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게시물에서 찾기분류 전체보기

2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04/08/15
    (IBT)중국의 당면상황
    투사
  2. 2004/08/11
    쿠바 사회주의는 러시아 자본주의보다 우월하다
    투사

(IBT)중국의 당면상황

(국제 좌파 그룹 IBT의 중국 관련 글입니다. 전북 현장연대 사이트에서 퍼왔습니다. 중국의 당면 상황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는 자료입니다.)


경제특구와 국영기업

마오저둥의 사망 후 도입된 핵심 "개혁들" 가운데 하나는 집단농장을 가내기업으로 분해시킨 것이었다. 현재 농촌에서는 수백만 가구가 국가로부터 좁은 농토를 빌린다. 몇몇 농민들은 대규모 사업을 시작할 정도로 충분한 자본을 축적했지만 대다수는 절박한 빈곤으로 추락했다. 그러나 가장 성공한 중국의 농민도 서방의 초국적 거대 농업기업과는 경쟁이 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시카고 현물시장에서 옥수수는 2000년 9월에 톤당 100달러였으나 중국에서는 175달러였다([미니애폴리스 스타 트리뷴], 2000년 10월 1일). 현재 중국 농촌의 노동력은 거의 20%가 실업자이다. 1억 명 이상의 전직 농민들이 도시 주위의 빈민굴에서 노점상, 매춘, 경미한 범죄 등에 종사하면서 목숨을 부지하고 있다. 중국 농업부의 예상에 따르면 세계무역기구의 요구에 따라 수입 규제를 완화할 경우 최소한 2천만 개의 농업 관련 일자리가 사라질 것이다.

1980년 정부는 홍콩과 인접한 광둥성에 외국인 투자를 유치하기 위해 4곳의 경제특구를 설치했다. 현재 경제특구는 약 1만2천 곳으로 늘었는데 대부분은 남동 해안에 집중되어 있다. 이것들은 근본적으로 기형적 노동자국가 내부에 존재하는 자본주의 경제 식민지인데 중국의 전체 제조업 생산량의 8분의 1을 차지하고 수출의 절반을 담당한다. 초기 투자를 한 홍콩과 대만 출신의 중국인 자본가들은 경제특구가 대단한 이윤을 창출한다는 것을 알게되었다. 중국은 세계에서 임금이 가장 싼 나라에 속해서 멕시코 임금의 절반 수준이고 미국 임금의 20분의 1 수준 밖에 되지 않는다. 임금이 이렇게 낮은 이유는 중국공산당이 노동조합 설립을 무자비하게 탄압하기 때문이다.

공산당이 직접 관리하는 북동 지역의 거대한 국영기업들은 1949년 혁명이 수립한 집단적 경제의 핵심부이다. 1980년대에는 국영기업이 중국의 비(非)농업생산을 거의 전부 차지했지만 지금은 그 비중이 30%로 하락했다. 그러나 국영기업들은 중공업, 첨단 군수산업, 에너지산업, 통신산업 등 경제의 핵심부문이며 전체 고정자산의 약 70%를 차지한다. 더욱이 국가의 재정원인 세금을 비중에 비해 엄청나게 많이 낸다. 국가는 국영기업을 통해 노동자들에게 일자리, 식량, 의료, 주택, 연금 등 "철 밥그릇"을 보장하기 때문에 국영기업은 관료집단의 권력 유지에 필요한 핵심 도구이다. 시장의 압력이나 생산자의 민주적 통제가 없기 때문에 국영기업은 절대적 수치와 외국기업들과의 상대적 수치로 비교했을 때 당연히 생산성이 꾸준히 하락해왔다.

부르주아 금융언론은 국영기업을 실패한 체제의 유해로 간주하면서 가능하면 빨리 해체하고 싶어한다. 그러나 제국주의자들이 없애려는 "유물"인 공산당 관료집단은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다. 1990년대 말부터 공산당은 국영기업 "합리화"를 시도해왔다. 생산성이 최악인 기업은 파산시키고 다른 기업들은 자본주의 기업을 모델로 합병을 추진하고 주식을 발행한다. 또한 생존능력이 부족한 부문들은 팔아치운다. 이것이 공산당의 계획이다.

2003년 5월 후진타오 주석은 이렇게 선언했다: 그동안 정부 부처나 지방자치단체가 운영해온 국영기업들은 이제 중앙의 국가자산감독경영위원회(SASAC)가 관리할 것이다. 이 조치의 목표는 일본이나 남한의 재벌을 모델로 하여 전략산업에서 국제적으로 경쟁력 있는 열 몇 개의 국영기업을 설립하는 것이다. 이 조치는 집단적 경제에 대해 관료집단이 통제력을 행사하는 근본 모순을 해결하지는 못할 것이다. 다만 단기적으로 국영기업의 실적을 개선시킬 수는 있을 것이다.

