나이에 따른 ‘아랫사람’에게 주로 하는 말인지라 굳이 청소년이 더 많이 듣는 말이라고 할 수 없기도 하다. 나도 가끔 듣거나 하게 되는 말인데, 음음… 이제 나(참가자 자신들)에게 말한다. “고마워, 너나 잘하셔~^^”

2. (어른들 말 안 듣더니,) 너 그럴 줄 알았어 : ‘말 잘 듣는 아이’로 살게 되면 경험하지 못할 것들을 과감하게 저질러버린(?) 분들에게 경의를 표해야 함에도, 이런 식의 말로 청소년들이 실수하고, 방황할 권리, 다양한 경험을 할 권리를 얼마나 가로막아왔던 건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 사회의 결과 중심적인 판단을 문제 삼았던 우리도 별수 없구나 하는 반성도 하게 된다. ‘점집 차리세요~^^’라는 댓글이 인상적인데, 한 치 앞의 인생을 모르기는 매한가지인데, 어른들은 모르는 게 하나도 없다는 듯이 늘 전지적 작가 시점이다.

3. 00 하지 마 : 청소년도 뭔가 알아서 할 수 있는 온전한 존재, 무엇이든 스스로 결정할 권리가 있다는 의견들이 댓글로 달렸다. 청소년의 여러 가지 행동을 금지하려는 이 말들은 정말 위험하니까 하지 말라는 말이라기보다는 어른들에게 부여될 미래의 책임을 피하고자 하게 되는 경우가 더 많다는 이야기들을 나누게 되었다. 어떤 청소년도 비청소년들에게 무언가를 대신 감당해달라고 하지 않았음에도 말이다. 청소년들을 보호하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금지하면 된다는 생각에는 청소년들이 저지를 일에 대한 책임을 그들의 부모나 교사 등 보호자를 자처하는 비청소년이 감당해야 한다는 인식이 깔렸다. 청소년을 스스로 판단하거나 그 결과를 감당하고 책임지기에 부족한 존재라고 여기고 있다는 것 아닐까? 이것도 저것도 다 하면 안 되는 청소년들의 댓글은 ‘그럼 뭐해요?’였다. 이 사회에서 청소년은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는 존재가 되어버린다.

4. 공부 안 하면 저렇게(노숙자,청소노동자) 된다 : ‘우리는 좀 달라’라고 생각했을지 모를 청소년노동 인권교육의 참가자들도 역시 사회가 만들어 놓은 경쟁, 즉 ‘성공과 실패에 대한 이미지’를 그대로 수용하고 있음을 확인한 경우다. 그만큼 자본주의는 힘이 세다. 참가자들이 청소년의 관점에서 적어 놓은 비판 댓글을 살펴보면 ‘저렇게 된다.’라 할 때의 ‘저렇게’를 해체하지는 못하고 있다. ‘공부해도 다 저렇던데, 저게 뭐 어때서, 대학 가면 잘 되나…, 너는 공부 잘해서 이 모양이셔?’. 우리가 더 주목하고 고민해야 했던 것은 ‘저렇게’로 분류되는 존재와 노동이 사회에는 물론, 우리의 인식 속에도 그대로 건재하다는 것이 아닐까.

5.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것이, 넌 몰라도 돼 : 어른들의 일이 따로 있다는 듯이 하는 말이지만, 알고 보면 별거 없다는 사실을 참가자들은 댓글로 적어주었다. 어린 너(청소년)와 말할 이유 없다는 의사표시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고, 어떤 주제로든 나이 어린 사람인 너와는 동등한 관계로 대화하지 않겠다는 거부의 말이다. 그러니까 청소년에게 하라는 공부나 할 것이지 왜 어른들의 일이라고 여겨지는 노동이며 정치며 성(性)의 영역에 관심을 두느냐는 배제의 말이기도 하다. 여느 조직에서나 권력을 쥔 사람이 정보에 대한 접근권도 갖는다는 사실은 이런 배제가 청소년들에게만 향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미 다른 권력관계(남성/여성, 상사/부하 직원 등)에서도 숱하게 경험하고 있다.

 

청소노동자와 판사의 임금이 같아진다면, 노동의 위계는 사라질까?

노동의 프랑스어 Travail는 속박과 고문을 의미하는 것처럼 노동은 힘든 게 분명한데, 왜 노동이 신성하고도 숭고하다고 추앙받고 있는지 생각해 볼 일이다. 이렇게 숭고하다는 칭송을 받으면서도 그 노동에 대한 대가를 제대로 보상받지 못하는 다양한 노동을 떠올려본다. 이반 일리치가 그림자노동이라고 이름 붙인 이 노동에는 가사, 돌봄 등 우리 사회를 존속 유지케 하면서도 임금이 지급되지 않는 모든 노동이 포함된다. 노동을 바라보는 사회의 시선이 이미 이렇게 갈팡질팡하고 있으니 청소년들이 노동에 대해 부정적으로 인식하게 되는 것은 당연하다. 게다가 자신들은 ‘노동자’가 되지 않겠지만, 또 노동은 사회를 이끄는 힘이라고 여기는 모순을 안고 사는 것이다

청소년기에 들었던 말들과 우리가 청소년들에게 하는 말들에는 청소년을 대하는 사회의 기본태도와 노동에 대한 이런 분열적인 시선들이 고스란히 들어있다. 특히 진보를 말하는 사람들마저 자녀와의 관계에서 ‘네가 정 운동을 하고 싶으면 지금은 공부하고 대학 가서 해’라고 하더라는 얘기는 너무 많이 들어서 지겨울 지경이다. 일과 노동을 대하는 우리의 인식이 분열적인 것은 우선 잘게 쪼개어 분절된 노동구조 때문일 것이고, 또 하나는 우리가 고민하는 노동이 정규직/이성애자/남성/비장애인의 임금노동을 중심으로 구성되기 때문일 것이다.

비정규직 노동자의 임금과 전문직 노동자의 임금이 같아져 보상의 평등이 실현된다고 해서, 최저임금을 1만 원으로 올려 분배의 평등을 위한 실마리를 마련한다고 해서 이런 분열적인 인식에 기댄 노동의 위계를 없애는 일은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그 일을 하기 위해 받아야 하는 교육비의 부담은 누가 할 것인지, 노동을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에 대한 사회적 합의는 또 어떻게 일구어갈 것인지, 각자 하고 싶은 일을 하고, 모욕당하지 않으면서 살기 위한 사회적 안전망을 어떻게 갖출 것인지에 대한 수많은 논의도 함께 진행되어야 할 것이다.

이렇게 적어놓고 보면 청소년노동 인권교육에서 나눌 이야기는 무엇이어야 할지 여전히 풀리지 않는 숙제처럼 고스란히 남는다. 그래서 사회가 지정해 둔 자리를 벗어나려는 노력, 내가 누리는 소소해 보이지만 끊을 수 없는 권력의 힘들을 어떻게 놓을 것인지 같이 머리 맞대고 찾아보는 일에 더 큰 관심을 두자고 초대하는 일을 멈추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

 

<이 글은 인권 오름 제442호(2015.6.11)에 실린 글을 수정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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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5/24 05:14 2016/05/24 05:14

[세월호와 청소년⑤] 청소년도 '동료 시민'으로 대하는 사회 꿈꾸며

 

#0. 

가족처럼 함께 일할 분을 찾는다는 흔한 구인광고, 

이모팬, 삼촌팬을 자처하는 아이돌 팬덤, 

영화 국제시장, 드라마 응답하라 1988, 

'또 하나의 가족'을 내세우는 삼성, 

경기도 마을 돌봄공동체의 브랜드명인 '온마을 엄마품'… 

한국 사회가 얼마나 가족의 가치에 많은 의미를 부여하는지를 확인할 수 있는 몇 가지 사례들이다. 여기저기 다 가족이고 누구나 엄마, 아빠, 이모, 삼촌, 언니, 오빠, 형, 누나가 된다. 우리 가족이라는 마음으로 타인을 대하는 일이 뭐 그렇게 문제냐고 물을 수도 있다. 

그러나 남성-여성의 젠더 위계, 어른-아이의 나이 위계를 바탕으로 이루어진 가족은 불평등한 조직이다. 가족은 이런 권력 관계와 역할을 중시하면서 가족 구성원 개인을 지워버린다. 개인이 지워진다는 것은 그 가족이라는 조직 안에서는 하나하나의 개인을 온전히 존중 받아 마땅한 인간으로 대우하지 않고 주어진 역할을 수행하라는 요구만 남는다는 말이다. 이런 권력의 위계질서가 가족이라는 조직을 유지하는 뿌리가 되고 있다. 

#1.

딸을 출산한 후, 이 사회는 나에게 엄마/아내로서 역할을 잘 해야 한다고 잔소리하는 시어머니 같았다. 어디를 가도 가족이라도 되는 듯 거침없이 편하게 나를 대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딸과 함께 외출이라도 하는 날엔 특히 그랬다. '아유~ 애기 옷이 너무 얇네, 발목이 다 나왔네, 모자를 씌워야지, 안 그러면 감기 걸리는데'를 시작으로, 괜찮다고 아무리 만류해도 기어코 사탕을 손에 쥐어주는 사람, 애가 귀엽다며 쓰다듬는 사람, 덥석 아기나 나를 붙잡고 여기 앉으라고 끌어 대는 사람……. 물론 그 이들이 베풀었던 것은 호의였을 테다.

2013년 11월에 진행되었던 밀양희망버스에 나는 아이를 데리고 함께 탔다. 거기서도 숱한 '가족 같은' 사람들을 만났다. 딸이 걷고 뛰며 행렬에 함께 있으면 애기가 힘들겠다거나, 기특하다며 말을 건네고, 내 등에서 딸이 잠들면 아이를 태울 차를 마련해주려던 이들이 많았다. 고마운 마음이 들지 않았던 건 아니지만 딸이 힘들건, 지치건, 잠이 들건 간에 '아, 그냥 내버려 두지…….' 하는 푸념이 절로 나왔다. 세 살 된 여자 어린이와 동행하는, 나 같은 희망버스 탑승자는 연대하러 간 시민이 아니라 그저 엄마로만 여겨지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이들이 베풀었던 것도 역시 호의였을 것이다.

그 많은 '가족 같은'(?) 사람들을 만나면서 나에게 베풀어준 그들의 호의는 내가 바랐던 것이기보다는 그 이들이 해주고 싶었던 것일 테다. 자기 마음 편하기 위해 도와주고 싶거나 챙겨주고 싶은 마음, 아니면 누구 아이든 우리가 함께 보호해야 한다는 마음 말이다. 그저 내가 도움을 요청할 어느 때에 성심껏 대안을 고민해주는 정도의 응답이면 나는 괜찮았을 것이었다. 호의를 베풀고자 하는 대상이 정말 어떤 필요가 있을지 헤아리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 일인가 궁금했다. 넘치는 관심은 접어두고, 도움을 청하는 신호를 놓치지 않고 응답하는 사회는 정말 어려운 걸까?

2013년 12월부터 한동안 '안녕들 하십니까' 벽보가 큰 화제를 이루던 어느 날 조그만 벽보가 고대에 붙었다.

"너희들에게만은 인간을 가장 귀하게 여기는 세상을 물려주고 싶었는데……. 너를 키우면서 부끄럽게도 성적과 돈에 굴종하는 법을 가르쳤구나. 미안하다. 이제 너의 목소리에 박수를 보낸다 ― 82학번 너희들의 엄마가"

인터넷과 SNS에서는 온통 감동적인 응답이라는 반응이었지만, 나는 묻고 싶었다. 왜 당신이 고려대 학생들의 엄마인지, 어떤 세상이든 그것을 왜 당신이 물려주었어야 했는지 말이다. 이런 나의 반응에 몇몇 친구들은 엄마로 산다는 일이 나에게 큰 트라우마가 된 것 같다며 농담 섞인 걱정을 해 줄 정도다.

#2.

