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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7/06/15
    요즘 관심있는 서동진씨 박사학위논문 관련자료(3)
    거추장
  2. 2007/06/15
    2007/06/15
    거추장

요즘 관심있는 서동진씨 박사학위논문 관련자료

 

- 서동진, <자기계발의 의지, 자유의 의지 - 자기계발 담론을 통해본 한국 자본주의 전환과 주체형성>, 연세대학교 사회학과 박사논문, 목차


차 례

표 차례

그림 차례

국문 요약


제1장 서론

1. 문제제기

2. 논문의 구성


제2장 “지식기반경제”라는 경제적 가상

1. 들어가며

2. 지식기반경제의 경제적 주체성

2 1. “구조조정”과 새로운 경제적 가상의 등장

2 2. 경제적 실재 대 담론적 현실

2 2. 지식기반경제담론의 헤게모니

3. 한국자본주의와 그 재현의 변화

3 1. “신경제”에서 “지식기반경제”까지

3 2. 지식기반경제라는 담론적 현실의 구성


제3장 자기계발하는 시민 “신지식인”에서 “인적자원”까지

1. 신지식인: 지식기반경제의 국민주체

2. 인적자원 그리고 능동적 시민

2 1. 평생학습의 주체, 자기책임의 시민

2 2. 국가인적자원개발 “경쟁력있는 국민”

3. 국민의 통치, 자아의 통치


제4장 유연한 노동주체 일터에서의 노동주체와 자아의 생산

1. 자본의 유연화 그리고 유연한 노동주체

1 1. ‘유연화’ 담론을 넘어

1 2. 노동력의 (재)생산에서 주체성의 경영으로

2. 경영담론과 주체성의 관리

2 1. “인재”라는 노동주체

2 2. 경제적 삶의 경영, 인간의 경영

2 3. 경영담론의 생산과 소비

2 4. 경영담론의 제국주의

3. “전략경영”과 “인적자원관리” 담론의 정치학

3 1. 전략적 행위자? 전략경영담론의 노동주체의 재현

3 2. “비전”이라는 주체화의 테크놀로지

3 3. 균형성과표와 개인화된 노동주체

3 4. 주체성의 관리, 목표의 관리

4. 능력과 역량 노동주체의 신체와 정치적 테크놀로지

4 1. 능력의 계보, 자본의 역사

4 2. 능력에서 역량으로

4 3. 역량모델링, 주체성의 엔지니어링

4 4. 일의 과학과 일의 지배 직무분석과 그 이후

4 5. 역량의 관리, 주체성의 관리 “역량중심의 인적자원관리” 분석

4 6. 역량기계로서의 노동주체


5. 소결

제5장 자기계발에의 의지

1. 자기계발담론의 정체성

1 1. 자기계발이라는 문화산업

1 2. “성공학”에서 “자기경영‘으로

1 3. 자기계발 지식, 테크놀로지, 텔로스

2. 자기계발과 “기업가적 자아” 나는 기업이다

2 1. “자기경영”과 자기의 문제화

2 2. 1인기업가와 기업가적 자아

2 3. “기업가정신”과 주체성의 지배

3. 자기계발의 테크놀로지

3 1. 자아의 과학

3 2. 쓰기와 읽기 자기의 텍스트

3 3. 시(時)테크, 자기의 테크닉

4. 자기계발하는 주체와 그 정치학

4 1. 자기계발에의 의지

4 2. 불확실성, 리스크, 자유

4 3. 신자유주의와 자기의 지배


제6장 결론

참고문헌



- 서동진, <자기계발의 의지, 자유의 의지 - 자기계발 담론을 통해본 한국 자본주의 전환과 주체형성>, 연세대학교 사회학과 박사논문, 초록


1980년대 이후 한국 자본주의는 장기적인 그러나 심원한 변화를 겪어왔다. 그리고 이런 변형 과정은 단지 경제적 삶의 영역을 변화시키데 머물지 않고 새로운 “주체성의 체제”를 형성하는 과정이었다고 볼 수 있다. 줄여 말해, 자본의 구조조정은 노동하는 주체의 구조조정이었고, 경제적 삶의 리엔지니어링은 또한 주체성의 리엔지니어링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이 글은 한국 자본주의의 정체성의 변화와 분리시킬 수 없는 상호구성적인 과정으로서 새로운 주체화의 과정에 관심을 둔다. 그리고 이를 “자기계발하는 주체”라는 범주로 요약하고 그것이 변화된 자본주의에서의 삶을 지배하는데 어떻게 작용하는지 분석한다.

