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파부침선'

http://hook.hani.co.kr/blog/archives/4438

조국 교수가 한겨레 '훅'에 쓴 글이다.

 

제목은 2012년을 위하여 ‘파부침선’하라

 

2012년을 위하든 그렇지 않든, 나를 포함해 6.2 지방선거 결과를 조금이라도 즐겁게 받아들였던 이들은 '파부침선'의 화두를 마음과 몸으로 새겨야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번 선거에서 진보진영이 얻은 자리나 힘이 혹여 자신의 밥솥이나 배라고 생각한다면 즉시 깨뜨리고 가라앉혀야 할 것이다.

 

* 破釜沈船(舟) : 밥 지을 솥을 깨뜨리고 돌아갈 때 타고 갈 배를 가라앉힌다는 뜻으로, 살아 돌아오기를 기약하지 않고 결사적 각오로 싸우겠다는 굳은 결의를 비유하여 이르는 말. 파부침주, 파부침선.(출처: 네이버 백과사전)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일단 제자리로 돌려놓고

일제고사로 해직된 교사들을 복직시키는 교육감이 나오기를 간절히 바란다.

일단 이것부터 제자리로 돌려놓고, 그리고 앞으로...

 

아래 사진은 일제고사 거부를 이유로 해직된 동해 선생님들이 '해직은 부당하다'는 판결 직후 인터뷰를 하고 있는 모습이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들뢰즈, 교육 그리고 되기(서문)

 Inna Semetsky . 2006. Deleuze, Education and Becoming. Sense Publishers .

 

INTRTODUCTION


1899년 한 미국 학자가 유럽에서 있었던 강의에 초대되었다. 20세기의 시작과 일치하는, 이 사건은, 이전 식민지 국경을 넘어 프래그머티즘(pragmatism)에 대한 인식을 선도한, 미국 철학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며 하나의 전환점이 되었다. 한 세기가 지난 새로운 밀레니엄에서 시계추가 반대로 움직이고 있다. 이 책의 목적은 (영어권에) 아직 그 이름이 낯선 프랑스 후기구조주의 철학자 Gilles Deleuze(1925-1995)를 가장 미국적인 전통속에 있는 프래그머티즘 위치로 자리매김시키면서 영어권에 교육철학자로서 소개하는 데 있다. John Dewey를 Deleuze의 파트너로서 사용할 것이다. 이 책은 두 철학자를 비교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근대의 최전선에 잠복해 있는 포스트모던 경향의 특정한 것을 선택적으로 가져오는 데 초점을 맞추지도 않을 것이다. 오히려 전체적인 프로젝트는 다음에 오는 병치적인 Bernstein(1995) 모델의 아이디어 - 두 가지 생각은 둘 사이의 보편적, 공유 수준(plane)을 만들 수 있도록 진행한다. - 에 토대를 두고 있다.

 

Richard Bernstein(1971, 1983, 1995)은 실제적이고 방법론적인 관점 모두에서 대륙적이고 프래그머티즘인 가로지르기를 시도했다. 그는 특별히 두 가지 전통의 가치와 중요성을 알고 있었다. 그 두 가지 전통은 선험적인 이론적 판단으로서만 엄격하게 정의된 것이 아닌 축적된 결과들로 이끄는 본질적으로 실천적인 예술(practical art)로 그가 생각하는 이른바 실험적 앎(experimental knowing)의 전통이다. 이 책은, 사고-실험(thought-experiment)으로 시작해서 Bernstein에 의해 옹호되고 그가 『새로운 배치』(the new constellation)라고 묘사한 접근법에 토대를 둔 다음의 장들에서 최고조에 달한다. 배치(constellation) 은유는 Dewey와 Deleuze의 사상을 단일한 공통분모로 축소시키기는 하지만, 대신 그들 각각의 철학들 속에서 외관상 “공유된 가정들, 위임들과 통찰들”(Bernstein, 1983, p.2) 접근하는 데 도움을 준다.

 

이 책에서 사용된 문체(style)는 현대 문화연구에서 사용하는 지도제작의 다양하고 포괄적인 보다 넓은 형식을 가지고 엄격한 분석적 논증의 좁은 경로를 보충하는 지도제작 방법(cartographic method)에서 끌어왔다. 지리학적 은유의 공간성은 게다가 Dewey(Hickman, 1998; Rescher, 1996, 1998)와 Deleuze(Deleuze, 1990; Deleuze and Guattari, 1994) 모두의 방법지향적 형이상학(process-oriented metaphysics) 속에서 탁월하다. 선도적인 이론가인 동시에 사회운동가이며, 프랑스에서 실험적 의학을 하는 실천적인 정신분석학자인 Felix Guattari의 마지막 프로젝트인 『철학이란 무엇인가?』(What is philosophy?)를 포함해 여러 작업들을 Deleuze와 함께 했음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이론과 실천 두 측면 모두에서, 이 공동 작업은 공유된 그리고 (특정한) 상황에 처한 것으로서의 지식에 대한 새로운 접근법을 나타낸다. 그리고 철학을  “적실하게” 사회문화적 이슈들과 실천적 관심들에 보다 긴밀하게 연결시킬 수 있게 한다.