국영기업의 "합리화" 결과 노동자들과 은퇴자들의 기본 서비스는 감축되었고 노동력은 급격히 축소되었다. 1998년부터 지금까지 국영기업들은 2천5백만에서 5천만 개의 일자리를 없앴다. 노동계급의 생활수준이 이렇게 전방위로 공격당하자 수백만 노동자들은 크게 분노하고 있다. 실업률이 40%에 도달한 북동 공업지대에서는 "경찰과 도둑" 대신 "사장 죽이기"가 어린이들의 놀이거리가 되었다.

서부 지역의 거대 개발과 티베트, 신장의 민족문제

공산당은 최근 몇 년간 간쑤, 구이저우, 닝샤후여, 칭하이, 산시, 쓰촨, 윈난, 신장 등 서부지역 성들에 살고 있는 민족들을 위해 "서부 거대개발" 사업을 시작했다. 이 지역은 중국 전체 면적의 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으며 3억 인구를 포괄하고 있다. 그리고 전략적으로 핵심적인 국경지역, 핵심 군사기지, 나라의 가장 중요한 석유 및 광물자원을 보유하고 있다. 지리적 고립, 정치 불안정, 원시적 사회기반시설, 낮은 교육 수준을 가지고 있으며 널리 흩어진 인구 등의 특징 때문에 이 지역은 자본주의 방식의 투자가 적합하지 않다.

거대 개발 사업은 도로, 철도, 공항, 신장에서 샹하이까지 2천5백 마일에 걸친 시가 140억 달러의 천연가스 파이프라인 등의 건설을 포함하는 것으로 국영부문의 대대적 팽창을 의미한다. 중국의 가장 넓은 성인 신장은 가장 빈곤한 성의 하나이며 터키어를 말하는 8백만 위구르족의 고향이다. 이곳에는 회교 민족주의의 불만이 들끓고 있다. 1997년 초 신장 서부의 도시 이닝에서 발생한 반체제 시위에서 위구르족 500명이 체포되었다. 국제사면위원회에 따르면 이 가운데 30명이 분리주의 및 종교와 관련된 활동으로 2001년 4월 사형선고를 받았다.

정부는 석유와 면화를 수출하는 신장에 한족의 이주를 적극 권장하고 있다. 한족은 이미 석유산업을 운영하고 있으며 이들이 새로 운영하는 대규모 면화농장은 위구르족이 운영하는 소규모 개인 면화농장을 생산량의 면에서 앞지르고 있다. 위구르족이 아직은 한족보다 수가 많지만 한족은 미래에 국가 주도 개발의 최대 수혜자가 될 것이다.

위구르족에 대한 정부의 억압은 서방 언론의 주목을 거의 받지 못하고 있다. 아프가니스탄에서 미군이 생포한 탈레반 포로들 가운데 300명이 위구르족이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미국의 "테러대전"에 중국이 파트너로 비열하게 합류하려고 하지만 미국은 신장의 회교 근본주의에 대한 중국의 우려를 인정하거나 위구르족 포로들을 중국 당국에 넘기는 것을 한사코 거부하고 있다. 미국의 정책 결정자들은 신장의 회교 광신도들을 장차 이용할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이다. 이것은 미 중앙정보국이 20년 전에 오사마 빈 라덴의 아프간 무자헤딘에게 무기와 훈련을 제공한 것과 같은 논리이다.

위구르족과 달리 티베트족의 곤경은 친제국주의 "민주주의자들"의 마음에 가까이 다가와 있다. 그런데 이들은 1949년에 티베트가 대단히 후진적이고 승려들이 우글거리는 봉건사회였으며 인구의 평균수명이 30세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무시한다. 1950년대 초 권력을 처음 장악한 후 중국공산당은 티베트의 종교국가주의자 및 귀족 기생충들과 "공동전선"을 체결하여 응석받이 10대 소년 달라이 라마와 그의 하수인들에게 아양을 떨려고 했다. 그러나 이 협약은 몇 년 내에 깨지고 1959년에 대규모 반란이 인민해방군에 의해 진압되고 티베트족 수만 명이 희생되었다. 달라이 라마는 히말라야산맥을 넘어 인도로 도망쳤다. 중국 정부는 티베트를 직접 통제하고 귀족과 수도원의 토지들을 농민들에게 배분하여 전통 사회체제를 뿌리째 뽑아버렸다.

고유한 언어, 문화, 영토를 가지고 있는 티베트족이 한족의 지배에 분노를 느끼는 것은 당연하다. 위구르족과 마찬가지로 티베트족도 민족으로 존재할 권리가 있다. 그러나 사회주의자들은 중국 내 피억압 민족들의 민족적 권리를 기형적 노동자국가의 방어에 종속시켜야한다. "자유 티베트"를 위한 국제 캠페인은 중국에 대한 제국주의자들의 공격의 한 방식이다. 이것은 새로운 현상은 아니다. 1959년에 미 중앙정보국이 티베트 반란에 개입한 것은 공공기록에 나와있다. 몇 년 전 연합뉴스(AP)는 이렇게 보도했다: "달라이 라마 망명정부는 미 중앙정보국으로부터 1960년대에 매년 170만 달러를 받았다고 오늘 인정했다...."([뉴욕 타임즈], 1998년 10월 2일). 18만 달러의 연간 지원금이 "달라이 라마를 위해 책정되었다."

