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06_재창간 특별칼럼

 

내가 사랑하는 지구

 

사티쉬 쿠마르 옮김 김미영

 

자연은 우리 부(富)의 진정한 원천입니다.

우리가 맞닥뜨린 환경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찾길 원한다면, 지구의 모든 살아있는 것들에 대한 인간의 태도가 변화하길 바란다면, 문제 자체와 현상을 잘 구분해야 한다. 예를 들어 지구온난화에 대해 모두가 이야기하고 있는 그 순간에는 지구온난화가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그 문제 현상이며, 그 현상을 다루는 일에 대해 이야기 하는 데에 그칠게 아니다. 더 멀리 나아가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현상들이 생기는 이유를 파헤치기보다는 어떻게 그 현상에 대처할 지에만 신경 쓰는 것이 오늘 우리들의 특징이다. 지구온난화현상에 관련해 우리가 질문해야 할 것은 이것이다. “왜 우리는 우리 생명을 유지하게 하는 대기를 통째로 바꾸고 있는가?” 우리는 우리가 올라가 앉아 있는 나무의 가지를 톱으로 잘라내고 있는 이 지경에 도달하기까지 어떻게 해왔는가?

 

이에 대답은 우리가 정신(idea of the spirit)을 생각하지 않고 문제(matter)에만 신경써왔다는 것이다. 우리는 물질주의에 빠져 있다. 그 문제가 정신을 가지고 있다면 문제될 것이 없다. 온통 문제뿐인 것은 쓸모가 없다. 인간의 몸은 머리, 팔, 다리로 이루어진다. 그러나 인간 정신이 없으면 다 쓸모가 없다. 정신이 있어야 신체가 살아있다고 할 수 있다. 나는 정신의 결핍이 환경문제의 뿌리이며 지구온난화는 단지 현상에 불과하다고 주장하곤 했다.


지난 수백 년 동안 데카르트나 뉴턴과 같은 서구의 많은 철학자들과 과학자들은 지구를 사람이 이용하고 지배하는 생명 없는 기계로 여겨왔다. 인간이 주인이며 지구를 맡고 있는 최고의 종이라고 믿어 왔다. 수년 동안 인류는 식민주의, 민족주의, 남성우월주의 같은 사상에서 벗어나려고 노력해왔다. 그러나 인류는 특별한 종이며 따라서 모든 것을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종편견주의 세계에 여전히 살고 있다.


인류는 과거에는 노예를 소유했고, 지금은 자연을 소유하고 있다. 자연은 어떠한 권리도 없다. 인간은 언제 어디서든지 자연물에 대한 소유를 주장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다른 세계관을 가지고 자연을 죽어있는 것이 아닌 지혜와 영성으로 충만하며 살아있는 것으로 본다면, 우리는 곧 자연세계와 깊은 관계를 맺을 수 있다. 그리고 나면 자연은 살아있고 인간의 권리와 똑같은 권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사실 인간은 자연의 일부분이다. 라틴어에서 나탈(natal)은 ‘탄생’을 뜻한다. 이것은 태아(prenatal)나 출산(postnatal)처럼 인간의 탄생과 관련된 단어에는 나탈(natal) 글자가 들어 있는 이유이다. 아프리카에서 태어나 사는 사람들을 가리켜 네이티브 아프리카인(native African)이라고 한다. 탄생(natal), 태어난 고향(native), 출생(nativity), 자연(nature)은 모두 같은 말에서 나온 말들이다. 우리는 자연의 일부이지 자연의 주인이 아니다. 우리는 나무나 땅, 강을 소유한다고 할 수 없다. 단지 우리는 그들과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일 뿐이다.

 

현대경제학에 팽배해 있는 ‘인류가 자연을 소유하고 원하는 대로 이용할 수 있다’는 생각에는 뿌리 깊은 결함이 있다. 우리가 ‘자연을 소유하고 있다’는 생각에서 ‘자연과 관계를 맺고 있다’는 생각으로 전환하지 않으면 지구온난화는 결코 끝나지 않을 것이다. 석탄연료가 아닌 다른 방법, 가령 풍력발전이나 태양에너지, 핵에너지, 바이오 에너지 같은 데에서 동력을 얻는 방법을 발견한다고 해도 그것은 현상에 대처하는 것일 뿐이다. 자연을 소유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강이나 동물, 열대우림을 자유자재로 통제할 수 있다고 여긴다면 지속가능성에 대한 우리 노력은 단지 환상에 불과하다. 기술을 이용한 해결법은 발상의 전환과 함께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


