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게시물에서 찾기토론모임

레닌주의의 태동/ 2장 레닌주의의 정책과 전략 (발제와 토론주제/ 심화 토론 주제)

레닌의 혁명적 사회주의 (Leninism Under Lenin), 마르셀 리브만 (Marcel Liebman)

 

제1부. 레닌주의의 태동 제2장 레닌주의의 정책과 전략, 65~92p, 발제 : W 2011.08.08

 

 

 

(1) 레닌과 부르주아민주주의

(2) 동맹의 문제 : 레닌과 자유주의

(3) 레닌과 의회주의

(4) 부르주아혁명과 노동계급혁명

(5) 레닌과 연속혁명(Ⅰ)

 

 

 

(1) 레닌과 부르주아민주주의

 

1904년 말, 그리고 대체로 1905년 혁명이 발발하고 나서 볼셰비키 논쟁과 멘셰비키의 논쟁은 혁명전략을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 하는 문제로 확산됨.

 

러시아에서 산업화와 부르주아민주주의가 충분히 발전한 사회에서 사회주의가 태어날 것이라는 도식을 러시아에 적용하는데 다음과 같은 문제를 낳음

1) 러시아의 자본가계급이 국가권력을 맡겠다고 나설만큼 강력한가?

2) 인구의 대다수가 농민인 나라에서 마르크스주의 전망이 타당한가?

3) 서유럽처럼 러시아의 자본주의도 국가의 간섭없이 역동성을 띨 것인가?

4) 러시아에 실재하는 집산주의 농업 전통이 자본주의를 우회하게 해줄 수 없는가?

 

===> 마르크스가 이런 문제들에 대해 충분한 해결책을 제공해 주지 못함. 그러나 마르크스주의는 운동의 역사발전이라는 개념을 갖추게 함으로써 정치적 목적과 혁명전략 면에서 중요한 결과를 낳게 되어 있던 몇 가지 확신을 운동해 부여해 줌.

 

서구의 사회주의는 혁명적 자본가계급이 떠맡은 민주주의적 자유를 위한 투쟁을 한번도 거부한 적이 없었다. 러시아의 마르크스주의자들도 비슷한 태도를 취함.

 

레닌,

“노동자에게 정치적 자유를 위해 싸울 것을 요구하는 것은 그에게 진보적 자본가계급을 위해 위험을 무릅쓰라고 요구하는 것과 마찬가지일 것이다. 왜냐하면 정치적 자유가 주로 자본가계급의 이해관계에 봉사할 것임을…부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레닌은 왜 노동자계급이 자신들에게 적대적인 계급의 이해관계에 봉사할 정치체제를 야기하기 위해 싸워야만 하는지 그 근거를 제시한다.

 

“노동자는오직 근로인민의 주요한 적인…자본…에 대한 긍리의 길을 환히 밝히기 위해서만 보편적인 민주주의적 요구의 달성을 필요로 한다.”

“자본가계급이 지금처럼 정책에 은폐된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보다는 공공연하게 영향을 미치는 것이 노동자들에게는 훨씬 더 득이 된다.”

“정치적 자유가 존재하는 조건에서 광범한 대중투쟁이 전개될 때에만 러시아 노동자계급은 사회주의의 최종적 승리를 위한 조직을 발전시킬 수 있다.”

 

===> 레닌과 러시아 사회주의자들 일반은 오랫동안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을 가장 중요한 임무로 제시. 이 투쟁에서 성공하는 것이야말로 자본가계급의 권력을 서서히 약화시키고, 마침내는 노동자권력에 이르게 할 노동자계급의 완전 승리로의 길을 열어젖힐 것으로 판단. 레닌과 멘셰비키 사이에 커다란 차이가 없음.

 

 

(2) 동맹의 문제 : 레닌과 자유주의

 

사회주의 운동이 민주주의적 성취를 지키기 위해서 어떤 세력과 동맹을 맺어야 하는가를 결정하는 문제가 제기되자 레닌과 멘셰비키는 의견을 달리함.

===> 사회계급 사이의 관계와 일상적인 전술과 혁명전략에서 각각의 계급에게 부여된 역할문제를 이해하는 차이.

 

1904년말 자유주의자들에 의해 시작된 정치캠페인과 젬스트보에 대한 태도를 둘러싸고 의견을 달리할 때 까지, 레닌과 멘셰비키는 다음과 같은 동일한 견해를 가짐.

===> 노동자당의 완전한 독자성이 계속 유지되는 따라서 당이 노동자계급을 조직하고 본질적으로 노동자들이 자신과 부르주아 동맹세력 사이에 존재하는 근본적인 적대적 이해관계를 자각하게끔 정치적으로 교육시키는 임무 수행을 방해해서는 안되는 범위내에서 자유주의의 민주주의파와 동맹을 체결해야한다고 인정.

자본가계급으로 하여금 때로는 짜르체제에 저항하게 하고, 때로는 타협하게 하는 모순적 상황을 이용하여 자본가계급에게 압력을 가하고, 따라서 자본가계급을 왼쪽으로 밀어붙일 필요가 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멘셰비키의 젬스트보 캠페인에 대한 태도 : 젬스트보 캠페인을 지지하기로 결정, 노동자계급에게도 자유주의자들에 대한 지지를 행동으로 보일 것을 요구. 아울러 자유주의 동맹세력들을 놀라게 할지도 모르는 일은 피하라고 노동자들을 훈계. 자유주의자들에게 가하는 압력도 신중하고 온건한 성격의 것이어야 함. ===> 몇 가지 유보조건에도 불구하고 자본가계급의 혁명적 역할을 굳게 믿음. 지지대신으로 주어진 자유주의자들의 약속과 보증을 확실히 하는 것을 원함.

 

레닌과 볼셰비키 :

“유감스럽게도 혁명적 노동자계급과 싸우기 위한 온건한 젬스트보주의자와 정부의 동맹은 분명히 있을 수 있고, 또 거의 확실하다.” : 실제로 역동성이 전혀 없는 러시아의 자본가계급은 혁명적 역할을 수행할 수 없다.

“자본가 계급은 반혁명적”이라고 선언.

