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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07/01/30
    100년 후의 사람들에게 편지를 써봅시다.
    꿈이
  2. 2007/01/28
    어떤 영화를 만들거야?(2)
    꿈이
  3. 2007/01/27
    유독 나이든 여성노동자를 왜 '어머니'라고 부르는 거야?(2)
    꿈이
  4. 2007/01/04
    이들 모두를 잡아 쳐넣어라(2)
    꿈이

100년 후의 사람들에게 편지를 써봅시다.

* 아래 글은  한미 FTA 협상이 막 시작되고 있던 지난 2006년 4월에 써 본 글이예요.

   게으름 때문에 시도해보진 못했지만,  이런 영상물을 만들어 유포해 볼 생각이예요.

   이글을 본 누구라도 시도해보셔요.  

 

      FTA 저지를 위한 교육 선전용 영상물 아이디어 1

                                                                                     2006. 4. 27  꿈돌이


(1) 시리즈 영상물의 제목  - [22세기에 한반도에서 살아갈 사람들에게...]


1) 대안적 세계화/FTA저지 캠페인의 어느 단계인지는 모르겠지만, 기획은 빠를수록 좋을 듯합니다. 6월에는 돌아야하니까요.


2) 기획의 목적 :

 - 오늘의 민중들이 신자유주의의 본질에 대해 생각게 하고, 저항의 의지를 다지고 그 실천을 모색할 수 있도록, 성찰의 계기를 제공한다.

 - 동시에 ‘진짜로(!)’ 1세기 후의 사람들이 볼 수 있게 제작물을 만든다. (우리가 100년 전의 어떤 도판과 문자텍스트 등을 통해서 우리시대의 문제를 성찰하게 되는 것처럼)


3) '100년 후의 한반도 거주자들에게...'의 관념으로, 대화 혹은 편지, 혹은 타임캡슐의 영상메세지 형식으로, 오늘의 이야기와 우리의 상상을 담아 전하는 방식의 교육선전물


4) 다큐/극영화의 형식을 버무릴 수도 있다.

 - 각 분야의 전문가들에게 1세기후의 사람들에게 지금의 상황을 설명(이야기,소개) 하는 방식으로 인터뷰를 한다.

 - 인터뷰의 주요내용에 대한 실사 자료화면의 편집도 가능하다.

 - 오늘날의 사람들에게는 영상유언의 느낌이 날 수도 있다.

 - 배우들을 이용하여,  특정 사안 (의료, 서비스 공공성의 붕괴에 대해 말을 할 수도 있다.) 

 - 유명세가 조금있는 사람들 (교수들 이영희 선생등) 의 연속인터뷰 형식이 될 수도 있다. 문제는 대중적 언어를 사용해야한다는 것.



 (2) 기획의 의미


1) 소통의 상상력 강화

 활동가들, 제작자들, 미디어운동 기획자들 모두가, 더 나아진 미래, 혹은 악화된 미래에 대한 상상을 함으로써, 좀 더 영감을 얻고, 이를 통해, 시야를 확장하고 이를 통해 선전의 핵심을 점검할 수 있다. ( 1세기 후의 사람들에게 지금의 상황을 어떻게 호소력 있게 설명할 것인가 ? 이는 지금 신자유주의 흐름 속에서 고통의 호소와 고립된 저항을 반복하고 있는 민중들에 대한 선전의 수사학 개발에 도움이 될 수 있다. - 약간 변주한다면, ‘어린 조카에게, 나이든 어머니에게, 주변의 아저씨들에게 어떻게 이 국면을 설명할까 생각해봅시다.)


2) 콘텐츠들의 호소력의 강화 : 콘텐츠가 ‘세대를 뛰어넘은 대화/소통’ 형식을 취함으로써, 우리가 어떤 연속성속에 또 사회와의 유기적 연관 속에 있음을 강조하는 효과가 있다. 성찰적 태도를 강화할 수도 있다. ‘그래. 나는 지금을 살고 있지만, 이 땅과 사회는 미래세대를 위한 것이기도 하지. 나의 행동은 단지 나의 것이기도 하지만 미래세대에 영향을 줄 수도 있어...’