사실 나는 '세월호 운동'이라는 것에 대해 뭔가를 말할 입장이 아니라고 생각해 왔다. 세월호 참사가 발생하고 지금까지 냉정함과 이성적인 태도를 잃지 않으려고 애를 써오고 있고, 인권교육센터 '들'에서 '재난 참사를 대하는 시민의 자세'라는 문서를 토론을 통해 함께 만드는 와중에도 끝없이 세월호 참사를 슬퍼하는 것과 분노하는 것은 다른 일이라는 생각을 하며 거리감을 유지하려고 노력했던 것 같다. 게다가 세월호 운동에 함께 한 일이 있다면 아주 가끔 집회나 광화문 농성장에 배꼼 다녀오고, '존엄과 안전에 관한 416 인권선언 2차 전체회의'에 참여했던 것 정도일 뿐이니 이런 내가 뭔가 말을 보탠다는 것은 사실 염치 없는 일이다.

참사에 대한 슬픔과 분노가 어떻게 다르겠냐고 말할 사람이 많겠지만, 그 둘을 구분하는 일은 나에게 중요한 문제였다. 2014년 7월 15일로 기억되는 국회 앞 세월호 미사에 참여했을 때, 유가족 한 분이 "내 몸 같은 자식을 잃은, 팔다리가 잘려나간 듯이 자식을 잃은 나는 아무것도 두려울 게 없습니다. 뭐가 두렵겠어요?"라며 울부짖는 소리를 들은 뒤론 다른 어떤 얘기들도 들리지 않았다.

'자식 잃은 부모'의 슬픔을 나는 도저히 헤아릴 수 없을 테지만, 이 슬픔을 '부모들'의 슬픔으로만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친구들의 걱정대로 '엄마로서의 트라우마' 때문일 수도 있지만, 그 유가족의 절규는 이 사회에서 벌어지는 일에 대한 '부모/어른으로서의 책임감'을 호출하는 것 같았다. 그분의 절규만이 아니라 세월호 참사 이후 내내 인터넷에 오르는 기사나 SNS의 글들이 대부분 그랬다. 세월호 참사 이전에는 이런 어이없는 일이 없었던 것처럼 슬퍼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슬프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같은 마음으로 슬퍼할 수 없다는 판단을 했다. 고집스럽게 냉정함을 유지하려고 했고 나를 아는 한 지인은 이런 냉정함을 어색해 하며 말했다. '네가 따뜻한 사람이라는 것을 애써 부정하지 마.'

#3.

참사에 대한 슬픔과 분노를 분리해서 생각하겠다는 내 마음은 세월호 운동에서 참사의 당사자를 청소년으로 설정하고, 그 '지켜주지 못한 아이들의 죽음에 대한 미안함'과 '자식 잃은 부모의 슬픔'이 부각되고 있는 상황을 우려하는 이유와 맞닿아 있다.

세월호 참사 당사자의 대다수를 청소년이 차지하고 있기는 하지만, 476명의 탑승자 가운데에는 비청소년 탑승객, 승무원, 교사 등 다양한 사람들이 세월호 안에 타고 있었고, 304명의 실종/사망자 말고도 170여명의 생존자들이 있다. 게다가 '나도 세월호의 승객'이라며 참사를 함께 경험한 많은 시민들이 스스로를 당사자로 인식하고 있다는 것도 분명한 사실이다.

이런 상황에서 청소년을 세월호 참사의 당사자로 부르는 일은 최근 몇 년 동안 끊임없이 보도되고 있는 여러 아동학대로 인한 어린이 청소년들의 죽음을 '괴물 같은 나쁜 부모' 탓으로 돌리며 공분하는 것과도 닮아 있다. 계모/계부가 문제라거나, 가르치려고(훈육을 위해) 때릴 수는 있지만, 죽이는 것은 도가 지나치다거나, 어떻게 부모가 그럴 수 있느냐는 논란, 그래서 부모들을 교육해야 한다는 논의들은 아동 학대가 그저 약자인 어린이 청소년에 대한 폭력의 문제라서 그 가해자는 친부모, 가족, 형제자매일 가능성이 더 높다는 사실을 가려버린다. 그리고 그런 폭력으로 희생된 어린이 청소년들의 죽음 그 자체에 대한 애도도 쉽게 건너뛰거나 잊어버린다. 

비슷하게 가족 동반자살 사건들의 경우도 실상은 자녀를 '살해'하고 부모가 자살하는 사건이기 쉬운데, 이때 자녀인 어린이 청소년들은 자신의 삶과 죽음에 대한 결정권마저 없는 존재, 함께 살아가기 위한 방법을 같이 논의할 수 없는 무력한 존재, 온전한 가족구성원은 아닌 존재가 된다. 그러니까 세월호 참사에 대한 '사회적 부모들의 슬픔'은 세월호 참사 이후의 사회를 고민하면서도 청소년들을 하나의 온전한 시민으로 대하지 못하게 할 위험을 여전히 안고 있다. 세월호 참사를 애도하기 위한 청소년들의 행동은 학교에서 여전히 저지당하고 있으며, 청소년 생존자들도 자신들의 말을 할 기회를 이제야 조금씩 찾아가는 중이다.

#4.

세월호 참사에 대한 이런 고민은 내 일상 구석구석과 계속 이어지고 있다. 부모가 자녀를 키우는 게 아니라 자녀가 부모를 키워주는 것이라는 사실을 새로 배우고 있기는 하지만, 제대로 책임지지 못할 존재를 만들었다는 자괴감이 늘 나를 뒤흔든다. 자발적으로(?) 만든 '가족'이었지만, 그 안에서 나에게 부여되는 역할에 대한 억울함이 끝없이 치고 올라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찌 되었든 같이 살아야 하니까, 어린이와 함께 가족을 이루고 사는 사람으로서 돌봄, 육아의 문제를 해결하는 일은 정말 그날그날의 숙제 같기만 하다.

그런 육아의 고민에 대한 명쾌한 해답이라는 듯이 최근 몇 년 동안 회자되고 있는 말이 있으니 바로 "한 아이를 키우려면 온 마을이 필요하다."는 아프리카 속담이다. 예전에는 대가족을 이루고 살아서 자연스레 육아의 부담을 온 가족이 나누었지만, 단일 가족이 대부분인 요즘 부모에게만 몰리는 육아 부담을 지역 공동체가 함께 해결하자는 취지란다. 그래서 마을 돌봄이 중요하고, 내 자녀만 보이는 좁은 시야를 넘어 우리 (동네) 아이들 모두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함께 돌보자는 것이다.

"육아라는 절실하고 시급한 필요를 해결하기 위해 이웃과 만나고 마을을 알게 되고, 그러다 보면 그렇게 형성된 이웃 관계망이 다시 내 아이가 살아갈 삶의 공간이 된다. '내 새끼'에서 출발했지만, '우리 새끼'로 나아가고, '동네 아이들'로 확장된다. 물론 그 속에서 내 아이도 잘 자랄 것이다. 이렇듯 마을에서 함께 돌보는 공동육아는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면서 이웃과 마을을 재구성함으로써, 종국에는 "누구와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답을 찾아가게 한다." - <'내 새끼'가 '우리 새끼'로!>, 유창복 서울시 마을공동체 종합지원센터장, 2015. 05. 01, 프레시안

마을 공동체를 꾸리자고 아무리 제안을 해도 어느 부모는 그 공동체에 함께 하지 않겠노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러면 이 좋은 걸 왜 마다하느냐고 타박할 수는 있어도 억지로 그 이들을 공동체의 구성원이 되도록 강요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렇다면 자녀들의 선택권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공동체의 구성원이 온 마을 사람들이라고 하지만, 그 마을 각 가정의 자녀들에게는 선택권이 없고, 자녀는 부모의 뜻에 따라 묶음으로 움직인다고 쉽게 생각해 버린다. 그렇게 그 마을의 자녀들은 본인들은 동의하지 않은 공동체의 구성원이 되어 버리고 동시에 본인들의 의사와 상관없이 수 없이 많은 엄마 아빠들이 생긴다. 아버지, 어머니뻘/ 할아버지뻘/ 언니 오빠뻘 된다며 처음 만나는 자리에서 호칭을 정리하는 사회에서 가족 같은 연장자 앞에서 자유롭게 정당한 요구를 하는 일 동등한 관계를 맺는 일은 무척 어려운 일이다. 어디를 가도 엄마의 눈으로 지켜보는 사람들 사이에서 우리들 모두는 온전한 개인으로 존중받고 살 수 있을까.

가족주의의 시선을 담고 있는 이런 '말 잘 듣는 아이'에 대한 '운동사회(?)'의 판타지도 있을 뿐만 아니라 다양하게 변주되어 드러난다. 게다가 이게 왜 문제인지 아무도 고민하지 않아서 더욱 문제적이다. 강정, 밀양을 위시한 다양한 싸움의 현장, 광화문 세월호 농성장,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 반대 집회에 찾아가는 청소년들을 보면서 '대견하고 기특하다'고 생각하는 마음속을, 아니 고민할 시간도 없이 그냥 툭 튀어나온 호의어린 칭찬의 말 한마디를 이제는 고민해보자. 

일상적으로는 이 사회를 함께 살아가는 주체, 동료시민으로 청소년을 대하지 않으면서 필요한 때에만 '너희들의 의견도 중요하지, 한마디 해줄래?' 하며 말을 걸고는 필요한 말, 듣고 싶은 말만 골라내는 것은 제대로 듣는 일이라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세월호 기억교실 문제에 대한 논란 속에서 청소년의 입장이 없는 게 문제라는 말도 틀린 건 아니지만 흔쾌히 맞장구치기 어렵기도 하다.

온 사회, 온 마을이 다 가족이 되는 사회를 넘어서는 것을 세월호 이후의 새로운 사회를 구성하려는 노력으로서의 '세월호 운동'의 지향으로 고민하자는 신호를 보내고 싶었다. 그래서 염치불구하고 글을 써 보낸다. 어린이 청소년들에게 '말 잘 듣는 아이'가 되라고 다그치는 가족 같은 사회 말고, 우리가 만들어야 할 사회에 대해 모든 구성원이 평등하게 논의하고 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 가는 여정은 더 힘들 테지만 말이다. 덧붙여 세월호 참사의 당사자는 청소년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라는 사실을 기억하고 일상의 삶과 관계에 대해 던지는 질문들을 함께 고민하자는 요청도 함께.

 

오마이뉴스 2016.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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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5/24 05:11 2016/05/24 05:11

그림책의 힘…… 즐거움과 숙연함을 오가며

도봉여성센터 아동인권 교육 중에서

 

“보육 돌봄 전문가”라는 낯선 이름, 그러나 ‘돌봄노동을 제공하는 영역’에 관여하게 될 분들일 거라는 추측. 지난 6월 23일 도봉여성센터에서 진행된 ‘아동학대 예방과 아동인권’ 교육은 경력단절여성들의 재취업프로그램의 하나로 개설된 ‘내일은 보육 돌봄 전문가 양성과정’ 중의 하루 일정이었습니다. 교육과정 시간표를 보니 주로 어린이집, 지역 아동센터 등을 운영할 분들을 위한 과정인 듯했습니다. 물론, 왜 하필 경력단절여성들에게 ‘돌봄노동’으로 재기하시라는 프로그램을 구성했을까 하는 질문이 떠오르며 안타깝기도 했습니다만…… 
총 4시간 교육의 전반부는 아동인권 전반에 대한 질문들을 담아 PPT 강연을, 후반부는 ‘나도 한때 아이였다-아이들과 함께 살기 위한 책 읽기’ 정도의 주제로 모둠 활동을 하게 되었답니다. 오늘 꼬물꼬물에서는 참가자들과 그림책을 읽으며 나눈 이야기들을 소개합니다.

우선 다룰 주제는 “애 취급/ 자기 결정권의 주체 / 보호주의 / 폭력”이었습니다. 애초 교육을 준비하는 회의에서는 이 네 가지 주제에 대한 사례를 구성해보고, 각 모둠에 당신들의 어린 시절, 비슷한 경험을 떠올리며 그런 행동을 했던 어른들(보호자인 부모나 친척, 교사 등)에게 편지를 쓰도록 해보자는 것이었죠. 그러나 구성한 사례가 무척 단편적이고, 풍부한 얘기가 나오기 어려울 듯하여 동화책을 같이 읽고 모둠 활동을 하는 걸로 급선회. <검피 아저씨의 뱃놀이>, <지각대장 존>, <고함쟁이 엄마>. 이렇게 세 권을 골랐습니다. 함께 교육을 간 묘랑이 ‘어린이 책 공룡 트림’에서 미리 읽어보았다며 강력하게 추천했고 전 덥석 물었습니다.