 

이 책은 다음과 같은 중요한 목표들을 가진다. : 시간, 공간, 그리고 문화를 가로질러 프래그머티즘(pragmatism)의 타당성을 복원하고, 지식 경제를 프래그머틱하게 바라보도록 Deleuze 철학을 정치시킨다. ; Deleuze의 비정통적인 인식론과 윤리학에 토대를 둔 개념들의 교육학으로 현대 교육학을 풍부하게 한다. ; Deleuze와 Guattari의 비의미론적(비기표적, a-signifying) 기호학(semiotics)에서 정보를 얻은(도움을 받은) 역동적인 논증 모델을 개발한다. ; 지식 구조 속에서 경험과 문화의 역할을 고려하는 것이며, 교육에서의 정체성 형성의 역동적인 과정을 고려하는 주체 이론를 제안한다.

 

Deleuze의 작업과 Guattari와의 공동 프로젝트에서 그들이 했던 것처럼 철학적, 윤리학적, 사회적, 미학적 차원들에서 몇 가지 새로운 개념들을 소개함으로써, 나는 Deleuze의 철학적 위치를 우선 프래그머틱한 것으로 정하고, 미국 프래그머티스트들(pragmatists)인 John Dewey와 Charles Sanders Peirce에 의해 남겨진 풍부한 유산과 양립하도록 할 것이다. 나는 Dewey의 방대한 작업들에 접근할 것이고 Deleuze의 개념화라는 렌즈를 통하여 많은 인용들(excerpts)을 읽을 것이다. 만약 이 과정에서 Dewey적(Deweyan) 사고 자체가 변화와 재구성을 겪게 된다면, Jim Garrison(1995)이 지적한 것처럼, Dewey 자신은 그의 철학적 프로젝트와 관련하여 “새로운 시대와 (사회적) 맥락의 변화(vicissitude)에 보다 적절히 대응할 수 있도록” 자신의 생각을 재구성하는 것을 환영할 것이라는 점을 단지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Garrison, 1995, p.1). 마지막으로, 두 사상가들 사이의 뜻밖의 상호연결을 따라, 나는 교육을 위한 잠재적인 함의를 고려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Deleuze 철학을 탐구할 것이다. 이것은 귀납적 추론(abductive inference), 의미 생성의 복잡성(complexity of meaning-making), 그리고 전문화(specialization)와 같은 개념들을 비판적으로 탐구하는 것은 물론이고 이용가능한 교육적 연구들로부터 도출되는, 이론적이고 실천적인 질문들 모두에 접근할 것이다. 현대 Dewey 학문 속에서 Deleuze의 자리를 확인하는 것으로써 결론을 내릴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가정을 이어서, 교육철학 공동체 속으로 토론을 제기할 것이다. 문화연구나 사회철학, 정치철학 등과 같은 여타 영역에서의 Deleuze 작업의 영향을 고려하면, 교육 담론 속으로 그의 개념들을 가져오는 것은 아직도 교육철학 분야에서 광범위하게 미개척의 영역으로 남아 있는 간극을 채우는 것이 될 것이다. 이 책은 이 간극을 좁히는 데 목적이 있다.

 

지도작성(mapping) 모드에서의 표상(presentation)은 엄격한 감각(sense) 속에서 주어진 것으로서 이 지도를 재현하는 널리 알려진 영토를 가정하지는 않는다. Deleuze는 지도를 그리는 것이 의미하는 것의 세밀한 구별(subtlety)을 가리키기 위해 프랑스어 tracer를 사용했다. Deleuze 에게 ‘그린다’(to draw)는 동사는 정확하게 복사(copy)하는 것이 아닌 만들어가는 것(to create)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그의 번역자 Brian Massumi가 지적한 것처럼, “그려진 것은 그리는 행동 전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프랑스어 tracer 는 이것을 보다 잘 포착한다.: 그 단어는 영어에서의 “to draw"의 모든 시각적 함축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길을 여는 것(blaze a trail or open a road)을 의미하기도 한다”(Massumi [Deleuze and Guattari], 1987, p.xvi).

 

책의 구조는 여러 겹으로 중첩(multi-folded)되어 있다. 처음에, 몇 가지 Deleuze의 개념들, 특히 되기(becoming) 개념을 소개함으로써, 언어와 개별화(individuation), 혹은 주체성(subjectivity)의 생산 등의 문제틀(problematics)에 접근한다. 이러한 문제틀은, Deleuze가 위치시킨 데로, 심리학적이고 사회적인 차원 모두에서 공유되고 받아들여지는 것으로 여겨지는 것들이다. Charles Taylor(1991)와 Bellah, Madsen, Sullivan, Swidler과 Tipton 등과 같은 이들에 의해 작품에서 발췌된 인용들을 비판적으로 검토하면서, 나는 Deleuze의 개념화들을 보다 넓은 사회철학의 맥락속에 위치시킬 것이다. 포스트구조주의적 독해는 각 개념들의 가능한 해석들로부터 도출된 의미의 애매함에 접근함으로써 개별화, 자유, 선택 등과 같은 개념들을 문제시한다.

 

나는 특별히 앞에서 언급한 개념들 각각 속에서 함축된 역동적인 장(chapter)에 초점을 맞춘다. ; 이러한 목적을 위해, 간과된 Dewey와 Deleuze의 사상 모두에 대한 Darwin(Darwinan) 영향의 범위에 대해 인정(인식)함으로써, 몇몇 Deleuze의 문학적 개념들을 분명하게 하는 데 도움을 주는 복잡성 이론(complexity theory)으로부터 이끌어낸 몇 개의 개념들을 소개할 것이다. Deleuze와 Guattari(1994)에 의해 이동하는 것으로서 실험되고 묘사된 유목주의(the nomadic)는 그 자체로 윤리학적이고, 미학적이며 감응하는(affective) 차원을 포함하는 사고의 예인데, 이것은 많은 Deleuze적 신조어(neologisms)의 한 가지 예이다.