반동 이데올로기와 민족주의 감정은 계급으로 분열된 사회의 물질적 불평등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이 진실을 맑스주의자들은 인식하고 있다. 가능한 한 우리는 탄압보다는 교육과 경제적 동기부여를 통하여 사회 후진성의 영향력을 잠식하려고 노력할 것이다. 레닌주의 정부는 소수민족지역의 개발을 위한 풍부한 지원금을 진정한 자치와 결합시켜 한족 국수주의를 퇴치하려고 노력할 것이다. 지역 정치기관들을 토착민족이 스스로 장악할 권리, 이들이 원하는 언어로 교육과 정부의 공공 서비스를 받을 권리, 정치적 표현과 여행의 자유를 누릴 권리 등을 부여하는 것이 이 노력에 포함되어 있다. 티베트족과 위구르족이 자치의 권리를 누려야 한다는 점에 중국의 혁명정부는 동의할 것이다. 동시에 티베트의 전통 지배 집단 그리고 신장의 회교 지도자들이 대중의 지지를 받을 경우 이들과 혁명정부는 공존할 의향이 있다는 것을 보여줄 것이다.

제국주의의 올가미

지난 몇 년간 중국의 목에 걸린 제국주의의 올가미는 상당히 촘촘해졌다. 제한 없이 제국주의적 약탈을 할 수 있는 곳으로 중국을 되돌리는 것이 미국의 가장 우선하는 핵심 전략이다. 미국이 최근에 벌이는 신식민지 전쟁들의 목적 가운데 하나는 기형적 노동자국가인 중국에 대한 우위를 강화시키는 것이다. 중국은 갈수록 수입 석유에 크게 의존하고 있기 때문에 이라크에 생존 능력이 있는 미국의 괴뢰정부가 수립될 경우 중국은 진짜 큰 위협을 받게 될 것이다.

아프가니스탄 점령 중에 키르기즈스탄과 우즈베키스탄에 건설된 미군 기지들은 한때 소련의 영토였던 중앙아시아에서 중국의 영향력을 차단시켰다. 아프가니스탄, 남한, 일본에 군대를 주둔시키고 있는 미국은 현재 월남, 태국과 해군, 공군 기지 사용권 협상을 진행 중이다. 더욱이 대만에 계속 무기를 공급하고 있다. 현재 미국의 대외정책은 중국에 경제적 압력을 가하고 해외에서 중국의 영향력을 저지시키는 데에 집중되어 있다. 동시에 미국의 미사일은 중국의 핵심 요충들을 영구히 겨냥하고 있다. 따라서 미국이 어떤 핑계를 대든 중국에 대해 군사도발을 일으킬 위험성은 상당히 있다.

파륜궁은 중국공산당에게 위협적인 존재인가?

중국공산당은 언제나 정치에 대한 독점권을 조심스럽게 지켜왔다. [중국의 꿈]에서 조우 스타드웰은 이렇게 말했다: "중국인들은 정부의 허가 없이는 낚시클럽, 알코올 중독자 자활 모임, 지역 신문 등을 조직할 수 없다." 지역 밖의 다른 사람들과 연결이 되어 있는 어떤 조직도 위협으로 간주된다. 중국의 뉴스 매체들은 주요 산업재해, 부패 스캔들, 파업, 시위 등을 보도하지 않는 것이 관행이다. 정부에 대한 전국적 규모의 분노를 촉발시키지 않기 위해서이다.

그러나 공산당의 통제는 언제나 불완전했으며 인터넷의 등장은 정권에게 새로운 골칫거리이다. 파륜궁의 급속한 성장에 인터넷이 기여했다고 널리 인정되고 있다. 파륜궁은 일종의 중국식 뉴에이지 명상/신체단련 운동으로 일반인들에게 제공하던 기공/태극권 강습에서 개발되어 나왔다. 정부는 오랫동안 기공/태극권을 대부분 노인들의 체력단련과 사회활동의 일종으로 간주하고 체제에 해롭지 않다고 판단했다. 따라서 이 운동의 많은 조류들이 가지고 있는 반(反)유물론적 철학의 토대를 하찮은 것으로 무시해버렸다. 정부는 심지어 기공연구협회를 설립하였다. 이 단체에서 리홍지의 주도로 파륜궁이 1990년대 초에 등장했다. 1994년 리는 이 협회에서 탈퇴하여 뉴욕으로 활동무대를 옮겼다.

