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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Dispossess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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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


The Dispossessed님의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 에 관련된 글.

 

<아바타>를 본 후 안구정화용으로 봤던 영화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가 너무 좋아서 책까지 읽게 되었는데.. 역시 명불허전이라. 끝내줬다.

처음에는 원서로 도전했다가 너무 속도가 안 나길래 민음사에서 나온 번역판으로 다시 읽었다. 번역도 깔끔하고 좋았다. 물론 원서의 간결한 문장이나, 각 캐릭터의 말투는 번역에서 다 살리지 못했지만, 그래도 이 정도면 훌륭한 번역이라고 생각된다. 시간나면 원서로 다시 도전해봐야겠다.

이 책을 읽는 내내 떠올랐던 건 푸코의 <감시와 처벌>이었다. 마치 <감시와 처벌>의 소설판을 읽는 느낌이랄까. 그런데 이 소설이 먼저 나왔던 걸 감안한다면, 오히려 <감시와 처벌>을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의 충실한 해설판이라고 불러도 괜찮을 정도로 <뻐꾸기...>는 훌륭했다.

<감시와 처벌>이 좋았던 분들에게는 <뻐꾸기...>를 권하고 싶고, 영화 <뻐꾸기..>가 좋았던 분들에게는 원작 소설과 <감시와 처벌>을 권한다.

소설의 저자인 켄 키지는 소설의 1인칭 화자인 추장이 주인공이 아닌 것에 실망했다고 하지만, 영화는 소설의 주제 의식을 잘 살려냈고, 중요한 사건들도 놓치지 않았으며, 주인공 캐릭터도 잘 살렸기에 썩 잘 된 각색이라고 생각된다.

물론 깊은 생각꺼리야 소설이 영화보다 훨 낫지만, 영화 역시 교과서스러울 정도로 잘 만들어진 영화인지라, 전혀 불만은 없다. 언제 기회되면 연극도 함 보러 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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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돌아보면 : 2000-1887 - 1장 (2)


1887년 나는 서른 살에 접어들고 있었다. 나는 결혼을 하지는 않았지만, 에디스 바틀렛과 약혼한 상태였다. 에디스는 나와 마찬가지로 마차 위에 올라탄 사람이었다. 당시 우리가 어떻게 살았었는지에 대한 대체적인 인상을 독자들에게 전달해주려는 목적으로 제공했던 마차의 비유에 더 이상 억매이지 않고 다시 말하자면, 그녀의 집안은 부유했다. 돈만 있으면 맘 편히 세련되게 살 수 있었던 그 시대에, 여성은 부자이기만 하면 구혼자를 구할 수 있었다. 하지만 에디스 바틀렛은 아름다운데다 우아하기까지 했다.

여성 독자들은 이 이야기에 항의하리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여성 독자들은 이렇게 말씀하실 것이다. “그녀가 아름다웠을 지는 몰라도 우아하다는 건 어림도 없어. 당시 유행했던 옷차림으로 볼 때, 머리 위에는 30센티나 솟은 현기증 나는 물건을 뒤집어쓰고, 믿기 힘들 정도로 길게 늘여 붙인 치마는 재단사들이 그전의 어떤 시대보다도 비인간적인 형태로 만든 것들이었어. 그런 옷을 입은 사람이 우아하다니!” 그런 지적은 전적으로 타당하다. 하지만 20세기의 여성들이 여성적인 우아함을 강조하는 적절한 의상의 모습을 아름답게 잘 보여주고 있기는 하지만, 20세기 현대 여성들의 증조모 세대에 대한 내 기억을 더듬어보면, 아무리 기형적인 의상을 입더라도 여성적인 우아함을 완전히 가릴 수는 없었다는 답변만은 해줄 수 있을 것 같다.

