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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perations Research

Operations Research

 

이름하야 O.R이라고 불리는 과학적 방법에 의한 시스템의 운영문제 해결방안

1909년 F.W.Taylor가 발표한 '과학적 관리의 원칙'(the principles of scientific management)으로 시작된 과학적 관리기법은 공정도로 유명한 Frank Gilbreth 의 동작분석에 의한 작업방법의 개선연구인 '동작연구'(motion study)를 거쳐 드디어 O.R이 개발되었다.

O.R은 2차 세계대전 중 본격적인 연구 이전에  영국의 F.W.Lanchester라는 사람이 군사작전 문제를 수량적으로 연구하고 전투의 결과(평균병력손실)는 병력 수와 교전 1회당 화력의 유효율의 積에 비례한다고하는 Lanchester 방정식을 고안하여 O.R과 유사한 연구를 시도하였고 본격적인 연구는 2차 세계대전 중 영국 국방부에서 시작되었다.

영국은 전쟁 중 전쟁물자를 비롯한 물품을 미국 등 외부로부터 선박편으로 들여왔는데 독일군의 U-Boat의 무차별 공격에 의해 피해가 막심하였다. 이에 잠수함 공격에 대한 최선의 방어전략을 찾기 위해 영국 국방장관은 물리학자, 심리학자, 공학자, 수학자 들로 구성된 O.R 팀을 구성하였는데 그 중 가장 유명한 팀이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한  P.M.SSS.Blackett 교수가 이끄는 해군 O.R 팀이었다. 그리고 전쟁이 끝난 수 이들은 각자의 기업체와 학교로 복귀하여 기업의 경영관리상 문제에 O.R을 적용하기 시작하면서 이 괴로운 O.R이 시작되었다.

 

선형계획법(Linear Programming)

여러 개의 제한 조건하에서 목적함수(objective function)의 값을 극대화, 극소화하는 자원의 배분문제(allocation problem)를 물기위한 O.R 기법을 수리계획법(mathematical programming)이라하고 이 중 가장 유명한 것이 선형계획법이다.

선형계획법은 선형대수학의 이론을 활용한 것으로 목적함수, 제한식(constraints)이 모두 1차식이 된다하여 이름 붙여졌다.

 

예제를 보면서 천천히 함 풀어보자.

 

문제>

아래 표에서 보듯 제품 A를 만드는 데 재료 abc가 각각 3,1,1 쓰이고 제품 B를 만드는 데는 재료 abc가 각각 4.3.6 이 쓰인다. 판매이익을 극대화하는 각 제품의 생산량을 구하라.

제품

A

B

사용가능량

a

b

c

3

1

1

4

3

6

48

21

36

판매이익

1,000

2,000

 

 

풀이>

이런 문제가 바로 제품혼합문제라구 그나마 간단한 문제 되겠다. 이걸 도해법과 Simplex Method로 풀어보자.

먼저 수학모델로 만들기 위해 결심변수(decision variable)결정. 생산량 구하는 문제이므로

제품 A의 생산량을  , 제품 B의 생산량을

 

목적함수

제한식

 ···················· ①

 ······················· ②

 ······················· ③

 

■ 도해법 (Graphical Method)

 

 

제한식 ①②③을 에 대해 그림으로 나타내면 위 그림과 같다. 목적식 는 Z값이 변함에 따라 움직이며 가해지역내에서 Z값이 최대가 되는 점을 찾기 위해 움직여보면 가해지역의 다섯 꼭지점 중 하나에서 Z값은 최대가 된다.

이 문제에서는 C점이 가해지역과 만나는 최대 지점인데 C점은 목적식 ①과 ②가 만나는 접점으로 이 두방정식으로부터 ()=(12, 3)가 구해진다. 그리고 드디어 최적해 정답 Z=18,000

 

■ Simplex Method

위 도해법에서 최적해는 제한식들이 만나는 점 중에서 생긴다는 사실에서 각 접점만을 최적해 값에 대입해 보는 것이 Simplex Method란 것이다.

근데 과연 Simplex 라는 말처럼 간단할까? 아니 열라 복잡하다. 거의 죽음이다. 그래도 우짜겠나 위 그림처럼 2차원내에 그림이 그려지면 모르지만 목적식이나 제한식이 4,5차원으로 넘어가 버리면 못 그리지 않나 근데 현실의 문제라는 게 대부분 그렇게 복잡한 것들 투성이니까 어찌보면 Simplex 이기도 하다. 아주 복잡한 Simplex. 젠장...

 

목적함수

제한식

 ···················· ①

 ······················· ②

 ······················· ③

 

다시 똑같은 문제를 Simplex Method로 풀기 위해서는 먼저 제한식의 부등식을 등식으로 바꾸어야 한다. 그래서 말고 또 다른 변수를 널어서 등식을 만들어보자.

 

목적함수

제한식

 ···················· ①

 ······················· ②

 ······················· ③

 

위의 부등식에서 좌변이 모자라는 것을 메우기 위해서는 양의 변수를 더해 주어야 하는데 이렇게

 

          더해주는 변수를 여유변수(slack variable)이라 하고

          빼주는 변수를 잉여변수(surplus variable)이라 한다.

 

이제 접점들 중 인 A 점부터 해를 구하고 A 점에서 가까운 접점의 해를 차례대로 구해나간다.

또한 여기서 기저변수(Basic Variable)는 한 곳에만 존재하고 계수가 1인 이고 비기저변수(Nonbasic Variable)는 0의 값을 가지는 이다.

 

 

 

solution

 

Z

-1000

-2000

0

0

0

0

 

3

4

1

0

0

48

/4=12

1

3

0

1

0

21

/3=7

1

6

0

0

1

36

/6=6

Z

0

0

0

12000

 

0

1

0

24

10.2857

0

0

1

3

6

1

0

0

6

36

Z

0

0

0

16000

 

0

0

1

10

6

1

0

0

2

-1

6

-6

0

1

0

5

15

Z

0

0

200

400

0

18000

 

0

0

1

6

 

1

0

0

12

 

0

1

0

3

 

 

1. 진입변수는 Maximize 문제에서는 Z 값의 음수를 없애야 하니까 음수 중 가장 작은 값으로, Minimize 문제에서는 Z 값의 양수 중 가장 큰 값이 된다. (쉽게 절대값이 젤 큰 거 넣으면 된다) 이 문제에서는 표에 안의 열이고 진출변수는 해를 진입변수로 나눈값 중 가장 작은 값으로 안의 행이다. 그리고 진입과 진출의 접점에 있는 값을 Pivot Element라 한다.

