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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연대>전평의 1946년 9월 총파업과 자주관리운동

전평의 1946년 9월총파업과 자주관리운동



1946년 전평의 9월총파업


1946년 9월 24일, 4만 철도노동자들의 투쟁이 전개되었다. 미군정 운수부의 25% 감원방침이 그 계기였다. 철도노조와 전평(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은 미군정의 탄압에 맞서 "쌀을 달라! 물가인상에 따라 임금을 인상하라! 실업자에게 일과 집과 쌀을 달라! 공장폐쇄·해고 절대반대! 민주주의운동 지도자에 대한 체포령 철회와 즉각석방! 언론·출판·결사·시위·파업의 자유를 보장하라! 해방일보 등 탄압받고 있는 신문을 즉시 복간시키고 직원들을 석방하라!" 등의 요구를 내걸고 총파업에 돌입했다. 경제적 요구뿐 아니라 정치적 요구까지 포함하는 총파업투쟁이었다. 전화국, 우체국 노동자들이 이 파업에 합세하고 더욱 확대되어 전국적으로 25만 이상이 참여했다.

한국노동운동 최초의 위력적인 총파업이었으며 다양한 가능성을 보여주었던 전평의 9월총파업은 결국 미군정과 경찰, 우익세력의 물리력에 의해 진압되었다. 이 패배로 타격을 입은 전평은 이후 다시 한번 조직화에 나섰으나, 미군정과 우익세력은 기세를 몰아 탄압의 고삐를 더욱 조였다. 전평은 급속히 쇠약해졌다.

오늘날 전평은 "먼 과거의 기록"으로 남아있을 뿐이다. 하지만 우리는 뛰어난 계급의식으로 새로운 세계를 향해 전진해나가던 전평노동자들의 위대한 업적과 의의를 계승해야 한다. 또한 그토록 강력했던 전평노동운동의 패배의 원인을 규명하고, 우리 운동의 자양분으로 삼는 것은 보다 더 중요할 것이다. 전평노동자들이 넘어서지 못했던 "벽"은 지금의 민주노조운동이 넘어서지 못하고 있는 "벽"이기도 하다. 우리는 아직 전평운동만큼의 역량을 가지고 있지 않지만, 전평노동운동의 전진과 패배를 검토하며 미래의 승리를 준비해야 한다. 그것이 "먼 과거"의 기록을 들여다보는 이유다.


전평 건설과 공장위원회


일제 패망 후 이 나라 산업의 80%가량을 장악하고 있던 일본자본가들이 대대적으로 철수하자 경제 또한 극심한 침체와 혼란을 맞게 된다. 친일자본가들은 공장폐쇄와 사보타지를 통해 공장가동을 중단시켰다. 많은 노동자들이 실업자가 되었다. 공장이 멈추면서 심각한 물자부족과 물가폭등으로 노동대중의 생활수준은 급격히 하락했다. 노동자들은 일본자본가들과 친일자본가들이 운영했던 공장들의 공백을 메꾸고, 마비된 산업을 재건하며, 심각한 물자부족문제를 해결해야만 하는 시급한 과제를 안게 되었다. 살아나가기 위해서는 그렇게 해야만 했다. 생존을 위한 투쟁 자체가 노동운동을 한층 고도한 수준으로 밀어올리고 있었다. 우리는 이 시기 노동운동의 역사 속에서 "자주관리운동"을 만나게 된다.

해방 후 전국 각지에서 산업별로 노동조합 혹은 공장위원회가 조직되었다. 1945년 11월 5일, 전국 단일노동조합인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 즉 전평이 건설된다. 노동자들은 공장위원회나 노동조합을 중심으로 "야근철폐, 8시간노동제 실시, 차별배급 철폐" 등 노동조건 개선을 요구하며 투쟁에 나섰다. 동시에 폐쇄된 공장, 경우에 따라서는 폐쇄되지 않은 공장에서도 "공장관리를 공장위원회에 맡길 것"을 요구하는 공장 자주관리운동을 벌였다. "자본가 없이" 노동자들이 스스로 공장을 가동하고 생산을 통제하기 시작한 것이다. 경성방직의 경우, 김연직이라는 한국인사장은 노동자들의 요구에 맞서 공장 문을 닫고 투쟁지도자 5인을 해고했지만, 노동자들은 공장위원회 지도 하에 조업을 계속했으며 오히려 생산액을 증가시키기도 했다.