자연과 관계맺음(relationship)에 대한 개념이 정신주의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반면, 소유물로 자연을 바라보는 생각(ownership)은 물질주의에 뿌리를 두고 있다. 소유권(ownership)과 관계맺음(relationship)에는 큰 차이가 있다. 남자가 여자를 소유할 수 있다는 생각이 지배하던 시절이 있었다. 우리는 이런 생각을 바꿨고 이제 우리는 남자들이 아내를 소유할 수 없다는 것을 안다. 부부는 관계맺음이지 소유관계가 아니다. 사람들이 노예를 소유하고, 얼마나 많은 노예를 부리느냐에 따라 부를 측정하던 시대가 있었다. 그리고 아직도 사람들은 숲, 대지, 동물을 노예로 생각하고 있다. 우리는 동물들을 공장식 농장과 우리에 가둔다. 우리는 동물들을 우리 마음대로 다룬다. 그런 인간 중심의 물질위주 마음가짐이 계속되는 한 지구온난화는 절대 사라지지 않는다.

 

우리는 인간중심 세계관에서 지구중심 세계관으로 눈에 띄게 도약을 해야 한다. 우리는 모든 생명체에 대한 바탕을 이루는 가치를 받아들여야 한다. 인간의 생명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생명체에 대해서 말이다. 인간 사회는 지구 전체의 한 부분이다. 경제는 생태와 조화를 이뤄야 한다. 마음의 변화뿐만 아니라 세계관의 변화도 밑바닥부터 일어나야 한다. 정신영역을 다루는 생태학과 정신을 포함하는 경제를 창조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우리는 정부가 지구온난화에 대비하여 뭔가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환상 속에서 살고 있다. 그러나 인류가 지구와 관계를 바꾸지 않는 한 결코 지구온난화에서 자유롭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지구의 손님이다. 우리는 지구의 친구가 되어야 한다. 부처는 지구의 첫 번째 친구였다. 그는 모든 소유물을 포기하고 나무 밑에 앉아 사람은 지구에 연관되어 있다고 말했다. 지구 전체가 우리 가족이다. 모든 생명체는 우리 형제이다.


서구에서 우리는 유행을 따라간다. 요즘 최신 유행은 기후변화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다. 1960년대 유행은 핵전쟁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이었다. 그때 나는 당시 92세였던 버트란트 러셀을 만났을 때 이렇게 말했다. “존경하는 러셀 선생님, 선생님은 저에게 영감을 줍니다. 그러나 나는 선생님 철학에 대해서 한 가지 문제를 제기하고 싶습니다. 그것은 선생님께서 핵전쟁에 대해서 말씀하신 의제를 사람들이 두려움 때문에 따른다는 점입니다.”


이와 똑같은 일이 기후변화에 대한 대중의 인식을 높이는 일에서 일어나고 있다. 그것은 사람들의 두려움에 의해서 몰아가지고 있다. 그 두려움은 우리가 소비위주의 생활방식을 더 이상 할 수 없고 물질적 소유를 포기해야 하는 것을 말한다. 환경운동의 많은 부분을 움직이는 것이 바로 이런 두려움이다.

 

내가 버트란트 러셀에게 지적했듯이 평화는 삶의 한 방식이다. 핵무기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끌려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지속가능성 또한 삶의 한 형태이다. 그것은 우리가 우리 소유물을 아끼거나 우리 경제를 살리기 위해서 해야 하는 그 무엇이 아니다. 우리는 두려운 마음가짐에서 벗어나야 한다. 우리의 환경중심주의는 생명, 사회, 사람, 지구, 자연에 대한 사랑에서 영감을 받아 나와야 하는 것이다. 부처는 지구온난화현상이 생기기 2600년 전부터 이미 환경중심주의 사상가였다. 그는 민생구제 방법을 찾으면서 나무 아래 앉아 우리가 이 나무를 사랑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나무 아래에 앉지도 않는다. 대신에 어떻게 하면 저 나무를 이용해서 이윤을 낼까를 생각한다. 어떻게 하면 저 나무에서 돈을 뽑을까, 어떻게 하면 저 나무로 내 집을 짓고 가구를 만들까 생각한다. 부처에게 나무는 신성하고 바탕을 이루는 가치를 지닌 존재였다. 그러나 서양 문명에게 그것은 단지 돈으로 바꿀 수 있는 대상일 뿐이다.


