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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7/01/05
    2006 다산인권 종간사(2)
    몽상
  2. 2007/01/03
    나무와 사람의 이름을 찾아 묻는 한 해가 되려고요.(2)
    몽상

2006 다산인권 종간사

 

- 초안 -

 

2007년의 해가 밝았습니다. 반인권 악습 철폐와 생존의 권리를 움켜쥔 민중들이 밟고 선 현장에서, 좀 더 아파하고 연대하지 못한 무거운 돌을 쌓아둔 채 저무는 해를 지켜보고 진정 소외된 이들의 목소리가 찬란하게 빛날 여망의 해를 또한 지켜봅니다.


지난 해는 신자유주의와 국가의 폭력에 맞서 빼앗긴 생존의 권리와 직접민주주의를 갈구하는 전 민중이 총궐기하여 분노를 폭발한 역사적인 해로 기록될 것 입니다.


참여정부는 사회 양극화를 가속시켜 민중의 삶을 나락에 빠뜨리다 못해, 그 고단한 삶에 초국적 자본으로 무장한 괴물 ‘한미 FTA’ 의 이빨을 박아놓았습니다. 또한 정부는 한반도뿐 아니라 동북 아시아 평화마저 위협할 전략적 유연성에 합의하고 평택전쟁기지건설을 강행하며, 평화적 생존의 권리를 외치는 주민들과 인권활동가들을 무차별적으로 잡아 가두고야 말았습니다. 국방부는 가증스럽게도 ‘불가피하게 삶의 터전을 옮기셔야 하는 아픔과 미군기지주변 주민들이 감수해야 했던 소음 등의 불편에 대해 위로의 말씀을 드린다’ 로 시작된 편지를 띄워 놓고 용역깡패를 앞세운 무자비한 폭력으로 대추리/도두리의 집과 논밭을 부수고 할퀴어 놓더니, 포수가 총을쏘면 달려가는 사냥개처럼 재빠르게 마을을 포위하고 주민의 숨을 조여온 건 정작 그들을 보호해야 할 경찰이었습니다.


노동 기본권 쟁취를 위해 거리로 뛰쳐나온 노동자들에게도 지배 계급과 기득권층의 탄압은 가혹하기만 했습니다. 하루 아침에 해고된 노동자들의 임금으로 용역 깡패를 사들여 구사대로 둔갑시키고, 차마 믿지 못할 폭력과 잔인한 방법으로 노조원들을 짓밟아도 경찰은 그들을 보호하지 못했습니다. 헌법에 보장된 노조결성의 권리를 압수당한 건설 노동자들에게는 ‘공갈,협박범’이라는 족쇄를 채우고, 지상 75m의 올림픽대교 상징탑으로 내몰고야 말았습니다. 여기에 삼성공화국의 망종 역시 결코 덜하지 않았습니다. 아무런 예고도 없이 해고된 1,700여명의 삼성 에스원 노동자들은 차디찬 11월말의 한강에 뛰어들어 삼성과의 싸움이 건널수 없는 강이 아님을 온몸으로 보여주었습니다. 


한 쪽에서는 반기문 유엔사무총장 배출을 자축하며 ‘인권국 완성’의 축배를 들고 있습니다.


수용시설에서 성폭력에 희생되고 방안에서 굶거나 얼어죽어 갈 삶을 선고받은 장애인들이 언 아스팔트 바닥을 기며 외쳤던 건 그저 지역 사회에서 같이 살고자 하는 것이었습니다. 사람 사냥에 쫓겨 몸을 던진 이주노동자 古코스쿤 셀림씨가, 식량 주권을 쟁취하겠다고 나선 전용철 열사, 노동3권을 외치다가 처참하게 돌아간 古하중근 열사가 죽음으로 쟁취하고자 했던 인권입니다. 저들만의 공간에서 저들만의 인권을 고무하고 있을 때, 밟히고 짓눌리며 배운 인권의 참 의미를 보여준 이들은 따로 있었습니다. 여성, 장애인, 성소수자, 이주노동자... 이 땅 차별철폐의 함성과 생존의 권리를 손에 들고 기꺼이 일어선 전 민중들은 아직 가야할 길이 멀다고 외치고, 그 목소리는 더욱 거세지고 있습니다.


민주주의와 인권을 실종시킨 범죄자들은 이제 두려운가 봅니다.  


그들은 마지막 해와 함께 퇴장하지 않고 ‘복면시위금지법’라는 어처구니 없는 법안을 들고 2007년 벽두에 다시 돌아왔습니다. 배우지 못하고 가지지 못한 이들이 유일하게 입장을 밝히고 의견을 낼 수 있는 집회/시위의 자유는 국가가 최대한 보호해야 할 권리이자 명백한 불가침의 인권입니다. 마스크는 물론 신분확인을 방해하는 손수건, 모자, 선글라스, 목도리, 피켓 등 얼굴을 가릴 수 있는 것이면 '소지하고만' 있어도 경찰이 현행범으로 체포할 수 있게 하겠다는 비상식적인 논리는 국민의 대표로서 본분을 망각하고 민주주의의 시계를 거꾸로 돌리려는 망종이 아닐 수 없습니다.


[다산인권]은 인권 위기의 작금에 더욱 눈과 귀를 세울 것입니다.


실종된 민주주의와 인권을 다시 찾기 위한 모든 노력을 동원하고, 그 가능성을 열어 가기 위해 거듭날 것입니다. 또한 양심적인 세력들의 정의로운 목소리가 공중에 떠돌며 표류하지 않도록 독자들에게 설득력 있게 다가갈 것입니다.