파륜궁은 "진실, 자비, 금욕"을 설교하면서도 혼혈 인종은 내세에서 자리를 제대로 잡기 어렵다고 경고했다. 또한 컴퓨터와 비행기 등 현대의 기계를 인간으로 위장한 외계인이 발명한 것이라고 가르친다. 일련의 5가지 운동을 연습하면 파륜궁 회원들은 자기 몸 속에 황금빛의 회전하는 "파륜"을 갖게 될 것이며, 이 파륜을 통해 이들은 종교적 해탈과 신체 건강을 동시에 성취하고 여러 우주들로부터 에너지를 흡수할 수 있다는 것이다. 더욱더 많은 사람들이 연금이나 값싼 의료서비스의 혜택을 받지 못할 지도 모르는 사회에서 파륜궁의 미신은 당연히 호소력을 가지고 있다. "새로운" 중국에서 성공하지 못하고 있는 노인, 실업자 그리고 기타 서민들에게 파륜궁이 인기인 것은 전혀 놀랍지 않다.

1999년 지방 당국이 파륜궁 집회의 소란스러움에 대해 불평하기 시작한 후 중국과학원의 이론물리학자 헤조우시우는 파륜궁의 가르침에 대한 비판서를 썼으며 이것은 널리 읽혀졌다. 이에 대한 응답으로 파륜궁 회원 1만 명은 1999년 4월 25일 중국의 정치 엘리트들이 사는 베이징의 종란하이 지구 외곽에서 명상 집회를 열었다. 공안 당국은 이 시위를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에 크게 놀랐다. 공산당은 직접적 요구에 초점이 맞추어진 지방 차원의 항의시위는 그냥 넘길 수 있다고 느낀다. 그러나 자신이 통제하지 못하는 조직 활동은 절대 금지하고 있다. 이 시위 이후 파륜궁 집회는 금지되었으며 다수의 파륜궁 지도자들이 감옥에 갇혔다. 그러나 이 운동은 지금까지 살아남아 있다. 최소한 5개의 성에서 파륜궁 지지자들은 한때 정부의 텔레비전 채널을 해킹하여 "파륜궁은 좋다!"는 단순한 권유문에서부터 시작하여 이 컬트를 선전하는 한시간 이상의 프로그램을 방영하기까지 했다.

중국 스탈린주의자들의 정치적 파산 상태는 너무 심각하여 파륜궁 같은 원시적 사상에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하고 있다. 공산당 지도자들은 사상에 사상으로 대처할 능력이 없기 때문에 탄압을 동원할 수밖에 없다. 파륜궁은 의심의 여지없이 제국주의자들과 이들의 용병인 반혁명 분자들의 지지를 받고 있다. 그러나 파륜궁은 폴란드의 연대 노조 운동과는 다르다. 연대 노조 지도자들은 폴란드의 기형적 노동자국가 내부에서 의식적으로 친제국주의 세력의 앞잡이가 되었다. 그러나 파륜궁에게는 이렇다할 정치적 사회적 강령이 없다. 맑스주의자들은 이 특이한 미신 운동에 대한 공산당의 탄압에 책임을 지지 않는다.

파륜궁은 무너지고 있는 노동자국가의 불안정한 삶과 물질적 궁핍을 피하려는 절박한 중국인들 다수가 애용하고 있는 확실히 해로운 아편이다. 그러나 공산당 내부를 포함하여 사회의 구석구석에는 파륜궁보다 훨씬 위험한 친자본주의 세력이 이미 뿌리내리고 있다. 문제는 한때 파륜궁이 인민해방군 내부 심지어는 공산당 상층부에까지 널리 전파된 적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 현상은 한때 "맑스주의-레닌주의-마오저둥사상"에 고무를 받았던 공산당 간부들이 있었지만 지금 공산당은 자기의 특권과 특전을 유지하는 일에만 온통 관심을 쏟고 있다는 증거이다.

중국 노동계급의 투쟁사

중화인민공화국의 역사 내내 노동계급은 끊임없이 자신의 조직을 건설해왔다. 1956년-1957년의 짧았던 "백화제방"의 자유화 시기에 중국의 공식 노동조합인 전국노동조합총연맹(ACFTU)의 외부에서 현장 중심의 "불만시정회"가 다수 조직되어 파업의 물결을 일으켰다. 이 운동의 절정은 광둥성의 도시 광저우에서 부두 노동자 절반이 임금삭감에 맞서 투쟁했을 때였다. 그러나 결국 공산당은 파업투쟁을 진압하고 다수의 노동계급 지도자들을 강제노동수용소에 보냈다. "문화혁명"으로 알려진 1960년대 중반 관료집단 내부의 권력투쟁은 잠시나마 노동계급의 독자적 투쟁을 위한 공간을 열어주었다. 수십만 노동자들을 포괄한 대중 조직들이 수립된 샹하이를 중심으로 1966년-1967년에 노동계급의 전투성은 상당히 상승했다. 노동계급 조직들은 공산당의 시 정부를 무너뜨리고 짧으나마 샹하이 인민 꼬뮌을 수립했다.

