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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남주

남주 시인

  

김남주시인의 시들은 내 첫 번째 대학생활을 거의 지배했었다. 비쩍마른 체구와 달리 말만 들어도 섬뜩한 '남민전'이라는 조직의 전위대 전사 출신이다. 70년대 말 썩을대로 썩은 박정희 유신정권에 맞서 정권을 뒤엎을 것을 결의하며 지리산에서 훈련을 하였다는 그 남민전의 전위대 전사. 유약해 빠져 우유부단함을 상징하던 지식인의 이미지를 깨는 그의 모습, 돌아가지 않고 너무나 직설적인 그의 詩들은 20살 팔팔한 나의 마음을 뒤흔들어 놓았다. 어쩌면 그는 시인이기 전 전사였는지 모른다. 아래에 시들은 노래로 불려져 너무나 유명해진 '함께가자 우리', '노래', '삼팔선은 삼팔선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와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시들이다.

 

 

- 1946 (01) : (10. 16) 전남 해남군 해남읍 삼산면 봉학리 535번지에서 아버지 김봉수,  어머니 문일님의 둘째 아들로 태어남.

- 1964 (18) : 광주일고 입학, 입시위주의 획일적 교육제도에 반대하여 이듬해 자퇴

- 1969 (24) : 대입 검정고시를 거쳐 전남대 문리대 영문과 입학. 3선개헌 반대운동과 교련 반대운동에 참여, 반독재 민주화운동을 이끔. 지하신문 '함성'지 제작

- 1973 (28) : 전국적인 반 유신투쟁을 위해 지하신문 '고지'지 제작. 반공법 위반 혐으로 구속. 징역 2년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고 복역 중 투옥 8개월만에 석방됨.전남대서 제적.

- 1974 (29) : 고향에 내려가 농사를 지음. 『창작과 비평』여름호에 <진혼가>, <잿더미> 등 7편의 시를 발표하면서 작품활동 시작

- 1975 (30) : 광주에서 사회과학 서점 '카프카' 개설

- 1977 (32) : 농민들과 함께 '해남농민회'결성. (한국 기독교 농민회의 모체). 광주에서 황석영, 최권행과 함께 민중문화연구소 개소.

- 1978 (33) : 상경하여 <남조선 민족해방전선 준비위원회>에 가입하고 남민전 전위대 전사로 활동. 수배중 프란츠 파농의 <자기 땅에서 유배당한 자들>(청사)번역출간.

- 1979 (34) : 남민전 조직원으로 서울에서 활동 중 구속되어 투옥됨. 이듬해 이 사건으로 징역 15년을 선고받고 광주교도소에 수감.

- 1984 (39) : 첫시집 <진혼가>(청사)출간.

- 1987 (42) 제2시집 <나의 칼 나의 피>(인동)출간. 일본에서 시집<농부의 밤> 일어판 출간

- 1988 (43) : 제3시집 <조국은 하나다>. 하이네·네루다·브레히트 시선집 <아침 저녁으로 읽기 위하여>(남풍)출간. 12월 21일 형 집행정지로 투옥생활 9년 8개월만에 출소

- 1989 (44) : 1. 29 광주 문빈정사에서 박광숙과 결혼. 옥중 서한집 <산이라면 넘어주고 강이라면 건너주고>(삼천리) 출간. 시선집<사랑의 무기>(창작과 비평사) 출간. 제4시집 <솔직히 말하자> (풀빛) 출간.

- 1990 (45) : 광주항쟁 시선집 <학살>(한마당) 출간. 92년 12월까지 민족문학 작가회의 민족문학연구소장.

- 1991 (46) : 제5시집 <사상의 거처>(창작과 비평사)출간.

- 1991 (46) : 제5시집<사상의거처>(창작과 비평사) 출간. 제9회 '신동엽창작기금상'받음.  시선집<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미래사) 출간.

  산문집<시와 혁명>(나루)출간.  하이네 장치 풍자시집2<아타 트롤>(창작과 비평사)번역 출간.