1905년 혁명이 일어난 첫 몇 개월 동안 “자본가계급은 노동계급혁명을 더욱 두려워하게 될 것이며, 더 서슴없이 반동의 품속으로 몸을 던질 것이다.”

1905년 9월 “혁명이 진전될수록…자유주의의 정체가 드러난다.”

그럼에도, 레닌은 “공화주의적, 혁명적 자본가계급”과 “자유주의적, 왕당파적 자본가계급”을 구별.

자본가계급과 소부르주아 계급(농민)을 구별.

 

===> 1905년 혁명이 끝나고 1914년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전까지 멘셰비키주의에 대한 레닌의 투쟁은 주로 자유주의에 대한 투쟁, 사회민주주의자와 입헌민주주의자들의 동맹을 목표로 하는 모든 경향에 대한 투쟁이었음.

 

 

(3) 레닌과 의회주의

 

입헌민주주의자들의 의회 그룹에 대해 견지해야 하는 태도와, 두마의 사회주의 대의원 그룹이 수행해야 하는 역할 문제에 대해 볼셰비키와 멘셰비키 사이의 의견이 반목. 의회기구에 대한 혁명정책을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 하는 문제였으며, 비혁명적 시기의 사회주의 전략에서 전혀 다른 두 가지 유형의 모습을 드러냄.

 

멘셰비키 : 두마를 지지하고, 두마의 특권확대를 위해 가능한 모든 일을 해야 할 피룡가 있다곡 생각. 1906년 스톡홀름 당대회에서 두마가 진보적인 역할을 맡을 능력을 갖췄다는 결의문을 통과시킴. 나중에 멘셰비키 그룹이 분열되고 다수의 지도자들이 합법정당 결성을 주장하자, 두마의 사회주의 대의원 그룹을 재조직된 사회주의 운동의 정치적 중심축으로 삼자는 생각이 부활함. 가능하면 언제라도 입헌민주주의자들과 선거동맹을 맺으려 함.

===> 멘셰비키 사이에서 특히 중도주의와 개량주의가 점증하고 있다는 하나의 징후, 유럽사회주의 운동에서 점차로 두드러졌던 ‘의회주의’현상을 러시아적 맥락에서 표현.

 

레닌 :

- “입헌주의적 환상”에 대해 경고.

“실질적인 권한이 전제주의 정부의 수중에 있는 한, 의회를 수단으로 정치적 자유를 획득하는 것이 불가능함을 인민에게 설명하고, 노동자계급과 혁명적 소부르주아 계급, 특히 농민의 요구를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서 두마의 완전한 무용성”을 인민에게 보여줄 것을 당에 촉구.

===> “일단 우리 볼셰비키들이 어떤 약속을 했다면, 그것은 오직 두마는 반혁명의 산물이며, 실질적인 이익이 전혀 기대되지 않는다는 우리의 확신 때문이었다.”

 

- 두마에 대한 완전 보이코트를 촉구한 경향과도 투쟁.

 

사회주의자들의 의회활동 참여는 무엇보다도 노동자들 사이에서의 당의 정치선동을 확대하는데 도움을 준다. : 두마의 연단이나 선거운동을 통해 제공된 사회주의 선전의 모든 기회는 최대한으로 활용되어야 한다. 사회민주당의 임무는 오직 의회주의의 정체를 폭로하기 위해서만 의회제도에 참여한다.

 

두마의 사회민주주의 그룹의 역할과 지위

‘비판, 선전, 선동, 조직화 임무’를 수행하는 것

“사회민주주의 그룹이 두마에 제출할 법안의 용도는 즉각적인 ‘입법화’가 목적이 아니라 이런 임무를 위한 것이어야 한다.”

당 중앙위원회에 두마 그룹에 ‘지시’를 내릴 권한이 부여되어 있다고 규정한 1907년 런던 당대회에서 통과한 동의안을지지.

===> 1906년에서 1914년 사이에 레닌은 의회 그룹을 당의 가장 엄격한 통제 아래 두기 위해 끈기있게 싸움. 전쟁직전 몇 년 동안, 레닌은 두마의 자지 지지자들에 대해 완벽한 권위를 행사. 이때, 이들을 효율적으로 통제하기 위해 레닌은 이들의 연설문 대부분을 직접 씀.

 

당의 혁명활동을 확대하기 위해 두마를 활용하는 것이 가능하기 위한 두가지 조건

첫째, 사회주의 대의원들이 부르주아 의회주의 동료들에게 오염되지 않아야 함. 따라서 입헌민주주의자들과 어떤 협정도 금지.

둘째, 사회주의 대의원들에게 허용되는 임기응변의 자유는 최소로 억제.

 

선거동맹 : 오직 소농을 대표한 정당들과만 협정을 체결.

 

 

(4) 부르주아혁명과 노동계급혁명

 

멘셰비키와 레닌의 일치점 :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러시아혁명의 부르주아적 성격에 대해 절대적으로 확신하고 있다.”

 

멘셰비키 : 자본가계급 스스로 부르주아혁명을 이끌 것이며, 노동자계급은 단지 보조적인 역할을 수행. 부르주아 권력은 부르주아 정당에게, 노동자의 저항은 노동자계급의 대표에게 맡기는 선에서 그쳐야 한다. 혁명이후 부르주아 질서내에 야당역할 자신을 위치. 서구의 반여당주의 태도. - 사회주의 장관들은 부르주아 정책에 관련됨으로써 체면을 구기거나, 사회주의 질서를 도입하기 시작할 것이므로 모험주의적 노선에 착수하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임으로 임시정부에 참여하지 말아야 한다.

 

러시아의 특수성 : 도시경제 자체가 러시아에서는 매우 부착적인 위치를 점함. 산업노동자 계급이 혼자서 러시아에 사회주의를 세우기에는 실제로 너무 미약, 반면에 자유 자본가계급은 사회적, 정치적 역량이 미비하여 국가에 대한 종속은 서구의 ‘중간계급’이 누린 상당한 정도의 독립과 대조됨.