정신영역을 다루는 경제학은 우리에게 두려워 말고 지구를 축복하라고 가르친다. 이것이 우리가 자연중심주의자인 까닭이다. 우리는 사람들이 지구온난화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지구를 구하기 원하는 게 아니라 지구에 대한 우리의 사랑 때문에 그렇게 원하길 바란다. 생명에 대한 사랑, 자연에 대한 사랑, 사회에 대한 사랑은 파멸과 우울함보다 강력하다. 우리는 두려움이 가지는 힘에서 사랑의 힘으로 이동해야 한다.


지구온난화를 끊임없이 이야기하는 것은 실제 논란거리에서 우리를 멀어지게 한다. 기후 변화에 대처하는 세계의 자세는 모두 현상에 대처하는 것뿐이다. 모두들 특히 정치인과 사업가들은 이에 앞장서고 있다. 그들은 지구를 사랑하는 법을 배우지 않고 지구온난화가 새로운 사업 기회를 제공할 것이라는 생각에 그렇게 한다. 이 사람들 머릿속은 온통 “경제 성장, 경제 성장, 경제 성장”이라는 주문으로 가득 차 있다. 내 주문은 “내가 사랑하는 지구, 내가 축복하는 지구, 내가 누리는 지구”이다. 지구가 우리에게 준 선물을 누리기 위해서는 지구를 돌보고 지켜야 한다.

 

지구온난화이거나 지구온난화가 아니거나 지구를 돌보는 것이 우리의 가장 우선하는 책임감이다. 물론 경제학은 나름의 역할이 있지만, 자기 범주에서 제 역할을 다해야지 지배하게 놔두면 안 된다. 에코스(Ecos)는 그리스어로 ‘집(home)’이란 뜻이다. 로고스(Logos)는 ‘지식(knowledge)’을 뜻한다. 노모스(nomos)는 ‘다루다(management)’는 뜻을 가진다.


만약 우리가 우리 행성을 집으로 인식하지 않으면 어떻게 다룰 것인가? 그러므로 생태학(Ecology)이 우선순위가 된다. 우리가 경제학에서 생태학으로 초점을 이동하면 지구온난화현상은 사라질 것이다. 지구온난화는 경제학과 세계화 현상이 온 지구를 지배하면서 생겼기 때문이다. 아인슈타인이 우리에게 말했듯, 처음 문제가 생겼을 때 가지고 있던 마음가짐을 지금도 가지고 있다면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우리는 끝도 없이 생태를 파괴시키는 경제성장 보다 더 나은 목표를 세울 필요가 있다. 경제성장이 이룩한 수조 달러는 어떻게 쓰이고 있는가? 우리는 그것이 전쟁과 무기를 만드는데 그 돈이 쓰이는 것을 알고 있다. 특정 한계를 넘어선 돈은 짐이 될 수 있다. 그것은 불행을 가져오고 더 나쁜 경우 돈이 가난과 착취를 낳는다. 돈은 진정한 부가 아니다. 지구가 우리 부의 원천이다. 극한 가난과 극도로 부유함이 없이 중도를 지키는 것이 추구해야 할 이상이다. 왜냐하면 부자가 있는 한 가난한 자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우리가 가난의 역사를 만들길 원한다면 우리는 또한 부의 역사도 만들어야 한다. 이 둘의 균형 상태를 이루는 것이 정신영역을 다루는 경제이다.

 

사티쉬 쿠마르 님은 인도에서 태어나 간디의 비폭력과 연대의 가르침을 따른 사회운동에 헌신하였다. 무일푼으로 인도에서 러시아, 유럽을 거쳐 미국까지 걸어서 평화를 위한 순례를 하기도 했다. 지금은 영국에 살면서 생태잡지 ‘리저선스’의 편집자로 일하며, 녹색사상과 그 실천을 위한 세계적인 교육센터 ‘슈마허 대학’를 설립·운영하고 있다.

 

김미영 님은 녹색연합 활동가로 일하다가 지금은 배움의 길에 있으면서 <작아>의 번역자원활동가로 함께하고 있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2009/05/28 21:21 2009/05/28 21:21
http://blog.jinbo.net/salrim/trackback/1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