 

Deleuze 철학은 60년대 말 작품인 『차이와 반복』(Diffenence and Repetition)과 『의미의 논리』(The Logic of Sense) 두 작품에서 매우 잘 제기되었다. 그리고 20여년 후에 Guattari와의 공저인『철학이란 무엇인가?』(What is philosophy?)에서 정련되고 재구성된다. 이 책에서 철학을 새로운 개념들, 도구적이고, 실천적인 열정(an instrumental, tool-like, pragmatic flavor)에 대한 기준을 창안하는 데 책무가 있는 것으로 자리매김시킨다. 그리고 철학자의 지적 실천이 사고하지 않은 것을 사고하는 구성적(constructive) 프래그머티스트(pragmatist)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Deleuze는 사고하지 않은 영역을 외부의 문제로 취급한다. 외부(Outside)는 단순히 배경지식에 토대를 둔 것이 아닌 새로운 개념들 - “알려지지 않은 땅을 위한”(Deleuze, 1995, p.103) -이 만들어지는 현재 조건을 창조한다는 점에서 미래지향적인 탐구를 나타낸다.

 

이 책은 Charles Sanders Peirce와 John Dewey의 프래그머티즘적 유산을 위한 것이 아니라면, 그 목적을 충족시키지 못할 것이다. 따라서, Deleuze가 이 주제에 대해 특정하게 설명되고, Peirce의 생각이 대부분 이미지나 영화에 대한 작업과 관련하여 사용되고(appropriated)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Peirce의 삼항적 논리(triadic logic)나 기호학(semiotics)은 꼭 필요한(imperative) 것이다. Deleuze의 철학적 사고와 연관되는 것으로서 Peirce의 제1차성, 제2차성, 제3차성의 범주와 Peirce 철학의 (Deleuze 철학과의) 관련성을 토론하려고 한다. 교육의 고전인 『민주주의와 교육』(Democracy and Education)은 물론이고, 『경험과 자연』(Experience and Nature), 『사고 방법』(How we think)과 『경험으로서의 예술』(Art as Experience) 등의 Dewey 작품들을 보다 더 살펴볼 것이다. 그것들을 Deleuze의 개념적 공간을 따라 배치함으로써, Dewey의 자연주의적 인식론과 미학 속에 담겨있는 의미의 복수성(plurality of meanings)은 물론이고 현대와의 관련성과 시사점에 접근할 것이다.

 

문맥상 자연주의적(naturalistic)이라는 단어의 의미가 모호할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해야겠다. Dewey에게 있어서, 결코 물리학주의로 환원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전체(entity)에 대한 철학적 분석은 초월적이거나 초자연적인 영역과 관련하여 가정함이 없이 선행한다는 믿음에 토대를 두고 있다. Dewey는 자연 전체로부터 조건(환경)을 감싸는 분리나 소외를 분명하게 거부한다. 자연은 기억과 희망, 이해와 욕구를 가진 인간의 상호작용 결과와 (인간의) 일방적 철학이 ‘자연’(nature)을 한정하는 세계 등의 전체 복합체를 의미한다(Dewey, 1925/1980, p. 152).

 

Dewey의 반이원론(anti-dualism)을 따라, 그리고 교조적인 데카르트적 이미지에 대항하는 새로운 -반근원적인(non-foundational) - 사고의 이미지인, Deleuze가 생물학에서 빌어온, 리좀(rhizome)의 개념을 도입함으로써, 역동적인(dynamic) 탐구로서 논리에 대한 Deleuze와 Dewey의 접근법이 가지는 친화력(affinity)을 보여주려는 것이 나의 의도이다. 은유적으로, 리좀은 단일한 교차점은 없으며, “서로 다른 선들 사이에 횡단하는 소통”의 다양체(multiplicity)만이 존재한다는 관점에서, 매우 다른 면에 대한 다양한 상호작용과 접속들의 열린 체계를 묘사한다(Deleuze and Guattari, 1987, p. 11). 교육철학의 맥락에서 지식의 원천에 대한 질문과 관련하여 사용함으로써, 이 은유는 지식(knowledge)의 고정된 구조(몸체 body)로부터 앎(knowing)의 역동적 과정으로 초점을 이동시키는 것이 가능해진다. 그리고 이것은 발전하고 생성하는 실천으로서의 교육을 위한 함축에까지 이르게 된다.

 

각각 상대의 영토에 이르는 두 철학자의 개념적 탐험을 그리는 방법으로서의 지도제작 접근법(cartographic approach)는 또한 “Dewey가 Foucault와 Deleuze가 현재 걷고 있는 길의 끝에서 오랫동안 기다렸을 것 같은” 가능성을 즐기게 도와준다(Rorty, 1982, p.xviii). Deleuze에 의해 만들어진 그 길은 실증적 탐구의 정신속으로 안내될 때 단순히 은유적이 아니라 실제적인 효과의 생산으로 인도하는 수많은 개념적 탐험들에 의해 표시되어 있다. 주체화(subjectivation)의 과정에 영향을 주는 이 복잡한 인식론은 “아직 오지 않은"(Deleuze and Guattari, 1987, p.5) 기대하고 있는 결과와 가치와 관련된 윤리학으로부터, 그리고 이것은 결과주의자(consequentialist?) [로서] Dewey의 프래그머틱 윤리학에서의 원리에 동의하는 것으로 생각될 수 있는 윤리학으로부터 분리될 수 없다(Noddings, 1998, p. 146).