“자기계발하는 주체”란 크게 세 가지의 차원을 아우른다. 그것들은 각기 담론, 테크놀로지, 그리고 규범을 가리킨다. 자본주의 체제의 변화란 그를 구성하는 사회, 경제적 삶에 관한 표상을 재구성하며 현실을 새롭게 문제화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성장, 발전, 생산성, 능률과 효율 등의 개념은 전연 자명하지 않다. 그것은 비규정적인 경제적 현실을 일관된 담론적 실재로 변형하는 과정에서 고안, 폐지되고, 새로운 의미와 기준을 획득한다. 나아가 경제적, 사회적 삶을 새롭게 문제화하는 것은 그에 적합한 주체란 무엇인가에 관한 담론을 생산하는 것이기도 하다. 따라서 일터에서의 노동하는 삶이든 학교에서의 교육받는 삶이든, 새로운 담론형성은 주체성의 이상을 규정하고 그에 관한 다양한 지식을 형성한다. 한편 이는 주체화의 테크놀로지와 불가분하다. 새로운 경제적, 사회적 이상은 또한 그것을 달성하고 그 과정과 결과를 관찰, 감시, 측정, 평가, 보상하는 다양한 기술을 수반한다. 그리고 이는 이것이 주체화의 세 번째 측면, 즉 주체화의 윤리-정치적 규범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무엇이 생산적인 삶인가, 무엇이 자유로운 삶인가, 무엇이 행복한 삶인가. 이런 규범은 행위자들이 자신의 삶을 어떻게 인식하고 다룰 것인가를 규정하고 그것에 깊은 작용을 한다.

먼저 이 글은 “신교육체제”부터 “국가인적자원개발”에 이르는 국가의 통치 프로그램의 변화를 살펴보면서, “지식기반경제”라는 새로운 경제 체제에서 국민 형성의 기획이 어떻게 변모하였는지 분석한다. 이를 위해 외환위기 직후의 “신지식인 캠페인”과 그 이전의 신교육체제의 등장 그리고 이를 계승하는 “국가인적자원개발”을 각기 살펴본다. 국가인적자원개발계획은 기존의 교육정책과 신지식인 캠페인 등이 만들어낸 국민 주체의 모델을 계승하면서, 자신의 “인적 자본”, 즉 지식과 능력을 스스로 개발하고 향상시킴으로써 삶과 행복을 책임지는 주체라는 국민 형성의 기획을 완성하였다. 이제 지식기반경제의 새로운 국민 주체의 주체성은 “경쟁력 있는 국민”, 자신의 “생애능력”을 통해 스스로를 돌보는 국민, 자율과 책임의 시민이 되었고, 국민의 삶을 관리하고 지배하는 다양한 정책, 제도, 관행 역시 이와 더불어 근본적으로 변화되어왔다.

다음으로 이 글은 1990년대를 전후한 경영담론의 변화를 통해 노동주체를 관리하고 지배하는 새로운 담론들이, 어떻게 “일”에 관한 표상을 변화시키고 노동주체의 주체성을 재구성하였는지 분석한다. 특히 주목하는 것은 1990년대 초반부터 비약적으로 확산된 경영 담론의 생산과 소비이다. 1990년대에 한국 자본주의는 본격적으로 유연화와 탈규제화, 전지구화 등으로 칭해지는 변화를 겪어왔다. 경제적인 삶의 변화란 외적인 조건의 변화에 대응하여 기존의 행위의 방식과 대상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경제적 삶을 가시화하는 지식, 경제적인 행위를 관리하고 규제하는 규칙과 기준 자체를 수정하는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경영담론들은 이를 매개하고 일터에서 노동과 노동주체의 정체성을 새롭게 구성한다. 그것은 일반적인 노동능력을 지닌 행위자로서의 “노동력”이 아니라 기업가적인 노동주체를 구성하고, 경영 전략에 따라 고용은 물론 노동주체의 능력, 태도, 일터에서의 관계 자체를 규정하고 관리하는 테크닉을 생산한다. 따라서 새로운 경영 담론은 일터에서 노동의 의미를 변형할 뿐 아니라 그에 따른 노동주체의 관리 방식 역시 변화시킨다. 이 장에서는 이를 분석하며 새로운 경제적 주체성의 형성이 자아의 주체화라는 전략과 어떻게 결합하는지 제시한다.