1967년 2월 초 백만 노동자들이 참석한 집회에서 꼬뮌은 수립되었다. 샹하이 꼬뮌은 단명한 삶 내내 공산당에 식상한 일 분파가 주도했다. 이들은 1871년 빠리 꼬뮌을 다룬 맑스의 [프랑스 내전]에 기초하여 통치할 의지를 천명했다. 그러나 이들은 대중에 의해 지도부를 선출하고 소환해야 한다는 이 고전적 저서의 언명은 무시했다. 결국 수립된 지 3주일이 지나서 꼬뮌은 위대한 지도자 마오저둥의 "요청"에 의해 해체되었다. 결국 "꼬뮌"은 중국공산당 일 분파의 도구에 불과했다. 그리고 이 조직에 대한 샹하이 노동자들의 열정은 번지수를 잘못 찾은 셈이었다. 이 사건은 관료집단의 불안정성과 노동계급의 휘발성을 동시에 증명했다.

1976년 4월 마오저둥주의 극좌파였던 "4인방"의 정책에 대항하여 현장 중심의 투쟁이 또 다시 물결쳤다. 이 혼란에 책임을 지고 등샤오핑은 두 번째로 잠시 권력에서 쫓겨났다가 다시 복귀했다. 등샤오핑의 "자본주의자"들은 권력을 강화시키는 과정에서 정치탄압을 잠시 완화시켰다. 이 틈을 타서 노동자들은 독자적인 노동조합 수립을 요구하고 저임금, 자의적인 경영진 그리고 기타 새로운 시장 "개혁"의 해악 등을 비난했다. 타이유안 제련소에 중심을 둔 어느 신문은 이렇게 제안했다: 진정으로 자기 이해를 방어하려면 노동자들이 직접 대표들을 선출하고 소환하는 독자적 조직을 건설해야한다. 이 주장은 즉시 침묵을 강요당했으나 이 신문이 주창한 사상은 지금도 살아남아 있다.

1989년 4월 초 학생 시위자들이 천안문광장을 점령하고 민주개혁을 요구하자 베이징 공장 노동자 대표들이 즉시 이 투쟁에 합류했다. 이 달 말 베이징노동자자치연맹(WAF)이 철도, 제철, 항공 노동자들에 의해 수립되었다. 다른 주요 도시들에서도 이와 유사한 조직들이 건설되었다. 초기에 이들은 전국노동조합총연맹과는 별도의 독자적 노동조합을 합법화시키라는 요구에 역량을 집중했다. 그러나 곧 임금, 생활수준, 관료적 특권, 임금격차, 직장 민주주의 등의 사안들을 제기하기 시작했다. 다른 도시의 노동자 조직들은 조직적 연대를 시작하여 다수 조직들이 베이징노동자자치연맹에 대표들을 보냈고 자치연맹은 운동의 중심 역할을 하기 시작했다.

1989년 5월 18일에 대부분 노동자들로 구성된 1백만 인파가 베이징에서 시위에 나섰다. 이로부터 일주일 후 전국"노동자자치연맹" 준비위원회가 수립되었다. 공산당은 이 움직임을 심각한 위협으로 간주했다. 대중의 총파업 요구에 긍정적이던 전국노동조합총연맹은 갑자기 6월 2일 노동자자치연맹을 불법화시킬 것을 정부에 요구했다. 그리고 이틀 후 정부에 충성하는 군부대들이 시위대에 무자비한 공격을 가해 수백 명을 살해했다. 노동자 자치 운동에 참여한 혐의로 기소된 수천 명의 노동자들은 감옥에 갇히거나 처형되었다.

노동자자치연맹은 결국 진압되었지만 이 조직은 노동계급의 독자적 정치행동의 잠재력을 강력하게 증명시켰다. 1990년과 1994년 사이에도 노동자 권리 향상을 위한 조직들이 시도되었으나 탄압 당했고 활동가들은 감옥에 갇혔다. 공산당의 노동자 통제기구인 전국노동조합총연맹만이 합법성을 인정받고 있다. 또한 이 조직에게는 "합리적 요구"를 제출하고 "시장 개혁을 지지하며 가능한 한 생산의 정상적 질서를 회복시키는" 선에서만 노동 분쟁이 허락되고 있다.

노동자 투쟁의 상승

최근 몇 년간의 대대적 실업으로 촉발된 노동자 투쟁의 상승은 1949년 혁명이래 최고의 전투성을 보이고 있다. 공안부가 작성했다고 인정되는 보고서에 따르면 1998년과 2002년 사이에 일상적 항의투쟁의 평균수치는 2배 이상으로 증가했다. 이 투쟁들의 대부분은 개별 직장 차원의 일자리 회복, 의료서비스, 실업수당 등 직접적 요구들에 집중되고 있지만 시위자들은 빈번하게 경영인들과 지역 당국의 부패를 비난하기도 한다.