 

Deleuze와 Guattari의 철학에 있는 반(anti) 이원론은 Deleuze에 의해 외부 혹은 주름(접힘, fold)으로 개념화된 복잡한 관계에 토대를 두고 있다. 이 개념은 처음 Foucault의 사상과 관련하여 Deleuze(1998a)에 의해 시도되었고, 이후 Leibniz에 대한 후기 작업에서 탐구되고 발전되었다(Deleuze, 1993). 접힘(주름, fold)의 개념은 인식론과 심리학 사이의 경계를 모호하게 하는 데 기여한다. 그리고 주체성은 상호작용의 방법에 의해 새로운 내용의 형태의 출현을 통하여 혹은 이중 변형(double transformation)을 통하여 그 자체를 표현할 수 있게 된다. John Dewey의 다음과 같은 인용문은 그것과 매우 친화력이 있음을 보여준다. :

 

모든 것은 물질이 매개로서 작동할 때 사용되는 방법에 의존한다. .... 표현을 구성하고 하는 내부 감정과 충동 뿐만 아니라 대상을 둘러싸고 저항한다.... 매개물(medium)을 통해서 그리고 그 안에서 자신의 표현을 표현하는 것은 .... 객관적 환경(조건)을 가진 자아로부터 비롯된(issuing) 무언가의 연장된(prolonged) 상호작용이다. 처음에 소유하지 않는 질서이고 형태를 얻는 과정이다. .... 서로서로의 유기적 연결 속에 있는 ‘내부’와 ‘외부’의 물질의 진보적인 조직화에 의해서만 학문적 문서나 좀더 친밀한 설명이 아닌 어떤 것이 생산될 수 있다(Dewey, 1934/1980, pp. 63-65, 75).

 

Deleuze에게 각 개념은 “본질 보다는 사건(event)을 표현해야 하는” 것이고(Deleuze 1995, 25) 지각된 대상과 감응(affect) 사이의 삼항 관계 속에서 존재한다. : “사물의 흐름을 얻기 위해서는 세 개 모두가 필요하다.”(Deleuze, 1995, p. 165). 역동적으로 움직이는 힘은 “지각되거나 상상력 속에서 나타나겠지만”(Dewey, 1916/1924, pp. 152-154), 철학에 생명을 불어넣는 것, Deleuze의 즐거움, 다양한 되기, 그리고 삶의 긍정 등은 Dewey에 토대를 둔 교육에서의 자연주의와 일치하는 특징들로 여겨진다. :

 

한 사람이 인간이 된다는 것, 욕구, 감정과 사고를 하게 된다는 것은, 의식적인 삶이 깊어지고 넓어지는 것이다. 이것은 보다 강렬해지고 보다 훈련되어지고 의미의 자각을 확장하는 것이다. ... 그리고 교육은 이러한 삶의 단순한 수단이 아니다. 교육이 바로 이 같은 삶이다(Dewey, 1916/1924, p. 417).

 

Deleuze와 Guattari의 변형된 화용론(pragmatics)은 본질적으로 삶의 한 가운데이며 혼돈 상태이다. 하지만 접혀진 경험의 질이 물질적인 것과 비물질적인 기호 모두 혹은 -대문자 “T" 없이- 의미를 만들고 사실을 생산하는 특정 상황의 맥락에서 우발적인(contingent) 순수한 사건들의 다양체를 포함한다. 경험은 추상적인 일반적인 것(abstract universals)에서 실증적인 특정한 것들(empirical particulars)에 토대해서가 아니라 실험(experimenatation) 즉, 특정한 개념을 다루는 것에 의해서 의미있는 것이 된다. :

 

마주침의 대상으로서, 지금-여기로서 (다룬다), ... 언제나 새로운 것으로 끊없이 나타나는 것으로부터, '여기‘와 ’지금‘을 서로 다르게 배치한다. ... 나는 나의 개념을 움직이는 지평선을 따라 만들고 다시 만들고 없애버린다. 항상 중심을 분산시키는 것으로부터, 반복하고 그것들을 차별화하는 주변을 바꿈으로써(displaced periphery)(Deleuze, 1994a, pp.xx-xxi).

 

마지막으로, Charles Sanders Peirce의 프래그머티즘적 격언을 따라, Deleuze 철학의 잠재적인 실천적 효과와 교육적 함의를 고려하려는, 따라서 궁극적으로 최근 Dewey에 관한 새로운 학문이라고 불리는 것과 연결시켜 Deleuze와 Guattari의 목소리를 들리게 하려는 특별한 목적을 위해 Deleuze 철학에 접근하는 것이다(Garrison, 1995). 현대 교육철학자들은 “포스트구조주의- 그것의 계보, 전달(전승), 발전과 적용 -가 교육이론에 진행중인(현재적) 중요성이 있다”는 가정에 열려있다(Peters, 1998). Deleuze의 리좀적 방법 - “접속의 선을 이끌어내는 전략”으로서 문화연구 영역에서 요약된(Grossberg, 1997, p. 84) -은 페미니스트 교육철학자들의 관심을 끌어 왔다. : Leach와 Boler(1998)는 “교육이론과 실천에서 공적이고 현재적인 학문적 토론과 관련하여 다르게 사고하기의 잠재성(potential of thinking)"을 탐구할 목적으로 Deleuze 작업을 연구하도록 우리를 이끈다(Leach and Boler, 1998, p. 150). Deleuze 철학과 그의 유목적 탐구라는 아이디어는 교육연구에서의 질적연구 영역에 적용되어 왔다(St. Pierre, 1997a, 1997b).