나는 당시 도시에서 사람들이 가장 탐내는 지역, 즉 주로 부자들이 사는 지역에 우리가 살 집을 짓고 있었는데, 우리의 결혼은 그 집이 완성되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상황이었다. 당시 보스턴에 있는 각 주거지들에 대한 선호도는 자연적인 특성이 아니라 이웃에 사는 사람들의 특성에 따라 결정됐다는 사실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각 계급과 국민들은 자신과 같은 부류의 사람들로 이루어진 주거지에 함께 살았다. 가난한 사람들 사이에서 부유한 사람이 살거나, 교육을 받지 못한 사람들 사이에서 교육을 받은 사람이 사는 것은 질투심 가득한 외부 인 사이에 혼자 고립되어 사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처음 집을 짓기 시작했을 때에는, 1886년 겨울이면 집이 완성이 되리라 예상했었다. 하지만 그 다음해인 1887년 봄까지도 집은 완성되지 않았고, 내 결혼식도 계속 미뤄지고 있었다. 열렬한 연인을 특히 분통터지게 만들었던 건설 지연의 원인은 연이어 발생하는 파업이었는데, 다시 말해서 벽돌공과 석공, 목수, 도장공, 배관공, 그 외 주택 건설과 관련된 업종의 사람들이 동시에 노동을 거부했다. 당시 파업의 원인이 정확히 무엇이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그 시대에 파업은 일상적으로 일어났기 때문에 사람들은 파업의 원인이 무엇인지 알아보려고 하지도 않았다. 1873년 대공황 이래로 파업은 이 산업에서 저 산업으로 거의 끊임없이 일어났다. 사실, 당시에는 어떤 노동자든 한 번에 수개월 이상 자신의 업무를 착실히 지속해나가는 걸 보는 것 자체가 예외적인 일이었다.

앞서 언급한 시대를 지켜본 독자라면 이러한 산업의 동요 속에서, 모든 사회적 결과물과 현대 산업 체계를 수립함으로써 종료된 위대한 운동이 시작되는 모순된 상황을 당연히 알아볼 수 있을 것이다. 지금 회상해보면 너무도 명백해서 어린애라도 그러한 사실을 알 수 있을 정도지만, 예언자가 아닌 그 당시 우리들로서는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 전혀 알지 못했다. 우리가 알 수 있었던 것은 국가가 산업적으로 아주 기묘한 상황에 놓여있다는 정도였다. 노동자와 고용주간의 관계, 노동과 자본의 관계는 도저히 납득하기 힘들 정도로 뒤죽박죽인 상황으로 보였다. 노동계급은 매우 갑작스럽게 그리고 총체적으로 자신의 처지에 대한 깊은 불만과 어떻게 해나갈지 알 수만 있다면 이 상황을 완전히 뜯어고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노동자들은 모든 곳에서 하나로 단결하여 높은 임금과 노동시간 단축, 보다 나은 주거시설, 보다 나은 교육 혜택, 세련되고 사치스러운 삶에 대한 자기 몫 등 세계가 그 당시보다 훨씬 부유해지기 전에는 도저히 줄 수 없는 요구들을 제기했다. 그들은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는 조금이나마 알고 있었지만, 어떻게 그것을 달성할지는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래서 그러한 문제에 대해 조금이라도 불빛을 비추며 안내해주는 이에게 열광적으로 사람들이 몰려들며, 지도자인 척 하는 많은 이들에게 갑작스런 명성을 안겨 주었지만, 자칭 지도자라는 사람들은 일부만이 그나마 아주 약한 빛을 겨우 던져줄 수 있을 뿐이었다. 노동계급이 얼마나 터무니없는 목표를 꿈꾸었든 상관없이, 노동자들이 그들의 최고의 무기였던 파업을 진행하는 동안 서로를 지원하며 보여주었던 헌신적 사랑과 그들이 파업을 진행하기 위해 겪어야 했던 희생은 의심할 바 없이 그들의 순전한 진심이었다.

