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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일의 여자 3

 원하는 일자리는 아니라도, 필요한 일자리를 찾을 수 있는 웹사이트에 접속하면 시급 4만원의 일자리가 있다. 덜 쓰고 더 달아 보이는 매력적인 조건을 찾을 수 있다. 사람을 찾는 자리와 자리를 찾는 사람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매력적인 이중계약. 그런 자리는 사람을 항상 뒤에서 노린다. 더 좋은 자리를 찾아서 달린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런 자리에게서 도망치고 있는 것뿐이다. 용모가 단정한20대 여자가 돈을 벌기로 마음먹는 즉시 자리는 그 여자를 벌어오기로 결정한다. 그 자리의 수는 돈을 벌려고 하는 여자의 수와 같다. 유리천장은 없다. 그 자리는 어차피 여자의 자리가 아닌가? 이번만큼은 남자에게서 빌려오거나 빼앗아올 필요가 없다. 어쨌든 시급이라는 조건에 매달리는 사람들에게는 모든 것이 불확실하므로, 젊은 여자들에게는 매력적인 그림자를 보여주기만 하면 된다. 너무 사치를 부리지만 않는다면 시급4만원은 큰 돈이다. 4만원으로는 적당한 시설에서 잠을 잘 수도 있고, 배부르게 밥을 먹을 수도 있다. 내 지갑 안에 당장 쓸 수 있는 돈이4만원이라면 나는 내게4만원의 여유가 있다는 것만으로 약간의 우월감까지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돈은 소비되지 않는 순간에도 끊임없이 내게 대가를 준다. 구두쇠는 욕심이 너무 적어서 소비되지 않는 돈이 주는 대가만으로도 만족할 수 있는 소박한 사람을 말한다. 사랑이 없는 세계에서 서로를 향한 사랑 이외에 아무 것도 보지 못하는 연인들이 아름답다면 그의 작은 세계에 돈을 담지 못하는 지갑이 돈 이외에 아무 것도 꿈꾸지 못하는 것을 추하다고 단정지을 필요는 없을 것이다.

 나는 전화번호를 메모해 둔다. 며칠을 망설이다 나 이외에 몇 사람의 전화번호부에 저장돼 있을지 짐작하기도 힘든, 열린 번호로 전화를 한다. 전화를 하기 바로 전에 나는 내가 며칠 동안 망설인 원인을 규명하는 데 실패했다. 어느 때 어느 장소, 내가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았든, 그렇게 나의 좌표가 정해지는 바로 그 순간에 내 등에는 젊은 여자의 점이 찍혔다. 나는 그 점의 색깔도 모양도 알 수 없다. 철저하게 시각적인 점, 철저하게 제한된 나의 시야. 운전을 가르치는 남자들은 여자들의 시야의 폭은 남자들의 시야의 폭보다 좁아서, 여자가 남자보다 운전을 못 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말하곤 했다. 내 뒷모습을 보는 다른 모든 사람들은 그 점을 보고 지금 여기에 젊은 여자가 서 있다고 생각했다. 내가 보기에, 다른 젊은 여자들의 등에 찍힌 점은 너무 조잡해 보였다. 그래서 내 점을 볼 수 있는 다른 사람들의 말을 믿어야 했다. “너는 특별해.” 전화하기를 망설이게 한 것도 그 말 때문이었지만, 결국 전화를 할 수 있게 한 것도 그 말이었다. 내가 어떤 점에서 특별한지 아무도 제대로 설명하지 못했던 것이다.