 

레닌 : 1905년 러시아혁명은 성격상 부르주아민주주의적이지만 “완전한 자유와 공화국을 위하여 결연한 투쟁을 수행할 수 있는” 유일한 계급인 노동자계급에 의해 추진될 것이라고 말했다.

도시 노동자계급과 소농대중의 동맹 : 물론 당면 임무가 사회주의를 수립하는 것이라면 농민의 소부르주아적 본성이 노동자계급과의 동맹에 장애가 되지만, 오직 부르주아 혁명만이 의제라면 해당되지 않는다.

===> 노동자계급과 농민의 혁명적 민주주의 독재, 혁명적 노동자당은 혁명정부내에 자리잡아야 한다. 당 지도부는 현재의 발전 가능성들을 무시하지 않고, 민주주의혁명과 사회주의혁명을 매우 분명하게 구별할 수 있을 것이다. 임시정부는 오직 조직화된 노동자계급이 참여했을 때에만 혁명적일 것이다.

 

레닌의 모순 : 러시아 혁명이 사회적, 경제적 본질에서 부르주아적이지만 도시 노동자계급과 소농대중의 동맹의 의해 수립될 혁명적 민주주의 독재는 정치적인 면에서 반부르주아적일 수 있다. 반면에 레닌 자신이 말한 것처럼, 이 혁명이 “주로 대자본가, 재계의 거물, ‘계몽된’ 대중에게 유리한 형식”을 취할 것이라면, 우선 이 부르주아혁명의 승리를 노동자계급에 의해 획득된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가?

 

 

(5) 레닌과 연속혁명(Ⅰ)

 

1905년은 부르주아혁명과 사회주의혁명의 압축이라는 문제를 즉각 제기. 트로츠키만이 이를 완전하게 이해하고 대처할 수 있었음.

 

트로츠키의 <평가와 전망>

“노동자계급의 수중으로 구너력이 넘어갈 정확한 시기는 직접적으로는 생산력의 수준이 아니라, 계급투쟁의 여러관계, 국제적 상황,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노동자들의 전통, 주도력과 투쟁 각오 등의 수많은 주관적 요인들에 달려 있다.”

“노동계급독재가 어떤 점에서는 한 나라의 기술 발전과 자원에 자동적으로 좌우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황당무계하게 단순화된 ‘경제적’ 유물론의 편견이다.”

“경제적 후진국의 노동자들이 선진국의 노동자들보다 더 일찍 권력을 장악할 수 있다.”

레닌의 ‘노동자계급과 농민의 독재’ 정식 거부. “적어도 즉각적, 직접적 의미에서 실현될 수 없다. ===> 노동자 계급이 농민을 각성시켜야 함. 농민들이 여전히 자신의 정치조직을 갖지 못했다면, 노동자계급의 공세적 운동을 따를 것임.

“노동자계급은 부르주아혁명의 내적 메커니즘에 의해서 정치적 지배로 상승되었기 때문에 자신의 사명을 자본가계급의 사회적 지배를 위한 공화주의적-민주주의적 조건을 창출하는데 국한시켜야 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설사 그것이 바람직하더라도 아주 심한 공상일 것이다.”

“서구의 사회주의혁명이 우리로 하여금 노동자계급의 일시적인 지배를 사회주의 독재로 직접 전화시켜 나아갈 수 있도록 해 줄것이라는 사실은 한 점의 의혹도 없다.”

 

절제된 어조.

도이처 “이때까지 레닌은 이 책에 대해 부분적인, 그것도 간접적인 지식밖에 없었다. 1919년 이전에는 트로츠키의 <평가와 전망>을 실제로 읽지 않았음이 정설인 것 같다.”

1927년 요페가 트로츠키에게 보낸 편지 : “나는 레닌이 1905년에 옳았던 것은 자신이 아니라 당신이었다고 인정하는 말을 내 귀로 직접 들었다고 당신에게 자주 말했습니다. 죽음을 앞둔 사람은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 말을 지금 당신에게 다시 한번 그대로 반복합니다.”

 

본책은 레닌의 생각이 트로츠키와 유사했다는 것으로 결론

 

1905년 봄 : “그러나 만약 우리가 이 올바른 마르크스주의의 3단계 도식을 상승이 시작되기 전에 미리 그다지 크지 않은 부분 말하자면, 하나의 단계만을 구분해야 한다는 의미로 해석한다면, 만약 우리가 이 도식에 따라서 상승이 시작되기 전에 ‘혁명적 시기의 행동 계획을 작성’하려고 애쓴다면, 우리는 속물근성의 달인이 되어야 할 것이다.”

 

1905년 9월 ‘트로츠키주의적인 글’ : “민주주의혁명으로부터 우리는 즉시, 그리고 우리가 가진 힘, 계급의식적이고 조직화된 노동자계급의 힘의 정도에 일치하여 사회주의혁명으로의 이행을 시작할 것이다. 우리는 연속혁명을 지지한다. 우리는 중도에서 멈추지 않을 것이다.”

 

부르주아혁명에서 사회주의혁명으로의 이행에 대한 레닌의 생각

: <<두가지 전술>>에서 그는 이 이행기가 짧을 수 있으며, 당의 태도는 이 이행을 적극적으로 촉진시키는 것이어야 한다고 하고, 당의 모든 정책은 이행을 준비하는데 맞춰져야 한다고 지적. 혁명의 부르주아 단계와 사회주의 단계 사이에 실질적인 단절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덧붙임. “현재 혁명의 완전한 승리는 민주주의혁명의 종결이자 사회주의혁명을 위한 결연한 투쟁의 시작을 표시할 것이다.”

 

혁명의 국제적 연속성 언급

 

노동자계급이 패배하고 전제정권이 부활하자, 레닌은 1905년에 어뜻 비췄던 ‘연속혁명’전망을 포기한 것 같다. 1917년이 되어서야 이 전망은 비로소 다시 나타타고 승리를 거두는 레닌의 정책이 된다.

 

 

<<토론 및 점검 내용>>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 단계에서의 자유주의부르주아에 대한 태도와 사회주의 혁명단계에서의 태도

반여당주의에 대하여

선거전술 : 현시기 선거전술, 의원그룹이 구성된다면 레닌의 이해와 동일한 지위부여?