앞서 언급했던 노동운동으로 빚어진 상황을 가장 일반적으로 일컫는 용어인 ‘노동 쟁의’의 최종 결과에 대해, 내가 속한 계급의 사람들이 가진 의견은 개인적인 성향에 따라 제각각이었다. 혈기왕성한 사람들은 노동자들의 새로운 희망을 이루는 것은 당연히 불가능하다고 강력히 주장했는데, 이는 단지 노동자들의 요구사항을 들어줄 수 있을 정도로 세상에 돈이 충분치 않다는 것 때문이었다. 또한 노동대중이 매우 열심히 일하면서 적은 양의 식사만 했기 때문에 인류가 전체적으로 굶주리지 않을 수 있었으며, 그러므로 세계가 이토록 가난한 상태에서는 그들의 삶의 조건을 상당한 수준으로 개선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노동자들이 투쟁해야 하는 대상은 자본가가 아니라 쇠사슬에 묶인 인류의 환경이라며, 그들이 머리만 영리하다면, 이러한 사실을 깨닫고 상황을 개선할 수 없다는 사실을 묵묵히 받아들이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들 보다는 조금 차분한 사람들도 이 주장들을 모두 다 인정했다. 물론 노동자들의 열망은 당연히 성취될 수 없겠지만, 노동자들이 사회를 엉망진창으로 만들 때까지도 그런 사실을 깨닫지 못할 가능성 때문에 두려워했다. 노동자들은 투표권과 내키기만 한다면 휘두를 수 있는 권력이 있었고, 노동자들의 지도자들은 노동자들에게 그렇게 하라고 했다. 일부 낙담한 관찰자들은 사회적인 대격변이 일어날 것이라는 예상까지 나아갔다. 그들은 문명이라는 사다리의 끝까지 올라간 인류가 이제 대혼란 속으로 뛰어들려하고 있지만, 이 순간이 지나고 나면 인류는 자신을 추스르고, 문명의 사다리를 다시 올라가기 시작할 거라고 주장했다. 선사시대와 역사시대에 걸쳐 반복해서 경험했던 이런 일이 인간의 두개골에 영문 모를 융기들을 만들었을 것이다.(이는 19세기까지 유행했던 골상학(骨相學, phrenology)에 기초한 이야기이다. 골상학은 두개골의 모양(융기 등)으로 인간의 성격이나 능력을 측정하던 유사 과학으로서 인종주의 등의 기초가 되기도 했다. - 옮긴이 주) 인류의 역사는 위대한 모든 운동과 마찬가지로 순환하며 출발 지점으로 다시 돌아간다. 진보가 막연하게 직선으로 진행될 것이라는 생각은 실제로는 전혀 맞지 않는 근거없는 망상에 불과하다. 인류의 진행 과정은 혜성의 포물선 궤도로 묘사하는 게 아마도 더 나을 것이다. 야만이라는 원일점(遠日點)에서 태양을 향해 위로 나아가던 인류는 문명의 근일점(近日點)에 도달하고 나서 다시 한 번 대혼란의 영역에 있는 지옥을 향해 아래쪽으로 내려갈 수밖에 없다.

물론 이런 주장은 극단적이긴 하지만, 내가 아는 이들 중에서도 진지한 사람들이 당시의 시대적 징후를 함께 논의할 때 이와 매우 비슷한 생각을 받아들였던 기억이 난다. 당시 사회가 거대한 변화를 낳을 중대한 시기에 접어들고 있다는 것이 생각이 깊은 사람들의 보편적인 의견이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노동 쟁의의 원인과 과정, 해결책은 언론과 진지한 대화에서 항상 다른 화제들보다 중요한 자리를 차지했다.

당시 대중들의 신경이 얼마나 곤두 서있었는지는, 스스로 아나키스트라고 부르던 작은 모임의 사람들의 말 때문에 일어난 공포보다 더 기막히게 잘 묘사하기는 힘들 것이다. 이들은 폭력의 위협을 통해 미국 민중들에게 자신들의 생각을 받아들이도록 만들려고 했다. 마치 자신의 정치 제도를 지키기 위해 국민의 절반에 달하는 반란군을 간단히 짓밟아버렸던 강력한 국가가 겁에 질려서 새로운 사회 제도를 도입하게 될 것처럼 말이다.

나는 부자인데다 당시의 제도에 많은 이권이 달려있는 사람으로서 나와 같은 계급의 사람과 같은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내가 글에 쓴 그 시대의 노동 계급에 대해 내가 가졌던 특별한 불만이 있다면, 그들의 파업으로 인해 미뤄지고 있던 내 행복한 결혼 생활 때문에 일어났으며, 내가 그들에게 특별한 앙심을 품고 있었다는 점은 의심할 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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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돌아보면 : 2000-1887> 처음부터 읽기 : http://blog.jinbo.net/neoscrum/?cid=19
 
저자 : 에드워드 벨러미(Edward Bellamy)
번역 : neoscrum(http://blog.jinbo.net/neoscrum)
원문 : 구텐베르그 프로젝트(http://www.gutenberg.org/etext/624)
참조 : 펭귄 클래식 < Looking Backward : 2000-188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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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 아이티 지진의 계급성


원본 : Haiti's Classquake

번역 : 전소희

 