(3) 제작방법


1) 다수의 참가 (옴니버스 혹은 연작 )

 참가하는 모든 이들의 창의에 의해서, 이 아이디어를 ‘변용’ ‘발전’시킬 수 있겠습니다.

2) 자유로운 스타일 (기획자의 비독점) 과 상호협력

3) 각 부문 운동의 활동가들과의 강력한 연대와 협력작업

 (그 분들에게 1세기 후의 사람들을 위한 편지를 쓰라고 한다거나, 이를 위해 시청각적 이미지를 동원해서 마련하라고 주문하여 그들의 창의적 아이디어를 덧붙인 기획도 시도한다.) 



 (4) 내용 (의 예)


< 불연속적인 깜빡이는 화면 ? (100년 된 테잎...) / 자막 : 이 도상들은 1세기 전의 한반도에 거주하던 몇몇 인간들이 ‘비디오카메라’라는 기구를 이용하여 ‘자기테이프’에 담아놓은 영상과 신호들을 복원한 것입니다.>


1> ‘당신들이 살고 있는 곳은 살 만 합니까? 당신들이 황량한 불모지라 여기고 있는 그 새만금 지역의 평지는 사실은, 태고 적부터 1세기 전까지 온갖 생물들이 숨쉬던 습지였습니다.

 그것이 온갖 자양분을 품고 생명을 길러내던 풍요로운 습지에서, 별 쓸모없는 콘크리트 덩어리로 바뀌는 데는 불과 10여년에 불과했습니다. 저희는 불행히도 그것을 막지 못했습니다. 이와 같은 무지막지한 상황을 추동하는 거대한 욕망의 흐름 - 그것은 그것을 통해 ‘자기 몸집을 불리려는 ‘돈덩어리’ 자체의 욕망이, 지역개발 - 지역의 번영 이라는 수사로 포장되면서, 이루어진 일입니다. 대단히 유감스럽게도 당신들은 이제 그곳에서 다양한 뭇 생명들이, 생명의 고리 속에서 순환하던 땅이었다는 것을 상상할 수 없겠지요... 몇몇 사람들이 생명을 걸고 저항했지만 결국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미안합니다.’

 (* 여기에는 그동안 찍힌 자료화면들을 모아 편집한 것도 괜찮겠군요. )


2> 잘 이해가 안 될 수도 있겠지만 들어보세요. 우리는 불행히도... 몇몇의 형체는 없지만 막강한 힘을 휘두르며 허공을 떠다니는 돈덩어리들과 관료와 대통령이란 사람에 의해 7000만에 달하는 공동체의 운명이 휘둘리는 사회에 살고 있습니다. 당신들처럼 사람들과 생명체들 간의 교감과 의사소통을 통해 지속가능한 삶과 공동체를 꾸려나가고 잇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또 우리는 20세기 초부터 소위 전파란 것을 소통의 수단으로 이용하기 시작했는데, 이 또한 국가기구와 집적된 돈덩어리들이 장악하고 있어서, 보통사람들 간의 소통의 창구라기보다는 이를 장악하고 있는 소수의 사람들이 자신들의 이익을 교묘히 선전해내는 거대한 괴물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우리의 삶에 대한 설명을 덧붙이자면,


‘몇 개의 거대한 돈덩어리들이 자기몸집을 부풀려가는 순환과정(이를 요즘 사람들은 보통 자본의 순환운동이라고 부릅니다.)’을 본질로 하는 사회란 것입니다. 여기에서 생명이니 문화니, 생명체들 간의 소통이니 하는 것들이 그 거대한 순환구조속에서 살아내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는 상황이라는 것입니다.


