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이론적 태도를 강조하는 것이 '철학자'의 독법으로서 정치성을 제거할 수 있다는 데에는 동의합니다. 허나 '정치성'이라는 말이 즉각적인 현상 분석을 위한 통찰을 제공한다는 측면에 국한되지 않고, 사물을 다르게 보는 시각을 제공해 준다는 측면에서 본다면 앞서 말한 이론적 태도 역시 '정치성'을 가진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으음. 물론 이렇게 정치성이라는 개념을 폭넓게 사용하면 개념 자체가 가지는 의미가 희미해지는 측면을 우려할 수도 있겟지만요. 푸코와 정신분석의 오묘한 관계에 대해서는 강의가 끝나고 나서 대화를 나눌 기회가 있었는데 본인께서도 <저자란 무엇인가?>에서의 언급같은 개론적인 내용만을 언급해서 아쉬웠다고 하시더군요. 이 주제에 관해서는 또 다른 기회에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으면 좋겠다 싶었습니다.
먼저 장문의 댓글에 감사하며, 전반적인 언급에 대해서 동의합니다.^^ 오해의 여지가 있는 듯한 언급을 상술하자면, 제가 '생명정치나 통치성과 관련해서는 언급이 없었다'라고 쓴 부분은 그냥 강의에서 다루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주제가 주제이니 만큼, 강좌가 좀 더 고전적인(?) 푸코에 초점을 맞추었다는 의미 정도이고, 질문도 삶정치나 통치성과 관련해서 나오지 않았었고, 개인적으로 질문을 하려고 했으나 기회를 놓쳐 그 점은 아쉽습니다. 덧붙여, 푸코의 문제의식을 단순화하자면 '정치'를 권력과 주체(화)의 측면에서 들여 본다고 할 때, 그것이 훈육-사법 장치(미시?)든 인구의 통치(거시?)든간에 그것이 '결정적으로' 중요하지는 않겠죠. 푸코 본인도 분명히 그렇게 말하고 있고요. 요즘 '푸코'의 유행은 푸코보다는 네그리나 아감벤을 경유한 경우가 많고, 푸코 말년의 강의록 출판에 따른 영향도 있을 것이고, 그것보다는 '통치성'이란 유행어를 자의적으로 전용하는 탓 때문이겠죠. 그리고 잘 알다시피 '지리적' 문제 혹은 식민주의와 관련해서, 푸코가 모든 것에 해답을 주는 존재가 아니라고 한다면, 예컨대 E.사이드의 작업은 푸코의 작업을 '충실히' 잇고 있는 셈이겠지요. 그리고, 푸코 자신도 적어도 '오리엔트' 지역(과의 비교)은 언급을 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또한, '철학자'들의 훈고학적 작업이 -- 나쁘다는 의미는 아니고, 필요한 작업이고 -- 불필요하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것보다는, E.사이드처럼 푸코를 따라서, 한국에서도 자기 문제를 제기하고 실천하는 작업들이 지금보다 더욱 많아져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정치성'은 당연히 현재에 개입하는 지식인으로서 '철학자'가 견지해야만 하는 것이기에, '철학자'냐 아니냐가 중요한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저는 한국 사회에 한정해 볼 때, (적어도 이론적) 실천에서 프랑스 이론가들 중, 알튀세르와 푸코 만큼 큰 영향을 준 경우가 없다고 봅니다(브루디외도 포함시킬 수 있겠네요). 이론적 지평을 넓혔들 뿐더러 -- 이러한 기여나 효과는 다른 이들도 많지요 -- 구체적인 분석의 도구와 공간, 즉 관념이 아닌 도구를 바탕으로 한 실천영역들을 매우 확장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불행히도 후자의 '구체적'인 측면에서 주로 기여한 이들은, 활동가들을 제외할 경우, 역사학자들을 포함해서 사회과학자들이 더 많다는 것이지요. 한국 철학계의 아비투스를 가만한다고 하더라도 푸코다워 지려면 좀더 '푸코적'이어야 한다는 말이죠. 덧붙이면, 푸코와 정신분석의 관계를 연구한 선행작업들이 제법 있는 것으로 아는데, 강사는 푸코 이외에는 인용하지 않았다는 점이 많이 아쉬운 점입니다. 물론 그러한 목적의 글이 아니었다고 생각합니다만...중요한 '저항'의 문제가 강의에 많이 생략된 점도 마찬가지로 아쉬웠습니다. 덧붙이면, 강의가 끝나고, 식사자리에 참석할 기회가 있었으나, K대 철학과 교수들과 대학원생들 뿐이더군요. 개인적으로 안면이 있는 분들이 있지만, 저는 그런 자리에서 밥을 먹으면 체하기 때문에 빠졌는데, 지금 생각하니, 억지로라도 끼어서 정신분석의과의 '오묘한' 문제에 대해 좀 더 풀었으면 좋을 법했군요. 언젠가 기회가 있겠지요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