지난 1월 21일 강도 7.0 지진이 포르토프랑스를 강타하기 닷새 전, 아이티 정부 산하 공기업현대화위원회(CMEP)가 아이티 공영 통신사인 텔레코 지분의 70%를 매각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오늘날 포르토프랑스는 파괴됐고 수천명 또는 수십만명이 사망했다. 마을로 이어지는 도로가 차단됐고, 많은 사람들이 생매장 당했다. 레오간(Léogâne) 등 남부 반도에 걸쳐 있는 도시는 완전히 붕괴되어 피해자 수조차 파악할 수 없다고 한다. 르네 프레발(René Préval) 아이티 정부는 여전히 무능함을 드러내고 있으며 포르토프랑스에 나타나지도, 라디오에 출연하지도 않고 있다.

 

수도의 보아베르나(Bois Verna) 지역 퐁모랑(Pont Morin)에 있는 텔레코 건물은 심하게 무너진 상태이다. 포르토프랑스에서 올라온 한 트위터 메시지는 건물 주축대가 파괴됐기에 주민들은 대피해야 한다는 경고를 하고 있다.

 

수많은 사람들이 핵심 의료서비스, 생수나 기타 생필품 등을 구하지 못하는 상황을 보면, 지역 공공 인프라와 인력이 얼마나 부족했는지를 알 수가 있다.

 

그 동안 미국과 국제금융기구들은 아이티 정부에 압력을 가해 특히 이번 재앙과 같은 사태에서 포르토프랑스 주민들에게 도움이 될 법한 사회복지 사업과 공공 인프라에 투자하기보다는 기간산업을 매각하고, 정부의 무상식량배급 사업을 폐지하고, 농촌경제를 부추겨 온 관세를 낮추도록 했다.

 

지난 수십 년 간 아이티 인구구성이 어떻게 변했는지를 보면 자본주의적 세계화가 어떠한 효과를 미쳤는지 알 수 있다. 농촌지역에서 포르토프랑스 빈민촌으로 이주한 수많은 사람들은 언덕 기슭에 허술한 집에서 산다.

 

작가이자 역사학자인 마이크 데이비스(Mike Davi)는 “빈민촌은 잘못된 지질학에서 시작된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빈민촌 세상 (Planet of Slums)”이라는 저서를 통해 데이비스는 오늘날 지구적 자본주의에서 빈민촌이 급증한 현상을 설명한다. 세계 수십억명이 환경적, 지질학적 재앙을 항상 마주한 채 생활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2007년 중반, 아이티 기자 와드네르 피에르와 나는 아이티 공영 통신사가 해체된 과정에 대해 인터프레스서비스(IPS)에 기고를 했다. 우리는 줄줄이 해고된 공공부문 노동자들을 인터뷰했다. 당시 정부는 텔레코 직원 수를 3,293명에서 1,000명 이하로 줄일 계획이었다. 2010년 현재, 프레발 대통령이 임명한 텔레코 임원들은 노동자의 3분의 2를 정리해고 했다. 프레발 대통령은 1996년-2001년 초임 기간 중 이미 국영 제분소 미노테리(Minoterie)와 국영 시멘트 기업을 매각한 바 있다.

 

프레발 대통령은 그의 미선출 전임자(제라르 라토르투 임시정부)가 고안한 거시경제 구조조정 프로그램인 임시협력기본계획(Cadre de Coopération Intérimaire)을 국제 원조기관 및 아이티 관련 단체 등과 함께 계속 추진하고 있다.

 

1980년대와 90년대에 아이티는 외국산 쌀에 대한 관세 인하를 강요받았고, 지역경제를 그나마 보호하고 있던 제도를 폐지해야 했다. 농촌에서 살기 힘들어진 아이티인들은 수도로 계속 이주했다. 수십만 명이 카르푸(Carrefour)와 같은 언덕 기슭의 허술한 빈민촌에 정착했다.

 

아이티 정부는 자본주의적 정책을 이행하면서 국민의 관심을 호도하기 위해 낡은 민족주의 논리를 동원했고, 국제금융기구와 엔지오들, 외국 정부로부터 온 자문과 전문가들과 긴밀한 관계를 형성했다. 정부 정책에 반대하는 세력에 대해서는 잔인한 쿠데타, 무역재제 등이 가해졌고, “올바른 국정운영”을 확립한다는 명목 하에 외국 시민단체들이 들어와 교육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지진 발생 후, 국가로서 아이티는 사라졌다. 경찰은 자기 가족 찾는데 혈안이고, 정부 부처 건물과 유엔기지는 폐허가 됐다. 많은 고위 관료들은 콘크리트 더미 아래 매장돼있다.