- 1992 (47) : 제6시집 <이 좋은 세상에> (한길사) 출간. 옥중 시선집<저 창살에 햇살이 1·2>   (창작과 비평사)출간. 제6회 단재 문학상 수상.

- 1993 (48) : 윤상원 문학상 수상. 여의도 여성백인회관에서 '김남주 문학의 밤' 개최.

- 1994 (49) : 2월 13일 새벽 2시 30분 췌장암으로 별세. 유족으로 부인 박광숙 여사와 아들   토일 군이 있음.

- 2000. 5. 20 광주 중외공원에 민족시인 김남주시비 건립

 

 

80년대의 가슴에 꽃힌 시인전사

최재봉(한겨래신문)기자

한국 현대시사에서 김남주(1945∼94)의 시들은 선명한 메시지와 강렬한 어조로 하여 두드러진다.

김남주가 외세에 대한 거부와 부자들을 향한 증오, 독재권력을 상대로 한 싸움을 노래한 유일한 시인은 아니었지만, 그 거부와 증오와 싸움을 노래 바깥의 현실로 옮기려 했다는 점에서 그는 다른 많은 시인들과 구분된다. 그는 시인인 동시에 전사였으며, 그것은 결코 비유적인 의미에 머무는 것이 아니었다.

          "시인이여
          누구보다 먼저 그대 자신이
          싸움이 되어서는 안 되는가
          누구보다 먼저 그대 자신이
          압제자의 가슴에 꽂히는
          창이 되어서는 안 되는가."
          ('시인이여')

라고 그가 부르짖을 때 그것은

          "우리 모두 화살이 되어
           온몸으로 가자"
           (고은, '화살')

는 선동과 같은 궤에 놓이면서도 훨씬 더 강한 울림을 울린다. 그것은 무기(창:화살)와 대상(압제자:과녁)의 차이가 빚어내는 미학적 거리에 문제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말 그대로의 전사와 시인의 차이가 반영된 결과라 해야 할 것이다.

철의 독재자 박정희가 심복의 손에 쓰러지기 불과 보름여 전 내무부는 '남조선민족해방전선'(남민전) 사건을 발표했다. 김남주는 중심인물인 이재문 등 20여명과 함께 그때 이미 체포된 상태였다.

이후 모두 80여명이 검거돼 그 가운데 2명이 사형을 언도받기에 이른 남민전 사건이란 무엇이었던가.

사건 관련자들과 연구자들에 의해 밝혀진 사실에 따르면 남민전은 제3 세계 민족해방운동과 보조를 맞추어 예속적 독재권력의 타도와 외세의 축출, 그리고 부의 공평한 분배를 목표로 한 비밀결사였다.

남민전이 가장 직접적인 모델로 삼았던 것은 베트남 통일의 원동력이었던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이었으며, 국내적으로 그것은 인혁당과 같은 자생적 사회주의 결사의 전통 위에 서 있었다. 그러나 검거당시 아직 준비위 차원에 머물러 있던 남민전은 실제에 있어서는 한국민주투쟁국민연맹 명의의 반독재 유인물 살포에 주력했으며, 김남주와 박석률 등 남민전 전위대 전사들은 활동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부잣집 담을 넘기도 했다.

남민전 동지이자 김남주의 부인인 박광숙씨에 따르면 남민전은 무엇보다도 반독재 민주화투쟁 단체였다.

"모두가 숨죽이고 있던 공포통치의 시대에 남민전은 교사와 노동자, 학생 등 각계각층을 망라한 통일운동체였다. 강령에 있어서는 반제국주의와 노동해방을 표방했지만, 실제로는 반독재·반유신투쟁이 주요한 활동이었다."

김남주의 대부분의 시는 남민전 사건과 관련해 15년 징역형을 선고받고 복역중이던 감방에서 쓰여졌다. "시는 혁명을 이데올로기적으로 준비하는 문학적 수단" 이라고 규정한 그에게 선동의 효과가 미학적 고려에 우선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시와 혁명의 관계를 논하는 글에서 그는 그 둘이 상호보완적 관계에 있다고 토를 달았지만, 그것은 하부구조와 상부구조에 관한 마르크스의 규정과도 같아서 그에게 있어 우선시되는 것은 어디까지나 혁명이었다. 그러나 흥미있는 것은 시보다는 혁명에 기운 그의 선택이 오히려 미적 완성도가 높은 시의 탄생에 기여했다는 점이다.