 

2. 진입열이 이고 진출행이 이므로 기저변수는 , 에서 , 으로 바뀐다. =0, =0이므로

가 속한 ③번 식이  =0과 만나는 접점인 E점으로 이동한다.

 

3. 진출행은 Pivot Element로 나누어 주고

 

           =  1  / 6  =  1/6

           =  6  / 6  =  1

           =  0  / 6  =  0

           =  0  / 6  =  0

           =  1  / 6  =  1/6

   solution = 36 / 6  =  6

 

   나머지 행은 기존의 값-(해당행의 진입변수 × 바뀐 진출행의 값)

 

           = -1000  -  ( -2000 × 1/6 )   = -2000/3

           = -2000  -  ( -2000 × 1 )      = 0

           =       0  -  ( -2000 × 0 )      = 0

           =       0  -  ( -2000 × 0 )      = 0

           =       0  -  ( -2000 × 1/6 )   = 1000/3

   solution =       0  -  ( -2000 × 6 )      = 12000

 

4. 이것을 반복하는데 비기저변수의 Z값이 양의 수가 나올 경우 해가 최적해가 된다. 위의 경우 18000

 

근데 완전 노가다 짓이다. 이짓을 어케하냐. 그래서 맨처음 표만 짜고 나머지는 컴에게 맡긴다고 한다. 컴만 불쌍하다.

여기까지가 아주 평범한 Simplex Method 이고 Big M, Two Phase 는 시간 나는 대로 정리 할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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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자인 개념의 문제해결방식

자인개념의 문제해결방식


 

①문제의 형성(Formulation of the Problem)

'풀려고 하는 문제가 과연 무엇인가?'라는 기초적이며 극히 중요한 질문을 소홀히 하다보면 문제가 무엇인지 모르는 상태에서 무조건 문제를 풀려고 하는 경우가 생긴다. 이 단계에서는 문제의 범위를 전체 시스템으로부터 분리시키고 문제가 지니는 특성의 세부내용이나 제약의 상세한 조건 등은 고려하지 않는다.

또한 문제범위 선택 시 문제범위가 넓을수록 도출된 해결안이 최적해에 가까우며 좁을수록 부분최적해(Suboptimum)밖에 되지 않는다.

주의1 : 완전히 제거할 수 있는 작업공정을 다시 디자인하거나, 사용되지 않을 부품을 디자인하는 것 처럼 실제하지 않는 문제 혹은 존재하지 않는 문제를 해결하려 할 수 있다.

주의2 : 문제 자체보다 현재의 해결방안을 문제시하여 풀려할 수 있다. 현재의 방안 역시 문제의 여러 대안 중 하나로 보아야 한다.

②문제의 분석(Analysys of the Problem)

 

③대안의 탐색(Search for Alternatives)

 

④대안의 평가(Evaluation of Alternatives)

 

⑤선정안의 명시(Specification of the Preferred Solu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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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남주

남주 시인

  

김남주시인의 시들은 내 첫 번째 대학생활을 거의 지배했었다. 비쩍마른 체구와 달리 말만 들어도 섬뜩한 '남민전'이라는 조직의 전위대 전사 출신이다. 70년대 말 썩을대로 썩은 박정희 유신정권에 맞서 정권을 뒤엎을 것을 결의하며 지리산에서 훈련을 하였다는 그 남민전의 전위대 전사. 유약해 빠져 우유부단함을 상징하던 지식인의 이미지를 깨는 그의 모습, 돌아가지 않고 너무나 직설적인 그의 詩들은 20살 팔팔한 나의 마음을 뒤흔들어 놓았다. 어쩌면 그는 시인이기 전 전사였는지 모른다. 아래에 시들은 노래로 불려져 너무나 유명해진 '함께가자 우리', '노래', '삼팔선은 삼팔선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와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시들이다.

 

 

- 1946 (01) : (10. 16) 전남 해남군 해남읍 삼산면 봉학리 535번지에서 아버지 김봉수,  어머니 문일님의 둘째 아들로 태어남.

- 1964 (18) : 광주일고 입학, 입시위주의 획일적 교육제도에 반대하여 이듬해 자퇴

- 1969 (24) : 대입 검정고시를 거쳐 전남대 문리대 영문과 입학. 3선개헌 반대운동과 교련 반대운동에 참여, 반독재 민주화운동을 이끔. 지하신문 '함성'지 제작

- 1973 (28) : 전국적인 반 유신투쟁을 위해 지하신문 '고지'지 제작. 반공법 위반 혐으로 구속. 징역 2년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고 복역 중 투옥 8개월만에 석방됨.전남대서 제적.

- 1974 (29) : 고향에 내려가 농사를 지음. 『창작과 비평』여름호에 <진혼가>, <잿더미> 등 7편의 시를 발표하면서 작품활동 시작

- 1975 (30) : 광주에서 사회과학 서점 '카프카' 개설

- 1977 (32) : 농민들과 함께 '해남농민회'결성. (한국 기독교 농민회의 모체). 광주에서 황석영, 최권행과 함께 민중문화연구소 개소.

- 1978 (33) : 상경하여 <남조선 민족해방전선 준비위원회>에 가입하고 남민전 전위대 전사로 활동. 수배중 프란츠 파농의 <자기 땅에서 유배당한 자들>(청사)번역출간.

- 1979 (34) : 남민전 조직원으로 서울에서 활동 중 구속되어 투옥됨. 이듬해 이 사건으로 징역 15년을 선고받고 광주교도소에 수감.

- 1984 (39) : 첫시집 <진혼가>(청사)출간.