공장 자주관리운동 : 노동자에 의한 생산의 통제


전평은 전체 노동자의 단결을 위해 분투했다. 생산의 조직화는 기존에 조직되어 있는 조합원들만으로는 불가능하다. 공장을 움직이기 위해서는 사무직·생산직을 막론하고, 숙련공·미숙련공·관리직을 막론하고, 무엇보다 조합원·비조합원의 차이를 넘어 현장의 모든 노동자들이 단결 협력해야만 한다. 전평의 자주관리운동은 생산현장의 모든 노동자를 포괄해야만 한다는 과제를 이해하고 있었다. 가령 전평은 공장 내 노동자를 분열시키려는 시도에 정면으로 맞서 "직종간 물자 차별배급 철폐"를 주장하며 노동자의 단결을 외쳤다.

더 나아가 전평은 "노동시간 단축, 인력 확충, 실업 방지, 실업노동자에게 일자리 보장"을 요구했다. 전평노동자들은 실업자 역시 노동자계급의 일원으로서 자신의 동료임을 자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전평은 "실업자 즉 산업예비군이 있다는 것은 끊임없이 현업노동자의 노동조건을 열악하게 만든다. 그러므로 실업자운동은 실업자뿐만 아니라 현업노동자가 선두에 서야 한다"고 선언하며 적극적으로 실업노동자들을 조직했다. 전체 노동자의 일부로서, 그리고 먼저 조직된 노동자로서 노동자계급 공동의 이익을 위해 선두에서 투쟁할 것을 꺼리지 않는 헌신적인 태도를 모범적으로 보여준 것이다. 전성기 전평의 55만 조합원 중 절반 이상이 실업노동자였다는 사실은 전평이 현업노동자인가 실업노동자인가를 떠나 모든 노동자들을 굳게 단결시키기 위해 분투했음을 잘 보여준다. 현장에서 함께 일하는 비정규직 노동자들과의 단결조차 두려워하는 현시기 정규직 노동조합운동(물론 전부 그렇지는 않다)과 크게 대비되는 대목이다. 이처럼 전평노동자들의 선진적이고 헌신적인 활동으로 전평은 노동자 전체를 단일하게 결속했을 뿐만 아니라, 생산 자체를 자주적으로 통제하는 기관으로 성장해나갈 수 있었다.

공장 자주관리운동은 노동대중의 생존권을 확보하기 위한 자발적 행동으로부터 출발했다. 그러나 자본가 없이 노동자 스스로 공장을 가동하고, 물자를 생산하기 시작하자 문제는 달라졌다. 공장위원회와 노동조합으로 조직된 노동자들은 "누가 공장의 주인인가?" 하는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었다. 자주관리운동을 전개하던 노동자들은 자신의 실천 속에서 그 답을 찾아냈다. 지금까지 자본가들 밑에서 땀흘려 일해왔던 이 공장의 진정한 주인은 자본가가 아니라 바로 노동자라는 것, 노동자이어야 한다는 것을 확인하게 된 것이다!

노동자들의 의식이 생산 전반의 통제와 계획이라는 단계에 도달하면 그것은 곧 국가의 문제를 제기하게 된다. 이탈리아 공장평의회운동이 그랬던 것처럼, 전평의 자주관리운동 역시 국가의 문제에 직면했다. 사회가 필요로 하는 재화를 체계적으로 생산, 관리하는 것이 국가의 가장 중요한 역할이기 때문이다. 개별공장에서의 생산통제를 전체 산업으로 확장시킨다면 그 통제기관은 낡은 지배자들의 국가를 대체하는 새로운 권력기관으로 등장할 수 있다. 전평의 자주관리운동은 바로 그와 같은 기관의 맹아였다. 해방 후 정치적 공백기에 펼쳐진 노동자계급의 역동적 운동이 새로운 사회의 씨앗이 되는 새로운 형식의 기관을 창조해갔던 것이다. 전평의 자주관리운동은 "새로운 역사의 창조자"로서 노동자계급의 잠재력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조금씩 자신의 힘을 축적하며 성장해가던 전평의 자주관리운동은 커다란 "벽"에 부딪히게 된다. 그 "벽"을 넘는다면 전평의 자주관리운동은 승리할 것이고 노동자의 피땀을 한줌 자본가들에게 빼앗기지 않는 "새로운 사회"의 건설은 가능할 것이었다. 반면 그 "벽"을 뛰어넘지 못한다면 자주관리운동은 정체하게 되고, 미군정을 중심으로 전열을 정비한 자본가들의 공격에 괴멸될 것이었다. 유감스럽게도 그 "벽"은 전평노동자들에게 치명적 한계로 다가왔다

 

 

전평의 정치적 한계


 

급격히 성장해가던 전평의 자주관리운동은 두 가지 난관을 맞게 된다.