네 모둠에 세 권을 고르시라고 했습니다. <검피 아저씨의 뱃놀이>를 두 모둠에서 읽고 <지각대장 존>, <고함쟁이 엄마>를 나머지 모둠에서 읽기로 했습니다. 모둠별로 책을 읽고 느낌을 나눈 후, 자유롭게 전지에 표현해보시라는 주문을 했습니다. 두런두런 책을 다 읽은 참가자들은 앞에 놓인 전지를 어찌할 줄 몰랐습니다. 뭔가 멋진 걸 만들어야만 한다는 강박관념일 수도 있을 테고, 자신들의 이야기를 표현해 본지 너무 오래되었기 때문일 수도 있겠지만요.

어쨌든 어색하게 주저주저하던 참가자들이 뭔가 만들어냈습니다. 그렇게 약간은 부담스러웠을 모둠 작업이 끝나고 다 함께 나누는 시간. 검피 아저씨를 먼저 만나보기로 했어요. 책을 읽은 모둠 한 곳에서 책을 읽어주시고, 모두 함께 볼 수 있게 동화책은 슬라이드 화면으로 띄어놓았습니다. 검피 아저씨의 배에 아이들과 온갖 동물들이 함께 올라타고 즐거운 놀이… 동화구연을 듣는 듯, 함께 그림책을 보는 동안 분위기가 들썩합니다. 검피 아저씨처럼 그렇게 아이들을 대할 수 있을까요? 또 아이들과 약속을 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는 건가요? 약속을 빙자한 규율과 통제에 대해서, 그리고 아이를 ‘어린 애 취급’하지 않고 온전한 존재로 대한다는 것에 대해서 두런두런 얘기를 나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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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으로, 고함쟁이 엄마를 보았습니다. 엄마가 고함을 치자 아기 펭귄의 몸이 이곳 저곳에 흩어져 버리고, 그것을 찾아가는 이야기를 읽는 동안 분위기는 처참할 지경으로 숙연했습니다. 30대 후반부터 50대 초반 정도까지의 스물대여섯 명의 참가자들이 아마도 숱하게 아이들에게 고함을 질렀을 테니 이해가 되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나 무거운 공기는 왜일까요? 참가자들은 ‘내가 지르는 고함에 아이들이 저런 마음을 느낄 거라는 생각을 못 해봤다.’거나 ‘반성한다.’는 말을 합니다. <고함쟁이 엄마>를 읽으면서 ‘폭력’에 대한 얘기들을 나누는 것, 아이와 가장 가까우면서도 ‘엄마’라는 이름으로 부리게 되는 권위에 대해 더 많은 얘기를 나누었어야 했을까요? ‘좋은 엄마’로 살아야 한다는 사회적 요구에 짓눌리는 참가자들을 위로하고 싶은 마음이 더 강했습니다.

마지막은 지각대장 존. 아이들을 키워오며 믿어주지 않았던 일들이 떠올랐다고 하는 참가자가 있었습니다만, 자세한 얘기를 나누지는 못했네요. 고함쟁이 엄마로 가라앉은 분위기는 다행스럽게 발랄해졌습니다. “존 페트릭 노먼 맥헤너시”라는 지각대장 존의 풀네임을 반복하는 선생님의 태도는 과연 존을 존중하는 것일까? 권위의 힘으로 누르는 것일까? 불리고 싶은 이름이 있다는 것-‘나를 이렇게 불러달라’ 하고 요구한다는 것-은 어쩌면 ‘당연/물론’의 세계에 파문을 일으키는 돌멩이 하나가 될지도 모릅니다.

참가자들이 읽어주는 동화책을 듣는 일은 참 행복했습니다. 서른 명가량의 어른들이 함께 책을 읽는 색다른 교육을 마치고 들었던 아쉬움도 있죠. 그림책의 장면들에 대한 새로운 상상력, 혹은 세밀한 공부가 필요할 것 같다는 생각. 아기 펭귄의 부리는 왜 산꼭대기로 갔는지, 존은 왜 점점 더 까만 새벽에 학교 가는지, 검피 아저씨는 왜 화내지 않는지…… 지각대장 존을 읽으며 ‘지각하면 안 되겠죠?’ 하는 말씀이 나오지 않아 다행이지만 ㅎㅎ

전체 줄거리를 잘 아는 것보다 그림책 한 장 한 장에 담긴 다양한 이야기들을 더 찾아보고 갔더라면 더 많은 질문을 던질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들었습니다. ‘와 이거 좋다~’ 하고 느끼는 것을 나누기 위해 진행자가 준비할 일은 참 많잖아요? 우리의 교육은 뭔가를 전하는 일이 아니라 참가자들이 익숙하게 알고 있는 모든 것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일이니 말이죠. 좀 더 가볍게 무게감 있는 질문을 던질 수 있는 그날을 향해~^^

 

원문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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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8/03 11:27 2014/08/03 11:27

청소년 노동인권교육, 청소년인권에 연대하는 것부터~!

- 2014.4.18 청소년 노동인권교육 고민나누기 워크숍

<워크숍 일정표>

10:00~

12:00

여는 강의: 2014 십대 '밑바닥노동'의파노라마와 노동인권교육의 응답

강사: 배경내(인권교육센터 들, 청소년노동인권네트워크)

12:00~

13:00

중식(식사)

13:00~

15:00

교육사례 발표 및 현황 교류 시연1) 청소년 노동법 교육 (민주노총 서울본부 노동법률지원센터)
시연2) 노동인권 감수성 교육 (두근두근 인권탐험대)

15:00~

17:00

Session별 토론

노동인권교육과 지역 청소년 노동인권활동 / 노동법교육 /

노동인권감수성을 키우기 위한 노동인권교육

이 글을 쓰기가 너무 힘이 들었다. 신문의 스케치 기사처럼 일정표 넣고서 몇 명 참여했고, 어떤 얘기들이 오갔는지, 어떤 평가들이 있었는지를 챙겨 써버릴 수도 있지만, 그러기 싫었기 때문이다. 하고 싶은 말이 머리 속에 무수하게 맴도는데도 뭔가 체계 없이 뒤죽박죽이라 끄적거린 글은 A4용지로 서너 페이지를 들락날락. 이 정체 모를 맥락상실이 무얼까 며칠 동안 컴퓨터를 붙들고 밤을 새기 직전 겨우 잠들 만큼 씨름을 해댔다.

 

그런데 오늘(5/20) 청소년노동인권네트워크 회의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 집에 거의 다 와가는데 뜬금없이 눈물이 터졌다. 어떤 사람이 내 옆에 서서 의자 손잡이를 잡고 있다가 내 우는 꼴을 보더니 슬그머니 자리를 피했다.

회의 중에 논의한 여러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청소년들의 심정, 그 억울한 모멸감에 너무 심하게 공감했기 때문일까.. 그들이 겪었을 모든 일상에서 그들을 곤경에 빠뜨린 못된 사람과 시스템에 화가 났다. ‘미안하고 부끄럽네.’ 하는 혼잣말이 나오려는데 소스라치게 놀랐다. 세월호로 인한 세상의 반응과 나의 혼잣말은 뭐가 다른가 하는 생각이 번쩍.

 

장래희망이 ‘청소년노동인권교육’이라고 떠들고 다니던 1년 전쯤의 마음은 이랬다. ‘나도 이제서야 노동자라는 정체성을 발견했다. 그동안 부당하다고 생각되는 모든 일에 대해서 노동자로서 요구하고 싸워도 되는 줄 몰랐다. 그냥 사회 생활하려는 힘없는 개인이 감당해야 할 일인 줄 알고 외면하곤 했다. 아직 공부만 하고 있는 그대들이 나 같은 시행착오를 하지 않도록 할거야. 아 이 얼마나 아름다운 장래희망인가.’

 

그런 마음을 품고 내달려 온지 1년이다. ‘이제는 나도 활동가라고 해도 되겠지?’ 하는 생각도 움찔거리곤 했지만. 나의 첫 마음도 지금 다시 보면 오류투성이다. 청소년들은 공부만 하고 있지 않았다. 이미 노동자이고, 이미 자기 권리를 주장하는 권리주체이다. 아동 청소년기를 거치지 않고 비청소년이 된 이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내가 청소년이었을 때도 숱하게 당해온 부당한 처사에 분노했음에도, ‘어른’ 행세를 하고 마는 이유는 무엇인가에 대해서 다시 고민한다. 청소년 노동인권과 청소년 인권을 옹호하기 위한 활동을 하고자 하는 비청소년 활동가로 살고 싶다는 안간힘.

 

워크숍 얘기를 써야 하는데 딴 소리만 하고 있는 것같지만 절대 그렇진 않다. 그날의 워크숍은 냉정하게 말하면 지금 한국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하는 청소년의 인권이 마주하고 있는 적나라한 현실 그 자체였으니까.

 

최근 (청소년)노동인권교육이라는 말은 사용하는 사람에 따라, 혹은 그 말을 받아들이는 사람에 따라 아주 다양한 스펙트럼을 갖는다. 노동3권으로 대표되는 노동법 상의 권리를 주장할 수 없는 노동자들의 비가시화된 권리문제를 제기하는 교육이기도 하고, 김대중-노무현 정권을 거치면서 과격한 귀족노동자들의 싸움으로 격하된 ‘노동’운동의 외연을 순화하고 싶은 의도를 담은 교육이기도 하며, 이러니 저러니 해도 법이 보장한 권리를 알고는 있어야 하지 않냐는 노동 관련법 조항 교육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세월호 참사가 벌어진 지 이틀, 장애인 송국현씨가 숨진 지 하루가 지난 4월 18일 민주노총 교육원에서 열렸던 <청소년 노동인권교육 고민나누기 워크숍-청소년 노동인권교육, 무엇을 어떻게 그리고 왜>는 애당초 청소년노동인권네트워크가 진행해온 청소년노동인권교육에 공감하는 주체들이 모여 점차 확대되어 가는 ‘청소년노동인권교육’에 대한 깊이 있는 고민을 나누고자 기획 추진되었지만 실행에 옮기는 과정에서 묘하게 규모는 커졌고 고민은 깊어지지 못했던 아쉬움이 있다.

 

청소년들에게 노동법을 알려주면 그들은 노동자로서의 권리를 스스로 찾을 수 있을까? 나는 (또 당신은) 노동법을 몰라서 그 숱한 마음과 몸의 고생을 고스란히 감내해가며 일을 해왔던가? 우리가 십대 밑바닥 노동이라고 부르는 청소년들의 노동현실을 마주할 때마다 나는 스스로에게 묻는다.

‘근로기준법? 우리 회사에서 그런 말은 씨도 안 먹히지.’ 하고 포기하는 노동자가 얼마나 많은가? 연차, 생리휴가, 상여금, 각종 수당을 챙겨 받고 13월의 용돈이라는 연말정산도 한다는 친구들을 바라보며 ‘그게 뭥미?’하는 표정을 지었던 적이 있다면 당신도 나처럼 노동관계법령들이 적용되지 못하는 영세한 사업체에서 비정규직 노동자로 일해본 적이 있는 거다.

내가 노동자라는 자각을 한 순간부터 노동3권, 노조중심의 운동이 아닌 ‘노동인권’에 관심을 두었다는 것은 내가 그만큼 불안정한 노동을 체험했다는 얘기다. 물론 일반노조가 있고 다종다양한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근로기준법 적용이 제외되는 작은 사업장-사장 말고 직원은 나 하나인 작은 사업장-에서 그런 모색을 하기는 정말 쉽지 않다는 걸 아는 사람은 다 안다.

