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연수'라는 단어는 왠지 말랑하면서도 건조한 느낌을 불러일으킨다. 그리고 자꾸 발음해보고 싶어진다. 소설가 김연수를 알기 전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지만, 내가 그를 잘 아는 건 아니다. 다만 방금 앉은 자리에서 그의 소설을 한 편 읽긴 했다. 김연수의 소설을 읽고 나면 나도 그만큼이나 어른이 된 느낌이다. 느낌은 느낌일 뿐이라는 것만 잊지 않는다면 그 느낌을 즐기는 일은 좋다.
그 짧은 소설 속에서 김연수는 스스로를 알고 사랑할 때에만 타인에게 사랑을 고백할 수 있다고 말한다. 물론 자기에 대한 앎은 대부분 착각이다. 테일러의 텍스트에 이와 비슷한 뜻을 지닌 인용구가 있다. '우리의 인생에서 비록 사랑하는 사람들이 들어오기도 하고 떠나기도 하지만,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은 그대로 남아 있다.'
반면 테일러는 '불안한 현대사회'에서 이렇게 말한다. '인간 관계가 우리의 정체성을 형성해 주는 것이라면, 그것은 분명히 수단적 임시적일 수가 없다. …… 관계를 맺고 이쓴 당사자들의 자기 실현이 우선이고, 인간 관계는 부차적인 것이라는 인간 관계간을 조장한다(이 문장은 직접 인용이 아니라 참조). …… 자기 진실성의 이상에 비추어 볼 때, 단순히 도구적인 인간 관계만을 갖는다는 것은 결국 자기 파괴적일 수밖에 없다.'
테일러는 진정한 자기 실현을 위해서는 공동체와 연대, 진실한 인간 관계가 중요하다는 진부한 이야기를 선험적인 당위가 아니라 논리로 밝힌다. 그의 수준 높은 논의에는, 그러나 너무도 당연한 한 가지 사실이 빠져 있다. 사람은 타인에게 생채기 내기를 전혀 꺼리지 않는 동물이며, 많은 이들이 타인과의 연결을 부정하며 오직 스스로만을 사랑해야겠다고 생각하는 것은 두려움 때문이라는 점이다.
사실 이 문제에 관해서는 누군가의 이름을 들먹이기보다는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지만 아직 정리를 못했다. 어쨌든 김연수의 시크함(이렇게 간단히 말해버릴 것은 아니지만 생각하기 귀찮으...)보다는 테일러의 진득한 이야기에 나는 더 끌린다. 많은 이들이 부정하는 것을 부정하기는 쉬운 일이지만, 부정을 지양하고 새로운 의미를 찾으려는 이에게는 언제나 진정성이 있다. 무엇이든지 나를 뒤흔드는 것을 만난 순간의 멈춤과 그 연장 속의 미적거림은 기분 좋다. 마치 그런 게 나를 절실하게 지지해주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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