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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번에는 술 때문이고
이번에는 회사일로 출장이 있습니다.
발제를 맡았는데 책임을 다 하지 못해 미안합니다.
담에는 꼭 참석하겠습니다.
제 3장 1905년의 레닌(변증법적인 잠재력, 인민에 대한 깊은 혁명적 신뢰)
(1) 당 구조의 변화
-1905년 4월에 열린 볼셰비키 당 대회는 변화의 지지자와 반대자간의 대결장이었다. 가장 첨예한 대립은 노동자 계급 출신 구성원들에게 볼셰비키 조직과 위원회를 개방할 것인가 하는 문제였다. 대의원들이 지방위원회 위원의 노동자 수가 늘어나야한다고 요구하자 일부 중핵들은 이 문제는 매우 신중해야한다고 요구하자 당 구조 변화의 옹호자들은 ‘이런 사회적 변화는 당의 음모적 분위기를 일소하고, 지도자와 일반당원들의 건전한 관계 증진에 도움이 될 것’이라며 ‘더 깊이 아래로 뛰어들 것’을 볼셰비키에게 호소했다. 이런 개혁적 경향의 한 대표는 ‘비주류파’ 당원의 3분의 2가 청원하면 해당 지방위원회를 해산시킬 권한을 중앙위원회에 부여한다는 내용의 당 개정안을 상정했다. 레닌은 이 안건을 지지했으며 나아가 정족수 3분의 2에서 지식인 분자를 제외시킴으로써 더욱 더 ‘노동자주의적인’ 성격을 부여하려고 했다. 레닌은 보그다노프와 공동으로 볼셰비키위원회의 노동자 계급 위원수를 늘릴 것을 위무로 부과한 당 규약개정안을 제출했으나 이 개정안은 부결되었다. 크게 당황하지 않고 “그는 위원회를 더욱 결연한 노동자로 구성할 수 없는 이런 당을 다가오는 혁명이 근본적으로 치유할 것이 틀림없다고 이해했다.”(krupskaya. 127쪽)
일부 볼셰비키들이 <무엇을 할 것인가?>의 원칙을 그 저자에게 상기시키자, 레닌은 이들을 맹렬히 공격하면서“조직에 대한 이 모든 도식과 계획들은…관료적 형식주의라는 인상을 준다.…어떠한 형식적 절차도 요구하지 말고, 제발 이런 도식들을 전부 잊어버려라. 모든‘기능, 권리, 특권’은 악마에게 줘버려라”(레닌 전집, 제9권, 344-345쪽)고 말했다.
정말로 위원회 사람들의 기능, 권리, 특권의 대부분이 폐지되었다. 이는 레닌이 여러 방면에서 동지들의 주저, 침묵, 두려움에 맞서서 벌인 격렬한 투쟁의 결과였다.
(2)레닌, 볼셰비키당과 소비에트
1905년 혁명의 발발에 대한 볼셰비키의 반응을 특징지은 것은 놀라움이라기보다는 오히려 회의, 몰이해, 심지어는 간혹 노골적이기까지 한 적대감이었다. 1905년 10월 13일 수도의 25만 노동자를 대표한 대의원들이 모여 페테르부르크 소비에트가 수립되었으며, 다음날 총파업이 선언되었다. 페테르부르크 소비에트에는 다수의 멘셰비키 투사들이 적극 참여했으며 이들은 노동자들 사이에 소비에트 사상을 보급시켰다.
볼셰비키 투사 크라시코프는 이런 사태 전개에 대해 “멘셰비키가 새로운 음모를 꾸미기 시작했다: 이들은 무당파적인 주바토프주의 위원회를 선출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이들은(볼셰비키) 당이 통제할 수 없는 자생적 대중운동을 극도로 불신했다. 그런데 대개는 1905년 총파업들은 거의 다 자생적 성격을 띠었다.
마르토프는 혁명초기에 자신이 편집한 <이스크라>지를 통해 노동자 계급이 행정과 통치능력도 시험해 볼 수 있는 ‘혁명적 자치정부 기구’(getzler, 108쪽)의 구성을 주장했다. 이것이 노동자 민주주의의 견습 역할을 할 것이었다. 마르토프와 그 동료들에게 소비에트의 출현은 이런 생각이 구체적으로 실현된 것처럼 보였다. 이 주장은 인민정부 구성의 필수 전제 조건을 무장봉기를 통한 국가권력의 장악이라고 생각한 레닌에게 비판 받았다.(레닌 전집, 제9권, 184쪽)
물론 소비에트가 투쟁조직의 면모를 취한 경우에는 언제나 볼셰비키들도 주저 없이 대거 소비에트에 참여하여 간혹 모스크바에서 일어난 것처럼 통제권 획득에 성고하기도 했다. 그러나 소비에트에서 볼셰비키들은 대체로 ‘하찮은 눈에 띄지 않는’ 역할을 수행했다.(carr, vol.1 47쪽)
페테르부르크의 레닌 지지자들은 소비에트가 “자칫하면 노동자 계급을 발전의 초기 수준에 붙들어 맬 것”(keep, rise of social-democracy, 231쪽) 이라고 밝힌 결의문을 통과시켰다.