하나의 예를 들자면, 우리시대 한반도에 거주하는 사람들의 인생의 목표는, 본인이 태어난 시대의 환경과 아름답게 상호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소위 집장만이라는 것입니다. 서울이라는 지역에 거주하기 위해서는 평생동안 노동해봤자 절대 안 되고, 노동을 하는 대신에 집을 상징하는 딱지들을 절묘하게 사고 팔 때, 거주공간을 갖는 것이 가능합니다. 내가 살아갈 공간을 얻기위해 '일을 하는 것은 멍청한 짓이고, '집을 재산으로 여기면서, 돈 - 집-더 많아진 돈 - 집- 엄청커진 돈 - 이런 식으로 바꿔나가는 사람들만이 그나마 현명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3> 작은 공동체들은 수세기전에 소위 ‘국경’ 이란 경계 안에 포섭된 바가 있습니다. 이 국경, 혹은 국가란 것은 이전시대엔 ‘제국’이라 불리는 외부의 거대한 힘으로부터, 영내의 작은 공동체들의 특성과 자율성을 일정하게 보호하는 역할을 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국적이란 것에 속박되지 않는 거대한 돈덩어리들과, 이들의 의도를 관철시키기 위한 물리적 장치라 할 수 있는 제국주의 정치가의 연맹이 전지구 위를 날아다니며, 자본의 지배체제를 공격적으로 구축하려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돈’이란 것이 어떻게 자기몸집을 부풀리기위해 사람들을 이용한다는 것을 이해 못할 수도 있겠지요.

 이는 요상하게도 ‘신자유주의’ 라는 이름을 갖고 있습니다. 이들은 이미 세계각지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을 망가뜨려왔으며,  오랫동안 유지되어왔던 삶의 가치들과 작은 공동체들이 박살나는 상황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4> 지금 이곳, 21세기 초, 이제 그 신자유주의 질서의 완성판이라 불리는 소위 ‘FTA 체제’를 구축하기 위해, 제국의 지배자들과 이런 제국의 편에 서있는 이 지역의 정치관료들 간의 협잡이 비밀리에 빠른 속도로 진행되고 있습니다. 

몇몇의 사람들이 이것이 매우 위험하며 잘못된 일이라는 생각하고 있지만, 아직까지는 이것의 음모를 분쇄하기에는 역부족입니다. 그러나 어떻게든 이와 같은 흐름을 막아야한다고 생각합니다.


... 이는 단지 오늘의 우리의 문제일 뿐 아니라, 당신들의 문제이고, 한반도를 삶의 터전으로 삼아 살아갈 모든 생명체들과 관계된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 우리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당신의 삶의 모습은 크게 달라질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점점 강화되는 제국의 질서에 지친 우리는, 이제 막 새로운 길을 모색하고 있습니다. 뒤늦게 말입니다.


5> 그래서 참으로 궁금합니다. ‘당신들은 지금 어떻게 살고 있습니까 ?’


- 여전히 소수의 이익이 은밀하고 강고하게 보호되는 그런 사회입니까?

- 가난하기 때문에 병원치료가 불가능한 사회입니까?

- 제약회사들의 막대한 이윤을 위해 생명이 죽어가도 높은 약값을 유지하는 그런 사회입니까?


아니면

- 어쩐 종류의 것이든 차별을 하는 게 불가능한 사회입니까?

- 사회가 필요로 하는 재화와 서비스를 생산하는데, 이 생산 단위들의 주인이 ‘돈덩어리들’이 아니라, 거기에 참여하고 있는 많은 사람들의 자율적인 협력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입니까 ?

- 당신들은 물, 공기, 에너지를 ‘사고 판다’는 것을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사회에 살고 있습니까?


*  이런 질문내용들은 좀 사안별로 구체적인 모습을 띨 필요가 있겠죠..

*  그리고 각각의 사안들은 짧은 꼭지의 연속물일 수도 있겠습니다. 

*  농부가 낫을 들고 이것저것 설명해가는 방식도 있을 수 있다.


6> 당신들에게 오늘, 이 시대의 아픔을 이겨내기 위한 우리의 몸짓을 보여드리겠습니다.