계급동맹 : 현재 계급동맹이 의미 있는 전략인가?

연속혁명과 국제주의, 1917년 혁명과 더불어서....

 

 [레닌의 혁명적 사회주의_2장 레닌주의 정책과 전략.hwp (26.00 KB) 다운받기]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

내일 회사일로 참여가 어렵습니다.

저번에는 술 때문이고 

이번에는 회사일로 출장이 있습니다. 

발제를 맡았는데 책임을 다 하지 못해 미안합니다.

담에는 꼭 참석하겠습니다.

 

 

제 3장 1905년의 레닌(변증법적인 잠재력, 인민에 대한 깊은 혁명적 신뢰)

 

(1) 당 구조의 변화

-1905년 4월에 열린 볼셰비키 당 대회는 변화의 지지자와 반대자간의 대결장이었다. 가장 첨예한 대립은 노동자 계급 출신 구성원들에게 볼셰비키 조직과 위원회를 개방할 것인가 하는 문제였다. 대의원들이 지방위원회 위원의 노동자 수가 늘어나야한다고 요구하자 일부 중핵들은 이 문제는 매우 신중해야한다고 요구하자 당 구조 변화의 옹호자들은 ‘이런 사회적 변화는 당의 음모적 분위기를 일소하고, 지도자와 일반당원들의 건전한 관계 증진에 도움이 될 것’이라며 ‘더 깊이 아래로 뛰어들 것’을 볼셰비키에게 호소했다. 이런 개혁적 경향의 한 대표는 ‘비주류파’ 당원의 3분의 2가 청원하면 해당 지방위원회를 해산시킬 권한을 중앙위원회에 부여한다는 내용의 당 개정안을 상정했다. 레닌은 이 안건을 지지했으며 나아가 정족수 3분의 2에서 지식인 분자를 제외시킴으로써 더욱 더 ‘노동자주의적인’ 성격을 부여하려고 했다. 레닌은 보그다노프와 공동으로 볼셰비키위원회의 노동자 계급 위원수를 늘릴 것을 위무로 부과한 당 규약개정안을 제출했으나 이 개정안은 부결되었다. 크게 당황하지 않고 “그는 위원회를 더욱 결연한 노동자로 구성할 수 없는 이런 당을 다가오는 혁명이 근본적으로 치유할 것이 틀림없다고 이해했다.”(krupskaya. 127쪽)

 

일부 볼셰비키들이 <무엇을 할 것인가?>의 원칙을 그 저자에게 상기시키자, 레닌은 이들을 맹렬히 공격하면서“조직에 대한 이 모든 도식과 계획들은…관료적 형식주의라는 인상을 준다.…어떠한 형식적 절차도 요구하지 말고, 제발 이런 도식들을 전부 잊어버려라. 모든‘기능, 권리, 특권’은 악마에게 줘버려라”(레닌 전집, 제9권, 344-345쪽)고 말했다.

정말로 위원회 사람들의 기능, 권리, 특권의 대부분이 폐지되었다. 이는 레닌이 여러 방면에서 동지들의 주저, 침묵, 두려움에 맞서서 벌인 격렬한 투쟁의 결과였다.

 

(2)레닌, 볼셰비키당과 소비에트

1905년 혁명의 발발에 대한 볼셰비키의 반응을 특징지은 것은 놀라움이라기보다는 오히려 회의, 몰이해, 심지어는 간혹 노골적이기까지 한 적대감이었다. 1905년 10월 13일 수도의 25만 노동자를 대표한 대의원들이 모여 페테르부르크 소비에트가 수립되었으며, 다음날 총파업이 선언되었다. 페테르부르크 소비에트에는 다수의 멘셰비키 투사들이 적극 참여했으며 이들은 노동자들 사이에 소비에트 사상을 보급시켰다.

 

볼셰비키 투사 크라시코프는 이런 사태 전개에 대해 “멘셰비키가 새로운 음모를 꾸미기 시작했다: 이들은 무당파적인 주바토프주의 위원회를 선출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이들은(볼셰비키) 당이 통제할 수 없는 자생적 대중운동을 극도로 불신했다. 그런데 대개는 1905년 총파업들은 거의 다 자생적 성격을 띠었다.

 

마르토프는 혁명초기에 자신이 편집한 <이스크라>지를 통해 노동자 계급이 행정과 통치능력도 시험해 볼 수 있는 ‘혁명적 자치정부 기구’(getzler, 108쪽)의 구성을 주장했다. 이것이 노동자 민주주의의 견습 역할을 할 것이었다. 마르토프와 그 동료들에게 소비에트의 출현은 이런 생각이 구체적으로 실현된 것처럼 보였다. 이 주장은 인민정부 구성의 필수 전제 조건을 무장봉기를 통한 국가권력의 장악이라고 생각한 레닌에게 비판 받았다.(레닌 전집, 제9권, 184쪽)

 

물론 소비에트가 투쟁조직의 면모를 취한 경우에는 언제나 볼셰비키들도 주저 없이 대거 소비에트에 참여하여 간혹 모스크바에서 일어난 것처럼 통제권 획득에 성고하기도 했다. 그러나 소비에트에서 볼셰비키들은 대체로 ‘하찮은 눈에 띄지 않는’ 역할을 수행했다.(carr, vol.1 47쪽)

 

페테르부르크의 레닌 지지자들은 소비에트가 “자칫하면 노동자 계급을 발전의 초기 수준에 붙들어 맬 것”(keep, rise of social-democracy, 231쪽) 이라고 밝힌 결의문을 통과시켰다.