세 번째로 이 글은 자기계발이라고 불리는 일상적인 대중문화를 분석한다. 먼저 이 글은 성공학과 처세술이라고 불리던 기존의 자조 담론이 자기경영이라는 현재의 자기계발 담론으로 변화하는 과정을 간단하게 서술한다. 그리고 주변적인 하위집단들(영업판매직 노동자나 자영업자들)에 의해 소비된 자조 담론이 거의 모든 주체의 삶을 망라하는 보편적인 자기 관리의 담론으로 변형되었음을 강조한다. 그리고 이것이 앞서 살펴본 이질적이지만 서로 공명하는 주체성의 변화와 일치하는 것임을 주장한다. 자기계발 담론은 자신의 삶을 사업(기업)으로 대상화하고, 개인이 자신의 삶과의 관계에서 스스로를 “기업가”로 주체화하도록 한다. 이런 자기계발 문화의 소비자는 노동주체는 물론 어린이, 가정주부, 정부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람을 아우른다는 점에서 자기계발 담론은 “모두”의 윤리학이라 할 수 있다. 아울러 이 글은 시간과 신체 관리에서부터 재산 관리에 이르는 일련의 자기 경영의 테크놀로지, 즉 “자기의 테크놀로지”를 통해, 자기계발문화가 어떻게 자신의 “진실”을 강화하는지 분석한다.

마지막으로 이 글은 자율과 책임의 능동적인 시민에서 자기계발상품을 소비하는 일상적인 개인에 이르는 다양한 주체성의 형상이 “신자유주의”라는 새로운 정치적 합리성과 불가분한 것임을 설명한다. 신자유주의란 경제정책이나 정치적 이념이 아니라 특정한 사고양식으로서 사회적 삶을 객체화하고 이를 관리, 경영, 지배할 수 있다는 대상으로 구성하는 담론이다. 그렇지만 그것은 또한 개인들이 자신의 삶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 자신의 자유를 어떻게 행사할 것인가를 안내하는 자기의 테크놀로지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일터와 학교에서, 지역사회에서의 삶과 일상사에서 자기계발에의 의지를 발휘하는 주체란, “자아”를 동원하고 그것에 작용함으로써 자신의 힘을 발휘하는 새로운 권력과 그것이 자신을 표현하는 광범한 담론의 효과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신자유주의라는 새로운 정치적 합리성은 외부로부터 부과된 것이 아니다. 한국 자본주의의 위기를 문제화하고 해결하기 위해 제시된 지배의 기획과 “반공규율사회”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자유를 향한 욕망이 만나 현 체제를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1980년대의 민주화가 자유를 향한 꿈을 통해 추진되었다면 유연화를 통한 경제의 재편과 혁신이라는 통치의 개혁 역시 자유의 규범을 통해 이뤄졌다. 그리고 이는 한국 사회에서 신자유주의 비판의 근본적인 곤란을 규정한다. 신자유주의라는 것이 “자유”를 동원함으로써 권력을 행사하는 새로운 정치적 합리성이라면, 그것은 이제 자유를 향한 꿈을 위험한 것으로 만들어버린다. 관리와 경영 그리고 자유의 추구는 분리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신자유주의 체제에 관한 비판은 그것이 초래하는 부작용, 즉 실업과 빈곤, 불평등, 시장의 횡포와 공공성의 후퇴에 그칠 수 없다. 신자유주의 비판이란 자유의 위험과 대결하며 새로운 주체화의 가능성을 상상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것은 자유를 질서로 삼으며 작동하는 자본주의에 관하여 새로운 비판의 전망을 그려내는 일이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 서동진, <자기계발의 의지, 자유의 의지 - 자기계발 담론을 통해본 한국 자본주의 전환과 주체형성>, 연세대학교 사회학과 박사논문 결론 中 일부


