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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토 모교수의 자작 '당권파 위기원인론'을 보고

어제 '백분설레발'에 나온 모교수가 말했다.

 

"이게 다 옛날 프랙션 활동의 낡은 습관을 버리지 못한 채 그대로 합법정당활동을 하면서 비롯된 일이에요. 옛날에 말이에요... 사실은 지하 프랙션에서 대중조직에 다 '심고' '꽂고' 했던 거고 대중조직(여기서 예는 학생회)은 뭐 사실 그렇게 그려지고 만들어지고 했던 것에 불과하죠... 그래도 그땐 군부독재가 있으니 대중이 그걸 용인했죠. 근데 지금이 어디 그런 시절입니까? 그러니 안 통하죠."

 

단어는 틀릴 수 있겠으나 얘기는 이런 거였다.

 

근데 참... 너무 웃어주시는구만... 씁쓸하다. 그가 ‘실증’과 ‘형식적 민주주의-부르조아민주주의-’에 유독 강한 동기를 갖고 있음이야 익히 알고 있기에 별달리 새로운 언급으로 들리지도 않는다.

 

그런데... 그때나 지금이나 '프랙션'과 대중조직의 관계는 그렇게 완벽하게 자동반사적으로 구성되고 온전히 일방 지배, 통행되는 데 아무런 무리가 없는 구조만은 아니었다. (물론 일면 사실이었고.. 이더라도)

 

특히나 모교수가 학사를 마치고 난 이후의 시간대인 87년 노동자대투쟁과 6월 항쟁 이후의 대중조직의 성장과 분출 후의 변화로부터 80년대 끝트머리 여전히 군부독재치하에서였지만, 폭력의 또 다른 한편의 기만적인 상대적 유화국면 그 약간의 열린 공간에서 대중조직의 재생산이 조금씩 안정화될 즈음 소위 지하와 지상의 관계와 양상이 서서히 달라져가던 기억들이 있다.

 

당연히 그걸 모르지 않겠지만, 이 사람은 앞뒤 없이 “과거엔 다 그랬다”고 하고, 그 말은 TV 앞의 무작위의 사람들에게 도대체 언제부터 언제까지랄 것도 없이 “아, 뭐 그랬고, 그런 걸로 보면 지금도 그렇겠고... 대체로 그렇겠구나”로 들린다.사람들의 생각은 “그래 그러니 대중조직은 그저 역시 허수아비야.”라는 데까지 얼마든 미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마치 아무리 '혁명적인' 당도 대중조직을 무시하거나 권리를 일방적으로 묵살, 부정하고는 혁명을 할 수 없다고 하듯이, 이미 89~91년경의 대중조직만 해도 그렇게까지 맘대로 그릴 수 있기만 했던 빈 도화지는 아니었다.

 

참, 대체 그런데 이 아픈 얘기를 이다지도 웃으면서 할 수 있는 그는 자그마치 20년이 넘는 기간의 이 양자의 관계와 역사를, 양자 그 자체 혹은 둘 중 하나라도 대변할 권리를 스스로에게서 흔쾌히도 부여받은 듯 보인다.

 

“그래 이른 바 ‘논객’이지..” 하며 듣다 보면, 무수한 이들이 맞아가며 쓴 ‘몸빵’의 역사를 입술로 쉽게도 훓는다. 대중에게 별로 친숙하지도 않은 단어인 '프랙션', '프랙션'을 계속 집어들며 반복하면서...

 

“그래도 진보를 애정있게 봐주세요~” 라는 마지막 멘트를 제외하면, 중앙일보 논설위원과 똑같은 해석을 되풀이하며, 자작 '당권파론'을 펼치는 듯 보인다. “'당권파에 대한 비난과 외면’의 역사적 필연성, 불가역성”을 폼나게 펼치며 논증(?)했음에 만족했을까.

 

혼자서 TV를 보며 씁쓸한 조소와 함께, 그가 언급한 부분이 아니라 또 다른 이유로 힘들어 하던 과거의 기억들까지 끄집어내주는 데에는 조용히 분노가 올라온다. 많은 사람들에게 80년대 끝~90년대 초반 즈음의 상황은 다소간의 힘겨움으로 기억되는 부분이 있었기에.

 

웃는 얼굴이 참 ‘경쾌’하기도 하다.

