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게로

                                       최승자

 

 

흐르는 물처럼

네게로 가리.

물에 풀리는 알콜처럼

알콜에 엉기는 니코틴처럼

니코틴에 달라붙는 카페인처럼

네게로 가리.

혈관을 타고 흐르는 매독 균처럼

삶을 거머잡는 죽음처럼.

 

 

 

 

  '네게로'라는 제목과 1, 2행의 '흐르는 물처럼 네게로 가리'까지만 읽으면 누구나 이 시는 보통의 연시겠거니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바로 그 다음 행부터 사정이 달라진다. '알콜, 니코틴, 카페인, 매독 균, 죽음', 사랑과는 도무지 어울리기 힘들어 보이는 시어들에게 독자의 예상은 배반당한다. 대상의 관습적인 의미와 어긋나는 시어들을 결부시켜, 그 의미를 찢어내면서 빚어내는 충격은 새로운 '시적인 느낌'을 만들고 있다.

  알콜은 술, 니코틴은 담배, 카페인은 커피를 제유한다. 술, 담배, 커피는 온 세상이 줄기차게 끊으라고 외쳐대는, 몸에 나쁘다는 대표적인 기호품들이다. 그러나 화자에게 그것들은 아직 내가 완전히 닿지 못한 너와의 거리, 그 결핍을 해소하려는 애처로운 발버둥질이고 널 사랑한다는 아우성이다. 그러한 행위들이 '혈관을 타고 흐르는 매독 균'처럼 자신의 건강과 마음을 해치는, 스스로를 파멸로 밀어 넣는 일임을 화자 역시 알고 있다. 그래도 화자는 살기 위해서는 네게로 가야만 한다. 네게로 가지 않아도, 네게로 가도 죽을 수밖에 없다는 인식은 '죽을 만큼 사랑해'라는 우스운 말놀이와는 다르다. 화자는 종국에는 삶을 죽음에 저당 잡히고 죽음처럼 네게로 가겠다 한다. 자신을 파괴할 만큼 절박한 사랑은 처절하리만치 지독하게 느껴져서 나는 이 시에게서, 이 사랑에게서 도망치고 싶어진다. 이 지독한 사랑에는 '너' 역시 잠식당하고 말 것이다. 이보다 더 강렬하고 섬뜩한 사랑 노래가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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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6/27 12:50 2008/06/27 1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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