볼셰비키 라딘은 “미래에 있을 수 있는 불행한 결과들은 미연에 방지하고, 당의 사상을 선전하는데 소비에트와 그 조직을 이용하려고 한 것이 우리가 할 수 있은 전부였다.”(schwarz, 179쪽)
레닌 도착 전 볼셰비키당의 공식 기관지<노바야 지즌>편집장 그노제프의 명의로 소비에트에 대한 중요한 기사를 실었다. “사회민주주의가 노동자 소비에트를 노동자 투쟁의 집행기구로서 강력히 지지했지만, 이제는 그야말로 노동자계급의 정치지도자가 되려 하는 소비에트의 모든 기도에 대해서 강력히 투쟁해야 한다.”(schwarz, 189쪽)
레닌은 “내게는 라딘 동지가 문제를 잘못 제기하는 것처럼 보인다.…:노동자 대표 소비에트냐 당이냐? 나는 이런 식으로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부적절하며, 따라서 결론은 틀림없이 다음과 같아야 한가고 생각한다. :노동자 대표 소비에트와 당 모두”(레닌 전집, 제10권, 19쪽)
“노동자 대표 소비에트가 사회민주주의 강령을 받아들이고,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에 결합해야한다고 요구하는 것은 현명치 못하다고 생각한다.”이러 소비에트는 “임시혁명정부의 맹아로 간주되어야한다.”(레닌 전집, 제10권, 21쪽)고 덧붙였으며 그는 소비에트가 “실질적인 지도력을 행사할 만큼 견고하고 일치된 중앙”(레닌 전집, 제10권, 24쪽)이 아니라는 주장을 논박했다.
레닌의 초기 태도는 대부분 볼셰비키들에게 공통적이었던 회의와 적의였다.1905년 10월에 멘셰비키가 페테르부르크 노동자들에게 소속 공장에서 곧이어 소비에트가 된 위원회를 선출하라 호소했을 때, 레닌은 “이 구호의 오류”(레닌 전집, 제9권, 306쪽)에 대해 충고했다.
레닌은 소비에트의 발전과정을 면밀하게 추적했으며, 다수의 계몽적인 논평을 했다. 이러한 논평은 모두 아주 새롭고 전혀 예산치 못한 현상을 파악하려는 최초의 시도였다. 그는 소비에트의 활동에 참여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으며, 동시에 당의 활동을 긴밀히 결부시키려고 애썼다. 당에 소속된 투사들이 정치적 의의가 불분명한 기구에 참여한다는 것은 예외적인 것으로서 “다소 격렬한 혁명적 격변의 시기”(레닌 전집, 제12권, 143쪽)라는 우발적인 상활에 의해서만 정당화 되었다. 이런 당서를 단 것은 레닌이 소비에트 조직의 결함, 특히 극도의 분산성과 권위 있는 중앙의 부재를 간파했기 때문이다. :소비에트들의 가장 큰 역할망인 전러시아소비에트 대회는 1917년까지 등장하지 않았다.(레닌 전집, 제10권, 203쪽) 레닌은 트로츠키와 마찬가지로 소비에트를 “노동자정부의 맹아”(트로츠키, 1905, 251쪽)로 인식했다.
(3)레닌, 볼셰비키당과 대중의 혁명적 활동
“거대한 파업운동이 진행 중이었으며, 뭔지 모를 엄청난 움직임이 일고 있었다. 그러나 볼셰비키위원회는 자신만의 격리된 삶을 살고 있었다.”(schwarz, 67쪽) 1905년 1월 페테르부르크에서 결정적 사태가 진행되는 동안 자기 조직이 보인 소극성을 한 볼셰비키 목격자는 이렇게 묘사한다. 볼셰비키와 멘셰비키의 최근 분열로 인해 이 시기에 사회주의세력은 확실히 힘이 없었다.