                                                   

                                                        - 개 퍼포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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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영화를 만들거야?

'어떤 영화를 만들고 싶어요?' 라고 가끔가다, 나를 친근하게 여기는 이들이 물어온다.

 

명색이 '다큐멘터리 감독'이니, 그런 질문을 할만도 하다.  솔직히 별 답이 없지만 그런 질문을 받을 때면 생각을 하게된다.

이런저런 토론을 곁들여 대답을 하기는 했다.

 

내가 만들려는 영화

 

1. 몇몇의 사람들, 백명(?) 혹은 천명(?) 정도의 사람들이 '당신이 만든 것을 보고, 많이 느끼고, 많이 생각했어요. 그 것에 관해서 심각하게 같이 토론해 봐요.'라고 말하는 영화

 

2. '영화제작 행위'에 관계했던 사람들이 소외된 노동을 하지 않는 것 

    - 이때, '관계자'라하면, 극영화의 경우, 스태프들과 연기자들이 되겠고,  다큐멘터리라면, 소수의 스태프와 소위 사회적 배우(social actor=출연자) 가 되겠다.   

   -영화제작이라는 협력적 노동이 참여한 스태프들에게,  소통의 즐거움, 성찰의 계기, 화두의 발견,  새로운 감성, 시선의 확장,  영감 , 새로운 착상  등 '이윤' 을 넘어선 선물나누기가 될 것.

   - 특히 다큐멘터리에서,  '찍히는 사람들에 대한 카메라의 절대적 우위'라는 구조적 위험성을  명심하고 그것을 극복할 세심한 대안들을 마련할 것.    

   

3. 스스로 생각할 때, 쪽팔린 영화적 장치 (술수)를  사용하지 않는 것

   - 영화를 제작하다보면,  더많은 관객으로부터 더 빨리 시선을 끌기위해, 또는 연출자인 나자신의 숙련을 은근히 드러내려는 욕망이 작동하는 것을 경험한다.  '이렇게 표현하면 사람들이 너무 같잖게 생각하지 않을까? 이렇게 표현하면 더 극적이지 않을까? 이렇게 해야 나의 무지나 무신경이 좀 더 감춰지지 않을까? 등등'

 

4. 소망 : 죽기 전에, 100년 쯤 후에 몇몇 사람들이, 어느 공공 아카이브에서인가 내가 만든 영화를 빼보곤,   '음, 100년 전의 사람들중에 이렇게 생각하고 느꼈구나... 그 사람과 대화를 하고싶어.'  라고 생각하는 영화 5 편 정도 만들기.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

  

1.  현재의 미디어 구조에서 주류의 '상영 및 방영(보여주기-보기)' 시스템은  '제작자의 인기확장과 이를 통한 이윤확보'라는 써클에 결박되어 있어서,  '소통'과 '교감' 이라는 영화제작-보급활동의 본래의 의미를 죽이고 있다는 점이다.  

-  현재의 대자본이 주도하는 상영시스템은  '수백만을 일거에 감동시키는 그런 영화'에 대한 열망을 부추기며 조장한다.  자본의 이윤확보 써클에 포섭되어 있는 것이다.  주로 '투자비를 회수해야한다.' 라는 명목이 대중들의 비판적인 의식을 무마하는 논리로 사용된다.   하지만,  어떤 사람이 (혹은 그의 정신이) 일거에 동시대의 다수의 공동체  사람들의 정서를 쥐락펴락 한다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을뿐 아니라,  특히 요즘들어서는 자본의 요구에 의해 의제화된 욕망이다. 

- 나는 나의 영화를 보아준 사람들이  수십명이든, 수백명이든,  '대안적 상영운동'이  발달하여 '수천명이 되든,   그들간에, 혹은 그들과 내가,  오손도손, 왈가왈부, 속삭이며 논쟁하는 영화를 만들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2.  영화제작과정은 그 자체가  삶, 노동, 소통의 과정이다.  