 

교육에 대한 다소 좁은 관점을 인식하더라도, Deleuze는 또한 방법으로서의 직관에 접근하고 “무한한 이동... 패러다임으로 전제된 진리로부터의 자유로운 사고와 내재적 생성의 힘을 재정복하는 것”을 유지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교육제도에 대한 Nel Noddings의 뛰어난 작품을 한 장에서 다시 불러온다(Noddings and Shore, 1984). 그리고 또한 최근 Deweyan의 관점에서 지지를 받고 있는 Peirce의 귀납 범주(category of abduction)에 접근한다(Prawat, 1999). 『의미의 논리』(“the logic of sense") (Deleuze, 1990)의 역설과 새로운 복잡성 수준에서의 의미의 출현과 그것을 연결시킴으로써 이 개념의 다양한 해석가능성과 적용가능성을 비판적으로 검토한다.

 

마지막에 말하기는 하지만 매우 중요한 것은, 외연의 생산으로서 전문화에 대한 Noddings의 관점(1993a, 1998)에 나의 관심이 가 있다는 것이다. 나는 Deleuze의, 끝이 열려있는, 매끄러운 공간(smooth space) 개념을 학교 교육과정의 외연과(학교교육과정과) 연결시킨다. 이 공간은 선택의 장과 “여러 방향의 다양한 목소리(polyvocality)”(Deleuze and Guattari, 1987, p. 382)가 “공간의 기능”(Casey, 1997, p. 303)으로서 나타날 수도 있는 것이다. 충만한 Deleuze와 Guattari의 목소리 속에서 Deleuze 철학의 교육적 함의와 실천적 효과를 탐구하도록 하는 것은 Jim Garrison(1995)이 최근 “강단 철학자들 사이에서 출현하는” Dewey에 대한 새로운 학문으로 간주한(동일시한) 것과의 연결 속에서 Deleuze와 Guattari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지게 한다(Garrison, 1995, p. 1). 이러한 새로운 학문 조류와 같은 관점으로부터 Dewey의 교육철학은 커뮤니케이션, 미학, 그리고 다른 분야에서의 창조성 등으로 구성된다. 현대의 교육적 맥락에 적용함으로써, 이러한 면들(분야들)은 “Dewey 교육철학의 함의가 아직 소진되지 않았다.”(Garriosn, 1995, p. 6)는 강한 가능성을 이끄는 학자들에 의해 재검토되고 심지어 재구조화된다.

 

만약 듀이 교육철학이 여전히 심도있는 탐구를 위한 충분한 시야(관점)를 제공한다면, Deleuze 철학의 교육에의 적용은 거의 제출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Deleuze의 교육에 대한 이론적 탐험은 본질적으로 분명하지 않지만, 그는 실험실에서 행하는 연구와 비교하여 그가 가르친 실험과정에 대해 설명했다(Deleuze, 1995). "

 

과정은 내 삶의 매우 중요한 부분이었다. 나는 열정적으로 참여했다. ... 그것은 마치 연구 실험실 같았다. : 알고 있는 것이 아닌, 조사하고자 하는 것에 과정을 만들어야 한다. 몇 분의 영감을 얻기 위해서는 수많은 사전 작업이 소요된다. ... 점차적으로 ‘지식을 구성’하는 원리를 거부했다. : ... 모두는 필요하거나 원하는 것, 그들이 사용할 수 있는 것을 가져갔다(Deleuze, 1995, p. 139).

 

Dewey가 한 것처럼, 그의 사고와 Deluze 사유 사이의 연속성에 대한 보증된 주장가능성(warranted assertibility)이 나타나는 것처럼 보인다. 그 연속성은 가능해질 수 있다. 첫째, “철학적 반성을 위해 합의를 위한 협력적 경향의 무엇인가를 구하는", 철학에 있어서 경험적이고 실험적이며 유사-실증주의적인 것을 Dewey와 Deleuze 모두가 고수하고자 하는 것으로 인해(Dewey, 1925/1958, p. 30). 두 번째, 나는 그들 사이의 상호작용이, 물리적으로 결코 일어난 적이 없지만, “자유, 이동과 작동...[그리고 무언가를 만드는]... 살아있는 정신 등의 조직화된 생명력의 출현에 의해 고무될 것이라고 믿는다. 그는 그의 작품 속에서 살아있으며, 그의 작품들은 그를 따라 살아있다.”(Dewey, 1925. 1958, p. 294).

 

정보를 제공하게 되는(inform-ation) 시대(명사형 ‘form'이 아닌 동사형 ’inform'을 요구하는 시대)의 아이들을 교육하는 것은 다음 말을 잊지 못하게 한다. : 정신(감응, 정서)을 제공한다(Spirit informs) .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정치적 중립' 훼손하는 교과부

 교육과학기술부(교과부)는 “민주노동당(민노당) 가입” 혐의를 받고 있는 교사들을 모두 파면, 해임할 것이라고 밝혔다. 파면과 해임을 가르는 기준은 ‘시국 선언’ 참여 여부라고 한다. 해당 교사들의 행동은 헌법에 규정된 ‘정치적 중립’을 어긴 ‘중대한 범죄’이기 때문에 극한 징계가 불가피하다고 했다. 검찰의 기소가 이루어진지 채 한달도 되지 않았으며, 지방선거를 열흘도 채 남겨두지 않은 시점이다.