"마지막 장에서 결론으로 제시하였듯이 지금까지 각 장에서 살펴보았던 모든 주체성, 즉 새로운 시민 주체, 일터에서의 새로운 노동주체, 그리고 일상적인 삶에서의 자기경영의 주체는 동일한 주체성의 단면들이라 할 수 있다. 이를 본 논문은 정치적 합리성이란 측면에서 정의하고자 하였다. 정치적 합리성이란 세계관이나 시대정신과 같은 집합적인 의식도 아니고 기만과 허위의식이라는 뜻에서의 이데올로기도 아니다. "정치적 합리성"이란, 지배(government)는 언제나 특정한 사고양식(mentality)을 통해서만 즉 행복, 부, 건강, 안전이란 무엇인가에 관련된 특별한 담론을 형성함을 통해 사회적 삶을 객체화한다는 것, 그리고 이를 통해 그 가시적인 대상과 주체를 관리하고 경영하며 지배할 수 있다는 점을 가리킨다. 또한 그것은 그를 위해 각각의 개인들이 자신의 삶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란 자기 지배의 테크놀로지와 함께 한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살펴본 주체성의 형태, 본 논문에서 자기계발에의 의지라고 불렀던, 자기의 주체화를 지배하는 정치적 합리성이란 무엇일까. 본 논문은 이를 신자유주의라고 정의하였다. 신자유주의는 단순히 특정한 학설이나 이념도 아니며, 또한 시장 본위의 국가정책을 가리키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그 개념이 암시하듯이 개인의 자유를 통해, 개인이 자신의 삶을 어떻게 인식하고 대할 것인가를 규정함으로써 권력에 종속시키는 새로운 주체화/예속화의 권력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자신을 나사의 부품과도 같이 간주하는 조직인간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노동주체의 자유를 향한 욕망은 권한위임과 팀워크, 자기주도성을 갖춘 지식근로자를 착취하려는 권력의 욕망과 마주친다. 감옥과도 같은 획일적인 훈육의 공간을 박차고 나오려는 학생의 욕망은 자기주도적 학습주체를 형성하려는 권력의 욕망과 교차한다. 이미 주어진 삶의 궤적에서 벗어나 자신의 자유와 희망을 꿈꾸는 주체의 욕망은 자기계발, 자기경영하는 주체를 통해 그/녀의 삶을 자기책임과 자기실현의 문제로 축소하려는 권력의 욕망과 손을 잡는다. 결국 지난 20년간 한국 자본주의의 변화과정에서 형성된 권력의 주체화의 논리, 즉 "자기계발하는 주체"의 형성은 아이러니하게도 동시에 기존의 규율 사회를 비판하고 자유를 꿈꾸는 주체의 자기형성의 논리와 겹쳐져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자기계발의 의지와 자유에의 의지의 공모는 불가피한 것일까. 자유에의 의지를 통하여 우리의 삶을 예속시키는 권력을 향해 싸우기 위해 우리는 자유에의 의지를 거부해야 할 것인가. 아니면 전연 새로운 자유의 이미지를 고안해야 할 것인가. 아마 이 글을 쓰도록 이끌었떤 물음은 바로 그것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물론 자기계발하는 주체의 자유가 협잡이거나 기만이라 간주할 수 없다. 적어도 자유주의 사회에서 자유란 더 이상 자명하고 선험적인 이상이 아니다. 그것은 끊임없이 도구화되고 조작화됨으로써 사회적 삶을 관리하고 지배하는 데 사용된다. 그렇지만 자유는 또한 언제나 기정의 지배와 관리의 규칙과 의무, 규범을 의문시하고 사회적 삶을 새롭게 문제화할 수 있는 조건을 마련해 주었다. 그러므로 조급히 자유의 허위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대안이라고 결론을 내릴 수 없을 것이다. 근대성을 관류하는 급진적이고 비판적인 전통은 언제나 자유를 사유와 동일시하였다. 자신의 행위를 사유의 대상으로 제시하고 그 행위의 의미와 조건 그리고 목적을 의문시하는 것이 사유라고 한다면, 사유란 곧 자유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반성과 비판의 근본적인 조건은 자유이다. 결국 자유로부터 물러나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문제는 자유를 지지할 것인가 거부할 것인가의 문제가 아니라 자유에 관한 새로운 물음, 새로운 "자유의 정치학"을 통해 자유를 유지하는 것이어야 할 것이다. 푸코의 충고를 따르자면, 그것은 자유의 진실 혹은 허위를 묻는 것이 아니라 자유는 항상 "위험하다"는 반성을 요구한다. 자유를 동원함으로써 사회적 삶을 관리하고 조절하며, 나아가 개인이 자신의 삶을 어떻게 주체화하여야 할 것인가를 강제하는 것이 자유의 정치학이라면, 또한 그러한 자유의 동원을 다시 문제화함으로써 자유의 위험을 고지하고 비판하는 것 역시 자유의 정치학이다.