페테르부르크의 공장들, 특히 푸틸로프 공장에서는 선동이 점점 격렬해졌다. 가폰신부에 의한 선동으로 일요일(1월 9일)로 예정된 시위날, 짜르를 찾아가 청원서를 제출하자는 의견이 주장되어 사방에 퍼지자, 두 분파의 사회주의 투사들은 솔직히 적대적이기까지 한 반응을 보였다.
볼셰비키와 멘셰비키는 이내 시위에 대해 다른 태도를 취했다. 볼셰비키는 대중의 기분을 고려하여 온건한 방침을 정했으며 실제로 시위 보이코트를 촉구하지 않았다. 그러나 멘셰비키는 참여 결정을 내렸다.(schwarz, 56-64쪽) 1월 8일 볼셰비키는 본래의 결정을 철회하고 독립된 단위로 행진할 것을 결정했다(15명 정도가 행진).(schwarz, 70쪽)
곧 닥칠 사태 발발의 최초 징후를 알아차린 레닌의 열정은 ‘피의 일요일’대학살에 대한 러시아 노동자 계급의 강력하고 거대한 대응에 의해 수월하게 증진되었다. 1월 12일 수요일, 레닌은‘러시아 혁명의 시작’이라는 제목의 글에서 이렇게 말하였다. “노동자계급은 내전을 통해 중대한 교훈을 얻었다. 노동자계급의 혁명적 교육은 단조롭고 지루하고 비참한 생활이 몇 개월 아니 몇 년에 걸쳐 이룰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발전을 하루 만에 이루었다.”레닌은 가폰 신부가 시위 직후에 발표했던 성명서에 만족감을 나타냈다. :“우리에게는 더 이상 짜르가 없다. 피의 강물이 짜르를 인민과 갈라놓았다.”(schwarz, 97-98쪽)
1960년 모스크바에서 출판된 공식<소련공산당사>에서의 관변역사가들은 두 부분으로 된 신화를 표현하고 존속시킨다.:하나는 볼셰비키당이 동질적이고 단단히 결합된 완전무결한 당이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언제나 더욱 대담하고 더욱 혁명적인 행동을 위해 대중들은 설득하는 정책을 확고하고 일관되게 추구한 당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볼셰비키는 획일적 조직체가 아니었으며, 그 정책도 많은 경우 우유부단했다. 또한 대중들의 강력한 급진주의에 뒤처졌으며, 레닌의 가르침에 따라 당의 본질적 역할에 속하는 것으로 생각된 ‘투쟁의 지침’구실을 한 적도 없었다. 1905년 1월은 멘셰비키보다 훨씬 무능력한 것으로 판명되었다. 1906년 레닌은 “노동자계급은 그 지도자들보다도 빨리 투쟁의 객관적인 상황 변화와 파업에서 봉기로의 전환 필요성을 감지했다.”(레닌 전집, 제11권, 173쪽)“혁명가들의 구호는…실제로 사태발전에 뒤처졌다.”(레닌 전집, 제13권, 26쪽)고 말했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러시아 국내 조직의 최고지도자인 보그다노프는 급진적 태도를 드러낸 일부 대의원들을 겨냥하여 “혁명역량을 보존하고 집중시키기 위한 훈련의 중요성”을 강조했으며, 이 방침을 견지할 것을 당에 요구했다. 이처럼 볼셰비키들은 대중들의 '자생성‘에 대한 자신의 불신이나 순전히 ’노동조합주의적인‘ 요구들에 관한 자신의 편견을 잊어버리지 않았다. 이들은 이런 파업이 결국 노동자계급의 힘을 소모시키고 무장봉기의 조직화를 방해할 지도 모른다고 우려했기 때문에 간혹 정치 파업조차도 복잡한 심정으로 맞이했다. 이점에 대한 경계는 당 지도부에서 현저했던 것 같다. 1905년 모스크바조직의 위원회는 총파업에 7대 2로 부정적 견해를 보였다. 그러나 800-1000명의 모스크바 볼셰비키총회에서는 만장일치로 채택되었다.
레닌은 1905년 내내 볼셰비키들에게 각자 자신의 책임을 맡아야 한다는 것을 설득시키려 애썼다. : “내전의 시기에 이상적인 노동자계급의 당은 전투정당”(레닌 전집, 제11권, 220쪽)이기 때문에 모든 당원은 적극적으로 전투채비를 갖춰야 한다. 이 생각은 당시 그가 쓴 수많은 편지, 기사, 결의문, 보고서 등에서 중심사상처럼 거듭 반복된다. 그는 볼셰비키 런던 당 대회에서 “우리는 봉기의 불가피성을 과소평가 했다.”(레닌 전집, 제8권, 370쪽)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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