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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과 노동 - 꼬뮨을 꼬뮤니케이팅하는 뫼비우스의 띠


[출처] 사랑과 노동 사이의 공동체 | 작성자 demetre

 

수수께끼 하나. 마르크스가 다음과 같이 묘사한 것은 무엇일까? "나를 인간의 삶과 결합시키고 사회와 결합시키며, 자연과 또 다른 인간과 결합시키는 끈, 모든 끈을 풀기도 하고 다시 맬 수도 있게 하는 끈…."

 

답은 화폐다. 『경제학-철학 수고』의 세 번째 초고에서 마르크스는 화폐를 ‘보편적 연결수단이자 절연(絶緣)수단’이라고 쓰고 있다. 마르크스답다고? 진짜 마르크스다운 얘기는 이 대목 바로 뒤에 나온다. 청년 마르크스는 노트에 다음과 같은 알쏭달쏭한 문장을 끄적거려 놓았다. “화폐는 진정 ‘보조’수단일 뿐이며, 진정한 결합수단은 (…) 사회의 화학적 힘이다.”

 

인용문에서 (…)으로 표시된 부분은 악필로 유명한 마르크스의 초고에서 식별할 수 없는 어떤 단어(들)이다. 화폐를 ‘보조적’ 지위로 밀어내는 사회의 ‘진정한 화학적 힘’, 연결과 절연의 참된 끈을 마르크스는 도대체 무엇이라고 썼던 걸까? 마르크스주의 역사 동학(dynamics)인 유물론은 표면상 계급투쟁을 분석하지만, 그 이면에서는 혁명을 이끄는 이 ‘화학적’ 에너지에 대한 탐구가 지속되고 있다. 나는 그 ‘(…)’을 ‘사랑’ 혹은 ‘노동’, 보다 정확히 말해 사랑과 노동이 만드는 코뮤니케이팅(꼬뮨-하기), 즉 (주체의 행위에 의해, 그러나 주체의 의도로는 환원되지 않는) 동사형으로 존재하는 ‘꼬뮨’이 아닐까 추측해본다.

 


사랑과 노동의 상호소외

 

오늘날 사랑과 노동에는 흥미로운 모순이 딸려 다닌다. 모두들 각론에 몰두하지만 누구도 총론을 믿지 않는다는 사실이 그것이다.  먼저 사랑의 각론들을 보자. 사람들은 우연하거나 운명적인 만남에서부터 뜻밖이거나 필연적인 이별에 이르기까지, 연애사의 온갖 세목과 정서적 요동들에 지나치다 싶을 만큼 관심을 쏟는다. 결혼을 둘러싼 각종 이벤트들에도 거의 목을 매는 분위기여서 ‘짝짓기’는 이제 ‘중매’라는 수공업적 단계에서 각광받는 전문산업(mating system)으로 격상되었다. 하지만 정작 ‘사랑’이란 말에는 다들 고개를 갸우뚱한다. 사랑? 아직도 그런 걸 믿느냐는 분위기다. 물론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진지한 사랑과 헌신적 결혼―우리시대의 공식적 이데올로기―을 자기 삶이 지닌 진정성의 시험대로 간주하기는 한다. 그러나 모든 공식 이데올로기가 그러하듯 우리는 다만 믿는 척할 뿐이어서 아무도 그런 시험대에 자기 생을 올려놓는 모험을 하려들지는 않는다.

 

노동 쪽도 사정은 비슷하다. 일자리와 연봉의 등락은 언제나 초미의 관심사이나 노동 자체는 기피, 혐오, 염증만을 불러일으킬 뿐이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높은 연봉을 주는 일자리’이지 더 이상 일이나 노동은 아닌 것이다.  비정규직을 비롯한 각종 노동문제는 그저 ‘정치권’이 다뤄야 할 골칫덩어리처럼 여겨지고, 파업이나 노동운동이 벌어져도 ‘임금인상을 위한 집단이기주의’ 정도로 치부된다. 요컨대, 별 관심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가 아니라 ‘바로 그렇기 때문에’ 우리나라의 노동시간과 노동강도는 세계최고 수준에서 떨어질 줄 모르고 있고 ‘비정규직’으로 상징되는 노동환경은 악화일로를 벗어날 줄 모르고 있다. 그렇다면 사랑 없는 연애와 결혼, 노동 없는 일자리와 연봉의 추구는 도대체 무엇을 뜻하는가? 