- 1987 (42) 제2시집 <나의 칼 나의 피>(인동)출간. 일본에서 시집<농부의 밤> 일어판 출간

- 1988 (43) : 제3시집 <조국은 하나다>. 하이네·네루다·브레히트 시선집 <아침 저녁으로 읽기 위하여>(남풍)출간. 12월 21일 형 집행정지로 투옥생활 9년 8개월만에 출소

- 1989 (44) : 1. 29 광주 문빈정사에서 박광숙과 결혼. 옥중 서한집 <산이라면 넘어주고 강이라면 건너주고>(삼천리) 출간. 시선집<사랑의 무기>(창작과 비평사) 출간. 제4시집 <솔직히 말하자> (풀빛) 출간.

- 1990 (45) : 광주항쟁 시선집 <학살>(한마당) 출간. 92년 12월까지 민족문학 작가회의 민족문학연구소장.

- 1991 (46) : 제5시집 <사상의 거처>(창작과 비평사)출간.

- 1991 (46) : 제5시집<사상의거처>(창작과 비평사) 출간. 제9회 '신동엽창작기금상'받음.  시선집<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미래사) 출간.

  산문집<시와 혁명>(나루)출간.  하이네 장치 풍자시집2<아타 트롤>(창작과 비평사)번역 출간.

- 1992 (47) : 제6시집 <이 좋은 세상에> (한길사) 출간. 옥중 시선집<저 창살에 햇살이 1·2>   (창작과 비평사)출간. 제6회 단재 문학상 수상.

- 1993 (48) : 윤상원 문학상 수상. 여의도 여성백인회관에서 '김남주 문학의 밤' 개최.

- 1994 (49) : 2월 13일 새벽 2시 30분 췌장암으로 별세. 유족으로 부인 박광숙 여사와 아들   토일 군이 있음.

- 2000. 5. 20 광주 중외공원에 민족시인 김남주시비 건립

 

 

80년대의 가슴에 꽃힌 시인전사

최재봉(한겨래신문)기자

한국 현대시사에서 김남주(1945∼94)의 시들은 선명한 메시지와 강렬한 어조로 하여 두드러진다.

김남주가 외세에 대한 거부와 부자들을 향한 증오, 독재권력을 상대로 한 싸움을 노래한 유일한 시인은 아니었지만, 그 거부와 증오와 싸움을 노래 바깥의 현실로 옮기려 했다는 점에서 그는 다른 많은 시인들과 구분된다. 그는 시인인 동시에 전사였으며, 그것은 결코 비유적인 의미에 머무는 것이 아니었다.

          "시인이여
          누구보다 먼저 그대 자신이
          싸움이 되어서는 안 되는가
          누구보다 먼저 그대 자신이
          압제자의 가슴에 꽂히는
          창이 되어서는 안 되는가."
          ('시인이여')

라고 그가 부르짖을 때 그것은

          "우리 모두 화살이 되어
           온몸으로 가자"
           (고은, '화살')

는 선동과 같은 궤에 놓이면서도 훨씬 더 강한 울림을 울린다. 그것은 무기(창:화살)와 대상(압제자:과녁)의 차이가 빚어내는 미학적 거리에 문제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말 그대로의 전사와 시인의 차이가 반영된 결과라 해야 할 것이다.

철의 독재자 박정희가 심복의 손에 쓰러지기 불과 보름여 전 내무부는 '남조선민족해방전선'(남민전) 사건을 발표했다. 김남주는 중심인물인 이재문 등 20여명과 함께 그때 이미 체포된 상태였다.

이후 모두 80여명이 검거돼 그 가운데 2명이 사형을 언도받기에 이른 남민전 사건이란 무엇이었던가.

사건 관련자들과 연구자들에 의해 밝혀진 사실에 따르면 남민전은 제3 세계 민족해방운동과 보조를 맞추어 예속적 독재권력의 타도와 외세의 축출, 그리고 부의 공평한 분배를 목표로 한 비밀결사였다.

남민전이 가장 직접적인 모델로 삼았던 것은 베트남 통일의 원동력이었던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이었으며, 국내적으로 그것은 인혁당과 같은 자생적 사회주의 결사의 전통 위에 서 있었다. 그러나 검거당시 아직 준비위 차원에 머물러 있던 남민전은 실제에 있어서는 한국민주투쟁국민연맹 명의의 반독재 유인물 살포에 주력했으며, 김남주와 박석률 등 남민전 전위대 전사들은 활동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부잣집 담을 넘기도 했다.

남민전 동지이자 김남주의 부인인 박광숙씨에 따르면 남민전은 무엇보다도 반독재 민주화투쟁 단체였다.

"모두가 숨죽이고 있던 공포통치의 시대에 남민전은 교사와 노동자, 학생 등 각계각층을 망라한 통일운동체였다. 강령에 있어서는 반제국주의와 노동해방을 표방했지만, 실제로는 반독재·반유신투쟁이 주요한 활동이었다."

김남주의 대부분의 시는 남민전 사건과 관련해 15년 징역형을 선고받고 복역중이던 감방에서 쓰여졌다. "시는 혁명을 이데올로기적으로 준비하는 문학적 수단" 이라고 규정한 그에게 선동의 효과가 미학적 고려에 우선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시와 혁명의 관계를 논하는 글에서 그는 그 둘이 상호보완적 관계에 있다고 토를 달았지만, 그것은 하부구조와 상부구조에 관한 마르크스의 규정과도 같아서 그에게 있어 우선시되는 것은 어디까지나 혁명이었다. 그러나 흥미있는 것은 시보다는 혁명에 기운 그의 선택이 오히려 미적 완성도가 높은 시의 탄생에 기여했다는 점이다.

김남주는 하이네, 네루다, 마야코프스키 등 외국 시인들의 영향을 진하게 받았다고 밝힌 바 있지만, 한편으로는 '노래'에서 보듯 '새야 새야 파랑새야'에서 김지하에 이르는 참여적 서정시의 전통 위에 굳건히 서 있다. 제국주의/신식민주의, 독재/자유, 자본/민중의 명료한 이분법에 입각한 그의 세계관은 상황의 핵심을 꿰뚫는 촌철살인의 절창을 낳았다. 그의 대부분의 시들은 비정상적인 환경에서 비상한 수단과 방법으로써 쓰여졌다.