교육의 정치적 중립, 공무원의 정치적 중립에서 가장 먼저 고려해야 할 것은 무엇일까? 바로 국가 지배 권력으로부터 벗어나는 것, 국가로부터의 중립이다. 막강한 국가 권력이 공무원을 지배 도구로 직접 활용할 경우에 어떤 비참한 결과를 가져오는지는 우리나라 역사에서 충분히 지켜볼 수 있었다. 일제시대부터 군사독재 시절까지 교육을 권력의 이데올로기 선전 도구로 삼아왔던 기억하고 있다.

권력으로부터 벗어난다는 것은 일차적으로 권력의 지배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며, 나아가 권력을 비판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권력의 잘잘못을 비판(비교판단)할 수 없이 입을 다물고 시키는 일만을 해야 한다면 그것은 정부를 편드는 것이며 기득권을 옹호하는 정치적 편향을 드러내는 것일 뿐이다. 정부 비판은 정치적 중립을 훼손시키는 것이고, 정부를 지지하는 것은 정치적 중립을 지키는 것이라는 주장은 궤변이다.

모든 교육자들이 공통적으로 강조하는 교육 목표 중의 하나가 사고력 신장이다. 그 중에 가장 중요하게 꼽히는 것이 비판적 사고력 신장이다. 아직도 ‘비판’이라는 단어를 부정적으로 보는 이들이 있는데, 비판은 비교판단의 준말이다.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가입하는 00보험이 아닌 다음에야, 무비판적이고 일방적인 정권 선전 교육은 그야말로 위험하고 비교육적이다.

더구나 교육의 정치적 중립이 교사들의 대외적 정치활동을 모두 금지하는 것으로 귀결되어야 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많은 선진국들에서 교사들의 정치 활동은 충분하게 보장된다. 교사들이 정당에 가입하고 학교 밖에서 ‘정치적 목소리’를 내는 것이 학생들을 교육하는 데 편견을 가지게 만든다고 보지 않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지적하듯이 이것은 마치 종교적 중립을 확보하기 위해 교사의 종교활동 자체를 금지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교과부의 이번 징계는 교육의 정치적 중립에 대한 근본적인 오해와 곡해 문제를 제쳐두고라도 구체적인 몇 가지 문제를 가지고 있다.

첫째, 가장 큰 문제는 헌법이 보장하고 있는 ‘무죄 추정’의 원칙을 어기고 있다는 점이다. 해당 교사들은 “민노당 가입” 혐의를 받고 현재 기소된 상태이다. 아직 정식 재판이 열리지도 않았다. 재판은 법치주의 국가에서 죄의 유무를 따지는 그야말로 합법적인 절차이다. 그래서 헌법은 최종 재판 결과가 나오기 전까지는 무죄로 추정한다는 중요한 원칙을 명백히 하고 있다.

둘째, 징계 시점에 문제가 있다. 교육감 선거에서 특정 후보들은 반전교조를 선거 전략으로 내세우고 있다. 지난 서울시 교육감 선거에서는 구속된 공정택 교육감이 반전교조를 내세워 보수기득권층의 표를 결집시키는 데 효과를 본 적이 있다. 이점을 고려하면, 이번 교과부의 징계는 특정 교육감 후보들의 선거 운동을 직접 지원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선거 개입 의혹을 살 여지가 충분하다.

셋째, 징계 양형의 기준이 없다. 교과부는 ‘시국 선언’에 참여하면 파면이고 참여하지 않았으면 해임이라고 했다. 단순한 선언 참여가 정치적 중립을 훼손하는 일인지는 아직 법적인 판단조차 받지 않았다. 전교조 간부들의 시국 선언 주도 문제도 아직 재판 중이다. 단순 ‘선언’ 참여가 중대한 범법 행위라면 왜 검찰은 조사조차 하지 않았으며, 교과부도 참여자들을 징계하지 않았는가? 그리고 기소유예 처분을 받은 이들도 동일한 징계를 적용한 것도 전혀 납득할 수가 없다.

넷째, 징계의 형평성 문제이다. 지난 겨울 수사 초기부터 꾸준하게 문제가 제기되었던 교장 등의 여당 후원에 대해서는 언급조차 하지 않고 있으며, 유독 전교조 교사들만 문제 삼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대통령까지 나서서 ‘교육비리 척결’을 언급하게 했던 서울시 교육청 인사비리 당사자들에 대한 처벌이 미온적인 것인 데 비해 이번 조치는 지나치게 신속하고 광포하다.

다섯째, 반성을 모르는 교과부의 행태이다. 일제고사 거부나 안내 등을 이유로 강원, 서울 등지에서 파면, 해임되었던 교사들이 1심에서 모두 복직 판결을 받은 지가 얼마 지나지 않았다. 법원 판결 결과에 항소할 때부터 짐작하긴 했지만, 자신들의 잘못을 전혀 반성하고 돌아볼 줄 모르는 파렴치한들이다. 시간이 지나면 교과부의 광기가 여러 가지 형태로 바로잡히겠지만 자신들이 가진 권력을 자의적으로 휘두르는 전근대적인 정부와 관료들이 역겹다.