김남주는 하이네, 네루다, 마야코프스키 등 외국 시인들의 영향을 진하게 받았다고 밝힌 바 있지만, 한편으로는 '노래'에서 보듯 '새야 새야 파랑새야'에서 김지하에 이르는 참여적 서정시의 전통 위에 굳건히 서 있다. 제국주의/신식민주의, 독재/자유, 자본/민중의 명료한 이분법에 입각한 그의 세계관은 상황의 핵심을 꿰뚫는 촌철살인의 절창을 낳았다. 그의 대부분의 시들은 비정상적인 환경에서 비상한 수단과 방법으로써 쓰여졌다.

집필의 자유가 허락되지 않는 대한민국의 감옥에서 시인은 머릿속에 시를 써두었다가 면회온 친지들에게 불러주거나, 읽던 책의 여백이나 우유곽을 해체해서 생긴 은박지에 못으로 눌러서 시를 썼다(간수의 눈을 피해 한 땀 한 땀 수를 놓듯 시를 새기고 있는 시인의 모습을 상상해 보라!). 김남주는 먼저 석방돼 나와 그의 옥바라지를 계속한 박광숙씨와 출옥 한달여 만에 결혼해서 아들 토일이를 투었다. 노동자들이 1주일에 사흘 금·토·일요일은 쉬어야 한다는 뜻이 그 이름에 담긴 토일이는 어느새 초등학교 1학년이 됐다.

시인은 가고 뒤에 남은 처자와 함께 그의 해남을 찾는다. 희고 붉은 코스모스, 노랗고 예쁜 벼들, 그리운 이의 소짓처럼 하느작대는 억새로 해서 가을 들판은 따뜻하고 정겨웁다. 해남읍에서 차로 10여분을 달리면 나오는 삼산면 봉학리 그의 생가에서는 팔순이 가까운 노모가 마당에 넌 고추와 호박을 돌보고 있다가 어린 손주를 반긴다. 푸른 대숲으로 둘러싸인 집에는 군 청년회에서 만들었다는 시화패널들 이 처마에 걸려 있을 뿐 시인의 생가임을 알리는 이렇다 할 기념물은 보이지 않는다.

다만, 시인이 주로 썼다는 사랑채에 그가 옥중에서 보았던 이런저런 잡지와 단행본들이 먼지에 덮여 쌓여 있다. '수번 2164, 교부일 81. 3. 23, 요납일 81. 4. 22'의 열독허가증이 붙은 책들은 80년대 초의 어느 시점에 얼어붙은 채 무심한 세월을 견디고 있다. 시인은 죽어서 망월동에 묻혔다. 생전에 그가 쓴 시 '망월동에 와서'가 입구에 자리잡고 있는 5월 광주 희생자 묘역에서 그의 영혼은 비로소 안식을 찾았을 것인가. 그의 분신인 토일이와 부인 박광숙씨를 일어나 반기지 못하는 무덤 숙의 그를 안쓰러워하며 '전사 2'의 뒷부분을 떠올린다.

 

 

 

노래 - [진혼가] 연구사 1984
 
 
이 두메는 날라와 더불어
꽃이 되자 하네 꽃이
피어 눈물로 고여 발등에서 갈라지는
녹두꽃이 되자 하네

이 산골은 날라와 더불어
새다 되자 하네 새가
아랫녘 웃녘에서 울어예는
파랑새가 되자 하네

이 들판은 날라와 더불어
불이 되자 하네 불이
타는 들녘 어둠을 사르는
들불이 되자 하네

되자 하네 되고자 하네
다시 한번 이 고을은
반란이 되자 하네
청송녹죽(靑松綠竹) 가슴으로 꽂히는
죽창이 되자 하네 죽창이

 