 

볼셰비키 라딘은 “미래에 있을 수 있는 불행한 결과들은 미연에 방지하고, 당의 사상을 선전하는데 소비에트와 그 조직을 이용하려고 한 것이 우리가 할 수 있은 전부였다.”(schwarz, 179쪽)

 

레닌 도착 전 볼셰비키당의 공식 기관지<노바야 지즌>편집장 그노제프의 명의로 소비에트에 대한 중요한 기사를 실었다. “사회민주주의가 노동자 소비에트를 노동자 투쟁의 집행기구로서 강력히 지지했지만, 이제는 그야말로 노동자계급의 정치지도자가 되려 하는 소비에트의 모든 기도에 대해서 강력히 투쟁해야 한다.”(schwarz, 189쪽)

 

레닌은 “내게는 라딘 동지가 문제를 잘못 제기하는 것처럼 보인다.…:노동자 대표 소비에트냐 당이냐? 나는 이런 식으로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부적절하며, 따라서 결론은 틀림없이 다음과 같아야 한가고 생각한다. :노동자 대표 소비에트와 당 모두”(레닌 전집, 제10권, 19쪽)

 

“노동자 대표 소비에트가 사회민주주의 강령을 받아들이고,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에 결합해야한다고 요구하는 것은 현명치 못하다고 생각한다.”이러 소비에트는 “임시혁명정부의 맹아로 간주되어야한다.”(레닌 전집, 제10권, 21쪽)고 덧붙였으며 그는 소비에트가 “실질적인 지도력을 행사할 만큼 견고하고 일치된 중앙”(레닌 전집, 제10권, 24쪽)이 아니라는 주장을 논박했다.

 

레닌의 초기 태도는 대부분 볼셰비키들에게 공통적이었던 회의와 적의였다.1905년 10월에 멘셰비키가 페테르부르크 노동자들에게 소속 공장에서 곧이어 소비에트가 된 위원회를 선출하라 호소했을 때, 레닌은 “이 구호의 오류”(레닌 전집, 제9권, 306쪽)에 대해 충고했다.

 

레닌은 소비에트의 발전과정을 면밀하게 추적했으며, 다수의 계몽적인 논평을 했다. 이러한 논평은 모두 아주 새롭고 전혀 예산치 못한 현상을 파악하려는 최초의 시도였다. 그는 소비에트의 활동에 참여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으며, 동시에 당의 활동을 긴밀히 결부시키려고 애썼다. 당에 소속된 투사들이 정치적 의의가 불분명한 기구에 참여한다는 것은 예외적인 것으로서 “다소 격렬한 혁명적 격변의 시기”(레닌 전집, 제12권, 143쪽)라는 우발적인 상활에 의해서만 정당화 되었다. 이런 당서를 단 것은 레닌이 소비에트 조직의 결함, 특히 극도의 분산성과 권위 있는 중앙의 부재를 간파했기 때문이다. :소비에트들의 가장 큰 역할망인 전러시아소비에트 대회는 1917년까지 등장하지 않았다.(레닌 전집, 제10권, 203쪽) 레닌은 트로츠키와 마찬가지로 소비에트를 “노동자정부의 맹아”(트로츠키, 1905, 251쪽)로 인식했다.

 

(3)레닌, 볼셰비키당과 대중의 혁명적 활동

“거대한 파업운동이 진행 중이었으며, 뭔지 모를 엄청난 움직임이 일고 있었다. 그러나 볼셰비키위원회는 자신만의 격리된 삶을 살고 있었다.”(schwarz, 67쪽) 1905년 1월 페테르부르크에서 결정적 사태가 진행되는 동안 자기 조직이 보인 소극성을 한 볼셰비키 목격자는 이렇게 묘사한다. 볼셰비키와 멘셰비키의 최근 분열로 인해 이 시기에 사회주의세력은 확실히 힘이 없었다.

페테르부르크의 공장들, 특히 푸틸로프 공장에서는 선동이 점점 격렬해졌다. 가폰신부에 의한 선동으로 일요일(1월 9일)로 예정된 시위날, 짜르를 찾아가 청원서를 제출하자는 의견이 주장되어 사방에 퍼지자, 두 분파의 사회주의 투사들은 솔직히 적대적이기까지 한 반응을 보였다.

볼셰비키와 멘셰비키는 이내 시위에 대해 다른 태도를 취했다. 볼셰비키는 대중의 기분을 고려하여 온건한 방침을 정했으며 실제로 시위 보이코트를 촉구하지 않았다. 그러나 멘셰비키는 참여 결정을 내렸다.(schwarz, 56-64쪽) 1월 8일 볼셰비키는 본래의 결정을 철회하고 독립된 단위로 행진할 것을 결정했다(15명 정도가 행진).(schwarz, 70쪽)

 

곧 닥칠 사태 발발의 최초 징후를 알아차린 레닌의 열정은 ‘피의 일요일’대학살에 대한 러시아 노동자 계급의 강력하고 거대한 대응에 의해 수월하게 증진되었다. 1월 12일 수요일, 레닌은‘러시아 혁명의 시작’이라는 제목의 글에서 이렇게 말하였다. “노동자계급은 내전을 통해 중대한 교훈을 얻었다. 노동자계급의 혁명적 교육은 단조롭고 지루하고 비참한 생활이 몇 개월 아니 몇 년에 걸쳐 이룰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발전을 하루 만에 이루었다.”레닌은 가폰 신부가 시위 직후에 발표했던 성명서에 만족감을 나타냈다. :“우리에게는 더 이상 짜르가 없다. 피의 강물이 짜르를 인민과 갈라놓았다.”(schwarz, 97-98쪽)

 