 

그래서 결국 그 진작 버렸어야 할 그 ‘관행’이, 합법정당 하겠다면서도 끝내 버리지 못한 그 관행이 통합진보당 문제의 모든 원인인가? 과연 그럴까?

 

마치 '당권파'만의 타고난 속성인양 낙인찍혀진 '과도한 '프랙션' 편향의 '관행',  비민주성과 패권성만이 지금 이야기되어야 할 것들인가?

 

그래서 '나는 저들이 무얼 했는지 다 알고 있다' 는 듯 과도한 프랙션의 영향력을 비판하며 비단 통진당이 아닌, 결과적으로 훨씬 더 큰 범위의 사람들에 대한 이미지 형성에 기여할 프랙션비판론을 누구보다 앞서 설레발의 밥상에 올려놓고 칼질을 하는가?

 

또는 '전과 27범'이 원하는 바 밑도 끝도 없이 끌려가는 종북주의 논쟁의 수렁이 지금 또 필요한 것인가?

 

그래서 중앙일보 논설위원이 주창하듯(!) "이제 'NATIONAL LIBERATION'은 물러가고 'PEOPLE'S DEMOCRACY'가 진보운동을 '장악(?)'하면 '건강한(?)' '진보정당'운동이 또한 새삼 자리를(?)" 잡는가?

 

소가 웃을 얘기다.

 

많은 이들이 주지하듯이, 자본가계급의 대변인들에게는 사실 '주사' 자체가 문제도, 유일한 적도 아니다. 그들에겐 맑스도, 레닌도, 트로츠키도, 로자도 모두가 섬멸의 대상일 뿐이다.(이 시점에서는 심지어 '스탈린'조차도 물론.)

 

그들에게는 '아래로부터'든 '위로부터'든, 역시 중요하지 않다.(종종 '위로부터'만을 주로 차용하지만)  단지 남한에서 살아가는 대중이 늘 겪고 목도하는 착취체제를 유일무이한 구현 가능한 세계로 설파하면 그만이고, 그 틀에 뭔가 아귀가 안 맞거나 덜 맞는 듯 비춰지거나 뭔가 다른 틀을 갖고 있는 듯 비춰질 여지가 있는 그 어떤  세력에 대해서든 대중적 환멸과 고립을 보다 더 조장하고 배가시키면 그만이다.

 

그렇기에 이 시점에서 새삼 '자본주의 틀내에서의 사민주의적 개량을 진짜 열심히 한번 잘 해'보라며 썩소 섞인 '고무'를 기꺼이 보내며 우경 사민주의의 또 다른 극점으로 'PD'를 설정해놓고 '칭찬'(!)하며 분열을 촉진한다.

 

다시 돌아가보면, 사람들은 단지 '당권파'만을 특정해서 왜 그렇게 '음모적'이었냐고 물어왔는가?

왜 대중정당하겠다면서 안타깝게도 아직도 '프랙션 편향'이며, '비밀결사적'이냐고 캐묻거나 원망하고 있는가?

이른바 '프랙션' 편향이 비판의 주된 촛점인가?

사람들은 왜 현존 '선거법'을, 가식적이기 짝이 없는 '부르조아민주주의'의 절차를, '법질서'를 어겼냐고만, 그 기준에 끼워맞춰지기 힘든 이유와 배경을 관행적으로 계속 싸짊어져왔냐고만 당권파 혹은 이 당에게 물어왔는가?

만일 그 뿐이었다면 당권파가 아닌 전체로서의 이 당에 대한 노동자들로부터의 신뢰가  이 수준까지 떨어지고 있을까?

 

이른바 '비민주성'과 '패권성'으로 표현되는 모습은 오로지 '당권파'만의 문제거나, 그들 당내만의 문제는 아니며, 도리어 대중조직과의 관계 혹은 대중조직 내에서 활동하는 당내 다양한 부분이 함께 상당부분 공유하며 보여주어온 모습이란 생각이다.

더 혹은 덜 '완고하고' '고집스런', 부분이든, 더 혹은 덜 '유연한' 부분이든, 함께 보여준...

   

정작 모교수에게 이런 말이 하고 싶었다.