함께 가자 우리 - [나의 칼 나의 피] 인동 1987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
셋이라면 더욱 좋고 둘이라도 함께 가자
뒤에 남아 먼저 가란 말일랑 하지 말자
앞서 가며 나중에 오란 말일랑 하지 말자
일이면 일로 손잡고 가자
천이라면 천으로 운명을 같이 하자
둘이라면 떨어져서 가지 말자
가로질러 들판 물이라면 건너주고
물 건너 첩첩 산이라면 넘어주자
고개 넘어 마을 목마르면 쉬어가자
서산 낙일 해 떨어진다 어서 가자 이 길을
해 떨어져 어두운 길
네가 넘어지면 내가 가서 일으켜주고
내가 넘어지면 네가 와서 일으켜주고
산을 넘고 물을 건너
언젠가는 가야 할 길
누군가는 이르러야 할 길
가시발길 하얀 길
에헤라, 가다 못 가면 쉬었다나 가지
아픈 다리 서로 기대며

 

자유 - [나의 칼 나의 피] 인동 1987
 
 
만인을 위해 내가 노력할 때
나는 자유이다
땀 흘려 힘껏 일하지 않고서야 어찌 나는 자유이다라고 말할 수 있으랴
만인을 위해 내가 싸울 때 나는 자유이다
피 흘려 함께 싸우지 않고서야 어찌 나는 자유이다라고 말할 수 있으랴
만인을 위해 내가 몸부림칠 때 나는 자유이다
피와 땀을 눈물을 나워 흘리지 않고서야 어찌 나는 자유이다라고 말할 수 있으랴
사람들은 맨날
밖으로는 자유여, 형제여, 동포여! 외쳐대면서도
안으로는 제 잇속만 차리고들 있으니
도대체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도대체 무엇이 될 수 있단 말인가
제 자신을 속이고서

 

삼팔선은 삼팔선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 [조국은 하나다] 남풍 1988
 
 
삼팔선은 삼팔선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당신이 걷다 넘어지고 마는
미팔군 병사의 군화에도 있고
당신이 가다 부닥치고야 마는
입산금지의 붉은 팻말에도 있다
가까이는
수상하면 다시 보고 의심나면 짖어대는
네 이웃집 강아지의 주둥이에도 있고
멀리는
그 입에 물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죄 안 짓고 혼줄 나는 억울한 넋들에도 있다
삼팔선은 삼팔선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낮게는
새벽같이 일어나 일하면 일할수록 가난해지는
농부의 졸라 맨 허리에도 있고
제 노동을 팔아
한 몫의 인간이고자 고개 쳐들면
결정적으로 꺾이고 마는 노동자의
휘여진 등에도 있다
높게는
그 허리 위에 거재(巨財)를 쌓아올려
도적도 얼씬 못하게 가시철망을 두른
부자들이 담벼락에도 있고
그들과 한패가 되어 심심찮게
시기적절하게 벌이는 쇼쇼쇼
고관대작들이 평화통일 제의의 축제에도 있다
뿐이랴 삼팔선은
나라 밖에도 있다 바다 건너
원격조종의 나라 아메리카에도 있고
그들이 보낸 구호물자 속이 사탕에도 밀가루에도
달라의 이면에도 있고 자유를
혼란으로 바꿔치기 하고 동포여 동포여
소리치며 질서의 이름으로
한강을 도강(渡江)하는 미국산 탱그에도 있다
나라가 온통
피묻은 자유로 몸부림치는 창살
삼팔선은 감옥의 담에도 있고 침묵의 벽
그대 가슴에도 있다.

 

바람에 지는 풀잎으로 오월을 노래하지 말아라 - [조국은 하나다] 남풍 1988
 
 
바람에 지는 풀잎으로
오월을 노래하지 말아라
오월은 바람처럼 그렇게
오월은 풀잎처럼 그렇게
서정적으로 오지는 않았다
오월은 왔다 비수를 품은 밤으로
야수의 무자비한 발톱과 함께
바퀴와 개머리판에 메이드 인 유 에스 에이를 새긴
전차와 함께 기관총과 함께 왔다
오월은 왔다 헐떡거리면서
피에 주린 미친 개의 이빨과 함께
두부처럼 처녀의 유방을 자르며
대검의 병사와 함께 오월은 왔다
벌집처럼 도시의 가슴을 뚫고
살해된 누이의 웃음을 찾아 우는
아이의 검은 눈동자를 뚫고
총알처럼 왔다 자유의 거리에
팔이며 다리가 피묻은 살점으로 뒹구는
능지처참의 학살로 오월은 오월은 왔다 그렇게!