1960년 모스크바에서 출판된 공식<소련공산당사>에서의 관변역사가들은 두 부분으로 된 신화를 표현하고 존속시킨다.:하나는 볼셰비키당이 동질적이고 단단히 결합된 완전무결한 당이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언제나 더욱 대담하고 더욱 혁명적인 행동을 위해 대중들은 설득하는 정책을 확고하고 일관되게 추구한 당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볼셰비키는 획일적 조직체가 아니었으며, 그 정책도 많은 경우 우유부단했다. 또한 대중들의 강력한 급진주의에 뒤처졌으며, 레닌의 가르침에 따라 당의 본질적 역할에 속하는 것으로 생각된 ‘투쟁의 지침’구실을 한 적도 없었다. 1905년 1월은 멘셰비키보다 훨씬 무능력한 것으로 판명되었다. 1906년 레닌은 “노동자계급은 그 지도자들보다도 빨리 투쟁의 객관적인 상황 변화와 파업에서 봉기로의 전환 필요성을 감지했다.”(레닌 전집, 제11권, 173쪽)“혁명가들의 구호는…실제로 사태발전에 뒤처졌다.”(레닌 전집, 제13권, 26쪽)고 말했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러시아 국내 조직의 최고지도자인 보그다노프는 급진적 태도를 드러낸 일부 대의원들을 겨냥하여 “혁명역량을 보존하고 집중시키기 위한 훈련의 중요성”을 강조했으며, 이 방침을 견지할 것을 당에 요구했다. 이처럼 볼셰비키들은 대중들의 '자생성‘에 대한 자신의 불신이나 순전히 ’노동조합주의적인‘ 요구들에 관한 자신의 편견을 잊어버리지 않았다. 이들은 이런 파업이 결국 노동자계급의 힘을 소모시키고 무장봉기의 조직화를 방해할 지도 모른다고 우려했기 때문에 간혹 정치 파업조차도 복잡한 심정으로 맞이했다. 이점에 대한 경계는 당 지도부에서 현저했던 것 같다. 1905년 모스크바조직의 위원회는 총파업에 7대 2로 부정적 견해를 보였다. 그러나 800-1000명의 모스크바 볼셰비키총회에서는 만장일치로 채택되었다.

 

레닌은 1905년 내내 볼셰비키들에게 각자 자신의 책임을 맡아야 한다는 것을 설득시키려 애썼다. : “내전의 시기에 이상적인 노동자계급의 당은 전투정당”(레닌 전집, 제11권, 220쪽)이기 때문에 모든 당원은 적극적으로 전투채비를 갖춰야 한다. 이 생각은 당시 그가 쓴 수많은 편지, 기사, 결의문, 보고서 등에서 중심사상처럼 거듭 반복된다. 그는 볼셰비키 런던 당 대회에서 “우리는 봉기의 불가피성을 과소평가 했다.”(레닌 전집, 제8권, 370쪽)고 밝혔다

 

[제 3장 1905년의 레닌.hwp (19.50 KB) 다운받기]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

토론모임 일정 8월8일 오후 3시입니다.

토론모임 일정 8월8일(월) 오후 3시입니다.

 

장소는 전과 같습니다.

 

세미나 내용은 지난번 정한 내용 그대로 합니다.

 

W .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

오늘

아침에 들어왔습니다.

참여가 어렵게 되었습니다.

발췌한 글만 올립니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

레닌주의의 태동/ 1장 레닌의 당 (발제와 토론주제/ 심화 토론 주제)

레닌의 혁명적 사회주의 (Leninism Under Lenin), 마르셀 리브만 (Marcel Liebman)

제1부. 레닌주의의 태동 제1장 레닌의 당, 15~64p, 발제 : W 2011.07.29

 

 

1. 발제

 

제1장 레닌의 당

 

- 레닌주의는 볼셰비키 조직으로 구현되었으며, 볼셰비키 조직은 레닌의 작품이었다. 역사가가 이것들을 분리할 수 없도록 역사는 철저하게 이 둘을 결합시켰다. 볼셰비키 조직은 레닌의 고유한 창조물.

조직의 절대적 필요성에 대한 레닌의 강조는 레닌 저술과 활동 경력 전반에 걸쳐서 확인된다.

 

24세 때, 레닌은 <“인민의 벗‘은 누구인가>에서 러시아 혁명운동의 ’당면 임무‘는 ‘사회주의 노동자당을 조직하는 것’이라고 선언 (1894년)

1904년 레닌주의 조직의 최초 형태인 볼셰비키 분파 설립.

1905년 러시아 혁명 중에 “ 대중이 조직되지 않으면 노동자계급은 아무것도 아니다. 조직화야 말로 모든 것이다”(레닌전집, 11권, 320쪽)

 

-1895년에서 1902년 사이에 모스크바 사회민주주의 그룹들은 경찰의 간섭으로 평균 3개월을 견디지 못했다. (1898년 민스크에서 열린 1차 당대회에서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 창립 선포 됐지만, 대회가 끝난 후 모든 대의원들이 체포됨)

 

1. 볼셰비키주의 기원

 

-1895년 레닌은 사회민주주의 그룹에서 활동. 1895년에서 1900년 사이에 체포와 유형. 시베리아 유형 중에 “공동의 당 기관지 창간 긴급 호소문”을 유럽의 동지들에게 제출한다.

<이스크라>(Iskra: 불꽃)를 통해 레닌은 “ 신문은 집단적 선전가이자 선동가일 뿐만 아니라 집단적 조직가이기도 하다” (레닌전집, 5권, 22쪽, 강조는 레닌)

신문 창간 때 배포자 약 10명, 1901년 12명, 1903년 약 30명 수준임.

 

- <이스크라>가 조직적인 러시아 사회주의 운동을 탄생시킨 1903년 당 대회 소집할 수 있었다. 1900년 12월~1903년 10월 플레하노프, 마르토프, 악셀로드, 레닌, 트로츠키 등 참여. <이스크라>는 볼셰비키당의 논쟁적 방식을 채용.

 

(1) 엘리트주의적인 당 개념 : 노동자계급의 전위

 

- 1902년 3월, 정치사의 한 시기를 가르는 레닌의 소책자 <무엇을 할 것인가?> 슈투트가르트에서 출판됨.

 

“본질적으로 ‘자연발생적 요소’ (spontaneous element)는 맹아적 형태의 의식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하나의 맹아적 의식이 다른 맹아적 의식으로 변화하는 것은 가능하다. 그러나 노동자들은 자신들의 이해관계와 현대의 정치 · 사회체제가 화해할 수 없는 적대관계에 놓여 있다는 사실을 의식하지 못했으며, 또 의식할 수도 없었다. 즉, 이들의 의식은 아직 사회민주주의 의식이 아니었다.”(레닌, 전집, 5권, 374~375쪽 )

경제주의(economism)에 대한 레닌의 단호한 투쟁은 자생성 (spontaneity)에 대한 직접적인 공격으로 표현됨. 이것이 바로 “계급적 정치의식은 오직 외부로부터 즉, 노동자와 고용주들의 관계라는 영역 밖으로부터만 노동자들에게 가져올 수 있는” 이유다. (레닌, 전집, 5권, 422쪽 )

여기서 레닌의 비판은 노동자계급의 자생적 행동에 대해서라기보다는 오히려 초보적이고 본능적인, 따라서 많은 것이 결여된 노동자계급의 의식에 대한 것이었다.