 

사랑이나 노동이라는 이념과 사랑과 노동의 구체적 행위, 사건들 사이에는 누구나 알고 있는 커다란 간극이 놓여있으며 우리는 이 간극을 지배하는 연결과 절연의 매체가 무엇인지도 잘 알고 있다. 바로 돈이다. 사랑과 사랑-유사 행위들을 매개하는 것은 돈이고 노동과 노동-관련 사안들을 끊어놓는 것도 돈이며, 노동과 사랑을 연결하는 것도 돈이라는 일반적 등가물이다. 문제는 화폐라는 이 고약한 매체가 원활한 소통이 아니라 불통과 왜곡, 착복을 일삼는다는 데 있다. 하지만 손발도 마음도 없는 화폐가 절로 그런 짓을 저지를 수는 없다. 따라서 화폐라는 물신이 아니라, 그것을 작동시키는 사회의 물적, 정신적 구조―사랑과 노동을 제물로 삼는 ‘등가교환’이란 제의를 통해, ‘자본’이라는 모호한 신의 제단에 ‘잉여’라는 공물을 쌓는 자본주의라는 이름의 신앙체제를 비판하지 않으면 안 된다.3)

 
3) 자본주의는 시장질서이거나 경제논리라고만 생각하는 사람들은 자본주의가 뭔지 아직 잘 모르고 있다. 시장논자들은 왜 국가를 축소하라느니 말라느니 떠들기만 할 뿐, 국가를 폐절하자고는 감히 말하지 못하는가(심지어 그들은 국가의 행정이 경제의 원활한 운용과 기업의 이익을 도와주기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하라는 뻔뻔스런 요구를 하지 않는가. 최소한 전봇대라도 뽑아주는 성의를 보여야 만족하지 않는가). 국가라는 합법적 폭력이 화폐의 신용과 소유권의 신성함을 보장하지 않으면 자본주의는 단 하루도 버틸 수가 없기 때문이다. 자본주의는 경제(를 굴리는)권력의 체제이고 국가는 이 권력의 필수불가결한 도구인 것이다. 국가에 대한 시장주의자들의 공격은 실상 국가에 대한 것이 아니라 국가라는 도구를 장악하려는 위험함 대중의 힘, 즉 민주주의에 대한 도발에 불과하다.

 


자본주의, 사랑과 노동의 황무지

 

노동과 사랑은 사회적, 개인적 삶의 가장 큰 줄기여서 (‘노동이 사라졌다’느니 ‘사랑은 없다’느니 하는 헛소리들과 달리) 우리는 여전히, 일하고 사랑하며 살아간다. 우리 삶의 시간은 노동과 사랑으로 점철돼있고 지배적 현실과 이데올로기는 그걸 망치는 것으로 점철돼있다. 이를테면 이렇다.

 

경제생활을 소득과 지출로 나눌 때, 사회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임금노동자들은 노동에서 소득을 얻고 (자기애와 가족애가 포함된)사랑 쪽에서 지출을 한다. 반면, 자본가와 기업은 사랑(을 미끼로 한 상품)을 팔아 소득을 얻고 노동을 열악하게 만듦으로써 지출을 줄인다. 그래서 자본과 기업이 헤게모니를 쥔 사회에선 자기애, 가족애, 성애 등등 사랑의 온갖 형태들이 이스트를 잔뜩 넣은 빵처럼 부풀려지고 이제 사랑은 초자아의 의무적 명령처럼 스트레스의 원천으로 변질된다(“너 아직 솔로니?” “인생을 즐겨라!”). 노동 또한 사회의 물적, 정신적 재생산 동력이라는 자신의 의미와 가치를 상실한 채 (사랑하는 나, 연인, 가족이 요구하는)상품 소비를 위한 돈을 버는 ‘고역의 장소’로 추락한다. 그 결과로 우리가 보게 되는 것은 사랑의 증거로 보험금만 남기고 지상에서 사라지는, 생명보험 광고의 가장(家長) 이미지다.

 

노동(사라진 가장)과 사랑(과장된 평화와 행복)이 돈(보험금)을 통해 연결되는 이 끔직한 광고는 우리시대의 가장의 욕망―‘가족이라는 짐을 벗고 훌훌 이 세상을 뜨고 싶구나’―과 가족의 욕망―‘돈만 남기고 꼰대는 사라져주었으면 좋겠어’―을 반영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궁극적으로는 자신의 양손으로 노동과 사랑을 지배하고픈 금융자본의 욕망과 자기 이미지(잘생긴 신사로 등장하는 자애로운 보험회사 직원)의 표현이다.
 