바람에 울고 웃는 풀잎으로
오월을 노래하지 말아라
오월은 바람처럼 그렇게
오월은 풀잎처럼 그렇게
서정적으로 일어나거라 쓰러지지 않았다
오월의 무기 무등산의 봉기는
총칼의 숲에 뛰어든 맨주먹 벌거숭이의 육탄이었다
불에 달군 대장간의 시뻘건 망치였고 낫이었고
한 입의 아우성과 함께 치켜든 만인의 주먹이었다
피와 눈물 분노와 치떨림 이 모든 인간의 감정이
사랑으로 응어리져 증오로 터진 다이너마이트의 폭발이었다

노래하지 말아아 오월을
바람에 지는 풀잎으로 '바람'은
학살의 야만과 야수의 발톱에는 어울리지 않는 말이다
노래하지 말아아 오월을
바람에 일어나는 풀잎으로 '풀잎'은
피의 전투와 죽음의 저항에는 어울리지 않는 말이다
학살과 저항 사이에는
바리케이드의 이편과 저편 사이에는
서정이 들어 설 자리가 없다 자격도 없다
적어도 적어도 오월의 광주에는!

 

돌멩이 하나 - [사상의 거처] 창작과 비평사 1991
 
 
하늘과 땅 사이에
바람 한점 없고 답답하여라
숨이 막히고 가슴이 미어지던 날
친구와 나 제방을 걸으며
돌멩이 하나 되자고 했다
강물 위에 파문 하나 자그많게 내고
이내 가라앉고 말
그런 돌멩이 하나


날 저물어 캄캄한 밤

친구와 나 밤길을 걸으며
불씨 하나 되자고 했다
풀밭에서 개똥벌레즘으로나 깜박이다가
새날이 오면 금세 사라지고 말
그런 불씨 하나


그때 나 묻지 않았다 친구에게
돌에 실릴 역사의 무게 그 얼마일 거냐고
그대 나 묻지 않았다 친구에게
불이 밀어낼 어둠의 영역 그 얼마일 거냐고
죽음 하나 같이할 벗 하나 있음에
나 그것으로 자랑스러웠다

 

똥파리와 인간 - [사상의 거처] 창작과 비평사 1991
 
 
똥파리에게는 더 많은 똥을
인간에게는 더 많은 돈을
이것이 나의 슬로건이다

똥파리는 똥이 많이 쌓인 곳에 가서
뗴지어 붕붕거리며 산다 그곳이 어디건
시궁창이건 오물을 뒤집어쓴 두엄더미건 상관 않고

인간은 돈이 많이 쌓인 곳에 가서
무리지어 웅성거리며 산다 그곳이 어디건
범죄의 소굴이건 아비규환의 생지옥이건 상관 않고

보라고 똥 없이 맑고 깨끗한 데에 가서
이를테면 산골짜기 옹달샘 같은 데라고 가서
아무도 보지 못할 것이다 떼지어 사는 똥파리를

보라고 돈 없이 가난하고 한적한 데에 가서
이를테면 두메산골 외딴 마을 깊은 데라도 가서
아무도 보지 못할 것이다 무리지어 사는 인간을

산 좋고 물 좋아 살기 좋은 내 고장이란 엣말은
새빨간 거짓말이다 똥파리네게나 인간에게나
똥파리에게라면 그런 곳은 잠시 쉬었다가
물찌똥이나 한번 찌익 갈기고 돌아서는 곳이고
인간에게라면 그런 곳은 주말이나 행락철에
먹다남은 찌꺼기나 여기저기 버리고 돌아서는 곳이다

따지고 보면 인간이란 게 별 것 아닌 것이다
똥파리와 별로 다를 게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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