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에 드러난 목소리, 의미와 글쓴이의 의도는 동일하지 않다. 글빨의 문제가 아니다. 문학이나 영화에서야 당연한 이야기지만 이런 블로그같은 개인적인 잡글 쓰는 공간에서도 마찬가지다. 내가 하고픈 이야기를 멋대로 휘갈겨도 글쓴이의 의도는 글에 반영되기란 어렵다. 사실 그런 목적으로 뭘 쓴다는 것 자체가 모순이다.

 

  예를 들어, 결코 좋은 표현은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허세월드라고도 불리는 미니홈피의 다이어리 란에 K가  '요새 이러저러해서 저러이러 이래저래해서 결국 외롭다,,' 라는 요지의 글을 적었다고 치자. 그걸 읽는 이들은 K에게 동정심을 느끼고 그의 외로움에 마음 아파할까? 전혀 아니다. 그 글이 K에 관해 알려주는 것은 K는 외롭다는 이야기를 미니홈피 다이어리에 적는 부류의 사람이라는 것 뿐이다. K가 스무 살이냐 서른 살이냐에 따라서 글이 전달하는 정보는 또 달라지지만, 역시 K의 본 의도와는 관계없다. 혹시 K가 외로움을 내비치기 위해 사용한 문장이 꽤 재치있다든가, 에피소드가 흥미롭다든가, 그렇지도 않다면 그 글은 텍스트 자체로서도 가치가 없다.

 

  그러니까 자기 감정을 토로하거나 이해받기 위해서만 글을 쓰는 건 참으로 쓸데없는 짓이라는 거다. 뭐 쓰는 행위 자체가 주는 정화감이 있으니 개인적으로야 좋은 일이지만, 아픔이나 자기 장점을 타인에게 표현하고 인정받고 싶을 때 그런 방식을 택하는 건 원래의 의도와는 동떨어진 결과를 낳기가 십상이다. 그래도 지 맘대로 하는 거지만.

 

  반대로 말하자면, 좋은 글을 보았을 때 그것이 신선하고 재미있고 건강하고 진정성있고 기발하고 뭐 기타 등등의 이유로 글쓴이에게 매력을 느끼는 것 역시 어리석은 일이다. 글에 드러난 소소한 아이디어든 주제든과 글쓴이의 생각 사이에 꼭 긴밀한 연관이 성립되지는 않는다. 글쓴이의 역할은 그저 할 수 있는 여러 가지 생각 중에서 텍스트화되었을 때 읽는 이에게 가장 의미 있게 여겨질 수 있는 것들을 조합하고, 거짓으로 양념을 치는 게 아니던가.

 

  작품에 드러난 아이디어들이 진실로 그 작가의 것일까? 좋은 텍스트는 그것이 쓰이는 과정 자체 중에 만들어지는 경우도 많다. 그렇다면 좋은 글이란 우연적인 것일 수도 있다. 글은 쓰이는 동안에 나름의 생명력을 스스로 얻어가고 그 힘으로 나아간다.

  어느 작가의 소설이 좋은 것과 작가가 좋은 것은 분명 별개다. 내가 밀란 쿤데라를 좋아하는 건 그의 화자가 묘사하는 면들을 작가 그 자신이 볼 수 있는 통찰력, 그것을 객관화시킬 정도의 냉소, 내가 관심있는 일정한 영역 안에서 주제를 선택하는 성향... 뭐 그런 면들이 좋으니까 섹시한 거지, 그의 소설의 플롯이나 그것이 말하는 주제가 얼마나 깊이있고 의미있는 것인가와는 다른 문제인 거다.

 

   잡글이든 소설이든 시나리오든 최적이라고 생각되는 상태로 만들기 위해서, 부풀리고 축소하고 없애고 끼워넣고, 거짓말을 섞고 그러다보면 그 안에서 나는 굉장히 작아지고 때로는 완전히 지워진다. 뭐라 설명할 수 없지만 나는 그럴 때의 느낌이 굉장히 좋다. 그러니 블로그처럼 개인적인 특수한 공간에 쓰이는 글들이라고 해서, 결코 내 내밀한 비밀을 털어놓는 게 아니라는 것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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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1/02 21:55 2010/01/02 2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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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김기O
    2010/01/04 23:22 Delete Reply Permalink

    10 페이지 정도 읽었는데 난 이 글이 참 좋으네. 왔다감.

  2. 멍청
    2010/01/06 11:34 Delete Reply Permalink

    삶에는 꽤 많은 우연이 겹쳐있고,
    운때가 맞으면 화자의 바람에 어긋난 글이 역시 어긋나게 전달되어. 읽는 이에게는 근접하게 전달될지도 몰라;;
    아니면, 함수라고 생각해보기도 하는데, 나의 f(x)와 그이의 g(x)가 비슷하다면 결과물을 보고 대입값을 짐작해볼 수도 있지 않을까..
    뭐, 그런 일들이 쉽지는 않다는 건 나도 알아..;
    내가 남겨놓은 배설물들에는 언제나 어느만큼의 가식이 있지만, 그래도 그걸 남겨놓는 건, 나에게 그런 기적같은 우연이 일어나길 바라는 마음이 있어서인 것 같아..;

    이글루스 갔다가 넘어왔는데, 이 글 대문에도 걸려있네ㅋ

    1. Re: 어느바람
      2010/01/15 01:02 Delete Permalink

      하하 전부터 뭔가 빗껴가는 느낌인걸
      요새 바쁘다며? 나중에 만나서 얘기 하자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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