 시급과 담당자의 전화번호, 근무 시간 등이 적힌 자리 사이에는 사진이 있다. 화려하게 입고 웃는 여자들 사진이 대부분이다. 같은 전화번호를 적어둔 다른 게시물들을 몇 개씩 발견할 수 있는데, 어떤 게시물에는 여자들 사진이, 어떤 게시물에는 커피가 담긴 머그잔과 바게트가 등장하는 사진이 있다. 위치는 정확하게 나오지 않지만 강북과 강남의 구분만큼은 확실해 보인다. 어떤 곳은 아가씨들이 “안전하게 출퇴근”할 수 있도록 셔틀버스를 매일 운행한다고 광고하기도 한다. 친구들이 백화점1층에서 산 명품 가방이 부러운 여자, 비싸기로 유명한 성형외과에서 성형한 동창이 들고 나온 얼굴이 부러운 여자, 해외에서 럭셔리 휴가를 보내는 부잣집 자제들이 부러운 여자, 결혼을 잘 해서 풍족하게 사는 사촌이 부러운 여자들에게, 번쩍번쩍하는 배너가 포함된 광고는 부지런히 외친다. 시급4만원! 매 시간4만원을 열심히 적립해 봅시다.

 나는 금요일 낮에 전화를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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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일의 여자 2

 시간이 조금만 지나고, 시간이 흐름에 따라 다른 것들을 보면 새로운 생각들이 나타난다. 잠시를 기록하는 데서 만족하지 않으려면 긴 호흡이 필요하다. 기록하지 못한 것에 연연하지 않고, 나를 스쳐간 생각들이 내 생각임을 믿어서 다시 내게 자연스럽게 돌아오게 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다. 그래서 주인공이나 말하는 사람을 '나'로 두는 것은 어느 정도 위험한 일이다. 글을 쓰기 전에 '나'는 아직 없다. '나'는 경험하고 생각하고 기록했던 내가 아닌 등장인물인데, '나' 라고 한 번씩 말할 때마다 태어날 필요도, 생길 필요도 없었던 나는 점점 사라지기 때문이다. 나는 내 몸으로 나를 지우면서 '나'의 이야기를 쓴다. 그러니까 '나'라고 이야기할수록 나를 이야기할 수 없다는 것, 결국에는 내가 엄청나게 얇고 희미해지리라는 것을 알면서 쓴다.

 사실은 이야기 안에 '나'를 두지 않는 것이 좋다. 오히려 그래야 쓰는 나도 그게 내 이야기라고 착각하기 쉽고, 오히려 나는 일부러 기억하지 않아도 되는 진짜 생각들을 그, 그녀, 혹은 그것의 것인 양 솔직하게 적을 수 있을 것이다. 문장의 장난, 나의 장난. 단어의 장난인가? 하지만 '나'를 쓰지 않고 글을 이어나가기에 나는 너무나 편협하다.

 해가 빛나는 낮에 화려한 상점들을 웃으며 돌아다니는 젊고 예쁜 여자들을 보고 다들 한 마디씩 했다. 저 여자는 돈 많은 남편을 둔 예쁜 아내거나, 돈 많은 아빠를 둔 예쁜 딸이거나, 술집 여자일 것이라고 말했다. 술집 여자는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사라지는가? 그녀들은 오기도 하고 가기도 하고, 생기기도 하고 사라지기도 하는가? 나는 돈 많은 남편도 돈 많은 아빠도 없었으므로 술집 여자가 되어볼 수는 있었다. 찬란한 낮에 밝은 상점에서 걱정 없이 돈을 쓸 수 있다는 것에서부터 추락을 감지되었다. 더 많이 추락할수록 더 많이 쓸 수 있고 더 깊이 내려갈수록 더 즐거운 낮을 보낼 수 있으리라.

 그리고 나머지는 호기심이었다. 호기심의 자루를 쥐는 쪽에게는 더없이 흥미롭고 찬탄할 만하지만 호기심의 보이지 않는 날을 맞아야 하는 쪽에서는 당혹스럽고 모욕적인 일을 벌이는 것. 호기심 때문에 어떤 벌레는 찢기고 어떤 라디오는 분해되었다. 호기심은 시간과 장소의 제약이 덜할수록 목표에 강하게, 정확하게 집중할 수 있다. 호기심은 마음이 아니고 어떤 종류의 자세이다. 호기심은 대화하는 법을 모르므로 그의 상대, 그의 목표에게 아무 것도 알리지 않는다. 다른 이들에게도 호기심 자신에 대해 이야기하지는 않으면서 자기가 발견한 것, 연약하거나 친절해서 자기가 접근할 수 있었던 그것에게서 빼앗아 온 것을 잘린 귀들처럼 지니고 있다가 자랑하는 법만 알고 있다. 이제 나는 철저하게 계획된 호기심을 실행하려고 한다. 이 활동은 자유로울 수 없을지도 모른다. 어떤 시간에, 어떤 장소에서 어떤 사람을 파헤치고 어떤 것을 가지고 나올 지 정해져 있기 때문이다. 조금만 솔직히 이야기하면, 나는 이미 너무 많은 것을 알고 있었고 너무 많은 것을 예상하고 있었는데도, 나의 자세는 호기심이라는 이름을 붙이기에는 너무 단단해져 있었음에도 욕심을 내고 있는 것인지 모른다.