 

근대에 탈근대적인 것도 힘든데, 전근대적인 정부까지 대응해야 하니 참 어렵다!

 

아래는 공무원노조와 전교조의 공동 성명이다. 

http://chamkw.eduhope.net/bbs/view.php?board=chamkw_4_1&id=363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강원도 교육감 후보 박사학위 '논문표절' 의혹

한 중앙 일간지에 강원도교육감 후보 박사학위 '논문표절' 의혹 기사가 실렸다.

그런데 지도교수와 당사자의 해명이 걸작이다.

 

지도교수의 말이다.

 

 

“‘이론적 배경’이란 게 원래 대동소이해 문제 될 게 없으며, 논문의 핵심은 설문조사 부분”,  “나이 드신 분이 그만큼 썼으면 잘 쓴 것”

 

⇒ 박사학위 심사 기준에 "나이 드신 분" 우대가 있는 줄 처음 알았다.

'이론적 배경'이 "대동소이" 하다는 지도교수님! 혹시 본인 논문도 이런 식으로 쓰시는 건 아니겠죠?

이론적 배경은 자신의 이론적 문제의식을 풀기 위한 열쇠를 찾아가는 과정을 기록한 것이다. 그 과정에서 만났던 수많은 다른 문제의식들이 녹아 들어가게 된다. 이론적 배경은 내 문제의식과 선행연구들의 대화이다.

다른 이들의 문제의식과 내 문제의식이 만나는 지점이 무엇이고, 그들의 문제의식이나 이론이 가지는 장단점이 무엇인지를 나의 입장에서 살핀다. 나의 문제의식이 갖는 장점은 무엇이며 내 문제의식을 해결하는 데 그들의 이론이나 문제의식 중에서 무엇이 부족한지를 이야기한다. 당연히 대화를 이끌어가는 주체는 나이지 선행연구들이 아니다. 선행연구들을 베끼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인용도 없이 갖다 쓴 이론적 배경이 어떻게 문제가 없다는 말인가?

 

당사자의 말은 더욱 충격적이다.

 

 

“내가 논문 작성 기술이나 수준이 미약하고, 내가 생각하는 작성 기준이 그 정도여서 나온 오류”,  “표절은 아니다” 

 

 

⇒ 이건 표절을 시인하는 것보다 더 못한 것이다. 지도교수와 심사위원들이 수준미달의 논문을 억지로 통과시켜 주었다는 얘기인데, 이들의 명예와 학자로서의 자존심에 상처를 주는 말이다. 스승의 날을 앞두고 참담한 선물을 하는 셈이다.

살짝 과장하면 옆 사람 답안을 커닝한 수험생이 '내가 생각하는 시험 보는 기준은 옆 사람의 답안을 그대로 옮겨도 된다는 것이어서 그런 것이지, 커닝은 아니다'. 뭐 이런 식으로 변명하는 꼴이다. 당당하지 못한 태도이다.

논문 작성 기준도 모르고 박사논문을 쓸 생각을 했다는 용기에 박수를 보내며, 수준미달의 논문을 무사히 통과시켜 준 심사위원들의 제자사랑이 눈물겹다.

학위나 간판이 그 사람의 사유 깊이를 전혀 보여주지 못하는 껍데기라는 것을 몸소 보여주는 희생정신이 놀랍다.

 

 

 

 

다른 신문(지역 일간지)에 실린 당사자의 또 다른 해명이다. 중앙 일간지에 실린 해명이 군색하다고 여겼는지 좀 더 적극적으로 변명에 나서고 있다.

 

“직접인용 할 때는 별도의 문단을 만들어 아래 위와 지문 사이에 각각 1행씩을 띄우고, 3글자를 양편에서 안으로 모아서 써야 하나, 논문 작성 시 발생한 단순 착오였으며 표절은 아니다.”

 

   직접인용 할 때는 별도의 문단을 만들어 아래 위와 지문 사이에 각각 1행씩을 띄우고, 3글

   자를 양편에서 안으로 모아서 써야 하나, 논문 작성 시 발생한 단순 착오였으며 표절은 

   니다.

 

⇒ 1) 이렇게 해야 하는데, 편집 과정에서 그냥 썼다는 말이다. 문단 중간에 인용한 것도 편집 실수라는 말인가? 따옴표도 없고, 어디서 가져온 누구 얘기인지도 모르는데, 들여쓰기만 한다고 된다는 말인지? 이건 편집실수로 해명되는 부분이 아니다.

특정한 부분의 들여쓰기 실수가 아니라는 점은 이 논문 이론적 배경의 기본 인용 방식이 문단 시작이나 문단 마지막이 인용표시를 하고 있다는 점이다.

   

2) 그런데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표절 대상자로 지목된 교육감 후보(전 교육감)는 실수라고 해명하고 있지만, 현재로서는 그럴 가능성이 전혀 없어 보이지만, 설령 실수라고 하더라도,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비록 의도적 표절이 아니라 실수에 의한 잘못된 인용이라 할지라도, 실수를 증명할 수 있는 적절한 방법이 없는 한 의도적인 표절로 간주된다."(정병기. 2009. 『사회과학 논문작성법』. 서울대학교출판부, p. 103)

 

3) 아래 자료는표절 원본 중의 하나로 지목된

대표저자 유현숙(공저자 김태조, 송선영, 이석대)이 2004년에 한국교육개발원에서 발간한 『국가수준의 생애능력 표준설정 및 학습체제 질관리 방안 III』이라는 연구보고서의 이론적 배경 첫 부분(32쪽)이다.