 

- 영화제작은 나 외에 누군가와 협력작업을 해야하는 작업이다.   즉 만드는 이들의  공동의 열의와 창의적 노동이 수반되는 활동이다.  

- 그리고 그 협력노동과정은  참여한 사람들의  '삶(생활)'이기도 하다. (그동안 그들은 호흡을 하고, 정신적,감성적 육체적 에너지를 주고받는다. 그리고 조금 늙는다.)

- 자본주의는 '자아실현' 따위가 아니라, ' 지위 = 돈 = 편하고 폼나는 삶'을 위하여 '노동'을 하라고한다.   그러니 '돈을 벌기위해 노동을 하라' 고 강제한다.    

-   우선, 나는 지금의 사회시스템에서, 생존에 불가피한 만큼의 돈을 벌기위해 노력하기는 하겠지만,  '돈'을 벌기위한 이윤활동으로서, 다른 사람들과 '영화제작'이라는 노동을 하고싶진 않다.  혐력하는 사람들도 '돈을 위하여'  활동에 동참하기를 바라지는 않는다.     

 

3.  설득력을 강화하는 장르적 장치에 기대는 일은  '낯간지럽다'

    - 출연자를 내가 느끼는 것보다 더욱 더  '순수하게, 불쌍하게, 매력적이게' 그려내거나

    - 사건들을 내가 느끼는 것보다 더욱 더  ' 극적이게, 아니러니컬하게,  역설적이게, 환상적이게, 정교한 인과관계를 암시하여'  재현하는 것 등은  시간이 조금 흐른후에 보면, 참 낮간지러운 일이다.  

    - 만드는 이와  감상하는 이 간의  '보다 친밀하고, 보다 의미있으며 소중한 소통' 은  그런 잡스러운 장치와는 별로 상관없이 진행되는 것 아닐까?   

    

 4. 이거 지나친 욕망일 수도 있어요.  

     그런데, 100년 후에도 지금과 같이,  자본에 의한 계급구분, 소수 인간들의 타 계급과 대지에 대한 착취가 계속되는 사회라면 어쩌지?

      그 전에 자본주의가 전쟁으로 지구의 생명들을 멸종시키는 짓거리라도 하면, 100년 후의 사람들과 소통해보고 싶다는 나의 욕망도 도루묵이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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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독 나이든 여성노동자를 왜 '어머니'라고 부르는 거야?

 

나이 든 여성노동자를 '어머니'라고 의제화시켜 표현하는 일이 노조의 집회현장에서 종종 있는가봅니다.    뭐, 이것은 그 발언자가 , 힘겹게 싸우고 있는 '중년여성 노동자들'의 모습을 보고, 정말 자신과 가까운 '어머니', '이모,'고모' 들의 모습이 연상되었거나, 아니면 어떤 친밀한 연대감을 표현하기 위해서 그렇게 칭했으리라고 (좋게 ) 생각해봅니다. 

 

그런데 이 것이 적절하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어느 노동자들의 투쟁현장에서 장년의 남성 노동자나  활동가를 '아버님',  '아저씨', '삼촌(엉클)' 라고 부르지 않잖아요. 

어쨋든 '어머니'란 이름은 사회적 지위, 혹은 '가족내에서의 관계'를 표현 하는 말이고요,  

 

국어사전을 들춰보니 

 '자녀를 둔 여자를 자식에 대한 관계로 이르는 말.'  이 이 단어의 가장 일반적인 의미로 적혀있군요.   그런데 우리 사회에는 여러 가족 관계 속에 있는 중년 여성이 상당히 많을거라고 생각해봅니다. 자녀를 낳지 않는 분, 낳을 수 없는 분,  자녀와 떨어져 살 수밖에 없는 분,  다른 사람이 낳은 아이를 돌보는 분, 아니면,  한국의 현재의  제도나 현재까지의 관습이 포괄하지 못한 다른 가족적 공동채 생활을 하는 분,  혼자 지내시는 분,  또는 그 내용을 제 3자가 잘 알 수 없는 삶을 살고계신 분 등등...   