집필의 자유가 허락되지 않는 대한민국의 감옥에서 시인은 머릿속에 시를 써두었다가 면회온 친지들에게 불러주거나, 읽던 책의 여백이나 우유곽을 해체해서 생긴 은박지에 못으로 눌러서 시를 썼다(간수의 눈을 피해 한 땀 한 땀 수를 놓듯 시를 새기고 있는 시인의 모습을 상상해 보라!). 김남주는 먼저 석방돼 나와 그의 옥바라지를 계속한 박광숙씨와 출옥 한달여 만에 결혼해서 아들 토일이를 투었다. 노동자들이 1주일에 사흘 금·토·일요일은 쉬어야 한다는 뜻이 그 이름에 담긴 토일이는 어느새 초등학교 1학년이 됐다.

시인은 가고 뒤에 남은 처자와 함께 그의 해남을 찾는다. 희고 붉은 코스모스, 노랗고 예쁜 벼들, 그리운 이의 소짓처럼 하느작대는 억새로 해서 가을 들판은 따뜻하고 정겨웁다. 해남읍에서 차로 10여분을 달리면 나오는 삼산면 봉학리 그의 생가에서는 팔순이 가까운 노모가 마당에 넌 고추와 호박을 돌보고 있다가 어린 손주를 반긴다. 푸른 대숲으로 둘러싸인 집에는 군 청년회에서 만들었다는 시화패널들 이 처마에 걸려 있을 뿐 시인의 생가임을 알리는 이렇다 할 기념물은 보이지 않는다.

다만, 시인이 주로 썼다는 사랑채에 그가 옥중에서 보았던 이런저런 잡지와 단행본들이 먼지에 덮여 쌓여 있다. '수번 2164, 교부일 81. 3. 23, 요납일 81. 4. 22'의 열독허가증이 붙은 책들은 80년대 초의 어느 시점에 얼어붙은 채 무심한 세월을 견디고 있다. 시인은 죽어서 망월동에 묻혔다. 생전에 그가 쓴 시 '망월동에 와서'가 입구에 자리잡고 있는 5월 광주 희생자 묘역에서 그의 영혼은 비로소 안식을 찾았을 것인가. 그의 분신인 토일이와 부인 박광숙씨를 일어나 반기지 못하는 무덤 숙의 그를 안쓰러워하며 '전사 2'의 뒷부분을 떠올린다.

 

 

 

노래 - [진혼가] 연구사 1984
 
 
이 두메는 날라와 더불어
꽃이 되자 하네 꽃이
피어 눈물로 고여 발등에서 갈라지는
녹두꽃이 되자 하네

이 산골은 날라와 더불어
새다 되자 하네 새가
아랫녘 웃녘에서 울어예는
파랑새가 되자 하네

이 들판은 날라와 더불어
불이 되자 하네 불이
타는 들녘 어둠을 사르는
들불이 되자 하네

되자 하네 되고자 하네
다시 한번 이 고을은
반란이 되자 하네
청송녹죽(靑松綠竹) 가슴으로 꽂히는
죽창이 되자 하네 죽창이

 

함께 가자 우리 - [나의 칼 나의 피] 인동 1987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
셋이라면 더욱 좋고 둘이라도 함께 가자
뒤에 남아 먼저 가란 말일랑 하지 말자
앞서 가며 나중에 오란 말일랑 하지 말자
일이면 일로 손잡고 가자
천이라면 천으로 운명을 같이 하자
둘이라면 떨어져서 가지 말자
가로질러 들판 물이라면 건너주고
물 건너 첩첩 산이라면 넘어주자
고개 넘어 마을 목마르면 쉬어가자
서산 낙일 해 떨어진다 어서 가자 이 길을
해 떨어져 어두운 길
네가 넘어지면 내가 가서 일으켜주고
내가 넘어지면 네가 와서 일으켜주고
산을 넘고 물을 건너
언젠가는 가야 할 길
누군가는 이르러야 할 길
가시발길 하얀 길
에헤라, 가다 못 가면 쉬었다나 가지
아픈 다리 서로 기대며

 

자유 - [나의 칼 나의 피] 인동 1987
 
 
만인을 위해 내가 노력할 때
나는 자유이다
땀 흘려 힘껏 일하지 않고서야 어찌 나는 자유이다라고 말할 수 있으랴
만인을 위해 내가 싸울 때 나는 자유이다
피 흘려 함께 싸우지 않고서야 어찌 나는 자유이다라고 말할 수 있으랴
만인을 위해 내가 몸부림칠 때 나는 자유이다
피와 땀을 눈물을 나워 흘리지 않고서야 어찌 나는 자유이다라고 말할 수 있으랴
사람들은 맨날
밖으로는 자유여, 형제여, 동포여! 외쳐대면서도
안으로는 제 잇속만 차리고들 있으니
도대체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도대체 무엇이 될 수 있단 말인가
제 자신을 속이고서

 

삼팔선은 삼팔선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 [조국은 하나다] 남풍 1988
 
 
삼팔선은 삼팔선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당신이 걷다 넘어지고 마는
미팔군 병사의 군화에도 있고
당신이 가다 부닥치고야 마는
입산금지의 붉은 팻말에도 있다
가까이는
수상하면 다시 보고 의심나면 짖어대는
네 이웃집 강아지의 주둥이에도 있고
멀리는
그 입에 물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죄 안 짓고 혼줄 나는 억울한 넋들에도 있다
삼팔선은 삼팔선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낮게는
새벽같이 일어나 일하면 일할수록 가난해지는
농부의 졸라 맨 허리에도 있고
제 노동을 팔아
한 몫의 인간이고자 고개 쳐들면
결정적으로 꺾이고 마는 노동자의
휘여진 등에도 있다
높게는
그 허리 위에 거재(巨財)를 쌓아올려
도적도 얼씬 못하게 가시철망을 두른
부자들이 담벼락에도 있고
그들과 한패가 되어 심심찮게
시기적절하게 벌이는 쇼쇼쇼
고관대작들이 평화통일 제의의 축제에도 있다
뿐이랴 삼팔선은
나라 밖에도 있다 바다 건너
원격조종의 나라 아메리카에도 있고
그들이 보낸 구호물자 속이 사탕에도 밀가루에도
달라의 이면에도 있고 자유를
혼란으로 바꿔치기 하고 동포여 동포여
소리치며 질서의 이름으로
한강을 도강(渡江)하는 미국산 탱그에도 있다
나라가 온통
피묻은 자유로 몸부림치는 창살
삼팔선은 감옥의 담에도 있고 침묵의 벽
그대 가슴에도 있다.

