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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인 3종의 꿈

내 방문을 연 다음, 다시 현관문을 열고 조금만 걸어가면 수영장이며 빙상장, 축구장, 농구장에 육상 트랙이 구비된 말 그대로 종합운동장이 있다는 사실을 문득 깨달은 어느 날 이었다. 문밖 출입을 좀 삼가하며 지냈더니, 급기야 내 방문 바깥에 나가는 것도 심하게 삼가하고 있어 또 한명의 히키코모리가 탄생할 조짐을 깨달은 날이기도 했다. 그래, 일단 몸을 좀 움직여보자!

 

의외로 수영장 강습의 경쟁률은 치열했다.  인터넷 등록 시작일에 많은 강좌가 마감되었고, 한달 두달을 기다려 드디어 고대하던 수영강습 등록을 할 수 있었다. 선착순 최후의 1인으로 입문반에 당당히 등록을 마치고는, 이 멋진 육상 트랙과 전문가들의 호흡이 느껴지는 수영장에서 열심히 단련하여 마침내 철인 3종의 꿈을 실현해야지, 하며 종합운동장을 뿌듯하게 바라보았다.

 

몇 년 전 여름, 20인치 바퀴를 가진 어여쁜 제비(내 자전거)를 타고 제주도 여행을 할 때였다. 인천서 제주까지 가는 선박회사 청해진 해운이 자전거 하이킹 패키지 개발 사업을 위한 테스트로 공짜 배를 태워 준다기에 참여했던 여행이었다.  인천 연안부두에서 처음만난 팀 사람들은 어찌나 프로페셔날해 보이는지, 미니벨로에 가까운 자전거에, 여름 자전거 여행이라면 필수인 기능성스포츠 티셔츠 하나 없이 이것저것 챙긴 짐만 한가득인 내 모습이 참 우스꽝스러워 보였다. 그래도 어쩌냐, 때 마침 인천서 점심 약속이 있었던지라, 연안부두까지 같이 온 친구들의 화려한 환송까지 받으며 제주로 출발했다.      

우리팀은 선박회사에서  정해준 일정대로 하루에 100킬로를 달려 2박 3일만에 제주도 해안선 일주를 하고 리포트를 제출해야하는 일종의 계약이 있었기 때문에, 한여름 땡볕 아래서 또 변덕스러운 제주의 바람 속에서 무조건 달려야 했다. 20인치 작은 바퀴에 짐은 가득하고 흠뻑 젖은 티셔츠가 무겁게 느껴졌지만 달리고 또 달리는 수 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우여곡절은 많았으나 마침내 제주도 일주를 성공리에 마쳤다. 모든 일정을 마치고, 2박3일 동안 친해진 몇몇은 내 튼튼한 어께와 다리근육을 칭찬해주며 성공적인 바이크 라이딩에 이은 다음 미션으로 철인 3종을 권해주었다. 철인 3종의 꿈, 그것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초등학교 시절, 언제나 맨 첫줄에 섰던 그것도 두번째 아이와는 한 뼘이나 차이가 날 만큼 유독 키가 작은 어린이 였던 나는, 단신의 악조건에도 불구하고 뜀박질을 너무 잘하는 바람에 육상부 선수가 되었다. 선배 언니들은 스피드는 좋은데 콤파스가 짧아 장래성이 부족하다고 나를 '음해'했지만, 난 육상부가 좋았다. 스파이크화가 좋았고, 트랙을 달리는 것이 좋았다. 그리고 곧 시합이 있었다. 안양시 초등학생들이 종합운동장에 모두 모여 카드섹션과 함께 목이 터져라 노래하고 응원하는 체육대회에서, 육상 트랙에 스파이크화를 신고서서 관람석의 우리 학교 아이들을 향해 손을 번쩍 들고 인사하는 장면을 상상했드랬다. 그런데 결국 시합 며칠전 발목을 다쳤고, 엄마는 발목이 퉁퉁부은 나를 끌고 육상부 선생님한테 가서 이래 가지고 운동은 못시킨다며 한 어린 육상선수의 은퇴를 선언해 버렸다. 그리고 고대하던 체육대회 날, 발목 부상으로 짧은 선수생활을 마감한 난 관람석에서 쓸쓸하게 앉아 같이 훈련받던 육상부 친구들의 화려한 데뷔를 보아야만 했다. 그렇게 좌절된 육상 트랙의 로망, 그것은 철인 3종의 꿈 속에서 다시금 되살아 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문제는 수영, 바로 수영이었다. 어릴 때 부터 몇번의 시도가 있었지만, 번번히 숨쉬기에서 더 이상 진도가 나가질 않는 수영. 처음 배울 땐, 당시 어린이들의 나쁜 습관으로 오염된 수영장 물을 너무 많이 먹어 장염으로 실려가기도 했고, 한 때는 수영강사의 심한 구박에 집에 와서 세숫대야를 놓고 음파음파 연습을 하기도 했지만 정작 수영장 물 속에선 그저 허우적 거릴 뿐이었다. 물은 그렇게 공포의 대상이었다. 하지만 영화 블루 속 쥴리엣비노쉬가  한없이 가벼워진 몸으로 자유롭게 유영했던 그 푸른 빛은 너무나 아름다웠고 매혹적이었다. 게다가 수영만 배운다면야 철인 3종은 꿈이 아니다. 그리하여, 그 경쟁률 치열하다는 종합운동장 수영 강습 입문반에 등록을 하였다. 다이어리엔 2월 한달 월수금은 커 다랗게 동그라미를 쳐 놓았고, 요즘 머하니? 라고 물으면 당당하게 수영해, 라고 대답해야지 하면서 혼자 씨익 웃어보기도 했다.

 

그렇게 수영은 시작되었고, 고대하던 첫 강습의 날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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