1903년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 대회에서 레닌 자신은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다.: “ 우리 모두는 이제 ‘경제주의자들’이 한쪽 극단으로 가버렸다는 것을 알고 있다. 사태를 바로잡기 위해 누군가는 다른 방향에서 끌어당겨야 했다. 그것이 내가 했던 일이다.”

(레닌, 전집, 6권, 491쪽)

<무엇을 할 것인가?>의 수많은 구절들은 레닌의 관심사가 무엇보다도 대중의 자생적 행동을 충분히 효과적이게 하려는 것임을 보여준다. 레닌은 행동을 논할 때마다 자생성을 비난하기는커녕 혁명조직이 자생적 운동의 지도부가 될 것을 역설한다. 여기서 레닌은“대중들의 자생적 고양에 ... 지도자들이 뒤쳐져 있음”(레닌, 전집, 5권, 446쪽 )을 애석해한다.

 

레닌은 조직과 운동을 명확하게 구별한다. 대중들의 행동은 본질적으로 운동 항목에 든다고 생각한다. “당은 오직 광범한 노동자계급 대중의 ... 전위이어야 하며, ...노동자계급 전체가 ‘당’에 속하지 않으며, 또 속해서도 안된다.”(레닌, 전집, 6권, 502쪽 )

당과 계급의 관계에 대한 레닌의 이론과 ‘자생성 숭배’에 대한 비판이 일반적으로 적용된다.

 

* 서구의 사회주의 정당- 대중정당-들이 전체 노동자계급을 대표하려는 것과 비교.

 

1903년 당 대회에서 레닌과 마르토프 사이 논쟁. ‘볼셰비키’와 ‘멘셰비키’로 명명된 분파 논쟁의 원인.

레닌의 정식: “당원은 당의 강령을 받아들이고, 재정적으로, 그리고 당 조직 중 하나에 직접 참여함으로써 당을 지지하는 자이다.

마르토프 정식: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의 당원은 당의 강령을 받아들이고, 당 기구의 지도아 통제 하에서 당의 목표 성취를 위해 적극적으로 활동하는 자이다.”

쟁점은 당의 규모, 당의 성격 문제임. 마르토프 원안이 28대 22, 기권1표로 채택됨.

볼셰비키의 등장은 전위조직의 필요성 즉, ‘엘리트적’ 당 개념과 밀접한 관계가 있음.

러시아 아나키스트인 네챠예프 (Nechayev)는 “혁명가는 요주의 인물이다. 그는 사적인 이해나 용무, 사적인 감정이나 관계도 없다. 심지어 이름조차 없다. 혁명가의 모든 것은 단 하나의 유일한 목적, 단 하나의 사상, 단 하나의 열정 즉, 혁명에 맞춰져 있다.”

레닌은 러시아 전통적인 혁명조직에 반대하기는 했지만, 많은 점에서 이들의 유산을 이어받았다.

레닌이 블랑키(프랑스 혁명가)와의 차이점은 당을 노동자계급 대중과 연결시킬 의무를 강조한다.

 

(2) 중앙집중주의와 당내 민주주의

 

레닌이 주장한 중앙집중주의는 실제로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또 그 함의는 무엇이었는가? “혁명적 사회민주주의 조직 원칙은 ... 위에서 아래로 나아가려고 애쓰며, 각 부분에 대한 중앙의 권리와 권한의 확대를 지지한다.” 즉 “관료주의 대 민주주의”, “중앙집중주의 대 자치주의”라는 근본적으로 대조된다. “ 당의 전반적 업무 일체를 꾸려나가는 중앙위원회.

 

로자룩셈부르크의 비판: 레닌의 중앙집중주의 개념은 “중앙위원회가 당의 유일한 판단 부위가 된다.” “중앙위원회에 광범위한 권한은 당의 보수주의적 경향을 강화시킨다” (로자룩셈부르크, 정치 연설집, 116-117쪽)

이에 대해 레닌은 로자의 이론이 “마르크스주의를 속류화 시키고 타락시켰다”고 비판한다.(레닌, 전집, 8권, 61쪽 )

 

트로츠키의 비판 : “ 레닌의 방식은 이렇게 이끌린다. 처음에는 당 조직이 당 전체를 대리한다. 그 다음에는 중앙위원회가 당 조직을 대리한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한 명의 ‘독재자’가 중앙위원회를 대리한다.” (아이작 도이치, 무장한 예언자. 90쪽)

 

당시에 실제로 존재한 볼셰비키 조직의 상황은 “권위주의적 중앙집중화”, “군대식 규율”-레닌도 에둘러 말하지 않고 이렇게 불렀다-과 함께 위계적 원칙의 절대적 필요성을 긍정했다. 볼셰비키와 멘셰비키 사이에 차이가 거의 없었다. 1905년 혁명 때까지 이 방식을 채용했다.

 

2. 1905년의 볼셰비키주의

 

1905년 1월9일 페테부르크의 ‘피의 일요일’ 대량학살 이후 몇 달 동안 대중적인 선동이 일어남. 1905년 혁명은 레닌주의로 하여금 대중을 조직과, 노동자계급을 전위전당과 연결시키지 않을 수 없게 했다.

결국 가장 기초가 되는 것은 ‘공장에서 모든 사회민주주의적 활동 수행을 위해 위원회로부터 직접 권한과 지시를 받은 극소수의 혁명가들로 이루어진 공장위원회이다.

1905년까지 모든 러시아 사회주의 조직들의 특징.

 

(1) 소수 정예정당에서 대중정당으로

 

1905년은 대중들에게 당의 문호를 개방하는 것이 불가피해졌다. 1905년 혁명에 대한 적응은 조직과 운동, 수직적 연결망과 수평적 연결망, 그리고 전위와 노동자계급을 구별하는 것이 점점 더 중요하지 않아지기 시작했음을 의미한다.