자본이 더 많은 잉여를 뽑아내려고 기를 쓰는 곳에서 사랑은 독버섯처럼 화려해지고 노동은 곰팡이처럼 음침해지기 마련이다. 그렇게 사랑과 노동의 대지는 '황무지'로 변해가고 사람들은 잔인한 계절을 견디며 살아가야 한다. 누가 이것을 인간의 숙명이라 말하는가. 잔혹한 신처럼 군림하는 자본주의적 시장경제와 보이지 않는 손의 주인들, 가야할 때를 모르고 버티는 노회한 왕과 그의 부패한 신하들이 아닌가. 우리가 요즘 ‘신자유주의’라고 부르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를 아우르는) 총체적 권력체제는 바로 이 죽어가는 왕, 즉 자본주의 체제의 말기 증상이다.

 


노동과 사랑의 주고받음

 

노동은 인간의 사회적 존재방식이다. 공장이나 회사에서의 일, 임노동만을 노동이라 생각하는 상식적 노동 이미지와 달리 마르크스는 노동을 사회를 가능케 하는 인간적 매개활동의 총체로 이해했다. 이때 노동이란 자급자족을 위한 생계유지 활동이 아니다―그건 동물들도 다 하는 일이다. 노동이란 우선 그 산물이 타자에게 유용한 한에서 자신에게도 의미 있게 되는 그런 활동들을 가리킨다. 노동에는 그처럼 원초적으로 사랑의 계기(조건 없는 증여/수수)가 포함돼있다. 인간은 노동하는 인간이고 노동은 (의식하든 못하든) 타자들에 대한 일반화된 사랑의 표현이다.

 

자본주의 사회는, 다른 모든 사회와 마찬가지로, 노동 없이는 유지될 수 없으며 노동은 사랑 없이는 시작될 수 없다. 그러나 자본주의는 사랑과 노동을, 보다 정확히 말해 ‘사랑의 노동’과 ‘노동 속의 사랑’을 사회의 일반질서이자 구성적 문법으로 받아들이지 못한다. 어째서 그런가? 자본주의는 등가교환과 예외로서의 잉여만을 알뿐, 그 자체가 잉여인 교환, 즉 선물의 논리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사랑을 모른다. 자본주의에 길들여진 타산적 개인주의자들은 더 많이 주고 더 적게 받음으로써, 또한 누구도 예외 없는 그 부등가의 질서에 의탁함으로써 역설적으로 성취되는 참된 등가(궁극적이고 인간적인 평등)의 풍요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늘 궁핍과 피해의식에 시달린다. 자본주의에게 사랑은 풀 수 없는 방정식이고 견딜 수 없는 무리수이다. 이것이 자본주의가 사랑에 젖줄을 대고서만 자신을 유지할 수 있으면서도 결코 그것을 일반적 질서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끊임없이 사랑을 착취하거나 악용하는 이유이다. 이것은 인간과 자연을 잉여가치를 뽑아내기 위한 ‘자원’으로만 보는, ‘더 많은 잉여의 산출, 더 많은 자본의 축적’을 ‘발전’이라 부르는 자본주의적 합리성의 행태들에서 너무나 잘 드러난다. 그래서 나는 ‘인간의 얼굴을 한 자본주의’이라는 것을 믿지 않는다. 사랑을 마시고 인간적 얼굴을 하게 되면 자본주의는 독약을 삼킨 짐승처럼 죽어버릴 것이다.

 


노동과 사랑을 산다는 것

 

여기서, 뜬금없어 보이는 질문을 하나 던져보자. 돈 주고 사랑을 살 수 있나? 없다! 그건 자신은 웃지 않으면서 거울 속의 내가 미소 짓기를 바라는 것과 마찬가지다. 사랑은 사랑을 주면서만 받을 수 있고, 오직 사랑과만 교환(증여/수수)할 수 있다. 사랑은, 선물과 마찬가지로, 주는 것이 곧 받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건 사랑하는 사람에게 무언가를 주면 내 마음이 기쁘다는 정도의 얘기가 아니다. <증여론>에서 마르셀 모스가 관찰한 바 있듯이, 선물증여는 증여자에게 사회적 위신과 권위를 가져다준다. 그는 선물한 것들과 등가의 것들을 조만간 돌려받지 않지만, 그런 타산과는 다른 방식으로 증여의 순간에 곧장 무언가를 돌려받는 묘한 계산대 위에 선다(이런 계산을 하는 것은 증여적 사회이지 증여의 수행자들이 아니다). 그가 받는 것은 주관적이고 심리적인 만족만이 아니라 다른 인간과의 관계에서 그가 가지는 위상의 객관적 확인이다. 사랑도 이와 같다. 사랑을 준다는 것은 그가 타자와 사랑의 관계 속에서 자신의 자리(‘사랑하는 자’)를 유지한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사랑을 준다’는 것은 무엇인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무언가를 (사)준다는 뜻인가?