우선 전평이 이른바 "양심적 민족자본"에 대해서는 파업을 자제하고 협력할 것을 하달한 것이다. 당시 전평은 "자주독립을 위한 견실한 통일전선 결성을 통한 민중권력 수립"이라는 목표를 위해 노동자, 농민, 도시 소자본가, 양심적 민족자본 등 모든 계급이 연합할 것을 제기해왔다. 민중권력의 수립을 위해서 "민족자본"과의 마찰은 피하려 했다. 그러나 노동자들은 이를 수긍할 수 없었다. 자주관리운동은 단순한 생존권 보장의 의미뿐 아니라 기존 자본가들을 몰아내어 착취를 없애기 위한 파업투쟁의 형식을 띠었다. 그리고 전평이 이야기한 "양심적이고 건전한 자본가"는 사실 존재하지도 않았다. 전평이 제시한 협력방침은 노동자들의 고유한 무기인 파업의 권리를 박탈하여 무장해제하는 것과 같았다. 그것은 공장 자주관리운동의 방향타를 망가뜨렸다. 현장의 노동자들은 전평의 이와 같은 조치에 반발하거나 혼란에 휩싸였다.

두번째로, 전평은 "자주독립을 원조하는 미·소 양군에 협력"이라는 원칙하에 미군정에 대한 협조노선을 취하였다. 전평은 소련과 함께 미·영·중을 "진보적 민주주의 국가"로 규정하고 조선 해방의 은인으로 격상시켜 평화적 민중권력 수립을 기대한 조선공산당의 어리석은 주장을 그대로 따르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협조노선이 성과를 가질 수는 없었다. 전평이 "협조"라는 이름으로 무장해제시킨 노동자들을 미군정이 짓밟는 것은 식은 죽 먹기였다. 노동자들의 대중투쟁과 공장 자주관리운동은 탄압받기 시작한다.

전평은 그릇된 지도방침으로 전평노동자들의 능동적인 공장 자주관리운동에 찬물을 끼얹고 말았다. 공장 자주관리운동은 급격히 위축되었고, 노동자들은 미군정과 자본가들에게 주도권을 빼앗기게 되었다.


 

코민테른과 조선공산당의 그릇된 입장


 

해방 후 공장위원회, 노동조합의 건설과 공장 자주관리운동의 확산은 노동대중의 자생적 힘만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노동대중의 폭발적 물줄기를 자주관리운동으로 이끌었던 것은 일제시대부터 현장과 밀접하게 결합해 왔던 노동해방 세력이었다. 공장에서 헌신적으로 활동하여 노동대중의 광범한 지지를 받고 있었던 노동해방 세력이 없었다면 자주관리운동은 빠르고 강한 힘으로 등장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일제시대부터 활동하며 해방 후 노동운동에 커다란 역할을 담당했던 노동해방 세력 즉 조선공산당은 성장하는 노동운동을 억제하고 결국 패배하게 만든 근본원인이 되었다. 전평의 미군정에 대한 협조노선, 자본가 및 소자본가들과의 통일전선전술은 바로 조선공산당의 그릇된 입장을 그대로 따른 것이었다.

노동운동의 발전방향과 새로운 사회에 대한 전망을 미리 획득하여 노동운동을 선두에서 이끌어 갈 선진노동자들 없이 노동운동의 발전은 있을 수 없다. 반면, 현실과 어긋난 왜곡된 발전방향을 제시하는 세력이 노동운동을 주도한다면 그 운동은 패배에서 벗어나기 힘들다. 당시 가장 강력한 제국주의 국가의 하나로 자국의 이해를 위해 전쟁을 벌여나가고 있던 미국을 "진보적인 국가"로 인식하고 미소공동위원회에서의 교섭을 통해 평화적으로 국가권력을 수립할 수 있을 것이라 판단했던 것, 그리고 일제자본이든 민족자본이든 노동자를 착취함에는 변함이 없음에도 "양심적 민족자본"으로서 노동자계급과 협력할 수 있다고 본 엉터리 정치노선은 전평노동운동을 패배하게 만든 결정적 요인이다.