노동자 투쟁의 규모와 범위가 상승하자 공산당 당국은 바짝 긴장하고 있다. 2001년 공산당 중앙위원회의 어느 연구 결과는 이렇게 보고했다: "미숙한 일 처리와 다른 복합적인 이유들 때문에 최근 몇 년간 일부지역에서 집단행동의 빈도가 증가해왔고 투쟁의 규모도 확대되어 천 명 또는 만 명 수준의 투쟁이 빈번하다"([뉴욕 타임즈], 2001년 6월 2일). 이 보고서는 이렇게 불평했다: "시위자들은 빈번하게 교량과 도로를 봉쇄하고 당과 정부의 사무실에 난입하고 당과 정부의 위원회에게 강제로 명령한다. 심지어는 폭력행사, 기물파괴, 약탈, 방화 등 범죄행위를 자행한다." 시위에 "농민과 은퇴 노동자들로부터 현업노동자, 개인기업주, 제대 병사, 관리, 교사, 학생들까지 가세하는" 양상이 더욱 우려스럽다.

1989년 노동자 투쟁에 관련되었던 일부 투사들이 현재 노동자 투쟁에서 나름의 역할을 하고 있 다. 1989년 노동자자치연맹 투쟁에 연루되어 7년 징역형에 처해진 장샹광은 1998년에 다시 10년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이번에는 미국의 선전매체인 [자유 아시아 라디오]에 정보를 제공했다는 명목으로 기소되었다. 그러나 그의 진짜 범죄는 해고노동자들의 권리를 위한 슈푸군 노동자협회를 조직한 것이었다. 이 조직은 자의적인 세금징수에 대한 농민들의 항의투쟁을 지원하기도 했다. 유에티안시앙은 고참 노동운동가로 1983년 샤오양 시의 노동자공제회를 출범시켰다. 1989년에 샤오양 시의 자치노동자조합을 지도한 혐의로 그는 감옥에 갇혔다. 그리고 1999년에 간쑤성에서 [중국 노동자 모니터]를 출판한 역할과 관련하여 다시 10년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1999년 수에지펑은 허난성의 독립 노동조합을 조직한 죄로 정신병동에 수감되었다. 2002년 4월 30일에 발표된 국제사면위원회의 보고서는 카오마오빙의 투쟁을 소개했다. 독립 노동조합을 결성하고 관리자들의 부패를 폭로하려던 그는 장쑤성의 비단공장 노동자였다. 그는 결국 정신병동에 보내져 약물을 강제로 복용과 전기충격 "요법"을 당했다.

[자유 아시아 라디오]와 연관되어 있는 홍콩의 [중국 노동 게시판]과 친자본주의 민주당 등 제국주의 앞잡이 조직들은 중국공산당의 지배를 와해시키기 위해 냉소적으로 노동자 투쟁을 부추기고 있다. 대다수의 노동운동가들은 자본주의 시장"개혁"의 부정적 결과들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이들의 다수는 제국주의자들의 "민주" 하수인들이 늘어놓는 사탕 발림식 약속에 대해 환상을 가지고 있다. 지역의 투쟁을 지도한 분자들은 스탈린주의 공산당의 탄압으로 희생되었으나 친자본주의 "개혁가들"과 동맹 이외의 다른 대안을 찾지 못할 경우 자본주의 반동의 하수인으로 쉽게 전락할 수 있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쿠바 사회주의는 러시아 자본주의보다 우월하다

  
쿠바 사회주의는 러시아 자본주의보다 우월하다

자본주의 대 사회주의 : 거대한 논쟁이 다시 시작된다  


(편집자 주) 1989년 구소련과 동구권의 사회주의 국가들이 우후죽순 무너질 무렵 미국의 일본계 학자인 프란시스 후쿠야마는 “역사의 종언”을 이야기했다. 자본주의가 사회주의에 승리함으로써 역사가 일단락되었다는 것이었다. 이렇게 사회주의는 역사의 사생아, 혹은 ‘자본주의로 이행하는 가장 먼 길’로 전락했고, 사회주의자들은 줄줄이 과거의 이념을 버리고 자유주의나 심지어 파시즘으로 전향해버렸다. 한국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미국의 저명한 사회학자인 제임스 페트라스는 자본주의-사회주의 논쟁을 다시 시작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를 위해 그는 ‘신생 자본주의 국가'인 러시아와 동유럽의 현재와 과거를 비교하고 또 ‘신생 자본주의 국가'들과 사회주의를 견지해온 쿠바를 비교한다. 그리고 시민들의 삶의 질 측면에서 ‘신생 자본주의 국가'에 비해 그나마 옛 사회주의와 쿠바가 훨씬 우월하다고 판단한다.

저자 : 제임스 페트라스 미국 빙햄턴 대학 사회학과
출처 : Rebelion 2004년 6월호

사회주의냐, 자본주의냐!
이 논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오히려 ‘이념 전쟁’은 더욱 강화되고 있다. 유엔, 국제노동기구, 식량농업기구(FAO), 세계보건기구 등과 엔지오, 유네스코, 각종 전문가들의 보고서를 보면 이 논쟁은 오히려 지금 다시 시작되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이에 대한 결론을 이끌어내려면 우선 ‘자본주의 도입’ 이후 러시아, 동유럽의 모습을 그 이전과 비교해볼 수 있다. 또한 이러한 옛 사회주의 국가들의 현재와 지금도 사회주의 국가인 쿠바를 비교해보면 명확한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옛 사회주의 국가들이 자본주의로 이행하기 시작한지 15년이 흘렀다. 평가엔 충분한 시간이다.

