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 삶에 대한 얘기 듣는 거 언제나 재밌다.
할머니 할아버지는 9남매중 첫째 둘째는 초등학교까지만 보냈는데, 아빠는 공부를 잘 해서 대학까지 보낼 계획이었다. 그런데 대학을 가려면 인문대를 가야 하는데, 아빠가 고등학교에 입학하던 해에 면에 '산림고'라는 특수고가 생겼다. 전국에 2개 뿐인 산림고를 이 학교 교장이 어떻게 잘 해서 유치했던 거다. 그래서 가까운 산림고에 다니게 됐다.
교과과정은 교과서 공부도 있었지만, 기본적으로 농업(왜 산림업이 아니고 농업인지 모르겠지만;;) 신기술을 가르쳐 농업을 이어나갈 새로운 세대를 키우는 게 주된 교육 목표였기 때문에 양봉 치고 농사 짓는 실습 위주로 구성됐다. 애초 땡볕에 농사 짓는다는 걸 싫어했던 아빠는 2학년이 되던 68년에 더는 못 해먹겠다며 다른 학생들을 조직해서 스트라이크(아빠 표현)를 일으켰다. 약 60명 남짓한 학생들 대부분은 복학하고 후에 졸업했지만 아빠는 학교를 그만뒀다. 할아버지에게 시내의 인문고등학교로 전학시켜 달라고 얘기했지만 돈이 없다며 학교에 안 보내줬다. 이 때를 회상하는 아빠의 표정은, 왜 아부지만 흰쌀밥 주냐고 대들던 어린 시절을 회상할 때와 더불어 진심 원망스러워 보였다. 아빠가 자기 부모에게 실망스러웠던 순간을 숨기지 않고 얘기하며 부모가 그것도 못 해 주냐고 말씀하실 때가 있는데, 그래서 본인은 자식들 부족함 없게 노력했던 것 같다. 그런 얘길 대놓고 하실 때도 많다 ㅋ
아빠 바로 아래 동생도, 철도 고등학교에 붙었는데 돈이 없다고 안 보내줬다. 그 아래 동생은 애초 본인이 공부에 관심이 없어서 스스로 고등학교에 안 갔다. 그 아래 세 동생은 모두 대학을 졸업했는데, 형편이 확연히 나아지기도 했지만, 두 고모가 남매 중 최초로 고등학교(우리 아빤 졸업을 안 했으니까), 대학교까지 간 건 대단한 일인 듯 싶다. 보지 않아도 얼마나 싸우고 졸랐을지 상상된다.
아빠는 농사 짓는 것도 나무 하는 것도, 어린 시절부터 농촌에 살며 자연스럽게 익혔던 일들을 전혀 좋아하지 않았다. 그래서 학교를 관두고 서울에 갔는데 서울에서 ㅋㅋㅋㅋ 불쌍한데 웃김;;;; 십원 한 푼 안 받고 재워주고 먹여주는 공장에서 일했는데 불이 나서 그만두게 됐다고 한다. 그 뒤로 아빠도 여러 일을 전전했고.. 나름 인천에 잘 자리잡아서 엄마랑 아빠 동생도 인천으로 많이 불러왔다. 그래서 인천 출신도 아닌데 인천에 친척이 많다. 나중에 아빠 인생을 쫙 듣고 적어보고 싶다. 맨날 이런 생각하는데 안 함< 우리 외할머니 인생도 해야지 생각만 하고ㅜ
아빠 과거 회상 웃긴 거 진짜 많고 현재 얘기도 개웃긴데 진짜 앞으론 녹취해야겠다. 그냥 보통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왔는지 개인사 듣는 건 항상 재밌다. 특히 현대사랑 맞물려서. 아빠는 몰랐겠지만 1968년에 전세계에서 여러 혁명/파업 등등이 있었잖아? 그 순간에 아빠도 학생 파업을 조직했다니 ㅎㅎ 근데 요즘 얘기는 프라이버시 때문에 적을 수가 없네 가족용으로 만들어서 출판해 볼까 이십 부 정도 찍는 거지.. 요즘엔 주식을 딱 마음 편할 만큼만 하시는데 예전에 돈 많이 넣어놓고 잠도 못 자고 밥도 못 먹고 화장실도 못 갔다는 얘기를 들으며 ㅋㅋㅋ 사실 오늘 들은 요즘 얘기를 쓰려고 창을 열었는데 아빠의 프라이버시를 위해 관둔다...< 여자친구들 얘기도 흥미로운데.. 아빠가 대단히 부자는 아니어도 노후 대책이 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아빠에게 끊임 없이 여자분들을 소개시켜준다. 아빠는 재혼할 의지가 있어서 많은 사람을 계속 만남 근데 여건이 맞는 게 쉽지가 않다네. 예를 들어 지금 만나는 분은 아들들 밥해줘야 된다고 주말에는 만나지도 못 하고 평일 낮에만 만날 수 있기 때문에 -_- 아빠는 관계를 이어나갈 수 없다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예의상 몇 번은 더 만난다고...;;; 아 그리고 ㅋㅋㅋㅋ 아빠가 머리가 많이 빠져서 그게 '콤플렉스'인데, 그래서 항상 모자 쓰고 다니신다. 우리 어디 놀러가도 꼭 모자 쇼핑함ㅋㅋㅋㅋ 근데 여자분들 처음 만날 땐 모자 안 쓰고 가고, 두번째부턴 모자 쓰고 만난단다. 근데 처음부터 모자 쓰고 만나도 예의가 아닌 건 아니지? 하고 물어보시는 거임ㅋㅋㅋㅋ 예의가 아닌 건 아닌데, 그래도 궁금하잖아! 그랬더니 모자 쓰고 만났다가, 다음에 모자 벗고 만나서 머리 보고 싫다고 하면 그 사람이랑은 아니지 않냐고...ㅎㅎㅎㅎ 아 귀여워 ㅋㅋㅋ
암튼 내가 흥미롭게 여기는 건, 이 재혼 '시장'에 나오는 많은 여자분들이 노후 대비가 안 돼 있어서, 얼마나 많은 여자들이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살며 노후를 두려워하는지, 아빠가 알고 약간 딱하게 여긴다는 거다. 사실 아빠가 만났다고 몇 번 얘기해 준 분들이 다 직업이 괜찮아서 왜 자기 먹고살 방편 다 있는 사람들이 굳이 그 나이에 남자를 만나서 또 수발들며 살려 하는가? 아빠한테 이렇게까지 말하진 않았지만; 이런 요지로 의문을 표했었는데, 지금 먹고 사는 거랑 노후 대비는 또 다른 것이다.. 갑자기 만화 추천하고 싶은데< 마영신 작가의 『엄마들』 보면 노후 대비 문제 말고 중년의 연애에 대해 잘 나옴 겁나 재밌다.
암튼< 우리 아빠는 본인은 스트라이크도 조직하고, 부모와 불화해서 집 나가고, 막 진짜 십대 시절부터 자유의지로 한 사람의 주체로 살았는데 자식들은 그렇게 안 키웠다. 그리고 아빠의 경험에 비춰 다른 사람들을 이해하지도 않는다. 그런 것도 흥미롭다 담에 자세히 얘기해 봐야지
연애결혼 카테고리에 넣은 건 결혼 후 아빠랑 대화를 많이 하게 됐기 때문. 그냥 나이가 먹어서 그런 걸 수도 있다. 안식년 때도 아빠랑 시간을 많이 보내서 더 친해졌다. 아빠가 갑자기 아프시면서 갑자기 늙고 우울해하셔서 그랬던 건데 그래서 계획했던 건 많이 못 했지만 좋은 시간이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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