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일곱 번째 여행 - 해파랑길 ⑥ 태풍, 27구간(2019년 10월 13일)
또 태풍이다. 일본을 통과하고 있다지만 어찌나 큰 것인지 동해안 전역이 파랑주의보다. 버스 안에서 울리는 주의문자, 창밖으로 보이는 흔들리는 나무. 심상치가 않다. 더구나 삼척을 지나면서부터는 여기저기 흙이 밀려 내려왔던 흔적들. 집 안에까지 물이 찼던지 창문까지 다 뜯어내고 청소 중인 집들. 얼마 전 태풍 피해만 해도 아직 가시질 않았는데. 걱정이다.
부구에 내리니 바람이 그새 더 거세졌다. 온갖 쓰레기가 날라 다니고 때 이른 낙엽까지 지고. 핵발전소서부터 이어진 고압송전선이 머리 위에 어수선한데, 굉음까지 내지르고 있으니 이거야 원. 아스팔트 오르막이 아니라도 이런 고역이 또 어디 있을까. 뛰다시피 발길을 재게 놀린다. 어서 여기서 벗어나야겠다는 생각뿐이다.
고목1리쯤 왔을 때서야 겨우 버스정류장에서 잠깐 쉰다. 그나마도 가는 날이 장날이던가. 해가 정류장 맞은편에서 내려 보고 있어 앉지는 못한다. 그래도 스트레칭으로 몸도 풀고. “환경이 숨 쉰다”는 되도 않는 말이 쓰여 있는 광고판을 보고 궁시렁도 대고. 겨우 요기밖에 안 왔나, 가야할 길도 짚어보고.
재미없고 지루한 길을 근 1시간이 걷다보니 길이 끊긴지도 모르고 지나쳤다. 헌데 그도 그럴 것이 교량 놓는다고 둑길을 다 헤쳐 놨으니 헤매는 게 당연하다. 게다가 길이 저쪽으로 이어졌다고 표시가 됐는데 그걸 또 놓쳤으니 누굴 탓하랴. 조심조심 무너지지 않게 제방으로 올라서야지. 묶어 놓은 개쯤이야 이번엔 놀랄 일도 아니다.
후정2리 마을회관 앞을 지나면서부터는 한결 낫다. 바람은 여전하고 찻길이긴 하지만 오가는 차도 없고 송전선도 없다. 비 피해도 태풍이 지난 흔적도 없다. 느닷없이 나타난 활주로에 어안이 벙벙하다가도 곧 두 팔 벌려 누웠으니 쉬어가기 좋다. 사진촬영도 안 된다던데 어디서 나타났는지 모를 차만 아니었다면 좋았을 것을.
느닷없이 나타난 강릉 어디쯤에서 걸었던 듯한 오솔길을 따라 죽변읍에 들어서니 4시가 살짝 넘었다. 죽변터미널까지만 가면 오늘 일정은 끝이니 여유를 부려본다. 걷기여행을 하면서 중간에 뭘 마시는 건 처음이지 싶다. 혹시나 해서 책을 넣어오긴 했는데 30분 넘게 책장을 넘길 수 있다니.
드라마 세트장 이름과 딱 맞아떨어진다. 어찌나 파도가 센지. ‘폭풍 속으로’ 바닷가로 내려가기는커녕 눈에 찔릴까 대숲 사이를 지나기도 쉽지 않다. 여기저기 전망대가 놓여 있지만 여기도 통과. 멀찍이서 눈만 빼꼼 내밀고 까치발만 굴린다. 급기야 해변으로 갈 엄두가 나질 않긴 했지만. 길 중간이 허물어져 내려 앉아 있다.
하는 수 없다. 등대 쪽으로 올랐다 곧장 죽변항으로 내려가야지. 어디선가 본 듯하지만 크기가 커 남다른 항구를 따라 내처 터미널까지 걸었다. 시간상으로야 밥 먹고 차 타야겠지만 어째선지 빨리 집으로 가고 싶은 맘이다. 찬바람에 걸어서일까 오랜만에 걸어서일까. 비, 태풍, 바람 때문인가 돔, 송전선 때문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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