옛 사회주의 국가들 : 산업은 절망, 실업률은 급등, 조직범죄 극성

옛 사회주의 국가들이 공산주의 체제였을 당시, 경제 자원들은 국가 소유이거나 공공 소유였다. 또한 이를 운용하는 결정도 국가적이거나 공공적 차원에서 이루어졌다. 그러나 이 국가들이 자본주의로 이행한 15년 동안 일어난 일은 이런 경제 자원들, 즉 모든 기초산업, 에너지, 광업, 사회하부구조, 유통 등이 미국과 유럽 혹은 억만장자 마피아들에게 넘어가는 것이었다. 혹은 문을 닫았다. 이는 대량실업과 불안정 고용의 증가, 경기침체, 이민, 돈 세탁과 국민경제에서 자본이 탈출하는 현상으로 이어졌다.

폴란드에서는 연대노조의 기반이었던 그다노스크 조선소가 폐업하고 박물관이 되었다. 이 나라의 노동인구 중 20%는 공식적으로 실업상태이다.(『파이낸셜 타임스』 2004년 2월21일) 나머지 30%는 성매매, 밀수, 노천시장, 행상, 각종 지하경제 등 주변부의 저임금 부문에서 일하고 있다. 불가리아, 루마니아, 라트비아, 동독도 비슷하거나 더 나쁜 상황이다. 이러한 옛 사회주의 국가들에서 지난 15년 동안의 1인당 평균 실질소득 증가는 그 이전의 15년(공산주의 치하) 보다 훨씬 낮았다. 이와 함께 소득격차는 엄청나게 심각해져서 최상위 소득계층 1%가 사적 자산의 80%와 소득의 50%를 지배하게 되었다. 빈곤층은 50%를 상회하고 있다. 옛 소련, 특히 아르메니아, 조지아, 우즈베키스탄 등의 중앙아시아 지역에서는 생활 표준이 80%나 떨어졌다. 인구의 25%가 이민을 가거나 극빈 상태에 놓였으며, 산업과 공공자금, 에너지는 강탈당했다. 과학, 보건, 교육 시스템은 거의 붕괴되었다.

옛 소련에서는 하이테크의 중심지였던 아르메니아의 경우 지난 1990년엔 2만 명에 달했던 과학기술 연구자의 수가 1995년엔 5천명으로 폭락했으며 지금도 줄어드는 추세이다.(『내셔널 지오그래픽』 2004년 3월호) 아르메니아는 결국 대다수 인민들이 중앙난방장치와 전기 없이 사는 국가로, 국가의 경제적 자원들을 마피아들에게 강탈당한 국가로 전락했다.

러시아의 경제적 쇠퇴는 더욱 심각하다. 1990년대 중반 현재, 러시아 인구 중 50% 이상이 빈곤층이며 이러한 현상은 모스크바와 페테르부르크(옛 레닌그라드) 외부에서 더욱 심각하다. 노숙자는 증가 추세이고 국가적 차원의 보건․교육 시스템은 붕괴했다. 비(非)전시 상황에서 한 나라의 경제가 이토록 빠르고 철저하게 무너진 경우는 현대사에서 ‘러시아 자본주의’밖에 없다. 러시아 경제는 자본주의화 과정에서 민영화되면서 마피아들에게 접수되었다. 러시아 마피아를 이끄는 것은 8개의 억만장자 과두체제이다. 이들은 뉴욕, 텔아비브, 런던, 스위스 등의 은행으로 2천억 달러 이상을 반출한 바 있다. 이로 인해 러시아의 전 경제 부문에서 살인과 테러는 ‘경쟁력’이 되었고, 과학은 말살되었다. 공산주의 체제하에서는 세계적으로 가장 높은 수준이었던 러시아 과학자들이 현재는 저소득과 설비부족 때문에 굶주리고 있다.

러시아 자본주의 : 한 나라 경제가 이토록 빠르고 철저히 망가진 적은 없다

‘러시아 자본주의화’의 수혜자는 옛 소련의 관료, 마피아 보스, 미국과 이스라엘의 은행, 유럽의 땅 투기꾼, 미국의 제국주의자, 군부, 초국적 기업들이다. 이렇게 약탈과 대량실업, 빈곤, 절망이 만연하면서 자살과 알콜, 약물 중독이 폭증하고 있다. 소련 체제하에서는 좀처럼 보이지 않았던 질병도 나타나고 있다. 옛 소련이 붕괴되던 당시 남성의 예상 수명은 65세였으나 2003년엔 58세로 줄어들었다.(『월스트리트 저널』 2004년 2월4일자) 이는 방글라데시 보다 낮은 수준이다. 또 쿠바 남성의 예상 수명인 74세 보다 16년이나 적다. 인구학 전문가들은 러시아 인구가 다음 10년 동안 30% 줄어들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월스트리트 저널』 2004년 2월4일자)

그러나 최악의 상황은 아직 오지 않았다. 옛 사회주의 국가들이 도입한 자본주의는 대중적인 보건 시스템을 전체적으로 붕괴시켜 과거엔 통제 가능했던 전염병을 다시 대대적으로 부활시켰다. ‘유엔 합동 프로그램’ 보고서에 따르면 동유럽과 중앙아시아에서는 에이즈 전염이 다른 지역보다 훨씬 빠르게 늘어나고 있다. 이 지역에서는 2004년 현재 1백50만 명이 에이즈 보균자인데 1995년엔 3만 명에 불과했다.