 

 

 

아래에 있는 문제 논문의 이론적 배경 첫 부분(15쪽)과 비교해 보자.

 

 

이 논문의 두 번째 문장은 앞의 논문 두 번째 문단 두 번째 줄 쉼표 이후부터 네 줄을 그대로 옮기고 있다. 분명히 문단 들여쓰기 직접 인용이 아닌 문단 마지막에 인용 표시를 하고 있다. 이 부분은 직접 인용이 아니라서 이렇게 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인용 표시를 하고 있지만, 더 큰 문제가 있다. 몇 년 전에 먼저 출간된 보고서의 내용과 글자 하나 다르지 않게 똑같은 문단을 옮기고 있는데, 정작 인용 참고문헌은 다른 것으로 되어 있다.

유현숙등(2004)이 ILO(2002) 자료를 참고한 것을 원자료를 보지 않고 그대로 재인용 했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자기가 직접 ILO 자료를 보고 정리한 것처럼 인용표시를 달았다고 밖에 볼 수 없다. 당연히 겹따옴표나 문단 들여쓰기를 하고 유현숙등(2004)이 쓴 글에서 옮겨 왔다는 표시가 있어야 했을 것이다. 이 대목이 훨씬 더 중요할 수 있다.

엄격히 말하면, 첫 번째 문장도 유현숙등(2004)의 이론적 배경 두번째 문단 쉼표 앞 쪽을 줄여서 거의 그대로 옮긴 것으로 볼 수 있다. 사실상 한 문단 전체를 통째로 옮겨 적어놓고는 마치 자신이 외국 자료를 본 것처럼 쓴 것이다. 

 

다음은 지도교수의 말이다.

 

“우리 학과 교육심리학 분야는 미국심리학회(APA)의 논문 작성 양식을 따르고 있으며 인용구 마다 각주를 달아 쓰지 않고, 논문 뒷장 참고문헌에 모두 적는다.”

 

1) 참고문헌에 책이나 논문 이름만 있으면, 본문에서 아무런 인용 언급없이 인용을 해도 괜찮다는 말인데, 그야말로 황당한 말이다. 대학교 저학년 학생이 쓴 레포트라면 다음에 제대로 하라고 하면서 넘어가 줄 수도 있다. 하지만 정식 논문에서 이런 변명은 표절을 감추려고 말을 맞추다보니 하는 억지소리라는 말밖에 들을 수 없다.

 

2) 심리학회지에 실리는 논문들이 각주(페이지 아래쪽에 싣는 출처 표시)가 없는 것은 맞다. 하지만, 각주를 달지 않는다고 본문에 인용 출처를 안 밝히고 맨 뒤에 참고문헌만 적으면 된다는 것은 석사 과정 학생들도 하지 않는 소리다.

“우리 학과 교육심리학 분야는 미국심리학회(APA)의 논문 작성 양식을 따르고 있으며 인용구 마다 각주를 달아 쓰지 않고, 논문 뒷장 참고문헌에 모두 적는다”(000, 2010).

이런 식으로 문장이나 문단 끝에 인용 출처를 당연히 밝힌다. 페이지까지 밝히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리고 해당되는 참고문헌의 정확한 내용을 맨 뒤 참고문헌 난에 기록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논문에서도 이러한 인용 표시를 많이 사용하고 있다. 설마 본문에 인용 표시가 한 곳도 없는 논문이 있을 수가 있을까? 급하게 변명을 만들다 보니 앞 뒤 말이 맞지도 않는 억지변명을 한 것으로 보인다.

 

3) 억지 변명이 아니라면 참고문헌을 왜 다는지도 모르는 그야말로 논문 작성의 기초도 모르는 소리다. 참고문헌은 자신의 글과 생각의 출처를 정확하게 밝힘으로써 내 글을 읽는 사람들이 쉽게 확인하도록 돕기 위해 적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참고문헌과 주석을 통해 내가 참고한 글이나 생각을 정확하게 다른 이들이 찾아볼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상식이며 기본에 속한다.

 

지도교수의 또 다른 해명이다.

 

“000 후보의 논문은 이론이나 사상연구가 아니라, 저자가 직접 강원도 지역 학생과 교사들을 대상으로 설문 조사한 내용을 토대로 한 조사연구라는 점에서 표절은 아니다.”

 

⇒ 박사 논문 쓰기 정말 쉽다. 다른 설문 대상(학교급이나 지역)만 바꾸면 이론 부분은 문제 될 것이 없으니 말이다. 석사 논문도 이렇게 쓰면 통과시킬까 말까를 두고 심사위원들 사이에 논란이 생길 것이 분명하다. 하물며, 새로운 시각과 이론을 제시해야 하는 박사학위 논문을 대하는 태도가 이렇다는 것은 커다란 문제이다. 더구나 별 거리낌없이 언급하는 태도는 보는 이를 씁쓸하게 한다.

이런 걸 두고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린다'고 하고, '눈 가리고 아웅한다'고 말 하는 것일 게다. 교육을 담당했거나 맡고 있는 교육자들의 행태로 보기에는 떳떳하지 못한 면이 너무도 많다.

 

=================

15일 내가 운영하는 한 포털의 블로그 http://blog.daum.net/folie에 올렸던 글이다. 이제 블로그를 이곳으로 옮길 생각이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