1905년 1월 볼셰비키 조직원은 8천 400명의 당원.

1906년 봄. 러시아 사회민주당 당원 수는 4만8천명. (이중 볼셰비키 3만4천명. 1만 4천명이 멘셰비키) 1906년 10월 당원 수 7만 명. 1905년 혁명 발발 1년 뒤, 레닌은 처음으로 이 조직을 ‘대중정당’이라고 평했다.

 

1905년 혁명은 외부의 자극 없이도, 대중들의 활동을 고무하고 지도하며 이끌 수 있는 당 조직이 없어도, 대중들은 본질적으로 정치적 성격의 혁명운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2) 당의 민주화에서 민주집중제로

 

노동자계급의 군대가 전력을 쏟고 있는 싸움에서, 대오 내의 비판은 그 어떤 것도 허용될 수 없다. 그러나 행동명령이 내려지기 전에는 가장 광범위한 토론과 해결책에 대한 평가가 이루어져야 한다. 토론의 자유와 행동의 통일. 행동명령을 내릴 권한은 당 대회의 권한.

 

3. 레닌주의의 종파주의

 

1905년에서 1907년까지의 시기는 볼셰비키 조직, 러시아 사회주의 운동 조직의 신장과 ‘대중정당’으로의 전환이 혁명의 폭발에 힘입은 정도를 보여준다.

그러나 반동의 승리로 얼룩진 1908년 이후 러시아 혁명운동은 정체, 후퇴, 재기 불능 상태에 빠졌다.1907년 12월 말 경 레닌 망명. 1909년 볼셰비키는 전체 러시아에서 6개의 지방위원회가 존재했다.

‘소환파’는 당이 두마(의회)와 완전결별하고 오로지 비합법, 비밀 활동에 한정을 원함.

‘최후통첩파’는 의회 그룹이 더욱 확실하게 당에 복종해야 한다고 요구.

‘화해파’는 멘셰비키 내 특정 분자들과의 통합 시도 지지.

이 시기에 레닌은 1905년 11월 제1대 두마(의회)를 보이코트 한다는 당의 결정을 따르고 나서, 두마(의회)를 혁명적 목적을 위해 활용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좌익 경향인 보그다노프 분파(소환파와 최후통첩파 결합)는 레닌을 기회주의로, 멘셰비키주의로 일탈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1909년 좌익 지도자 제명을 둘러싼 레닌의 내부투쟁 전개.

당시 청산주의자들은 현존하는 사회민주당을 공개적이고 합법적인 새로운 유형의 조직으로 대체할 것을 요구.

레닌 화해파 (볼셰비키와 멘셰비키 화해 시도)인 트로츠키 비판.

이 시기 레닌은 어리석을 정도로 편협함과 종파주의에 이끌리기도 했다. 결국 당을 그 자체로 하나의 목적으로 간주하려는 일종의 ‘애당주의’다. 이 시기는 레닌주의는 가장 무기력하고 어려웠던 시기의 후유증으로 얼룩졌다. 레닌주의가 보여준 다양한 종파주의적 특징은 시대의 영향력임에 틀림없다.

 

2. 토론할 주제

 

2-1. 1900년 초 러시아 혁명조직의 전통과 시대적 배경에 대해.

 

* 나로드니키/ 인민의 의지파/ 네차예프와 연관된 인터내셔널에서 바쿠닌 연계.

 

2-2. 레닌의 <무엇을 할 것인가?> 가 제시하는 근본적 견해는 무엇인가? 시대적 배경은?

 

2-3. 1905년 러시아 혁명 때 멘세비키/ 볼셰비키 정치 활동의 차이는 무엇인가?

레닌과 마르토프 논쟁

 

2-4. 1905년 러시아 혁명 당시 소비에트 출현과 레닌의 당 노선 변화는 무엇을 말하는가? 1905년 전후를 둘러싼 레닌의 정치 분석에서 채택된 혁명정치- 전략적 논리의 핵심 테제와 변화 과정은 무엇인가? 전위조직 당의 성격과 변화. (전위정당에서 대중정당으로?)

 

2-5.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조직 문제와 관련한 레닌의 중앙집중제/민주주의 주장과 로자룩셈부르크, 트로츠키의 비판의 핵심은?

 

2-6. 레닌이 <이스크라>(불꽃)을 통한 “공동의 당 기관지” 주장의 러시아 시대적 배경은 ?

 

3. 이후 심화 토론 주제 ( 이후 세미나 주제와 연관해서 )

 

3-1. 당과 계급의 관계, 당은 계급 내부의 조직인가? 계급 외부의 조직인가? 엘리트주의적 당은 어떻게 정의내릴 수 있는가? 그 특징은? 의식은 외부에서 주입될 수 있는가? 레닌에게 교육과 정치의 차이는 무엇인가?

레닌은 러시아 혁명 전통 조직과 독일 사회민주당(라쌀레)의 당 형태를 어떻게 사고하고 받아들였는가?

 

3-2. 자생성(자발성)과 의식성의 문제. 자생성의 전환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레닌과 로자룩셈부르크 둘 다 중앙집중주의를 채택한다. 자생성과 의식성을 둘러싼 레닌과 로자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자생성과 자발성은 같은 개념인가? 경제투쟁에서 나타나는 부르주아적 자생성과 사회주의적 자생성은 존재하는가? 노동계급의 직접행동과 경제투쟁과의 관계는?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와의 관계는?

 

3-3. 1905년 혁명 당시 소비에트의 출현과 볼셰비키의 역할은 어떠했는가? (이후 노동자 농민 병사 소비에트 세미나와 연결해서) 소비에트는 무당파 조직인가?

 

3-4. 프롤레타리아 운동과 그 지도부를 구성하는 문제에 있어서, 지도자와 지도받는 사람들이 항상 존재해야 한다는 게 목표인가? 아니면 이런 분리가 더 이상 필요 없는 조건을 창출하는 것이 목표인가?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

첫 모임은 7월29일 (금)

첫 모임은  7월29일 (금)

 

오후 1시30분입니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