 

지진 직후 며칠 동안 피해주민들을 방문하거나 라디오를 통해 연설조차 하지 않아 비난을 사고 있는 프레발과 냉담한 아이티 정부 관료들은 도시 외곽지역 경찰서로 거처를 옮기고 외국 정치인들과 기자들을 만나고 있다. 지난 화요일 프레발은 인근 도미니카공화국에 있는 산토도밍고에 가 해외 원조 기관들을 만났다.

 

워싱턴포스트는 “미국 정부는 농업경제학자인 프레발을 경제성장을 중시하는 관료(technocrat)로서 지난 수십년 간 아이티를 분열시킨 정치적 이데올로기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으로 인식하고 있다. 그러나 지금처럼 재앙이 닥쳐 국가 전체를 재건해야 하는 상황에서 프레발이 계속 국민을 회피하면서 수백만 아이티인들은 과연 정부가 있긴 한지에 대한 의문을 품고 있다”고 보도했다.

 

수백명의 기자가 포르토프랑스에 쏟아져 들어왔고, 미군은 폐허가 된 공항을 기지로 사용하고 있으며, 미 국무장관 힐러리 클린턴은 현장에 급파된 상태이다. 미군은 대형 무기를 실은 항공기를 우선 착륙시켜야 한다며 의약품과 구조용 기기를 실은 대형 항공기 여러 대를 거절해 프랑스와 베네수엘라, 국경없는의사회로부터 항의를 받았다.

 

국제 언론사들은 붕괴된 건물 콘크리트 더미를 손으로 파고 있는 아이티인들의 모습을 보도하고 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자 살려달라고 외치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점점 희미해지고 있다.

 

어떤 언론사들은 기아가 확산되고 있는 상황에서 먹을 것을 찾아 도심지역을 헤매고 있는 빈민들을 ‘약탈자’라고 부르고 있다. 도시 다른 쪽에서는 무장한 사설 경호원들이 큰 시장을 지키고 있다.

 

지금과 같은 위기 상황을 제대로 대처하려면 사회기간시설에 투자하거나 무상식량배급 사업을 운영하고 빈민촌 주거환경을 개선할 수 있는 보다 큰 정부가 필요하다. 그러나 지난 수십년 간 아이티에 강제된 긴축 정책 때문에 이런 정부를 구성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2001년부터 2004년 타도될 때까지 집권한 아리스티드 정부는 무역재제, 엘리트계급과 반대파가 사주한 암살 기도 등 위협에도 불구하고 사유화 정책을 거부했고, 국가 무상식량배급소와 문맹퇴치학교 등을 만들었고, 빈민촌을 부분적으로나마 개조해줬다.

 

이런 미미하지만 반가운 조치들은 이제 과거사이다. 민주적 절차를 통해 발언하고자 하는 국민들의 노력을 짓밟고 국가경제를 지구적 자본주의에 강제적으로 종속시킨 지배엘리트는 그들이 지배하고자 하는 민중들로부터 괴리되어 있다. 이들은 사회학자인 윌리엄 로빈슨(William Robinson)이 그의 저서 “지구적 자본주의 이론 (A Theory of Global Capitalim)”에서 “초국가화된 남반구 토호 지배세력으로서... 때로는 ”현대화하는 부르조아지“로 불리며, 대대적인 사회적·경제적 구조조정과 지구적 경제 및 사회로의 통합을 주도한 자들”이라고 한 사람들이다. 폐허 더미에서 아이티인들이 이제 이 모든 것을 거부하겠다 해도 놀랄 만한 일이 아니다.

 

지리학자 케네스 휴잇(Kenneth Hewitt)은 2만3천명의 생명을 앗아간 1976년도 과테말라 지진을 조사하면서 “계급지진(classquake)"라는 말을 만들었다. 당시 지진이 유독 빈민촌을 강타했기 때문이다. 오늘날 아이티에서의 ”계급지진“은 자본주의적 세계화와 미국 개입과 맞물려 훨씬 더 심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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