여직원이기 때문에 전화는 당연히 내가 받았으며, 커피를 타고 사무실 책상을 걸레질하고 바닥을 쓸어야 했고, 늘 상냥해야 한다는 주문을 받았다. 비청소년이고 여성인 나도 숱한 모멸의 순간들을 버티며 노동하느라 욕쟁이가 될 지경이었는데 청소년들의 노동은 더더욱 고단하지 않을까.

 

시인 백무산은 자신의 시 <감수성>에서 “제길, 감수성은 고상한 것이 아니라 염치”라고 말했다.

학습노동자이거나 단기간 노동자이거나 십대 청소년들의 노동이 밑바닥에 머물기는 매한가지. (학교에서 하루의 대부분을 보내는 청소년들의 일과에 근로기준법을 적용해서 생각해 보시길. 무급으로 노동력을 착취하는 것도 모자라 휴가는 아예 없고, 매일 초과근무, 강제야근…ㅠㅜ)

장애인의 이동권 투쟁의 성과로 지하철역에 설치된 엘리베이터와 에스컬레이터가 모두의 편의를증진시켜 준 것처럼, 가장 소외되고 차별 받는 이들의 권리를 옹호하는 일은 결국 나의 권리를 옹호하는 일과 다르지 않다. 신자유주의가 주도하는 경쟁구도 속에서 나는 사회에서 안전하다고 믿는 것은 너무 순진한 발상이다. 언제 어떤 이유로 소수자로 낙인을 찍어 사회 밖에 내칠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 아닌가.

 

청소년과 함께 분노하고, 청소년이 노동을 비롯한 생활 모든 영역에서 자기 권리를 주장하고 획득할 힘을 갖도록 지원하는 청소년노동인권교육이 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까.. 고민나누기 워크숍은 어찌 보면 자기 할 바를 다 한 것도 같다. 나를 깊숙한 고민에 빠뜨렸으니 말이다.

 

<워크숍에 참가했던 일부 참가자들의 평가-김성호 노무사 정리>

  • 법률의 틀을 넘은 감수성교육이 지역 활동에 도움이 될 것 같다.
  • “노동부에 직접 신고하는 경험도 필요하다”↔“청소년이 권리침해에 대해 말이라도 할 수 있을까?” 등에 대한 논의가 논쟁이 치열했다.
  • 청소년들이 노동법 교육을 듣고 나면 “나와는 상관 없는 것”이라는 느낌이 들 것 같다. 법망으로부터의 소외감
  • 노동법 교육도 감수성의 영역으로 풀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면 좋겠다.
  • 법으로 풀 수 없는 상황에 대해 “함께 문제를 풀 수 있는 사람이 주변에 있다”라는 메시지가 중요하다.
  • “최저임금 0000원”이 아니라 “생활에 어느 정도의 수입이 필요한가?”의 질문처럼 열린 질문이 필요하다.
  • 안정적인 소통을 위한 최소 2시간 이상의 교육이 필요한 것 같다.
  • 자신에게 발생하는 불이익을 인식하는 것이 출발인 것 같다. 그런 뒤에 저항을 조직할 수 있지 않을까?
  • 청소년 노동인권교육을 준비하고 있는 정도에 따라 분리 운영하는 것도 필요해 보였다.
  • 예절이나 인성교육을 하고 있는 강사들이 인권교육을 하고 있는 현실이 우려스럽다. 교육활동가 준비가 필요하다.
  • 지역, 단체 등에서 다양하게 청소년 노동인권교육을 준비하고 있다. 다양한 만큼 내용과 실천 방식이 다양하게 쏟아지고 있다. 이 흐름을 묶어내는 틀과 내용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
  • 청소년노동인권교육에 대한 관심이 매우 뜨겁다.
  • 배경내의 여는 강의에 깊이 공감했다.
  • 노동법과 노동감수성 융합된 교안이 필요한 것도 같다.
  • 일회성 교육을 위한 강사단 양성이 아니라 인권활동가로서 활동할 수 있는 풀이 있어야 할 것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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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8/03 11:23 2014/08/03 11:23

모처럼 남편이 이틀을 연달아 쉬었다. 오른쪽 아래 맨 끝 어금니에 염증이 생겨 치과 치료를 받아야 하는데 일용직이라는 직업의 특성상 반차를 쓰거나 조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오늘은 어린이집 하원한 딸과 이른 저녁을 먹고 집에서 좀 떨어져 있는 생협 매장에서 부추, 오이, 무와 각종 찬거리 장을 보고 들어왔다.

 

초저녁에 엄마 아빠와 같이 있는데다가 저녁 먹고 잠시 마실도 다녀오자 하니 우리 딸 완전 신이 났다. 그 바람에 말도 참 잘 듣는다. 먹으라는 대로 밥도 잘 먹으며 '맛있어요.'를 연발해 주시고, <로보카 폴리>는 두 개만 보자니까 세 개 보겠다며 협상을 제시한다. 목욕하자면 목욕하고, 이제 자야지 하니까 밤 10시도 되기 전에 저 좋아하는 이불을 들고 순순히 안방에 걸어 들어가는 거다.

 

딸을 데리고 방에 들어간 남편이 아이 재우면서 자기도 잘 테니, 이제 나는 장 본 것들을 처치해야 한다. 김치라곤 묵은지만 남은 살림살이라 신선한 부추 오이 김치와 무생채, 무나물 만들기가 오늘의 일거리다. 결혼생활 54개월, 4년 살림 경력이라 그 일도 그리 오래 걸리진 않는다. 다행히 시이모님이 고춧가루 양념장을 만들어주신 것도 냉장고에 저장되어 있으니 오늘은 정말 횡재한 날이다.

 

잠시 고민을 한다. 최고 인기를 구가하는 <굿닥터>를 IPTV로 시청해 볼까 했지만, 마감이 다가오는 원고가 두 편 있는 게 걱정되기도 한다. 원고료를 따질 급이 안 되는 처지인지라 그나마 받는 게 어디냐 생각하다가 문득 아는 청년이 며칠 전에 했던 말이 떠오른다. “사람들은 저를 무급으로만 쓰고 싶어 해요.” 음…. 사람들이 내 글에 원고지 한 장당 몇만 원쯤 줄 날이 언제가 될까 하는 생각이 흘러간다. 어쨌든 나는 신용 위주 자본주의 사회의 구성원이므로 글을 쓰기로 한다. 원고 하나 마칠 즈음에 시계를 보니 새벽 한 시가 조금 넘었다. 아마도 나는 이 원고를 마친 후 아까 건너뛴 <굿닥터> 몇 편 보고 잠을 잘 것이다.

 

 

아마도 결혼하고 애 엄마가 되고부터 혼자만의 시간 또는 동굴, 이런 것을 갈망하는 사람이 되었다. 전에는 딱히 갈망하지 않아도 누릴 수 있었는데 말이다.

 

동굴이라는 단어가 남자들의 어떤 특성을 말하는 단어가 되어버렸다며 '여자가 웬 동굴?'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하여튼 내게는 동굴이 필요하다. 동굴의 절대조건은 두가지다. 혼자만의 시간을 보낼 것, 어떤 것에도 구애받지 않고 내가 하고 싶은 것을 결정하고, 할 수 있을 것. 이런 절대적 자유 시간이 내게 필요한 것이다. 


결혼 초에는 남편과 가사 분담을 하자고 요구하기도 했고 한동안 잘 지켜 오기도 했지만, 임신과 출산 이후에 남편에게 애 좀 챙기라는 것 말고는 집안일을 요구하는 일은 거의 없다. 간혹 너무 설거지하기 싫은 날 설거지를 해 달라거나, '이런 거, 저런 게 안 되네요.' 하고 당신의 지혜가 필요하다는 신호를 보내는 일 말고는 거의 그렇다. 그 이유는 오로지 하나. 나의 동굴을 지키기 위한 것이다. 


낮의 활동이야 남편에게 아쉬운 소리 안 해도 된다. 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내면 이른 저녁 시간까지가 내 시간이니 혼자 보고 싶던 영화를 보기도 하고, 때론 동네 친구들 만나 얘기를 나누기도 한다. 요즘은 자전거를 끌고 가까운 대학교 교정에서 커피 한잔 사 들고 책을 읽는다. 전에는 여기저기 숱하게 많은 커피집 중 하나를 골라 '죽순이' 노릇을 하며 책을 읽곤 했었다. 그렇다고 해서 늘 이렇게 유한마담 같은 일정만 있는 건 아니다. 가끔은 은행이나 관공서 일도 처리하고, 집 안 청소도 하고, 세탁기 한 통 차기를 기다리며 미뤄두었던 빨래도 돌린다. 

 

육아휴직(아이에게 엄마가 필요한 시기이니 꼭 해야만 한다고 나름 치열하게 작전을 짜서 얻어낸 사연 많은 사건)을 하기 전에는 정말 숨이 막히는 것 같았다. 집-어린이집-회사-어린이집-집으로 이어지는 단순한 생활. 싫어하는 지하철을 타고 다녀야 정해진 약속 시각을 지킬 수 있었던 숨이 가쁜 하루하루가 지긋지긋했다. 물론 이런 일상을 잘 넘기며 살아내기 위해 간간이 자투리 시간이나 틈새를 활용해서 막힌 숨통을 틔우기는 했지만. 


내게 나름의 장래희망이란 게 생긴 후로는 교육이나 참여해야 할 모임이 자주 생기고 있다. 안 그래도 술과 사람을 무척 좋아하는 나는 사람들 만나 수다 떨고 연극과 콘서트도 봐야 하는, 분주하게 다녀야 살아있음을 확인하는 캐릭터이다. 그래서 가끔은 내게 그런 시간이 필요하니 당신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남편에게 단단히 다짐을 놓아왔는데 그 횟수가 좀 더 늘어나 버린 것이다. 
남편의 퇴근 시간이 늦은 편이라 그런 모임이 있는 날, 딸을 어린이집에서 데려오고 밥을 챙겨줄 조력은 아이 돌보미 서비스를 이용하는 중이다. 시어머니나 친정엄마보다 속이 편하다는 것이 가장 큰 장점이다. 처음 신청하는 것이 번거롭고 매번 돌보미 선생님들의 일정을 조절하느라(이 조율까지 내가 하는 건 아니지만,) 귀찮기도 하지만, 아마도 이 서비스가 없었다면 늦은 나이에 찾은 나의 장래 희망도 서럽게 포기했을 것이다.

 

낮은 낮대로 바쁘고, 밤은 밤대로 분주한 생활을 하다 보니 '이러다 과로로 쓰러지겠네.' 싶어 때론 슬쩍 겁이 날 때도 있다. 고작 육아 휴직 4개월 차인 내가 혹시 과로사? 이제 애가 32개월이고, 우리 부부는 결혼생활 54개월을 맞는 중이고, 아직 내 인생의 반도 다 못 살았는데, 혹여 만일의 경우 내게 들이닥칠 수도 있는 내 과로사의 중대한 요인이 한 가정의 살림살이를 맡아 꾸려 가는 안주인인, 주부라는 정체성 때문이라면......나는 주부, 안 하고 싶다. 

 


글쓴이 :  옛날 같으면 손녀딸 볼 나이에 낳은 딸이랑 애증의 관계를 쌓고 있던 중, 청소년 노동인권교육 활동가라는 장래희망에 부풀어 좌충우돌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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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4/25 12:57 2014/04/25 12:57

아버지에게 ‘이놈의 가시나’라는 말을 한 번도 안 듣고 자랐다고 말하던 분의 얘기를 읽다가, 어떤 말을 듣고 사는가에 따라 우리의 자존감은 크게 달라질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 머문다. 예를 들어 ‘인건비 절감’이라는 말은 저임금과 살인적인 노동강도로 노동을 착취하겠다는 자본의 의지라고 읽혀야 마땅하지만, 많은 이에게 참으로 합리적이고 매력적인 말로 이해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누구의 언어로 말을 하고 글을 쓰고 있는 것인가?