 

라캉은 사랑이 ‘두 개의 결핍이 만나는 것’이며 ‘자신이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을 주는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자신이 가지지 않은 것을 어떻게 주는가? 데리다는 마르셀 모스의 『증여론』에 대한 비판서인 『주어진 시간: 위조화폐』에서 “시간을 준다”는 마담 맹트농의 편지 구절을 오래 붙들고 늘어지는데, 이때 자신이 결코 소유할 수 없는 것으로서의 시간을 준다는 것은 결국 자신의 생(의 시간)을 바친다는 뜻이다. 삶의 시간은 준다고 줄어들지 않고 주지 않는다고 소유하거나 축적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사랑은 바로 이 ‘삶의 시간’의 증여이고, 엄밀히 말하자면 그것은 증여라기보다 전달의 ‘몸짓’이며 교통의 ‘행위’이다. 그런 맥락에서 사랑은 삶의 방식(way of life)이며 몸을 붓으로, 시간을 물감으로 삼아 타자의 세계에 그리는 생의 무늬(紋畵)이다. 우리는 오직 그 타자의 캔버스에만 자신의 생을 남길 수 있으며, 우리 생은 타자의 사랑이 남긴 무늬를 모두 지우면 아무것도 남지 않는 백지와 같다. ‘사랑을 준다’는 것은 결국 타자를 향한 사랑의 몸짓을 ‘살아간다’는 것이며 우리는 그러한 살아감을 통해서만 사랑을 ‘돌려받는다.’ 사랑의 수행자(agent)는 증여가 곧 수수인 사랑의 세계를 살아갈 수 있을 뿐 사랑을 물건처럼 주고받을 수는 없는 것이다.  노동도 이와 마찬가지다. 노동은 (임금의 형태든 뭐든) 계량화되어 되돌려 받는 것으로는 절대 만족하지 않는다. 우리는 사랑과 마찬가지로 돈으로 노동을 살 수 없으며 그것을 물건처럼 주고받을 수도 없다. 노동은 오직 노동과만 교환할 수 있는데, 이것은 우리가 품앗이의 시대로 돌아가야 한다는 뜻이 아니라 노동 속에서 사랑의 계기들을 볼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노동은 인간이 세계를 향해 자신을 내어준 생의 시간의 총량, 즉 삶 자체이기 때문에 그 대가로 세계 전체를 향유하고 세계로부터 사랑받을 수 있길 기대하며, 세계 전체가 자신의 노동의 산물을 향유하며 기뻐하는 것을 보고 싶어 한다.

 

사랑이 그리움 속에서 타자를 향해 가는 생의 증여/수수라면 노동은 그 사랑의 능동적 표현이자 실현이고 우리는 노동을 통해 그 사랑에 응답해야 한다. 그러한 사랑과 노동을 통해 우리는 화폐를 ‘보조’수단의 지위로 끌어내리고, 비로소 코뮨을 코뮤니케이팅하는 생의 주체로 스스로를 변모시킬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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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빈집 블로그에서 찾은 보석 같은 글!
다시금 꼽씹으며 내 사랑과 노동을 돌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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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6/02 01:11 2010/06/02 0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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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음  | 2010/06/23 15:35
오~~ 이 글 원문이 없어져서 한 참 찾아다녔는데... 살림이 찾아줬네요. ^^ 엄청 땡큐. 그나저나 어떻게 살아요? 함 봐야지요?
살림  | 2010/06/24 14:40
지음 / 아... 지음!!! ^^ 한동안 잠수 타다 얼마 전부터 꼼지락 꼼지락 하고 있어요~ ㅎㅎ 금요일에 빈집에서 잔치 열린다는 소식은 들었어요.. ㅋ 조만간 접선해요~
지음  | 2010/06/28 15:21
몇일 몇시 어디서 볼까요? ㅋㅋㅋ 전화번호는 그대로지요? 가끔 전화했는데 안받아서. 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