 

더욱 교묘하게 가두고 왜곡시키는 인권 현실에서 존엄한 가치에 대해 절대적으로 옹호하며 모든 권력이 민중 스스로에게 있고, 인권에는 양보가 없음을 다시 한번 선언하는 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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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와 사람의 이름을 찾아 묻는 한 해가 되려고요.

 

이렇게 슬쩍 관리 들어감.. ^^

 

 



 

 나무와 사람의 이름을 찾아 묻는 한 해가 되려고요.


 작년 봄. 활동가 명함을 처음 들고 나선 뒤, 꽤나 많은 사람한테 뭐가 제일 힘드냐는 질문을 꽤나 받았습니다. 참으로 오래간만에 만난 사람을 앞에 두고 쉽게 쉽게 이야기해버리면 그만인 것을 ‘제일’ 이라는 말에 제법 생각을 하게 되더군요. 이제 막 7개월이 넘어선 초짜활동가에게 ‘활동’ 과 ‘삶’ 이라는 만만치 않은 사연중 하나를 골라보라는 일이 야속하기만 했습니다. ^^;;


 생각해보면 개인적으로 가장 힘든 일은 거리에서 사람들을 만날 때 입니다.

바삐 가는 사람들, 행복에 겨운 연인들, 제 자식 손잡고 갈 길 가는 사람들.. 그들의 눈과 귀를 붙잡고 세상이 좀 더 착하게 되었으면 한다고 말하는 일 말이죠. 여러 가지 사안, 여러 가지 행사에서 익숙해질 만도 하겠지만, 쾡-하거나 때로는 차가운 그들의 눈을 볼 때마다 그 거리에서 미아가 되곤 합니다. 등이라도 돌려 가버리면 괜찮을 것을 외계인 보듯 한참을 눈 맞추고 있게 될라치면 지구상에 그 사람과 나만 존재하는 것 같은 착각마저 들게 합니다.


활동가들끼리 모이면 가끔 하는 푸념 하나가 있습니다.

 “대중을 믿냐..”

한 선배 활동가는 말합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믿는다.”


 실제로 여론이 움직이면 안 되는 일이 없습니다. 하지만 여론을 움직이는 일은 쉽지 않고 갖은 노력 끝에 알려내더라도, ‘다 알겠는데.. 꼴사납고 혐오스럽게 시리.. 꼭 저런 방법으로 해야 하느냐’ 고 말하는 사람들이 아직은 너무 많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고단한 활동가들이 긴급하게 대중 행사를 기획하고 치러내는데 비해 그 성과는 초라하기만 하지요. 돌아와 평가하는 자리에선 조그맣게 ‘찻잔 속 태풍’ 이라고 모르게 낙서했다가 지우곤 합니다. 지워 놓고 나선 이내 ‘그러니까 힘든 일. 누군가는 했어야 하는 일’ 이라고 고쳐 적으며 다시 힘을 내는 게 활동가의 일상입니다. 

 

 그래서인지 가까운 친척이나 오랜 친구를 만나면 사는 이야기를 물을 여유도 없이 고백이라도 하는 것처럼 말이 많아지기도 합니다. 배운 것 없고 가진 것 없는 이들이 호소할 때 경찰병력은 방음벽이 되고, 교통체증으로 얼룩진 헤프닝이 되고, 결국 인터넷 기사의 덧글에 잔인하게 밟혀 잊혀지는 현실이 서글프지 않느냐고. 폼 나게 PD수첩이나 무슨 스페셜 프로그램에 나오는 건 고시패스하기보다 어렵고, 세련된 글을 써서 출판하기는 별을 따는 것만큼 불가능하니 모여 외치는 방법 밖에 없지 않겠냐고 말이죠.


 누군가에게 고백하는 건 책임을 져 달라고 하는 것이라고, 억눌린 사람들의 삶을 담보할 수 없다는 표정을 던지는 그들이라도 긴 얘기 끝에는 어깨를 맞대고 술잔을 쳐들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땐 조급한 마음에 지쳤다고 광고하냐며 한마디 하는 것 같아서 머쓱하기도 하고, 돌아오는 길엔 큰 무기를 얻고 온 것처럼 으쓱하기도 한답니다.  


 울창한 숲에서 나무의 이름을 모르면 나무는 나무일 뿐입니다. 나무가 나무이면 나는 나가 되고, 너는 너가 되어 버린다는 이야기를 들은 뒤에 습관적으로 길가에 서 있는 나무의 이름을 묻고 기억해두는 버릇이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정작 좀 더 가까운 사람들에게 먼저 다가가는 일에는 게을렀다는 반성을 하곤 합니다. 


 영화 [아름다운 세상을 위하여]에서 11살 헬렌 헌트가 ‘세상을 아름답게 하기 위해 내가 할 일’ 이라는 학교 숙제에, “내 옆에 3명에게 도움을 주면 된다” 고 했던 말이 오래오래 기억에 남습니다. 그 3명이 각 3명에게 감동을 주면 9명이 되고, 27명이 되고, 81명이 감동하게 되는 거라고 말이죠. 결국 주인공 헌트가 만난 3명에서 시작된 보이지 않은 릴레이는 결국 주인공의 가까운 누군가에게로 이어져 그 아이의 깊은 상처를 치유하게 된다는 이야기로 영화는 끝이 납니다.


 2007년 새해가 밝았습니다.


 새해에도 어김없이 새로 뜨는 해만큼이나 조용히 사람에서 사람에게 전하는 움직임은 멈추지 않고 착한 세상을 만들어 가고 있습니다. 그 믿음으로 지치지 않고 더 많은 나무 이름 을 기억하고, 좀 더 많은 사람을 만나는 한 해가 되었으면 합니다. 새해 새로운 마음으로 인사를 드리는 저나 정말 오랜만에 편지를 받으시는 여러분에게도 가장 가까운 것에서 감동받는 한 해가 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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