 

   

▲ 밀양구술프로젝트 지음, 

<밀양을 살다>, 오월의봄, 2014

온통 신문과 방송에서 ‘국가 경쟁력 강화’니, ‘깨끗하고 안전한 원자력’이니, ‘나라를 먹여 살리는 삼성’이니 하는 말을 떠들고 있는 까닭에, 이 ‘말’들에 대해 의구심을 갖지 않고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이가 ​많은 것도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일인지도 모르겠다고 생각이 흐른다. 그만큼 언어의 힘이 세다. 아마도 그래서, 그 강한 말의 힘에 대항이라도 하겠다는 듯이, 밀양에 대한 ‘편파적인 기록’이라는 이 책에 끌렸다.

 

밀양 할매들의 싸움을 님비 현상쯤으로 격하시키고, 보상금이나 더 따내려고 억지나 부리는 이들로 여겨 비난하며, 희망버스 참가자들을 불순한 외부세력으로 몰아세우기만 한 언론들은 그들에게 한 번도 왜 이렇게 싸우는지, 이 싸움이 도대체 뭔지 묻지 않았다. 아무도 묻지 않은 질문을 하고, 한 번도 해보지 못하고, 누구도 듣지 않았던 대답을 정성껏 듣고 기록한 <밀양을 살다>.

 

다양한 필자들이 모인 밀양구술프로젝트가 만난 열일곱 명 가운데 학교를 제대로 마치지 못한 이가 대부분이지만, 10년 못 되게 한전과 전쟁을 치러오며 이들의 몸이 저절로 알아챈 것은 공부 좀 했노라는 지식인들에 꿀리지 않는다. 송전탑 싸움은 ‘힘 있는 사람들과 힘 없는 사람들의 전쟁’이며, 백성을 보살펴야 할 나라님이 우리를 죽으라고 내모는 일이라는 것, 그리고 밀양의 이 싸움은 밀양만의 일이 아니라, ‘전국의 뜻있는 시민들과 같이 하는 싸움’이 되고 말리라는 것, 탈핵과 연대라는, 국가의 폭력이라는 평생 써보지도 않았을 말을 몸으로 배운 이들. 말의 힘이 센 것처럼 몸으로 깨달은 감각들도 쉬 잊히지는 않는다.

 

인터넷과 책 안에 갇혀 흘러넘치는 지식이 아니라, 산을 오르고, 경찰 벽에 부딪히며 탈핵, 연대, 생명의 가치들을 몸으로 터득한 그들은 ‘세상은 울력(여러 사람이 힘을 합하여 일함, 또는 그런 힘)으로 사는’ 거라고 한다. 그저 이 산과 이 땅이 아주 고맙고, 지금, 여기 농성 움막에 함께 있는 이들이 무척 소중하다고 한다.

 

 

‘여성’으로 사는 것만으로도 힘들었을 할매들의 이야기

 

시부모만 생각하고 시댁 귀신이 돼야 한다는 말을 귀에 박히도록 듣고 자라, 정말 그렇게 살아온 이, 청와대 드나드는 이들만 신사인 줄 알다가 땅 부치고 사는 농부가 진짜 신사였음을 깨달았으며, 자연과 생명의 경이로움에 감탄하고 고마워하던 이, 당신 살아온 삶은 기막혀도 그저 자식들이 쉬어갈 집이나마 남겼다고 뿌듯해 하던 이들. 그들이 ‘내가 죽으면 이 싸움이 끝날까’ 하는 마음으로, 무서울 것 없다는 듯이 살며 싸우고 있는 땅, 밀양.

 

인터뷰에 응한 열 몇 명의 여성들 앞에 놓였던 엇비슷한 환경들이 내 앞에 떨어졌다면, 아마 꾸역꾸역 살기는 했으되, 늘 괴롭고 힘들었을 것만 같다. 이 책을 읽는 동안 그런 ‘여성’의 삶에 울컥거리고, 그걸 버티고 살아온 그들이 존경스럽다가도 너무 고분고분 착하게 살아온 그 사람들의 삶이, 반항도 없이 감내하며 죽자고 일만 해온 그 인생들이 무척 답답하고 안타까웠다.

 

나이 지긋한 할머니들이 대부분 그렇듯, 밀양의 그 어른들도 그랬다. 그렇게 사는 줄 알고 군말 않고 살아남은 그분들을 ‘생존자’라고 불러야 할 것 같았다. 식민지배와 전쟁, 그리고 고단한 가난의 시기를 버텨온 착해빠진 여성들이, 타령하듯 읊어대는 그 살아온 얘기는 하는 이도 울고, 듣는 이도 우는 구슬픈 얘기다.

 

참, 여자로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쉽지 않은 일인지, 이 나라에서 힘없는 자, ‘소수자/약자’의 이름으로 살아가는 일은 그래서 눈물겹다. 그런 삶의 끝자락에 송전탑 싸움이 들어앉았다. 그들은 하나둘 세워지는 송전탑 앞에서 경찰과 용역들에게 모욕당하며 나날이 무력감을 느낀다. 송전탑 때문에 악으로 버티며 붙들고 늘어진 한 줄기 희망이 다 사라질 처지에 처한 것이다.

 

송전탑 52기 중 하나라도 안 서면 선은 못 걸 테니, 마지막 한 개라도 꼭 막고 싶다고, 이 싸움도 언젠가는 끝나지 않겠느냐는 이들. 고향의 품, 자연의 품에서 느릿느릿 살고 싶던 이들은 이 전쟁통을 겪으며 이웃과 척지고 사는 게 가장 마음이 아픈 것 같았다. 그 마음 아픔은 한전의 보상을 받은 이들에 대한 분노와 미움으로 표현되고는 있지만, 그래도 사람이 할 도리를 지키고 같이 살던 마을인데, 나라와 한전이 마을의 정을 깨고 이간질하여, 이제는 더 그러지 못하리라는 안타까움이 더 크게 보였다. 더 잃을 것이 없는 이들에게, 심지어 자신들을 모욕하는 용역 청년들에게도 먹을 것을 해 먹이던 이들에게 도대체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건가.

 

한 사람 한 사람의 살아온 얘기가 쌓이고 쌓여 비슷한 언덕을 쌓고 그 언덕에 기대어 서로를 보듬으며 사는 그들의 단단한 모습을 보았으니, 밀양구술프로젝트 참가자들도 ‘우리는 이미 스스로 희망인 사람들을 만났다’고 확신했을 테다.

 

   
▲ ⓒ장영식

 

사람이 다 울력으로 삽니더…밀양의 손을 잡자

누구나 살면서 부끄러운 때가 있다. 기억에서 지우고 싶은 때, 아니 너무 고단하고 상처가 크기에 심지어 기억해내지 못하는 순간들이 있다. 그때의 그 어리숙하고 바보스러운 일들마저, 내 삶에 있어야 하는 이유가 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 그런 어눌한 부분들 덕분에 나 아닌 다른 이들을 바라볼 수 있는 마음을 키워가는지도 모르겠다. 또 어지간한 어려움은 버텨낼 수 있는 배짱도 생기는 것 같다.

 

나에게는 ‘세상을 바라보는 일’이 그랬다. 진짜 관심은 세상에 대한 애정이 아니라 나를 드러내고 싶은 욕망이었던 것은 아닌가 반성하기 전까지 그냥 상처만 받았다고 여기고 애써 세상을 바라보는 길을 피해 다녔다. 물론 끝까지 세상일을 모른 체하고 살아갈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살다가 용산참사를, ‘바라보게’ 되었다. 아, 사람이 들고 나도 저 세상은 그냥 거기 있구나, 다들 그렇게 ‘살아가는구나’ 싶었다. 그래서 다시 다른 이들에게 ‘안녕하신가?’ 하고 묻고 싶어지고, 그들이 옳게 존중받는지, 안전하고 평화로운지에 관심을 두게 되었다.

 

한동안 외면했던 거리만큼 더 절실하게 세상의 얘기를 듣기 위해 애를 쓰는데도 밀양 송전탑 얘기는 한참 뒤에야 자세하게 들을 수 있었다. 아마도 2012년, 옷가지를 벗어 던지고 경찰과 싸우는 할매들의 영상을 보면서, ‘아…’ 하고 한숨을 토하던 기억. 그 후로는 도저히 할매들이 나온다는 영상은 차마 볼 수 없었다. 그리고 몇 번의 대한문 문화제, 올겨울 희망버스에 함께 참여했다. 그저 하룻밤 묵고 매일 싸우는 할매들 곁을 잠시 지키다 가는 것인데도 대접이 융숭했다. 이런 환대를 받아도 되는 걸까 하는 송구스러움을 잊지 못하겠다.

 

흔히 우리는 나 하나 살아가기 위해 얼마나 많은 이들의 고마운 노동이 깃들어 있는지 생각하지 못하고 살기 마련이다. 몸으로 많은 것을 느리게 깨달아온 이 농부들은 ‘사람이 아무리 부자라도 남의 도움 없이는 못’ 산다는 걸 알고 있다. 나, 너, 우리 모두 같이 살자면 같이 도우며 살아가는 거라고, 당신들이 그렇게 살아왔다고 말한다. ‘사람이 다 울력으로 삽니더, 울력으로예.’

 

지난 22일, 세월호 참사로 전국에 슬퍼할 권리만 남은 것 같던 와중에, 정부는 주민들의 집단 반발이 있다면 송전탑 건설 관련 공청회를 안 해도 된다는 취지의 전기사업법 시행령 일부 개정령안을 심의, 의결했다. 더는 밀양을 외롭게 두지 말자. 전기도 많이 필요 없는 밀양 말고, 차라리 서울 한가운데 송전탑을 세우자.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20140424

​원문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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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4/25 11:29 2014/04/25 11:29

지난 2월 말, 송파구 석촌동 어느 단독주택의 반지하에 세 들어 살던 세 모녀가 세상을 떠났다는 기사가 났다. 사람들은 분노했지만 슬퍼하는 이는 별로 없어보였고, 일주일 뒤 대통령은 하나마나한 소리나 하고 있는데, 그 모양을 보자니 절로 술 생각이 났었다.

 

“대통령님, 이럴 때 가만있으면 중간은 간다는 말씀을 드려야 하는 거겠죠? 혹시 기초생활수급제도에 대한 원고를 당신이 쓴 게 아니라면 그 직무유기에 해당하는 공무원 양반의 거취에 대해서도 고민해보시는 게 좋겠어요” 하고 충언이라도 해야 하는 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어쨌든 대통령이 복지제도를 알리도록 하라는 지시를 하시자, 묘하게 언론들은 생활고로 목숨을 던지는 이들에 대한 보도에 열을 올리는 것 같다.

 

술 생각에 현진건의 <술 권하는 사회>라는 단편소설이 생각난다. 읽어보지는 못했지만, ‘일제강점기 시대 상황에 적응하지 못한 지식인의 고뇌’를 다룬 소설이며, “그 몹쓸 사회가, 왜 술을 권하는고?” 하는 마지막 문장이 유명하단다.

 

그래, 사회는 술을 권하고, 교회는 자신이 살아남기 위해 죄책감을 권하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아마도 이번 기고의 주제는 ‘신자유주의 시대에 너무 잘 적응하고 있으면서 섹슈얼한 주제에 대해서는 왜 고리타분하게 구는지 알 수 없는 그리스도교회에 대한 어느 불량신자의 고뇌’ 쯤이 될 테다.

 

 

‘기지촌 여성을 위해 오신 예수님’

 

최현숙 씨의 <천당허고 지옥이 그만큼 칭하가 날라나>라는 책에는 세 명의 80대 여성 노인의 삶이 담겨 있다. 비슷한 시대를 살아온 그들의 삶은 다른 듯 닮아 있었다.

 

첫 번째에 등장하는 김미숙 할머니. 그의 아들과 며느리는 목사다. 할머니는 체격이 크고 훤칠한 외모의 소유자인데, 책의 곳곳에서 그 연배의 다른 여성들과 달리 개방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분이라는 것이 잘 드러나 있다. 김미숙 할머니는 미군 부대 주변에서 기지촌 여성들에게 옷 장사로 생계를 꾸리다가 미군들에게 성매매까지 하게 되었고 그 일로 모은 돈을 종자로 삼아, 하나 있는 아들을 공부시켜 목사로 키운 것이다. 그런 아들이 팔순이 넘는 노모를 위해 새벽기도 때 “우리 어머니에게 회개의 은혜를 내려주십사” 하고 통성기도를 한다는 얘기가 나온다. 목사인 아들은 어머니의 삶의 역정(歷程)을 부정하고 상처를 입히고 말았다. 그에 대한 할머니의 술회를 그대로 옮긴다.