 

바람에 지는 풀잎으로 오월을 노래하지 말아라 - [조국은 하나다] 남풍 1988
 
 
바람에 지는 풀잎으로
오월을 노래하지 말아라
오월은 바람처럼 그렇게
오월은 풀잎처럼 그렇게
서정적으로 오지는 않았다
오월은 왔다 비수를 품은 밤으로
야수의 무자비한 발톱과 함께
바퀴와 개머리판에 메이드 인 유 에스 에이를 새긴
전차와 함께 기관총과 함께 왔다
오월은 왔다 헐떡거리면서
피에 주린 미친 개의 이빨과 함께
두부처럼 처녀의 유방을 자르며
대검의 병사와 함께 오월은 왔다
벌집처럼 도시의 가슴을 뚫고
살해된 누이의 웃음을 찾아 우는
아이의 검은 눈동자를 뚫고
총알처럼 왔다 자유의 거리에
팔이며 다리가 피묻은 살점으로 뒹구는
능지처참의 학살로 오월은 오월은 왔다 그렇게!

바람에 울고 웃는 풀잎으로
오월을 노래하지 말아라
오월은 바람처럼 그렇게
오월은 풀잎처럼 그렇게
서정적으로 일어나거라 쓰러지지 않았다
오월의 무기 무등산의 봉기는
총칼의 숲에 뛰어든 맨주먹 벌거숭이의 육탄이었다
불에 달군 대장간의 시뻘건 망치였고 낫이었고
한 입의 아우성과 함께 치켜든 만인의 주먹이었다
피와 눈물 분노와 치떨림 이 모든 인간의 감정이
사랑으로 응어리져 증오로 터진 다이너마이트의 폭발이었다

노래하지 말아아 오월을
바람에 지는 풀잎으로 '바람'은
학살의 야만과 야수의 발톱에는 어울리지 않는 말이다
노래하지 말아아 오월을
바람에 일어나는 풀잎으로 '풀잎'은
피의 전투와 죽음의 저항에는 어울리지 않는 말이다
학살과 저항 사이에는
바리케이드의 이편과 저편 사이에는
서정이 들어 설 자리가 없다 자격도 없다
적어도 적어도 오월의 광주에는!

 

돌멩이 하나 - [사상의 거처] 창작과 비평사 1991
 
 
하늘과 땅 사이에
바람 한점 없고 답답하여라
숨이 막히고 가슴이 미어지던 날
친구와 나 제방을 걸으며
돌멩이 하나 되자고 했다
강물 위에 파문 하나 자그많게 내고
이내 가라앉고 말
그런 돌멩이 하나


날 저물어 캄캄한 밤

친구와 나 밤길을 걸으며
불씨 하나 되자고 했다
풀밭에서 개똥벌레즘으로나 깜박이다가
새날이 오면 금세 사라지고 말
그런 불씨 하나


그때 나 묻지 않았다 친구에게
돌에 실릴 역사의 무게 그 얼마일 거냐고
그대 나 묻지 않았다 친구에게
불이 밀어낼 어둠의 영역 그 얼마일 거냐고
죽음 하나 같이할 벗 하나 있음에
나 그것으로 자랑스러웠다

 

똥파리와 인간 - [사상의 거처] 창작과 비평사 1991
 
 
똥파리에게는 더 많은 똥을
인간에게는 더 많은 돈을
이것이 나의 슬로건이다

똥파리는 똥이 많이 쌓인 곳에 가서
뗴지어 붕붕거리며 산다 그곳이 어디건
시궁창이건 오물을 뒤집어쓴 두엄더미건 상관 않고

인간은 돈이 많이 쌓인 곳에 가서
무리지어 웅성거리며 산다 그곳이 어디건
범죄의 소굴이건 아비규환의 생지옥이건 상관 않고

보라고 똥 없이 맑고 깨끗한 데에 가서
이를테면 산골짜기 옹달샘 같은 데라고 가서
아무도 보지 못할 것이다 떼지어 사는 똥파리를

보라고 돈 없이 가난하고 한적한 데에 가서
이를테면 두메산골 외딴 마을 깊은 데라도 가서
아무도 보지 못할 것이다 무리지어 사는 인간을

산 좋고 물 좋아 살기 좋은 내 고장이란 엣말은
새빨간 거짓말이다 똥파리네게나 인간에게나
똥파리에게라면 그런 곳은 잠시 쉬었다가
물찌똥이나 한번 찌익 갈기고 돌아서는 곳이고
인간에게라면 그런 곳은 주말이나 행락철에
먹다남은 찌꺼기나 여기저기 버리고 돌아서는 곳이다

따지고 보면 인간이란 게 별 것 아닌 것이다
똥파리와 별로 다를 게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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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랑

Song of Ariran

  

님 웨일즈의 아리랑을 처음 접한 게 언제였는지 자세히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마 93년 정도였던 거 같다. 처음엔 무정부주의 이력 때문에 관심을 가졌었는데 그때는 무조건 테러리스트, 무정부주의, 저항 이런 말들에 끌리던 나이었던 거 같다. 그 후 다시 읽은 아리랑은 좀 다르게 다가왔던 거 같다.

김산이란 인물은 반공교육과 대학에 와서 알게 되었던 새로운 사상과 역사들로부터 다시 한 번 벗어나 나를 자유롭게 만들어 준 계기였었다. 남과 북 어디에서도 인정받지 못하고 만주와 중국에서 치열하게 살다간 혁명가. 그들은 지금의 현실을 어떻게 받아들일까. 역사는 항상 승자의 관점에서만 의미있는 것일까. 잊혀진 역사 속을 치열히 살다간 혁명가들,

생활인들. 어차피 누가 알아주길 바란 삶들은 아니었겠지만 역사 발전에 조금의 의미가 되고 싶어하지 않았을까.