그러나 조선공산당에 모든 책임을 떠넘길 수는 없다. 조선공산당의 그릇된 입장은 국제노동운동의 전반적 미성숙에 기인하기 때문이다. 1920년대 말을 통과하며 러시아 노동자국가가 관료들의 손아귀에 떨어지자, 러시아 즉 소련이 주도하고 있던 코민테른 (당시 노동자들의 국제연대기구) 역시 관료적 외교기구로, 국제노동운동 압살기구로 타락하기 시작했다. 세계노동자들의 공동이익을 도모해야 할 코민테른은 또다른 제국주의 국가로 변모한 소련의 일국적 이익만을 추구하게 된다. 코민테른은 노동자의 단결과 해방이라는 포장지를 덮어쓰고 세계노동운동을 주도한다. 때로는 극좌적으로 때로는 극우적으로 비틀거리며 코민테른은 세계노동운동을 위험에 빠뜨렸다. 1935년 7차대회에서는 이른바 "반파시즘 인민전선" 방침이 채택되는데, 이는 소련의 제국주의적 이익을 위해 미국, 영국 등과 동맹관계를 맺고, 조선공산당에 미군정과 협조할 것을 제기했던 것이다. 코민테른의 영향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던 조선공산당은 이 방침을 따르게 되었다. 당시 관료기구로 변질한 코민테른의 한계를 인식하고 극복하기에는 국제노동운동이 성장해 있지 못했고, 조선공산당 역시 이 한계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

이처럼 그릇된 정치의식이 바로 전평노동운동을 패배로 이끈 핵심요인이다. 전평과 조선공산당의 헌신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올바른 노동해방 정치를 획득하지 못했다. 이것이 바로 당시 노동운동이 뛰어넘지 못한 커다란 "벽"이었다. 그리고 이 "벽"은 아직도 우리 앞에 놓여 있다.


 

다시, 1946년 9월 총파업


 

1946년 중반이 되자 미군정은 전평노동운동에 대해 대대적인 탄압에 돌입한다. 그리고 미소 공동위원회가 결렬되자 전평과 조선공산당은 미군정에 대한 협조노선을 폐기하고 전면적인 투쟁에 나선다. 9월 총파업은 이와 같은 배경에서 진행된 것이다.

미군정의 탄압에 저항 한번 해보지 못하고 무기력한 처지에 놓여있던 노동자들은 재차 힘을 모으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전평과 조선공산당의 정치적 오류로 노동자들의 힘은 약화되어 있었다. 반면 미군정은 우익세력의 힘을 결집하여 더욱 강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전평노동자들은 패배를 예감하면서도 정면으로 미군정에 맞선다. 패배를 직감하면서도 투쟁에 나섰다는 것이 어리석어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실 9월 총파업은 여러 한계에도 불구하고 전평노동자들의 정치의식이 얼마나 뛰어났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창이다.


 

민주노조운동에 남겨둔 숙제


 

노동자는 자본가와의 투쟁을 통해 성장해간다. 노동운동은 패배를 통해 더 많은 교훈을 얻고, 부족한 부분을 채워나간다. 그리고 다시 자본가들에 맞선 투쟁, 패배, 보완을 통해 결국에는 자본가들보다 더욱 큰 존재로 자신의 모습을 드러낸다. 그렇기에 미래의 승리를 위해 현재의 희생을 감수하는 가장 선진적이고 헌신적인 노동자 없이 노동운동의 승리는 보장받을 수 없다. 전평노동자들은 미래의 승리를 위해 당장의 희생을 감수했다. 미군정의 힘에 눌려 자신의 힘을 최대한 동원하여 싸워보지 못하고, 노동운동의 생명인 단결, 연대, 투쟁의 무기를 빼앗겨 무기력한 존재로 떨어지게 된다면 결국 노동해방의 전망으로부터 더욱더 멀리 떨어지게 될 것을 잘 알고 있었던 전평의 노동자들은 9월 총파업이라는 힘을 동원한 것이다.

패배를 예측하면서도 미래의 승리를 위해 당장의 고통을 감수한 전평의 노동자들이 있었기에 우리는 노동자들이 어떻게 싸워야 하는지 배울 수 있다. 당장의 이익을 위해 미래의 승리를 포기하는 경향이 주류를 장악해가는 현재, 전평노동자들은 자신들의 희생을 잊지 말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또한 전평의 노동운동은 자신의 한계를 통해 민주노조운동의 한계를 보여주고 있다. 당시 전평과 조선공산당이 넘지 못했던 정치적 한계는 민주노조운동에 그대로 남아있다. 우리는 전평과 같이 강한 규율과 헌신성을 가진 선진노동자들을 충분히 배출하고 있지 못할 뿐 아니라, 해외자본과 국내자본을 다르게 바라보는 민족주의 관점, 개혁의 옷으로 갈아입은 노무현 정권에 대한 환상 등과 같은 정치적 한계 역시 극복하지 못하고 있다.

민주노조운동이 가야 할 길은 멀다. 하지만 과거의 동지들이 개척해 놓은 길을 따라 끈질기게 전진해간다면 시행착오를 최대한 줄이며 최대한 빠르게 전진할 수 있을 것이다. 전평노동자들이 넘지 못한 장벽! 이제 우리가 그 장벽을 무너뜨리고 전진할 차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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