 

“언젠가 아들이 나 붙들고 조용히 말도 하더라구. 미군 부대 근처에서 몸 함부로 굴린 거랑 낙태 많이 한 거랑 그런 거를 회개를 하래는 거야. (……) 다른 회개래면 할 거 많아두, 난 그 회개는 안 나와. 나도 예수 믿지만, 난 그런 게 별루 죄라고 생각이 안 돼. 여자 혼자 벌어먹고 사느라 한 일인데, 내가 도둑질을 했어, 살인을 했어? 그리고 그렇게 임신된 거를 다 낳았어 봐. 그걸 누가 책임지고 키울 거야? 거기서도 미군이랑 살림하던 여자들은 많이들 낳았어. 남자 붙잡아 놓을래니까, 남자가 낳자 그러면 낳는 거지. . (……) 그렇게 혼혈아 낳아서 많이들 결국에는 미국으로 입양 보내고 하는 거지. 붙들고 키운 사람들 보면, 어린 것들이 손가락질당해서 학교도 못 가고 직장도 못 다니고, 그러드라고. 나 하나로 끝나면 될 걸 왜 애까지 낳아서 그 설움을 또 만드냐구? 그걸 회개하라니 말이 돼? (……) 그리고 저 목사 만든 돈이 어디서 나온 건데? 저 목사 된 게 내가 양키 물건 장사하고 미군이랑 살림해서 번 돈인데 그게 뭐가 잘못이냐고? 그 돈으로 공부해서 목사 된 지가 할 소리냐? 회개를 하려면 에미가 뼈가 빠지게 고생한 돈 갖다 쓰기만 한 거를 회개를 하던가 해야지. (……) 지네들 하나님은 어떤가 몰라도 내 하나님은 딱 나 같은 사람을 위해 있는 하느님이야. 창녀와 세리와 죄인들을 위해 오신 예수님.”

 

이 책을 읽다가, 내 부모와 얽힌 나의 삶까지 되짚어보았다. 나의 부모도 이혼했고, 각자 다른 이들을 만났다 헤어지는 일을 반복했고, 우리 세 남매는 각자 그런 무게감을 버티며, 그들의 삶을 가끔은 외면하고, 비난하고 또 동정하기도 하며 살아 왔으니…….

 

사람의 삶이란 게 그이의 의지대로만 풀려가는 건 아니란 것을 대부분 인정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김미숙 할머니도 어렵고 힘든 인생의 굴곡 가운데, 미군들과 살림 차리며 살던 그 시기에 자유로움을 만끽하기도 했고 자신이 살아있는 인간임을 느끼며 행복하게 살았었다는 얘기를 했다. 자신의 삶 중에 가장 인간으로서의 존재감을 느끼던 시절이지만, 기지촌 여성들에 대한 편견으로 쉽게 그때의 얘기를 꺼내지 못하던 할머니는 최현숙 작가와 세 번째 만남에서 그 시절 얘기를 꺼낸 것이다.

 

“나 같은 사람을 위해 있는 하느님”, “창녀와 세리와 죄인들을 위해 오신 예수님”이라고 말한 김미숙 할머니의 하느님과 나의 하느님이 퍽 닮아 있어 반갑기도 했다. 내 부모에 대한 비난과 무시의 마음을 품었던 어느 때의 나에 대해 깊은 반성도 하게 되니 고마운 마음도 들었다. 한편으로, 교회의 교리는 그런 삶의 맥락을 다 무시하고 겉으로 드러나는 어떤 ‘일’에만 문제를 제기하고 죄책감을 느끼게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갖게 된 것이다.

 

 

혼전 성관계에 죄책감을 느껴야만 ‘좋은 신자’일까

 

가톨릭 청년 성서 모임에서 모임을 이끄는 역할을 했던 적이 있는데, 그때 우리 모임에 20대 초반의 여성 신자가 있었다. 그이는 남자친구와 연애 중이었다. 연애하다 보면 스킨십의 단계가 꽤 깊어지기도 하기 마련. 역시 그이는 그 일로 많은 고민을 하고 있었다. 어느 날 얘기 좀 하자고 말을 걸더니, 자기는 남자친구와 종종 성관계를 하게 되는데, 나름 신앙심 깊은 천주교 신자인지라, 잠자리를 갖는 날이면 심각한 죄책감에 시달린다고 했다.

 

“정말 사랑하는 사람하고 결혼을 약속했더라도, 결혼하기 전에 같이 자면 간음인가요? 우린 아직 어리고, 결혼을 말하기도 어려운 상황인데, 너무 죄책감이 생기니까 힘들기도 해서 신앙을 버릴까 싶기도 하네요.”

 

우리가 별로 친하고 가까운 사이도 아니었는데, 뜬금없이 자기 속내를 비치는 그이의 말에 적잖이 당황했지만, 나는 이렇게 말했던 것 같다. 내가 생각하는 하느님은 우리가 죄책감으로 자기의 자존감을 갉아먹는 걸 좋아하지는 않는 분인데, 교회에서 말하는 하느님은 좀 다른 것 같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일이고 소중한 일인데, 그 사랑의 한 과정일 뿐인 성관계만 문제 삼고, 나쁘다고 꾸짖는 것은 좀 이상하지 않느냐고 말이다.

 

그이가 죄책감을 갖지 않아도 된다고 나는 약간은 자신 있게 말해주었다. 그리고 열심히 남자친구와 사랑하라고, 사랑하는 일이 얼마나 많은 노력이 필요한 일이냐며, 연애도 못 하고 있던 시절이라 나는 당신이 좀 부럽다고 덧붙이면서.^^

 

 

죄책감 없는 교회, 반성하지 않는 교회가 부끄럽다

 

본당 사무실에서 일하다 보면 교무금을 많이 못 내서 미안하다는 할머니들도 자주 만나게 된다. 자녀들에게 겨우 용돈 받아 하루하루 살기 어려운 분들일수록 헌금 많이 내는 이들에 대한 상대적인 박탈감과 함께, 성당에 빚진 마음이 들어 나오기 힘들다고 하는 분들이 꽤 많았다.

 

교회 안에 있다 보면 이렇게 죄책감은 다양한 이유로, 다양한 방식으로 믿는 이들의 마음과 생활을 억압하는 도구가 되고 있다. 혼전순결이나, 성정체성, 성적 지향 등의 섹슈얼한 문제든, 이혼 등의 가정 문제든, 금전 문제든 죄책감을 느끼지 않아도 되는데, 괜한 마음 앓이를 하시는구나 싶을 때가 많다. 나날이 세상 속에 공존하면서 세상과 빠르게 닮아 가는 가톨릭교회를 보고 있자면, 죄책감을 느껴야 할 주체는 교회가 돼야 할 것 같은데, 우리 교회의 착한 신자들은 자기 속만 긁어댄다.

 

스스로 반성하지 않는 교회를 보고 있자니, 나 같은 불량신자는 종종 자괴감에 빠져버린다. 그 자괴감이란 예수가 다시 세상에 온다면, 이러저러한 현실에 좌절하고 다시 십자가에 못 박히는 선택을 할 것만 같아 생기는 것일 테다. 교회가 예수의 친구가 되어주지 않더라도 밀양 할매나, 거리의 노동자들, 세상 속의 소수자들이 그의 친구가 되어줄 테니 그나마 위안을 삼고 자괴감을 거두어야 하려나.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2014.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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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3/18 07:25 2014/03/18 07:25

“그런데 사람의 아들이 와서 먹고 마시자, ‘보라, 저자는 먹보요 술꾼이며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다.’ 하고 너희는 말한다.” (루카 7,34)

 

트랜스젠더와 어울리는 예수, 담배 피우는 예수

 

▲ 일러스트레이터 이강훈의 그림에 누군가 글을 덧붙여 만든 지난해 12월 28일 총파업 포스터의 하나

한참 본당 청년회 활동을 하고 있었고, ‘수도자다운 신앙심’이라는 비웃음도 당하던 2007년. 물론 살짝 수녀원을 들어갈 고민을 하기도 했지만, 그리 심각한 건 아니긴 했다. 그저 나를 숙고하게 하는 책이나 경구에 감동하고, 말하기를 즐겼을 뿐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싸이월드에서 맘에 드는 그림을 하나 발견했다. 바로 황인호 작가의 ‘은혜와 놀라운 은혜’다.

 

‘은혜’의 이미지는 쉽게 상상할 수 있었지만, ‘놀라운 은혜’의 이미지는 충격 그 자체였다. 마약중독자, 트랜스젠더, 소년병, 성 노동자, 알코올 중독자, 기아에 시달리는 아이, 앵벌이하는 할머니와 손자, 개, 데스메탈(이런 음악도 일부 그리스도교 신자들의 공세를 당하고 있다)을 할 것 같은 음악인들, 부상당한 이주민 등이 예수님과 화기애애하게 둘러앉은 모습이라니……. 별로 점잖지도 않고, 깔끔하지도 않은 사람들, 지금은 교회에 나타나지도 못하는 이들이 아닌가. 뭔가 당신들의 하느님과 나의 하느님은 다르다는 느낌이 들어 신앙의 갈등기에 접어들었던 나는 내 미니홈피에 이 그림을 스크랩하고는 몇 년 동안 이 작품을 잊고 있었다.

 

성당에서 일하게 되고, 결혼하고 아이를 낳았다. 생활인, 혹은 진보적인 마음만 있는 소시민이 되기도 했지만, 성당에서 일하면 일할수록 내가 노동자라는 생각, 성당에서 일하는 노동자는 천주교회 안에서 참 대접을 못 받는다는 소외감, 천주교회는 나날이 가난한 이들을 우선 선택하는 교회가 되기보다는 ‘사장님의 교회’로 변질하는 것 같다는 안타까움을 가득 안고 하루하루 견디고 있었다.

 

2013년 초부터 내 마음이 움직이는 대로 여러 교육과 강의를 쫓아다니다 보니, 스무 살에도 갖지 못했던 장래희망이라는 것이 생겼고, 2014년부터는 장래희망을 구체적으로 이루기 위한 인생 제2막을 시작해볼까 하는 기대를 하고 있다. 그래서 약간은 희망차다. 밀양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도 잘 알고 있고, 여전히 버거운 노동조건에 사람들은 허우적대며 살고 있고, 그 현실은 나의 희망과는 무관하다는 듯이 흘러가고 있지만 말이다.

 

아무튼, 나는 차마 아이를 데리고라도 가진 못했지만, 철도 민영화에 반대하는 여러 사람들이 작년 12월 28일 총파업에 참여했다. 그리고 총파업 전, 인터넷에는 총파업 참여를 독려하는 다양한 포스터들이 넘치게 흘러 다녔다. 그러다가 저 ‘담배 피우는 예수’를 만났다.

 

내가 이해했던 예수와 가장 닮은 그림이 저 두 가지이다. 그래, 우리는 저런 예수를 돈으로 떡칠한 조각상에 가두어 놓은 것일지도 모른다.

 

 

차별금지법에 대한 천주교의 침묵

 

2012년 말부터 2013년 2월까지 몇몇 국회의원이 포괄적 차별금지법을 발의했고, 숱한 논란 끝에 2013년 4월 24일 발의한 의원 중 일부가 철회를 요구, 결국 국회에서 논의도 해보지 못한 채 철회되기에 이르렀다. 인터넷 곳곳은 물론이고 온갖 신문, 잡지 등의 지면 광고, 현수막, 단체 문자메시지에 이르기까지 ‘보수 기독단체’의 적극적인 반대 의사가 보이지 않는 곳이 없었고, 그 혐오와 거부의 표현들을 보는 것 자체가 공해가 되기도 했다.

