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기장 - 2011/12/18 14:15

"스스로 자기 목을 베었다가 도로 살아나게 된 한 남자가 교수형에 처해졌소. 자살의 죄목으로 그를 교수형에 처한 거요. 의사가, 그를 교수형에 처하려면 그의 목의 상처가 벌어져 그 틈구멍으로 숨을 쉬게 될 것이므로, 교수형은 불가능하다고 이미 경고했는데도 말이요. 사람들은 의사의 충고엔 귀기울이지 않고서 그 사람을 목 매달았소. 당연히, 그 사람 목의 상처가 당장 벌어져 목을 졸랐는데도 또다시 살아나게 되었소. 어떻게 할 것인가하는 문제를 결정하기 위해 시(市) 참사회원을 소집하는 데 시간이 걸렸소. 드디어 참사회원들이 모여, 그 사람 목의 상처난 자리 밑을 꼭꼭 졸라매었소. <그 사람이 마침내 죽을 때까지> 말이요. 오 나의 메리, 이 무슨 놈의 미치광이 사회이며, 어리석은 문명이란 말이요."

 

알프레드 알바레즈가 자신의 책 ‘자살의 연구’에서 인용한 편지글이다. 원글은 E.H Carr의 ‘낭만의 망명객’에 나오는 니콜라스 오가레프(Nicholas Ogarev)의 편지이다. 그리 먼 옛날 중세시대의 일도 아니고 바로 전세기인 20세기 초반의 사건인 것이 놀랍다. 너무 야만적이라 눈살이 찌푸려지는가? 그럼 이런 이야기는 어떤가?

 

택시 노동자인 A씨는 지난해 소속 노조의 위원장에 출마했다. 선거당일 투표에 참가했던 조합원이 기표한 투표용지를 핸드폰 카메라로 찍었던 사실이 발각됐다. A씨는 선거관리위원회에 가서 부정선거 우려가 있다며 항의했으나 선관위는 별 문제가 없다며 투표강행 방침을 밝혔다. 기표된 자신의 투표용지를 촬영하는 행위는 IT강국 대한민국에서 최근 유행하는 부정투표의 신종사례이다. 몇몇 사업장에서 회사쪽이 노동조합의 선거에 지배개입하기 위해 누구에게 투표했는지를 확인하는 방법으로 사용하여 세간에 유명해졌다. 후보자인 A씨로서는 당연히 이의를 제기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지만 선관위는 A씨의 이의를 묵살했다. A씨는 선관위 사무실을 나와 회사 근처의 페인트가게에 가서 시너 0.5ℓ를 구입했다. 다시 철물점에 들러 재봉틀용 기름통 6개를 구입한뒤 시너를 이 통들에 나누어 채우고 선관위 사무실로 돌아갔다. 선관위 사무실에서 기름통 2개분량의 시너를 자신의 머리에 뿌리고 분신을 시도하였으나 주변의 사람들이 막아 다행히 사고는 벌어지지 않았다. A씨는 어떻게 되었을까?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은 A씨를 연행한뒤, ‘살인미수’혐의로 구속영장을 청구했다. A씨가 “죽여버리겠다”며 상대후보에게 신너를 뿌리고 불을 지르려고 했다는게 구속영장상 기재된 범죄사실이다. ‘민주노조’를 만들어 보려고 선거에 출마했지만 그 소박한 꿈이 부정선거로 인해 좌절되자 분신이라도 하고 싶었던 A씨가 갑자기 살인미수범으로 둔갑한 것이다. 증거불충분등의 사유로 구속영장은 기각되었다. 검찰은 죄목을 ‘현주건조물방화미수’로 바꾸었다. 피의자, 피해자 누구도 듣지 못했고 유일하게 검찰의 영장청구서에만 존재했던 “죽여버리겠다”는 얘기는 이제 사라졌다. 아마도 검찰과 경찰의 귀에만 환청으로 들렸던 모양이다. A씨는 법정에서 자신의 절박했던 심정을 절절히 호소하며 선처를 구했다. 그러나 법원은 A씨가 현주건조물방화미수죄를 저질렀다며 집행유예를 선고했다.

 

110여년전 영국에서 벌어졌던 일과 2010년 대한민국에서 벌어진 사건 사이에 차이가 느껴지는가? 사람에 따라 다르게 판단할수 있겠지만, 나에겐 눈살이 찌푸려질만큼 야만스럽게 느껴지는건 동일했다.

 

대한민국의 또다른 이름은 ‘자살공화국’이다. 한국에서는 30분에 한명꼴로 자기 목숨을 스스로 끊고 있고, 자살율은 매년 증가하고 있다.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를 비롯해서 생존권을 빼앗긴 수많은 노동자들도 죽음을 택하고 있다. 이런 암울한 현실에서 법과 정의는 과연 무엇이어야 하는가. ‘MB정권은 중도실용’이라며 친정부적 행각을 보여 지금은 많은 이들의 지탄을 받고 있지만 한때 나름 진보적인 작가였던 소설가 황석영. 그는 예전 자신의 소설 ‘아우를 위하여’를 통해 “이 겨울에 한사람의 거지가 얼어죽어도 그것은 우리 모두의 책임이어야 한다.”고 주장했었다. 제몸에 시너를 끼얹고 죽겠다고 할만큼 절망에 빠진 한사람의 노동자를 위무하기는 커녕 온갖 법조문을 들이대며 처벌하겠다고 덤비는 사람들이 한번쯤 가슴깊이 음미해 보아야할 문장이 아닌가 생각한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2011/12/18 14:15 2011/12/18 14:15
TAG

Trackback Address ::

http://blog.jinbo.net/soist/trackback/455
PREV 1 ... 3 4 5 6 7 8 9 10 11 ... 68 NEX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