 

나는, 또 어쩌면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은 실상 그 점에, 거의 '당권파론’ 내지 ‘학'으로 보이는 당신의 그 해석의 지점에 별 큰 관심을 주고 싶지 않을 것 같다고.

 

오히려 그 좁은 ‘비평’보다는 ‘편한 길과 방식’을 찾아가고자 했던 '한 배'가,

쌍용차의 죽음을 생산한 전직 집권세력 자본가정당과의 ‘한 배’조차 '통전'과 '전술'로 설명(!)해낼 수 있는, '대중적 진보정당'이라는 그 정확히도 동일한 입장이,

단지 노동조합조직 상층부가 아닌, 다양하게 표출된 바 있는 노동자운동과 운동진영 내의 목소리를, 2차례의 당대회 결과가 말하는 바를 무시 혹은 방기하며 결국 묻지마 원샷통합으로 내달린... 크게는 같은 발자국이,

오늘에 함께 이르러서까지도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당신'으로 서로 또 한번 먼 발치에 서 있기만 하려는 듯한 '더 큰 전체'로서의 모습이...

현상으로, 나아가 '원인'으로서 더 관심이 있지는 않을까.

 

또 그 중 어느 한 세력이 특별히 더 두들겨 맞을 때 대중앞에서 그들 스스로 서로에 대해 혹은 자신에 대해... 이 '사태'에 대해 말하고 설명(?)하는 논리와 방식에 진정 '관심'이 가지는 않나. 

 

이 당이 노동자계급으로부터는 물론, 또 달리 '대중'으로부터의 신뢰 또한 지속적으로 유지할 수 있을지에,

그들의 불안정한 동거속에서의 이른바 '집권전략'이 만일 '실현'될 미래의 그 어느 시점에서도, 그 어떤 계기를 통해서든 또 다시 얼마든지 표출될 수 있는 상황이 지금 앞당겨져 있음에 관심이 가지는 않나.

 

현재의 이 당이 스스로의 제한성에 대한 인식속에서 노동자, 민중의 운동과 평등한 소통을(총연맹 찾아가는 것만 말고) 더 해나갈 의지와 여력이 과연 남아있는 조직인지에 적든 혹은 크든의 관심이 주어지지 않나.

 

그리고 또 하나, '군부독재 시절엔 대중이 프랙션의 지배를 용인'했는데, 지금이 어떤 시절이냐고? ‘세상이 어떤 세상’이냐고?

 

세상으로 말하면, 그 때에 비해 착취율이 훨씬 더 높고 자본의 이윤율이 하락해 있는, 노동자계급의 과반 이상이 2년에 한번꼴로 해고(계약해지)로 간접살인을 당하는, (군부)자본가독재가 아닌, '날 것'의 자본가독재가 더없이 판을 치는 세상이다.

그래서 이른바 '지식정보의 섭취력'만 '세련화'된 자유주의적 구경꾼들만이 아니라, '원샷통합'의 대상으로서도 국참세력을 능히 포함하고도 남는 이른바 '진보적 대중' 뿐 아니라, 그것이 '지하'든 '지상'이든, 입 도마 위 불리우는 바의 '프랙션'이든 광범위한 이들을 포괄한 조직이든, 아래로부터 투쟁으로 불타오를 때 기꺼이 함성으로 맞으며 그 대열에 몸을 실을 '대중' 또한 존재하는 세상이다. 그런데 우리 힘이 딸려서 안타깝게도 ‘논객’들의 공간이 너무 넓은 그런 세상이다.

 

만일 얼마나 멀든 가깝든, 훗날 그 어느 ‘시절’에 노동자계급과 억압받는 사람들이, 바로 그 과거보다 훨씬 더 자각적이며 높은 사회적 의식을 확보한 '대중'이 '군부독재'가 아닌 '자본가독재’를, 착취체제를 박살내기 위해 대중조직의 권리를 더 튼튼히 보장할 것과 더불어 자신으로부터 탄생하고 순환하고 소환되는 자기 계급의 혁명적 부분(지난 밤 ‘설레발’ 상에서 부정적 이미지를 중심으로 뭉뚱그려진 ‘프랙션’ 및 써클주의가 아니라)의 활동과 그 공간을 더 폭넓게 '용인'하기를 강렬히 원할 땐...

 

그는 또 어떤 얘기를 하려 들지...도통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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