 그래서 처음에는 아르바이트를 구할 수 있는 웹사이트를 찾았다. 술집 아르바이트를 거기서 구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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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일의 여자 1

 잊는 것은 완벽한 소화 후에 가능하다. 부지런하거나 통찰력 있는 사람에게는 완벽하게 소화하는 일이 쉬울 수도 있다. 재주가 많은 사람은 다른 일에 집중함으로써 늘어지는 소화 과정을 그럭저럭 견딜 수도 있다. 나는 무능력하고 끈기도 없다. 결국 많은 사람들이 집착이라고 부르는 기억을 온 몸으로 맞는다. 그리고 마르기 전에 다시 맞고, 그것은 또 스며들고, 나는 주먹을 꽉 쥐고 짜낸다.

 오늘도 비가 내렸고 바닥은 축축하다. 덜 마른 빨래를 앞에 두고서도 세탁기를 돌려야 했다. 싸늘함이 싫어서 시원하게 뚫린 신발을 신고 저녁에 나왔다. 우산 밑에서 빛나는 얼굴들과 건조함 없이도 바삭거리는 젊음을 보고 그 사이를 걸었다. 앞에서는 검은 색 구두를 신고 검은 색 치마를 입은 늙은 여자가 은행에서 받은 우산을 들고 걷고 있었는데, 살짝 휘어진 다리가 괄호 모양으로 바닥을 끌면서 지나갔다. 그녀의 몸통과 다른 곳에서 출발했다고 해도 믿을 수 있을 앙상한 다리가 치마를 팽팽하게 만들었다가, 앞으로 나아가고, 뒤로 밀렸다가 바닥을 찼다. 그녀와 함께 버스정거장에 섰다. 우산들도 동시에 팔을 접고 얌전히 다리 옆에 섰다.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들 중에는 명품 가방의 로고를 흉내내지도 못한 조그만 가방을 든, 키 작은 여자가 있다. 두 손바닥보다 작은 가방에서 '스카치 브라이트'의 손잡이 부분이 삐져나와 있다. 서늘한 날씨에 붉은 얼굴을 하고 머리를 묶은 스카치 브라이트 여자는 핸드폰을 지켜보고 있다. 스카치 브라이트를 가방에 꽂고 버스를 기다리는 그 여자는 파출부다. 하루 4시간, 아파트 한 채, 3만 5천원 때문에 버스를 기다리면서 중학생 아들 때문에 집 냉장고에는 반찬을 대기시켰다. 한참 전에 떠난 겨울은 손에만 머물러서, 검붉어진 그 손은 항상 건조하고 따끔거린다.

 변두리를 순환하는 버스를 타고, 남겨둔 현금으로 혼자 DVD방에 갔다. 어두운 방에서 <Up>을 보고 소리내어 울었다. 사랑과 같은 것이라고 평가받는 행위로 발생하는 충격을 흡수하기 위한 쿠션을 최대로 이용하며 슬퍼했다. 여기보다 더 어두운 영화관에서 그와 같이 봤을 때처럼, 처음부터 끝까지 빠뜨리지 않고 울었다. 부은 눈으로 집에 돌아와서 나는 이 글을 쓴다. 너무 무거우면 버리고, 소화가 안 되면 게워내고, 잊지 못하면 발설해야 한다. 다 스며들지 못한 것이나, 다 마르지 못한 것이나 그대로 두면 썩기만 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서사가 아닌 상황이고, 기록이 아닌 나머지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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