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께서는 소위 민중사학의 약점에 대해 말씀을 하시고 있습니다. 최근 식민지근대화론자들이 ‘민중사학’의 약점을 파고들기도 하고요. 아울러 동학농민 운동 등을 스탈린주의의 ‘5단계설’에 끼워 맞춰 동학 운동을 마치 근대 부르주아 혁명인 것처럼 규정하는 것도 비판하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 설명을 부탁드립니다.
한국 민중사학의 일부는 일본 민중사학의 한 갈래이기도 한데, 바로 스탈린주의적인 5단계론을 한국 역사에 무비판적으로 적용해서 한국에서 자본주의가 자생적으로 발전했다고 사실을 조작함으로써 프롤레타리아 혁명이나 사회주의의 정당성을 찾아내려는 태도가 가장 큰 문제입니다.
물론 자본주의로의 전환이 아주 거시적으로는 세계사의 법칙이라고 볼 수 있는데 그런 전환이 모든 나라에서 일률적으로 똑같은 시기에 똑같은 방식으로 이루어지지는 않았죠. 많은 경우에는 예컨대 조선처럼 농업관료체제가 강했던 곳, 그러니까 국가의 수탈 능력이 강하고 국가가 상당 부분 시장을 대체했기 때문에 유통 경제의 발전 역시 다른 루트로 조금 늦은 시기에 될 수 있었던 것이죠.
그런데 그런 뉘앙스를 민중사학이 많이 무시했고 서구중심주의적인 방법으로 서구와 똑같은 시기나 조금 늦은 시기에 조선에서도 똑같은 방식으로 자본 축적이 시작됐다는, 사실이 뒷받침되지 않는 그런 주장을 했기 때문에 결국에는 지금 극우 세력한테 공격받는 데 아주 무력한 것이죠.
극우 세력들의 이야기는 무엇인가 하면 조선에 자생적인 자본주의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적어도 [조선에서] 서구와 같은 방식의 자본 축적이 이루어지지 않은 것은 사실입니다. 다른 방식으로 상인자본들이 강화돼 가고 있었지만 역시 그것은 국가에 예속된 상인자본이었죠. 그리고 그것이 산업자본으로 전환되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민중사학은 그런 걸 무시해 왔습니다.
민중사학의 그런 약점을 극우파들, 이영훈 씨와 같은 사람들이 이용해서 ‘일제 덕분에 우리가 자본주의 발전을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것이 한국의 성공적인 자본주의 기초였다’고 일본 제국주의를 간접적으로나 직접적으로 옹호하고 정당화하는 주장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지금 해외와 직접 연결돼 있는 한국의 대자본들에게 유리한 주장입니다. 그러면 해외 자본이 삼성전자의 지분을 60퍼센트 소유한다든가 한국의 금융시장을 장악한다든가 하는 부분이 역사적으로 정당화되는 것이죠. 해외 자본이 우리 나라의 자본주의를 발전시켰다면 해외 자본이 악이 아닌 선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한국의 대자본에게 아주 유리한 역사 해석이죠. 우리가 거기에 반론을 하려면 민중사학의 도식적인 끼워 맞추기 식 해석을 극복하고 조선 후기 상인자본의 발전에 대해 사실에 가까운 그림을 그려야 할 것 같구요.
동학농민운동 같은 경우에는 너무나 많은 층위들이 중첩적으로 얽히고설킨 것입니다. 기본적으로 피억압층·피지배민들의 수탈 기구에 대한 전반적인 반발, 전반적인 항쟁 운동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종합적으로 와해돼 가고 있는 수탈 체제에 대한 종교적 외피를 쓴 항쟁이라고 볼 수 있는데, 그 지도부는 봉건 세력들과 연결돼 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동학농민항쟁의 지도부를 보면, 전봉준의 경우에는 대원군과 깊은 관계가 있던 인물이었고, 주로 투쟁을 국가기구 자체에 맞춘 것이 아니고 봉건 지배세력의 일부인 민씨를 타겟으로 삼았습니다. 그 대신 대원군을 옹립하고자 했습니다. 결국 그 운동의 민중적인 의미는 그런 면에서 많이 훼손됐죠. 결국 그 운동이 부분적으로 성공했다 하더라도 아마도 지배계급 중 일파가 그 이득을 보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그만큼 동학 항쟁에서는 피지배계급이 아직은 지배계급을 완전히 탈피해서 지배계급의 영도 없이 직접적인 행동을 하지 못하는 한계를 보인 것입니다.
구한말 <독립신문> 등 개화파에 대한 비판을 많이 하셨는데, 이들이 사회진화론을 수용하게 되면서 보이는 모순에 대해 말씀해 주십시오.
<독립신문>은 한국적인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의 효시로 볼 수 있는데, 이들은 산업자본이나 자율성을 가진 자본가가 아니었고 새로운 유산계급, 특히 일본에 쌀을 수출하는 지주계급의 이해관계를 대표하는 지식인들이었는데, 핵심적으로는 외세에 절대적으로 예속돼 있는 지식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의 세계관은 거의 외세의 사상적인 영향에 의해서 만들어졌고, 또 외세와는 아주 가까운 유착 관계에 있었죠. 대다수는 개신교 개종자들이었고, 서재필은 아예 미국 시민이었습니다. 이들은 결국 조선도 기독교 열강들과 똑같은 열강이 돼서 예컨대 만주에서 중국의 세력을 밀어내고 조선의 이권을 확립하는 등 아류제국주의 세력이라도 됐으면 좋겠다는 상상을 발휘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민족국가는 바로 일본이나 서구의 제국주의적인 국민국가였고, 다만 현실적으로 조선이 당장 그렇게 되지 못하는 것이 그들이 절실히 느끼는 한계였습니다.
그런데 결국 조선이 합방이라는 식민화가 됐을 때, 제국주의적인 사고 방식대로 강한 자가 약한 자를 먹는 것이 법칙이라고 믿고 있는 사람들 중 상당 부분은 민족패배주의에 빠졌습니다. 조선이 어차피 운명적인 약자라고 생각하는 그들은 결국 일본 제국의 신민이 되어 중국 등을 약탈하는 것이 조선 유산 세력에게 더 유리하다고 판단해 소위 친일파가 된 거죠. 이광수가 대표적인 경우입니다.
그런데 일부 무장독립운동을 하는 세력 같은 경우에는 사회진화론에서 상당 부분 벗어나서 또 다른 대안적 이데올로기를 찾아나섰는데, 그 중에 일부는 공산주의 이데올로기를 채택하기도 했습니다. 예컨대 이동휘 같은 사람이죠. 이동휘는 개화기에 대표적인 사회진화론적 민족주의자였는데, 그 사람이 결국에는 1917∼18년부터 볼셰비즘을 조선 해방운동의 방법론으로 채택하기에 이른 거죠. 왜냐하면 사회진화론으로 더는 독립운동을 할 만한 그런 부분이 남아 있지 않았던 것입니다. 약자의 처지에서 보면 사회진화론이 별로 힘을 발휘하지 못하죠. 그러니까 별 다른 쓸모가 없죠.
선생께서는 불교에 관심이 많으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세노 기로의 신흥불교청년동맹 등의 사례를 통해 불교와 맑스주의의 접점에 대해 말씀을 하신 적이 있는데, 좀더 설명을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