얼마전 김산에 대한 다큐멘터리가 TV에 방영되었다. 그리고 정지영감독이 아리랑을 영화로 만든다는 소식을 들었다. 정지영 감독이 만드니 만큼 태백산맥처럼 힘빠진 영화가 되지는 않을거란 기대를 해본다. 그리고 그 영화를 계기로 다시 한 번 인간과 역사에 대한 고민들이 많아졌으면 좋겠다.

 

 

Song of Ariran 서문

김산이란 이 인물이 자못 독특한 인물이라는 것, 이런 인물과 더불어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귀한 기회가 결코 두 번 다시 오지 않으리라는 것도 명백한 일이었다. 그는 근래 7년동안 동양에서 만난 가장 매력있는 인물중 한 사람이었다. 그해 여름동안 적잖게 고생하면서, 원고를 쓰는 손에 오는 심한 경련 으로 고통을 받으면서 대략 25명에 달하는 혁명가의 자전을 쓰고 있었는데, 김산은 내가 만난 혁명가중에서도 좀체로 찾아볼 수 없는 몇가지 특성을 구비하고 있었다. 처음엔 그런 특성을 분석해낼 수가 없었으나, 오래지 않아 그의 특성을 단정하는 게 무엇인가를 알았다. 그는 투철한 의식과 두려움을 모르는 자주성과 완전한 신심을 가지고 있었다.

나는 노트로 일곱 권이나 되는 김산에 대한 상당한 자료를 정리하고, 고쳐쓰고, 축약하였다. 그러나 가능한 한 원래들을 이야기에 가깝게 하였다.  모든 자세한점에 있어서 -------대화까지도 포함하여---- 그것은 아주 믿을 만하다. 그것들은 아프고 힘든 고생을 하면서 김산의 구술을 받아쓰는 동안에 김산한테서 들은 것이다.

그의 이야기를 읽기 쉬운 영어로 고칠 필요성이 있을 때를  제외하고는 필자의 해석을 가하지 않고 김산 자신이 말한 대로 썼다. 그로므로 이 책의 장점은 이책의 역사적이면서도 자서전적인  가치이다. 이 책은 현대의 몇몇 가장 극적인 사건들에 대한 직접적인 경험담임은 물론이요, 나아가 동양의 혁명지도자들의 심정과 심리,경험에 대한 우리들의 하주 한정된 지식을 새롭게 넓혀 주리라고 생각한다.

이 일을 시작할 때 나는 김산에게 이렇게 말했다. "우선 당신의 개략적인 경력을 말씀해주시고, 그 다음에 당신의 젊은 시절에 대해 말씀해주세요". "내 젊은 시절이요? 틀림없이 나는 이제 겨우 서른 두 살밖에는 안되었지요. 하지만 나는 내 젊음을 어디에선가 잃어 버렸답니다. 어딘지는 알 수 없지만" 하고 익살스럽게 대답하였다.


1939년 필리핀의 바기오섬에서 ...중에서.. (요약)....

님 웨일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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뷰티풀 마인드

A Beautiful Mind

  

이번 중간고사 기간에 통계관련 서적을 찾으러 도서관 수학서적 코너에 갔다가 우연히 이 책을 발견했다. 옆에 사진의 책은 아니고 754페이지에 달하는 꽤 두꺼운 책이어서 한 번에 읽기에 좀 부담스러울 정도였다. 시험을 망치고 머릿속 정리 좀 할 겸 책을 대출했다.

몇몇 사이트에서 본 영화 내용은 전기내용을 상당히 뒤틀어 놓았다. 내쉬의 정신분열증의 원인을 첩보전에 이은 음모의 시각으로 그린 거 같은데 순 뻥이다. 헐리웃영화야 무엇이든 자기 입맛에 맞게 바꾸어 버리니까 머 어쩔 수 없지.

하지만 존 내쉬는 인간적으로는 좋은 사람이 아니었다. 천재라는 걸 부단히 뻐기면서 자기보다 못하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을 무시하고 자신의 아기를 낳은 가난한 여자를 버리고 좋은 집안, 학력의 앨리사랑 결혼해 버린다. 글구 앨리샤는

물론 내쉬의 치료를 위해 부단히 노력하지만 내쉬가 병이 심각해지고 호전의 기미가 없자 이혼을 요구하고 10여년 내쉬를 방치한다. 나중엔 내쉬의 동료와 결혼까지 하려다 직장문제와 아이 때문에 결혼이 무산되는 등의 산전수전을 다 겪고 나서야 거의 폐인이 된 내쉬를 받아 들인다. 이때 내쉬는 더 이상 남에게 위협을 주지 않는 조용한 '미친사람'이었다. 그리고 불행하게도 앨리샤와의 사이에 난 아들 '존 챨스 내쉬' 역시 총명한 머리로 수학박사학위까지 받고 마셜대학에서 강사로 나가기도 했으나 정신분열증으로 병원을 들락거리고 있다.

중요한 것은 내쉬의 정신분열증이 영화에서처럼 음모에서 비롯되었고 가족의 사랑으로 그것을 극복하고 그런 할리웃의 뻔한 구라가 아니라 너무나 뛰어난 정신의 어쩌면 필연적인 분열, 그리고 아주 오랜 시간이 흐르며 서서히 병에서 깨어나 비록 천재성은 잃었지만 다른 사람과 함께 살아가는 방법을 조금씩 익혀가고 아픈 아들을 돌봐주는 한 천재의 삶에서 인생을 배울 수 있다는 것이다.

 

 

카네기에서의 마지막 봄날, 내쉬의 마음을 짓누른 것이 또 있었다. 졸업이 다가오자 병역문제가 점점 걱정이 되었던 것이다. 미국이 다시 참전하게 되면 보병으로 징집될지도 몰랐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지도 3년이 지나 병력이 계속 축소되고 있었지만 내쉬는 안심이 되지 않았다. 그가 정기구독하고 있던 신문에서는 연일 징집의 조짐이 시사하고 있었다. 특히 러시아의 베를린 봉쇄, 그에 따른 미국과 영국의 생필품 공수, 냉전의 가소과 등이 그랬다. 자신의 자율성이나 미래 계획에 위협이 되는 일로부터 자신을 지켜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릴 정도였다.