따라서 신자유주의의 비판은 자유의 거부가 아닐 것이다. 자유를 위하여 관료제와 공장, 학교와 가족의 규율과 통제에서 벗어나려고 했던 지금 우리는 그 자유가 더 이상 보이지 않는 기괴한 필연성과 명령에 의해 옥죄여 있다는 불안을 떨치기 어렵다. 자유를 추구하면 추구할수록 더 많은 선택을 발휘하면 발휘할수록, 더 많은 재량을 발휘하면 할수록 그것은 자유와는 반대 방향으로 치닫는다는 느낌이 우리를 휩싼다. 따라서 이제 자유의 열망은 이제 자유의 환멸로 반전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유혹에 굴복해서는 안될 것이다. 무어라 형용할 수 없는 "자유 없는 자유"의 느낌에서 우리는 지금 다시 한 번 "경제적인 체계"가 아닌 사회적 삶을 추상화하는 원리로서의 자본주의와 힐끗 마주친 것일지도 모른다. 자본주의의 최종적인 승리가 선언되고 그것이 삶의 필연성이자 유일한 지평으로 승인된 세계에서, 우리는 짧은 단락(短落)에 불과하지만 자본주의의 또한 견딜 수 없는 적대성을 간파하였을 것이다. 따라서 지식기반경제, 신자유주의적 정치질서로 환원된 자본주의가 아니라, 자유와 경제, 자유와 통치를 새롭게 결합함으로써 자신을 추진하는, 현재의 자본주의를 분석하는 데 착수하여야 할 것이다. 그것이 이 글의 문제제기에서 밝혔던 물음, 즉 자기를 주체화하는 방식의 변화를 분석함으로써 과연 우리는 어떻게 사회라는 실재를 그려내고 있는가라는 물음의 답변에 다다를 수 있을 것이다. 이 글은 이미 밝혔듯이 그런 물음으로 나아가기 위한 전제를 발견하고 정식화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또한 그런 물음으로 나아가지 못한 것은 이 글의 한계이고 결함이기도 할 것이다. 그 물음에 대한 답변을 찾는 것은 이후 나의 연구 과제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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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6/15

지금 막 술자리를 끝내고 돌아왔다.

 

이제 어느새 내 집처럼, 아무렇지도 않아진 사무실에서, 잠들기 전에 오늘일을 정리하고, 내일 할 일을 생각하는 것처럼, 이렇게 글을 쓰고 있는다.

 

이제 잠들기 전까지 붙들고 있어야 마음이 편할 자료나 책 한권 정도를 챙겨 간이 생활방에 들어가면 오늘 하루는 대략 마감이 되는 것.

 

아침 시간을 활용하기로 기왕에 마음 먹었지만, 여전히 새벽시간에 대한 아쉬움이 참 많이 남는다.

 

어쨌거나, 일어나는 시간을 되도록 맞추고 볼 일이다. 금연도 이제 300일을 앞두고 있는 마당에 항상 바라마지 않았던 수면시간 통제에 들어가 보는 것도 매우 뿌듯한 일이 될 듯하다.

 

두명의 여성과 한 명의 남성.. 그 대화의 구도... 사실 나는 딱히 불편함을 느끼지 못했지만. 왠지 내가 나의 존재와 그 관계들 속에서의 나의 위치를 신경써야 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나는 지금의 이 상황을 불편해 해야 하는가? 그녀들이 자리를 옮기고 싶어하면, 나는 은근슬쩍 자리를 피해야 하는가? 아니면, 그 둘이 어색해지지 않게 그 술자리에 계속 끼어 있어야하는가? 나는 사실 그 둘을 번갈아가면서 쳐다보고, 그 표정을 관찰하고, 이야기를 듣고 있는 것도 좋았고, 내 생각을 가지고 가끔씩 섞이는 것도 좋았는데...

 

그것 만으론...

 

 

아래 어제 내가 쓴 글에 어떤 분이 답글을 달아주셨는데.. 조금 놀라운 일이다.

 

그리고 처음 개시된 블로그를 찾아온 27명의 사람들 중에서 누군가 자신이 나의 글을 읽고 어떤 말이라도 건내준건 고마운 일이다.

 

어쨌든 답글 하나는 내 블로그를 방문한 27명을 의미있는 숫자로 바꾸어 주는 듯 하고, 또한 내가 내 글과 내 블로그, 그리고 조금 확장한다면, '진보넷 블로그'라는 공간 속에서 나는 어떤 관계와 제스춰를 취해야 할 것인가를 고민하게 해준다...

 

그렇지만, 난 그 답글을 보면서도 내가 어떤 제스춰를 취해야 할 지 낯설어하고 고민한다. ^^;

 

기형도... 떠올리지 않고 지낸지 참 오래되었지만, 가끔 어제와 같은 날은 한번쯤 생각나는 그의 은유들...

 

톱밥처럼 쓸쓸한 뒷모습을 가진 청년은 되지 말자는 다짐 처럼 오늘 하루 잘 살았는지.. 생각해보게하는 이런 시간을 잃지 말자.

 

 

얼마전에 우연히 발견한 서동진씨의 박사학위 논문을 꼭 구해서 읽어보기... 조만간 달성해야할 내 목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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