 

가톨릭 신자인 나는 한국 천주교회는 어떤 견해를 밝히는지 정말 궁금했다. 아니, 솔직히 침묵하는 천주교에 대해 분노했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마치 저 왕왕거리는 ‘보수 기독단체’의 목소리가 고맙다는 듯한 그 침묵이 역겨웠다. 적어도 2013년 7월 조계종 노동위원회가 주최한 ‘차별금지법과 노동 토론회―노동, 차별금지법을 말하다’ 같은 행사를 통해서라도 차별금지법 제정이 필요하고 지지한다는 발언 쯤은 해주지 않을까 기대했던 내가, 어리석고 순진한 신자였다는 각성을 하는 계기가 되어 버렸다.

 

그렇다. 원래 침묵은 중립이라는 뜻이 아니다. 그냥 ‘나랑 상관없음. 내 알 바 아님’의 표시일 뿐. 그래서 침묵이 참으로 정치적인 언어라는 것을 한국 천주교는 나에게 가르쳐준 셈이다.

 

사실, 천주교의 그런 입장을 몰랐던 건 아니었다. 2011년 10월에는 ‘소수자 주거권 확보를 위한 틈새 모임’이라는 단체가 ‘가톨릭 청년회관 다리’에 대관 신청을 했지만, 이 행사에 ‘동성애 관련 단체’가 참여하고, ‘틈새 모임’의 행사로 인해 가톨릭 청년회관이 ‘가정’ 및 ‘성’에 대한 가톨릭교회의 가르침에 반하는 듯한 오해를 살 우려가 있다는 이유로 거부당한 일이 있었다. 물론 언론에 많이 보도되지도 못했지만, 이 사실을 알게 된 진보네트워크는 가톨릭 청년회관 다리에서 진행할 예정이던 ‘정보 인권상영회 행사’의 대관을 취소하는 것으로 연대의 뜻을 표하기도 했단다.

 

이 소식을 전해주던 친구와 틈새 모임 사람들이 받았을 상처에 대해, “천주교 은근히 보수적인가 봐” 하는 쑥덕거림을 보태 나누던 얘기들이 떠오른다. 그때로부터 햇수로 3년이 지나고, 가톨릭 청년회관은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이제는 차별적인 논란이 될 대관은 아예 접수하지 않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잠시 해본다.

 

 
▲ 지난해 11월 3일, 제10차 WCC 총회에 참가한 각국 성소수자 그리스도인들이 광화문광장에서 성소수자를 위해 기도하고 있다. ⓒ문양효숙 기자

 


“동성 결혼은 매우 부조리하다”고?

 

2005년 하반기쯤 나는 가톨릭 사회교리를 알게 되어 공부하기 시작했다. <새로운 사태>, <노동하는 인간> 같은 교황의 문헌들에 대해 강의를 듣고, 공부하면서는 심지어 가톨릭교회가 정말 예수를 따라 살고자 하는 교회일지도 모르겠다는 어렴풋한 희망마저 품었던 것도 같다. 물론 경영자의 처지에 있던 나이 많은 신자 몇 분들의 공격적인 비판(비난일 수도 있다)이 우리의 소박한 기쁨을 방해하는 일도 숱하게 있었다.

 

1차, 2차에 이르는 사회교리학교 일정을 마치고 그 당시 출간된 지 채 1년도 안 된 <간추린 사회교리>라는 책을 통독하는 3차 연수가 있었다. 통독 연수라지만 600페이지가 넘는 두꺼운 책을 2박3일 동안 다 읽을 수는 없었던 것 같고, 부분별로 중요하다 싶은 곳을 짚어가며 읽었던 것 같다. 그렇게 읽던 중 맞닥뜨린 228항. “동성 결합에 ‘혼인’의 지위를 부여하라는 요구는 매우 부조리한 것임을 드러낸다”는 문장을 만났다. 빙빙 돌려 서술한 글의 분위기 때문이었을까? 가톨릭교회는 동성애에 대해 어떤 입장인 건지, 그들에게 ‘사람이 아니므니다’라고 말하는 건지, 그들의 연애는 인정해도 법적인 혼인만은 인정을 못하겠다는 건지, 정확한 입장을 읽기가 힘들었다.

 

지금 읽어보면 명확하게 ‘인정 못함, 반대’의 뜻이 드러나는데, 그때는 왜 그렇게도 애매하다고 느꼈던 건지도 의문이다. 그날 연수에는 주교도 와서 약식 강의를 했는데(그 주교가 아마도 염수정 추기경이었을 것이다), 의구심이 있으면서도 차마 질문하려고 손을 들지 못했다. 다만 책 귀퉁이에 ‘한국 천주교의 동성애에 대한 입장은?’이라고 끄적이며 낙서만 했다.

 

“사실혼과 관련된 또 다른 구체적인 문제는 동성 결합의 합법적 인정에 대한 요구다. 이 문제는 점점 더 공론화해 가고 있다. 인간의 온전한 진리에 부합하는 인간학만이 사회적 교회적 차원에서 다양한 측면을 지니고 있는 이 문제에 적절한 응답을 할 수 있다. 그러한 인간학의 견해는 ‘동성 결합에 '혼인'의 지위를 부여하라는 요구는 매우 부조리한 것임을 드러낸다. 그러한 요구에 반대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하느님께서 인간의 본성 자체에 새겨 놓으신 계획에 따라 생명을 전달함으로써 열매를 맺는 결합 관계가 객관적으로 성립될 수 있기 때문이다. 또 다른 장애는, 신체적 생물학적 차원과 특히 심리 차원에서 창조주께서 뜻하신 남녀의 상호 보완성을 위한 조건들을 갖추지 못한다는 것이다. 인간이 통합적인 일치와 정신물리학적인 상호 완성을 통하여 완전함에 이를 수 있는 것은 성(性)이 다른 두 사람의 결합에서만 가능하다.

 

동성애자들의 인간 존엄을 온전히 존중하여야 하며 정결을 지키는 것에 특별한 관심을 기울이면서 하느님의 계획을 따르도록 격려하여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존중의 의무가 도덕률에 위배되는 행위의 합법화를 정당화하는 것은 아니며, 동성 간의 혼인과 그것이 가정과 동등하게 여겨질 권리의 인정을 정당화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법적인 관점에서 남자와 여자의 혼인이 단지 가능한 혼인 형태들 가운데 하나로만 여겨진다면 혼인의 개념은 근본적으로 바뀌게 될 것이고, 이는 공동선에 심각한 손상을 입힐 것이다. 동성애자들의 결합을 법적으로 혼인이나 가정과 동일 선상에 놓음으로써 국가는 독단적으로 행동하며 본연의 의무를 저버리게 되는 것이다.’” ―간추린 사회교리 228항

 

 

   
▲ 지난해 8월 22일, 서울 여의도 국회 앞에서 성소수자 4대 인권입법과제 실현 촉구 및 김조광수-김승환 결혼식 국회의원 초청 기자회견에 참석한 김조광수 감독(오른쪽) ⓒ민중의소리 LeeSuengBeen

 

동성결혼식 올린 가톨릭 신자, 김조광수와의 대화
“차별하지 말자는 법 반대하는 게 예수를 따르는 건가?”

 

‘본당에서 마주친 교회’라는 칼럼을 시작하면서, 천주교회에 얽힌 차별 얘기를 반드시 써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첫 칼럼을 기고하기 며칠 전인 2013년 9월 7일, 우리나라 최초의 공개적인 게이 커플 결혼식이 있었다.

 

가톨릭 신자로 알려졌던 김조광수(베드로) 감독에게 물어보고 싶었던 것이 많았지만, 고르고 골라 단 두 가지의 질문을 보냈는데 고맙게도 답변이 왔다. 답변을 정리해 글을 써볼까도 했지만, 당사자의 심경이 잘 드러난 글이라 그대로 옮긴다.

 

 

―가톨릭교회에서 세례 받은 신자시잖아요. 혼인성사에 대해 알아보신 적이 있을까요? 혹시 추진해보시기도 했는지 궁금합니다.

 

“가톨릭에서 세례를 받은 베드로이지만, 최근 10여 년은 주일에 미사도 드리지 않는 냉담자로 살았습니다. 가톨릭은 여전히 동성애를 죄라고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에요. 물론 저는 스스로 동성애를 죄라고 여기지도, 동성애자인 게 부끄럽지도 않지만, 성경에서 금하는 사람, 교리에 어긋나는 삶을 사는 사람이라는 생각 때문에 고해성사를 볼 때마다 힘들었어요. 신부님께 ‘저는 동성애자예요. 어제는 동성과 섹스를 했어요’ 이렇게 고백을 하지 않는 것 때문에 고해성사를 하고 난 뒤에 기분이 찜찜했죠. 그래서 고해성사를 안 하게 되고 그러니 영성체를 못 하게 되고요. 주위에서 ‘왜 영성체를 하지 않느냐’고 묻고 저는 얼버무리고. 그러는 모든 것들이 싫어지면서 교회에서 멀어지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신앙을 버린 것은 아니었어요. 가까운 신부님 중 동성애에 대해 긍정적인 생각을 하는 분들도 있어서 그분들 덕에 크리스천으로서의 끈을 놓지 않고 살아가고 있었죠. 결혼을 기점으로 교회에 다시 나가보려 했어요. 그래서 혼인성사를 시도해 보았지만 역시나 예상한 대로 저희 결혼을 받아주는 사제나 교회는 없었습니다. 아직 가톨릭교회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대답을 들어야 했죠. 다른 나라에서도 한 번도 없었던 일이니까 섭섭하지는 않지만 아쉽기는 하죠.

 

최근에는 성공회로 이적을 해서 성공회 교회에 나가고 있습니다. 미국 성공회는 커밍아웃한 동성애자 주교님도 있고 2010년에 ‘동성 결혼이 합법화된 주에서는 교회에서 동성 결혼하는 것을 합법화’했어요. 대한성공회는 아직 동성애와 동성 결혼에 대해 정확한 견해를 내놓은 적이 없지만(동성애를 죄로 규정하는 것도 아니라는 거죠) 보다 긍정적이고 앞으로 변화도 빠를 것 같다고 생각해서 성공회를 다니고 있어요. 아직은 성공회 교회에 다닌 지 얼마 되지 않아서 그냥 조용한 신자로 있지만, 언젠가 때가 되면 교회에서 다른 역할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차별금지법 논란이 있을 때, 저는 가톨릭교회가 묵묵부답하던 것에 참 분노했습니다. 그런 침묵은 동조로 보이기 쉬운데, 감독님의 생각도 듣고 싶습니다.

 

“차별금지법 제정에 반대하는 사람들 대부분이 그리스도인들이죠. 차별금지 조항 중 ‘성적 지향’을 크게 문제 삼는 것으로 ‘성경에 어긋난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저도 그리스도인인데, 이럴 때마다 힘들고 괴롭습니다. 차별하지 말자는 법을 제정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 예수의 가르침을 따르는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한국 가톨릭교회가 차별금지법 제정에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있는 것은 잘못이라고 생각합니다. 동성애를 인정하는 것도 아니고 최소한 성적 지향이나 성별 정체성으로 인한 차별을 하지 말자는 것인데 왜 그것을 찬성한다는 의견을 내지 못하는지 참으로 딱합니다. 이제라도 교회는 차별금지법 제정에 적극적인 참여를 해야 합니다. 최소한 프란치스코 교황만큼은 발언하고 행동해야 하지 않나요? 교황은 최근에 ‘동성애자 커플의 자녀도 다닐 수 있는 교회를 만들자’는 이야기도 했잖아요.”

 

 

   
▲ 지난해 4월 25일 열린 고(故) 육우당 10주기 기도회에 그의 유품이 전시되었다. 독실한 천주교 신자였던 육우당은 동인련 회원들에게 성모상을 남기고 돌아올 수 없는 길을 떠났다. ⓒ문양효숙 기자

 

육우당은 여전히 우리에게 질문하고 있다

 

내가 교회로 다시 찾아가기 몇 년 전인 2003년 4월, 술, 담배, 녹차, 파운데이션, 수면제, 묵주 6가지의 친구를 둔 19세 육우당이 세상을 떠났다. 동성애자인권연대 활동가이기도 한 그는 사무실 문고리에 목을 매달고 자살했다. 평소 묵주를 지니고 다니며 기도하곤 했다는 신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그의 옆에는 동성애자를 차별하는 세상을 원망하는 6장의 유서와 자신의 전 재산인 34만 원을 동성애자 인권운동에 기부한다는 메모가 있었다고 한다.