 

그런데, 보통 낯선 성인 여자에 대해서는 보통 뭐라고 부르지요?   

...

저도,  '아주머니!'라는 말이 떠오르는군요.  그 외에 막상 떠오르는 단어가 없는 것을 보면..., 뭐, 음...   어쨋든 복잡한 지하철에서 많은 짐 때문에 물건을 떨어뜨린 사람을 보면,  '아주머니! 장갑을 떨어뜨리셨네요!'  라고 말할 것 같습니다.  

 

참, 부족하다는 느낌이 듭니다만... 뭐 그래도, 영미식의 '유 (You) ' 따위 보다는 나은 것 같기도 하고....  

       

각설하고,

그런데,  '어머니'란  말에는 다른 뜻도 있군요.   

' 사랑으로써 뒷바라지하여 주고 걱정하여 주는 존재를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  이랍니다.

 

 '뒷바라지'와 '걱정' 은  공동체에서 필수적인 것일 겁니다.  그런데 문제는 '다른 사람은 모르겠는데,  어머니 만큼은 그것을 의무로 해야하는 존재'  처럼 여겨지는 현재의 상황을 묵인 용인하는 효과가 있다고  느껴지는군요. 

 

따지고 보면,  '돌보기', '걱정하기(배려하기)' 는 '어머니'들만이 해야하는 것이 절대 아니지요.   또 이것은 모든 공동체의 대다수의 많은 구성원들이 서로 나누어야하는  일일겁니다. ( 이 것은 전통적 가족관계가 강했던 10여년전 전까지는  '돌보는 일이 뭐가 힘들어. 그것은  다 큰 여자들이라면 당연히 해야하는 것 아니야? ' 라는 식이었다가,  지금으로서는  점점 더 '상품'처럼 되어가고 있지요. - '돈이 없냐? 돈을 벌어서, 그 돈을 들여서 노동력을 사서 돌보는 일을 남한테 맡겨라.  돈이 많으면 (물질적으로 폼나는) 돌봄이 가능하다.  네 집 아이들이 외로와서 상처받냐? 그러니 투잡, 쓰리잡 마구 뛰어 돈을 벌어야지 !' 가 신자유주의가  강요하는 삶의 방식이 되었으니까요.)  

  

저는,  일전에, 제 딸의 일로,  초등학교 학부모 모임에 간 적이 있었는데,  교사가 저를 '아버님'이라 부르더군요.  다른 분들은 '대표님' 혹은 '어머님'  등으로 불리고...

그 자리는 그래도, 제가 '자녀의 아버지' 지위란  명확한 지위로 참여한 것이었는데도,  '대표'를 제외만, 많은 학부형들이 '어머이, 아버지'로 불리는 것이 어색하기 그지 없었습니다.

 

대기업의 처분과 탄압에 저항하여, 집회현장에서 싸우는 많은 '아주머니'들(이거 말고 더 나은 일반지칭이 있엇으면 정말 좋겠군요.)은 위의 두 가지의 정의에 따를 때,  '어머니(성격)'  일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은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그렇게 불리는 것이 매우 껄끄러운 분들도 계실거구요. 

 

또 이분들이 '어머니'라고 불리는 순간,  또하나의 낡은  족쇄 하나가 무심코 그들에게 채워진 것이라고 생각이 듭니다.  이 단어에 붙어있는 '(다른 지위의 사람들보다 더욱 더) 돌보아야 하는 자, 더 남을 배려해야하는 자'  라는 함의 말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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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 모두를 잡아 쳐넣어라

복면과 마스크를 쓰고 시위하는 사람들을 잡아넣어야겠다는 집시법 법률안이 나왔다.

미친 놈들...

 

아래의 사람들을 다 잡아 넣어라 !

 

이들은  퍼블릭액세스 프로그램인 KBS의 [열린채널]에 항의하며   시위를 벌였던 독ㄹ비영호ㅘ제작자들이다. 

 

http://cafe.naver.com/shutchannel/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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