 

대학원 1년차 학생들은 말할 수 없이 시건방졌다. 그런데 내쉬는 모든 사람들에게 더 말할 수 없이 시건방졌고, 더 괴팍하다는 인상을 주었다. 외모는 그런 인상을 더욱 부추겼다. 스무살이 된 내쉬는 나이보다 어려 보였다. 키 183센티미터, 몸무게 77킬로그램, 떡 벌어진 어깨. 근육질의 가슴, 군살 없는 허리, 위풍당당한 체격은 아닐지라도 운동선수같은 체격이었다. 음성은 카랑카랑하고 서늘했는데, 느릿한 남부 말투가 어우러져 다소 냉소적으로 들렸다. 길 게 말을 할 때는 장식적이고 위엄을 갖췄기 때문에 남들에게 짐짓 젠체한다는 느낌을 주었다. 게다가 표정도 다소 거만했고, 남을 깔보는 듯한 미소를 지었다.

 

다과회에서는 그는 처음부터 이목을 끌었다. 그는 주목을 받지 못해 아달인 것 같았고, 그 자리의 누구보다도 더 영리하다는 것을 다짐받고 싶어하는 것 같았다. "대수는 헛소리다"라고 그가 칠판에 뤼갈겨 쓰기라도 하면, 대수를 전공하는 다른 학생은 얘기 중간에 입을 다물곤 했다.

 

내쉬는 거의 모든 수학 분야에 관심을 보였다. 위상수학, 대수기하학, 게임 이론 등에 대해 1년차에 이미 엄청난 지식을 흡수한 것 같았다. 프린스턴에서 별로 힘들지 않게 "꽤 광범위하게 수학을 공부했다"고 스스로도 말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는 수업을 들으려 하지 않았다. 내쉬와 함께 수업을 들었다는 것을 기억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또 대학원 생활 내내 내쉬가 책을 들고 있는 것을 보았다는 사람이 없다. 사실 놀랍게도 그는 거의 책을 읽지 않았다. 내쉬가 필요하다고 생각한 정보를 얻는 주된 방식은 교수와 동료 학생들에게 질문을 던지는 것이었다. 그는 클립보드를 들고 다니면서 끊임없이 기록을 했다. 내쉬는 그저 생각만 하며 대부분의 시간을 보낸 것으로 보인다. 그는 빌린 자전거를 타고 작은 8자형이나 그보다 더 작은 원을 그리며 시간을 보내곤 했다. 대학원 건물의 4각 안뜰을 서성거리기도 했다. 파인홀의 어둑한 이츨복도 벽에 어깨를 맞대고, 패널 벽에 맞붙어 굴러가는 이동활자처럼 미끄러져 가기도 했다. 또 비어있는 두레방이나 3층 도서관의 의자나 테이블에 누워 있곤 했다. 도서관에 있는 날이 더 많았다. 그럴 때면 대부분 바흐의 푸가를 휘파람 불곤 했다. 수학과 비서들은 휘파람 좀 못 불 게 해달라고 레프셰츠나 커거를 찾아가 하소연했다.

 

내쉬가 MIT 강사가 된 것은 갓 23세가 되었을 때였다. 그는 강사 가운데 최연소였을 뿐만 아니라, 다수의 대학원생들보다도 나이가 적었다. 당시 MIT 기준으로 볼 때 무어 강사들의 강의 부담은 가벼운 편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내쉬는 강의 부담이 싫었다. 그는 연구에 방해가 되는 일이나 판에 박은 일이라면 뭐든 질색이었다. 그의 강의는 설명이라기보다는 자유연상에 가까웠고 마인드게임에 가까웠다. 해결되지 않은 고전적인 문제를 출제하는 것도 내쉬가 즐겨 사용한 수법이었다. 로버트 오만은 이렇게 회상했다. "학생들에게 π가 무리수임을 증명하라는 문제가 출제되었어요. 그건 결국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를 증명하라는 것과 같았습니다. 나중에 학과장에게 질책을 당한 내쉬는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그것이 어려운 문제라는 선입견을 갖고 있는데, 아무래도 그게 문제인 것 같다. 어쩌면, 그 문제가 '어렵다'는 선입견을 갖고 있지 않으면 풀 수 있을지도 모른다."

 

어느 날 두레방에서 학생들이 제2차 세계대전의 유명한 병참 수수께끼인 "지프Jeep"문제를 논의하고 있었다. 지프 문제의 핵심은, 2천 마일 거리의 사하라 사막을 횡단하려고 하는데 지프의 기름탱크 용량으로는 2백 마일밖에 가지 못한다는 것이다. 단. 한 번에 1백 마일을 더 갈 수 있는 휘발유 통을 실을 수 있다고 가정한다. 사막을 건너는 유일한 방법은 2보 전진, 1보 후퇴 전략을 따르는 것이다. 즉, 지프에 휘발유 통을 싣고 1백 마일을 간 다음, 통을 내려놓고 다시 시작 지점으로 돌아가는 일을 반복한다. 그런 다음 1백 마일 지점에서 기름 탱크를 가득 채우고 휘발유 통도 싣고 1맥 마일을 더 가서 통을 내려놓고 돌아가서 통을 가져오는 일을 반복한다. 문제는, 사막을 횡단하는 데 휘발유가 몇 통이나 필요한가이다.

 

1959년 봄 병원 휴게실 한쪽 구석에서 하버드 대학 교수인 조지 매키는 부드럽게 말하려고 했지만 다소 퉁명스럽게 말이 튀어나왔다.

"어떻게 자네가..., 이성과 논리적인 증명에 몸 바친 수학자인 자네가..., 외계인이 자네에게 메시지를 보내고 있다는 허황한 얘기를 믿을 수가 있단 말인가? 어떻게 외계 생물체가 자네를 차출해서 이 세상을 구하려고 한다는 허황한 얘기를 믿을 수가 있단 말인가? 어떻게 자네가...?"

존 내쉬는 남부 특유의 느릿한 말투로 나직하게, 독백하듯 말했다.