 

작년 4월, 육우당 10주기 행사에서는 여전히 얼굴을 드러내지 못하는 수많은 동성애자가 함께했다. 그의 죽음이 있고 얼마 후, 인권사회단체들은 “그의 죽음은 차가운 편견과 멸시, 소외와 차별의 빙벽 속에 갇혀있는 이 땅 모든 동성애자의 죽음을 예고하는 것일 수 있다”면서 동성애자들을 자살이라는 막다른 선택으로 몰아넣고 있는 사회적 편견과 폭력을 비판했다. 나아가 동성애를 죄악시하는 일부 개신교 단체들과 언론에 대해서는 “단지 성적 지향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이들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야말로 반인권적 폭력이 아니고 무엇이냐”며 되물었다. 11년이 지났지만 지금까지 육우당의 죽음은 우리 사회에 여전히 같은 질문을 계속 던지고 있는 건 아닌가.

 

 

예수는 세상의 온갖 소수자를 받아들였다

 

2014년 1월 10일. 서울시 학생인권조례 개정안 공청회에서 한 판의 난동이 있고 나서, 이 원고를 시작하다 보니, 전반적으로 성소수자들에 대한 사건 중심으로 글을 쓴 감이 있지만, 성소수자를 포함한 장애인, 여성, 청소년, 이주노동자, 노인, 노숙자 등 모든 소수자들은 우리 사회에서 쉽게 혐오와 차별의 대상으로 지목되고 있다. 또 이러한 소수자성은 한 사람에게 하나만 있는 것이라기보다는 ‘여성-장애인’, ‘여성-성소수자’, ‘성소수자-청소년’ 등으로 결합하여 그 차별을 더 심화하기도 한다.

 

왜 나는 이 칼럼을 ‘차별’이라는 말로 채우고 싶었던 것일까 하고 오래 고민해 보았다. 그건 내게 차별의 말이 권위적인 억압의 다른 말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교회(또는 사제)의 권위에 도전하는 것들”이라는 판단이 싫었는데, 그 권위를 말하는 사람들은 자기와 하느님을 동일시하는 경향이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그들이 나나 나와 생각이 비슷한 이들을 권위에 도전하는 것들이라며 소외시키고 배제하려 해도 무섭지 않다. 내가 인정하지 않는 것은 하느님의 권위가 아니라, 하느님을 팔아서 자기 욕심(권력욕, 군림)을 채우고자 하는 그대의 혓바닥일 뿐이니까.

 

그리고 나에게 차별의 말은 순응을 요구하는 명령이었다. 본당에서 숱하게 돌봄 노동과 가사 노동을 요구받는데도 ‘할 수 없지’ 하며 일하는 우리 자매님들의 모습(흔히 예수의 어머니 성 마리아의 헌신과 모성의 수고로움을 들먹이며 존중하는 듯한 언사를 하기도 한다), 직장 생활도 버거운데 각종 행사에 그저 ‘동원’되거나 사제들의 의견을 넘어서는 일을 하기는 어려운 청년들, 그리고 사제와 사목위원들이 아무리 임금을 깎으려고 시도해도 노조는커녕 체념하고 그만둘 수밖에 없는 교회 안 노동자들은 일면 그 희생양일 수 있을 것이다.

 

동성애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말을 만들어 아무리 반대해도, 그들은 우리 옆에서 함께 살아갈 이웃이다. 노동자라는 말이 불편해서, 아무리 그들의 권리를 부인하려고 해도 어떤 타인의 노동에 빚지지 않고 단 하루라도 살 수 있는 사람은 없다. 하느님의 아들 예수 역시 목수 일을 하던 노동자였고, 그의 놀라운 은혜 혹은 은총은 세상 속 다양한 소수자들을 이미 다 받아들였는데, 어이없게도 우리는 교회며 사회라는 울타리를 치고 어떻게 저들을 배제하고 차단할 것인지 궁리하고 있다.

 

답을 내릴 수 없는 갈등의 순간, 우리에게는 좋은 질문이 하나 있지 않은가. 만약 예수라면, 어떻게 했을까?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20140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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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2/14 14:44 2014/02/14 14:44

두근두근 하며 나선 나의 노동인권 탐험 이야기  

- [두근두근, 노동인권 탐험대 : 청소년과 함께하는 노동인권교육 강사 양성과정

 

일단 후회 ㅡ.,ㅡ

덥석 하겠다고 해버렸다. [두근두근, 노동인권 탐험대 : 청소년과 함께하는 노동인권교육 강사 양성과정(이후 탐험대)] 교육후기.. 소식지에 글을 써 달라는 개굴님의 전화에.. ‘뭐 정리도 할 겸 쓸게요.’ 하고 덥썩... 
중요한 것은 7강 중 두 번이나 출석도 하지 않았던 나.. 게다가 뭔가 메모 했던 것 같은데 다 어디로 사라져 버린 그 무엇들 ㅠㅜ
음.. 어쩌나.. 고민을 좀 했지만 그냥 두런두런 [인권교육이 꼬물꼬물]이란 꼭지에 썩 어울리지 않을 수도 있는 글을 끄적거리기로 마음을 먹고 컴퓨터 앞에 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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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험대]를 만나기까지


시작은 올해 1월 ‘성공회대 노동대학 입문과정 겨울학기” 웹자보였다. 아는 분의 페이스북 담벼락에 ‘가고 싶다’고 써있었나? 그걸 보고 쿵쾅거리는 마음.. 딸을 엄마에게 부탁하고 집 가까운 성공회대니까 가뿐히 다녀오자고 마음을 먹었다. 


유명짜한 하종강 샘의 수업 한번 들어보는 게 소원이었다. 아이를 낳고 움직이는 자유를 잃게 되자 가고 싶은 이벤트들이 많아졌다고 할까? 결혼을 준비할 무렵 터진 용산참사가 대학 졸업후 거의 10년을 외면했던 사회로, 세상으로 다시 눈 돌리게 한 뒤로 나는 슬금슬금 가고 싶은 현장도 많았고, 만나고 싶은 옛 친구들도 많았다. 미루고 미루던 일들이 정작 움직이기 어려워지니 어찌나 간절했는지 모른다. 그런 갈증 같은 것이 소원으로까지 진화한 거라고 생각한다. 

어쨌든 부푼 기대를 안고 4번의 수업을 듣는 동안 한번도 울지 않은 날이 없었다. 그 4번의 수업에서 내 귀에 꽂힌 말이 ‘청소년 노동인권 교육’이었다. 광주교육청에서 교재를 발간했고, 어느 교사가 연구년을 내서 교재를 편찬하느라 애를 썼다는 얘기를 해주던 하종강 선생님.. 어릴 때부터 노동에 대한 교육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호소력 있는 강의. 그 강의를 듣고 내 인생 거의 최초로 장래 희망이 생겼다. 청소년 노동인권 강사.. 


20대 때는 철없어서 별 필요 없었고 그 뒤에는 하고 싶은 일이 없어서 마음고생마저 하게 했던 그 장래 희망이 와우~! 지금 생겼다...! 하고 있던 어느 날, 내 장래 희망과 똑 같은 이름을 내세운 교육이 있다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탐험대] 교육을 놓치면 절대 안된다는 생각에 부랴부랴 신청을 했고, 주로 내 휴일이 월화 이틀이라 하루 더 휴가를 내고 강의를 들으러 다녔다. 미리 ‘길담서원의 청소년 인문학교실 -일’도 찾아 읽어보기도 했다. 지각 대장이 지각 안 하려고 기를 쓰고, 혹시 빠지기라도 하면 녹음 파일이라도 달라고 졸라대며 ㅎㅎ


사실 [탐험대] 교육에 참여한 분들은 다양한 청소년 관련 단체에서 활동하는 분들이었다. 나와는 차원이 한참 다른 현장 속의 사람들에게 약간의 시샘을 느끼며 통통 튀는 다른 참여자 분들의 활약을 지켜보는 재미도 꽤 있었고 나도 여러 번 모둠 발표하러 나가기도 하며 적극적으로 교육에 참여했다. 그동안 인권과 관련한 활동에 목말라 업무시간 대부분을 그런 글 읽기에 보냈던 것이 이 교육의 예습이 되었던 건지.. 뭔가 머리 속이 정리되는 것 같은 시원한 교육이었다. 


[탐험대]다운 한 걸음...“노동권보다 노동인권”..? 

전체 교육자료를 교육이 끝나고 3주 뒤에 메일로 받았고(대용량 파일 다운로드 기한을 넘겨 다시 요청해서 받는 사건마저...ㅠㅠ) 내가 했던 메모들이 없는 자료지만 그 자료 덕분에 이 글을 쓸 수 있었다..(감사합니다!) 

나의 지난 직장 대부분도 그렇고, 우리 나라에서 일하는 사람들 대부분은 영세한 개인 사업체에서 일하는 비정규직이 많다. 단결권이니 단체행동권이니 읊어봤자 머리를 맞대고 고민을 나눌 동료가 사장님인 경우도 허다하다.. 임금 체불이 간간이 있어도 원망하지 못할 정도로 빤히 사무실(회사라고 부를 수조차 없는..) 사정을 알고 있다. 연차 휴가, 상여금? 꿈도 꾸면 안되는 일터가 정말 수두룩하다. 나 역시 숱한 직업을 전전하며 10여 년을 일했어도 내가 노동자라고 생각한 지는 몇 달 되지 않았다. 


물론 노동권과 노동인권 가운데 어떤 것이 더 중요하고 어떤 것이 부차적인지 섣부르게 결론짓고 싶은 것도 아니고 그럴 능력도 없지만.. 내가 노동자라는 것을 인식하게 된 계기도 내 인권이 짓밟히는 사적인 경험이 쌓여왔던 5년이라는 시간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은 확신할 수 있다. 일 한지 10여 년이 지나서야 노동을 하면서도 내가 노동자라는 것을 알았다는 약간의 부끄러움을 청소년들이 느끼지 않게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내 장래희망의 시작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어떻게 청소년들과 노동을 말할지, 어떻게 노동과 인권이 만나는 지점을 찾을지... 실질적인 노동을 아직 시작하지 않은 아이들에게, 부정적인 낙인이 찍혀버린 노동이라는 말을 잘 얘기할 방법은 없는 건지... 이런 고민들이 꼬물꼬물 피어나고 있다. 


그래서 일단 뭔가 부족한 이 느낌을 해소하기 위해 동반자가 절실했다. [탐험대] 교육이 끝나고 ‘들’의 ‘인권교육 고개넘기’ 워크샵을 등록한건 들의 활동회원을 할 마음을 먹고 벌인 짓(!)이다. 그리고 [탐험대] 교육이 맺어준 소중한 인연으로 아마 서울 각 지역에서 학교 단위 교육에 서로 협조하며 강의를 하는 시스템이 슬슬 만들어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성수공고 노동인권 교육을 준비하는 성동 지역의 부르심에^^ 보조 강사로 참여하기로 했고, 앞으로 다른 지역에서도 강사 교류 활동이 이루어질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리고 구로 민중의 집에서도 바로 오늘(13일)! 조촐하고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노동인권 교육 강사단 교육 1차시 교육을 마쳤다. 

마음 먹은 일이 너무 술술 풀려갈 때, 불나방이 불길에 뛰어드는 것처럼 내달리지 않으려고 애를 쓰는 편이지만, 그것이 장래희망이고 보니 조절이 안되는 느낌이다. 일 벌리기 좋아하는 성격이라 정리하고 마무리하는 일인 설거지와 청소를 가사노동 중에서 가장 싫어하는 내 성격에 브레이크를 걸어줄 친구도 절실하다. 

Help Me~ ^___________^

 

인권교육 놀이터 20130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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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2/09 19:20 2014/02/09 19: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