"왜냐하면 초자연적인 존재에 대한 착상이든, 수학적 착상이든, 내게 떠오를 때는 똑같은 길로 오기 때문이지. 그러니 어떤 착상이든 진지하게 따져볼 수 밖에."

 

1954년 8월 말의 어느 날 아침, 랜드 보안과의 숙직 책임자는 산타모니카 경찰서에서 걸어론 전화를 받았다. 퇴폐행위를 적발을 담당한 두 경찰-한 명은 유인책이고, 다른 한 명은 체포책-이 새벽에 펠리세이즈 파크의 남자 공중화장실에서 어떤 젊은이를 체포했다는 전화였다. 체포된 젊은이는 경범죄인 공개적 외설죄로 기소되었고, 불구속 처리되어 풀려났다. 20대 중반으로 보이는 그 젊은이는 자기가 랜드에서 일하는 수학자라고 주장했는데, 그것이 사실인가? 숙직 책임자는 내쉬가 랜드의 피고용이라는 것을 즉석에서 확인해주었다. 윌리엄스는 베스트에게 내쉬가 "괴짜녀석"이긴 하지만 비상한 수학자이며, 그가 만나본 사람 가운데 가장 영리한 사람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내쉬가 사직해야 한다는 것은 추호도 의심치 않았다.

 

내쉬에게 가해진 최대 충격은 체포 자페가 아니라, 랜드에서 축출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처음 베스트의 말을 들은 후 내쉬가 침착한 반응을 보인 것은, 윌리엄스가 그 사건을 눈감아주리라고 믿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어쨌거나 그는 랜드의 천재들 가운데 한 명이었으니까. 그러나 맥킨지와 튜링 등의 수학자들과 마찬가지로, 내쉬는 인생이 지난날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남의 뜻에 좌우되는 북확실한 것임을 깨달았고, 자신이 생각보다 훨씬 더 약한 존재라는 것도 깨닫게 되었다. 그것은 위험한 교훈이었다.

 

프린스턴 바깥에 있는 옛 친구들은 내쉬의 경과에 계속 관심을 보였다. 데이빗 게일은 연구소의 딘 몽고메리에게 편지를 보냈고, 이 편지의 사본은 밀너와 모르겐슈테른에게도 전해졌는데, 이 편지를 보면 내쉬의 상황에 대한 관심과 염려의 수준을 여실히 알 수 있다.

[존 내쉬 애기만 나오면 우리는 그의 현재 상태, 특히 정신 상태가 어떤지 궁금해왔습니다. 그가 의학적으로 어떤 상태에 있는지 우리 가운데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고, 누구한테 물어보면 알 수 있는지조차 몰랐습니다. "의사가 희망이 없다고 한다"부터 "다시 수학 연구를 하고 있다더라"까지 소문만 무성합니다. 걱정이 되는 것은 우리가 내쉬의 상황을 모른다는 것이 아닙니다. 수학계의 모든 사람이 우리와 같은 처지에 놓일 경우, 결국 내쉬가 최선의 치료를 받지 못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것이 걱정됩니다. 수학계에서는 필요할 때마다 내쉬에게 펠로쉽과 각종 일자리를 주어온 것이 사실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누군가 다른 사람이-정보에 밝고 능력이 있고 소임을 감당할 만한 사람들이 의학적으로 그를 꾸준히 보살펴주었으면 좋겠습니다. 이제는 내쉬가 고등학문연구소에 몸담고 있으니, 그렇게 보살펴줄 만한 사람이 있기는 있는지 당신이라면 알고 있을 거라고 나는 생각했습니다. 내쉬를 위해 할 수 잌ㅆ는 모든 일이 다 잘 되고 있는지 확인하고도 싶었습니다. 만일 돈이 문제가 된다면, 예를 들어 내쉬가 받아야 할 치료를 받고 있지 못하다면, 내쉬의 친구들이 힘을 모아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만남에서 바이불의 뇌리에 가장 강하게 남은 내쉬의 말은 따로 있었다. 그 말 때문에, 바이불은 초연한 관찰자이자 객관적인 정보 제공자 입장에서 열렬한 대변자로 돌아서게 되었다. 그들이 교수 클럽에 들어서기 전, 내쉬는 우물쭈물하며 이렇게 말했다.

"내가 들어가도 될까요? 나는 교수가 아닌데요."

이 위대한, 위대한 학자가 자기 자신을 교수클럽에서 식사할 자격조차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은, 바이블이 보기에 마땅히 바로잡아야 할 너무나 부당한 사태였다.

 

사람들을 놀라게 한 이 남자, 이 천재의 이례적인 인생 역정은 계속되고 있다. 남들을 공정하게 대하려 하고, 남들이 그에게 공정한 대우를 요구할 권리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려는 날마다의 노력은, 젊은 시절 차갑고 거만했던 것과 매우 달라졌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는 지적으로 전보다 못할지 모른다. 또 새로운 획기적 업적을 이루지는 못 할지도 모른다. 그런 그는 전보다 훨씬 더 넉넉한 사람, 앨리샤의 표현에 따르면 "아주 좋은 사람"이 되었다.

 

이제 우리가 그의 얘기를 접는 이 순간, 그는 어쩌면 파인홀로 이어진 아이젠하트 문 밑을 총총히 지나가고 있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거실 소파에 앨리샤와 나란히 앉아 대형 텔레비젼으로 <닥터 후>를 보고 있을지도 모르고...아니면 조니와의 체스 게임에서 지고 있거나... 아니면 아내와 사별한 로이드 셰이플리를 위로하는 전화통화를 105분쯤 계속하거나... 아니면 피사에서 있을 강연 원고를 준비하고 있느냐고 묻는 해롤드 쿤에게 개구쟁이 같은 표정을 지어 보이거나... 아니면 점심 쟁반을 들고 고등학문연구소의 수학 테이블에 앉아, 방금 캐링턴의 연애편지를 읽고 편지 쓰기의 아취가 사라진 시대를 한탄하는 엔리코 봄비에리에게 고개를 주억거려 보이거나... 아니면, 천문학 강연을 들은 후, 밤하늘에 반짝이는 아득히 먼 별을 망원경으로 지그시 바라보고 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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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 홈에 게시했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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