이러한 상황을 초래하는 데 큰 몫을 한 집단이 바로 러시아, 동유럽, 발칸, 발틱 국가의 범죄조직들이다. 이들은 헤로인 무역을 주도하면서 매년 20만 명의 성노예를 세계 각국으로 팔아 넘기고 있다. ‘해방’된 코소보를 근거지로 설치고 있는 알바니아 마피아들은 헤로인 무역의 요충지를 통제하면서 성노예들을 서유럽과 북미에 ‘수출’하고 있다. ‘해방’된 아프가니스탄에서는 미국과 동맹을 맺었던 군부가 헤로인을 생산, 옛 유고슬라비아를 거쳐 서유럽으로 반입시키고 있다. ‘해방’된 러시아의 마피아 과두체제는 주로 마약 및 불법무기 거래, 성매매 여성 양산, 미국-유럽-캐나다를 경유한 돈세탁 등에 종사하고 있다. 마피아 억만장자들은 정치인과 정당들(‘동방 민주주의’를 표방하는 선거에서 선출된)을 사실상 사고 팔면서, 미국, 유럽 등의 정보기관과 공식/비공식적인 동맹을 형성하고 있다.

이러한 ‘현실 자본주의’의 경제, 사회적 상황들은 본질적으로 이전의 사회주의체제 당시 실존하던 완전 고용, 안정적 성장, 복지 보다 못하다. 개인적인 삶에서 봐도 고용, 노후생활, 저축, 생활의 공적, 사적 안전성 측면에서 옛 사회주의 체제는 ‘범죄집단이 지배하는 자본주의 사회’보다 훨씬 안전한 시스템이었다. 정치적으로도 옛 공산주의 국가들은 노동자들의 사회적 수요에 훨씬 민감하게 반응했고, 소득 불평등을 억제했으며, 대외정책에서도 자국의 이해를 지킬줄 알았다. 또한 경제의 주요 부문을 산업화했고 소유했다. 그러나 새로 도입된 자본주의 체제하에서 정치가들은 자국의 모든 주요 산업을 해외나 특정인에게 팔아 넘겼고 기괴할 정도로 심한 사회적 불평등을 지지하고 있다. 그리고 노동자들의 보건과 고용은 무시된다.

쿠바 사회주의는 건재하다

옛 사회주의 국가들의 ‘자본주의 15년’과 ‘이전의 15년’을 비교해보면, 오히려 사회주의 당시에 시민들은 질적으로 훨씬 우월한 삶을 누렸다. 이엔 의문의 여지가 없다.

이제 ‘신생 자본주의 사회’인 러시아, 동유럽, 중앙아시아를 쿠바 사회주의와 비교해보자.

쿠바 사회주의는 소련과 동유럽의 자본주의화로 엄청난 타격을 받았다. 산업 생산과 무역은 60% 하락했으며, 쿠바인의 1인당 칼로리 섭취량도 절반으로 떨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쿠바의 유아사망률은 1989년의 1천명 당 11명에서 2003년엔 6명으로 하락했다. 한편 러시아가 국민소득의 3.8%를 공공 보건에, 1.5%를 사보험에 쓰는데 비해, 쿠바는 16.7%를 사용한다. 남성의 예상 수명도 자본주의 국가인 러시아에서는 58년이지만, 사회주의 쿠바에서는 74년이다.

자본주의 국가 폴란드에서는 실업률이 21%로 뛰어 올랐다. 그러나 쿠바에서는 3%로 떨어졌다. 신생 자본주의 국가들에서는 마약과 조직범죄자들이 날뛰고 있다. 그러나 쿠바에서는 청년실업자들을 위한 교육, 훈련 프로그램이 시작되었다. 젊은이들은 기술을 배울 때마다 봉급을 받고 일자리를 제공받을 수도 있다. 쿠바에서는 과학기술(특히 생명공학과 약학)이 계속 발전해왔으며 이젠 세계적 수준에 도달한 상태이다. 이에 반해 옛 사회주의 국가들의 과학 인프라는 완전히 붕괴되었다. 이 국가들의 과학자들은 이민을 가거나 국내에 머물러도 먹고 살 수가 없다.

쿠바는 정치, 경제적으로 자주성을 지키고 있다. 그러나 ‘신생 자본주의 국가'들은 미국에 군사적으로 예속되어, 발칸반도, 아프가니스탄, 이라크 등에 용병을 보내 미 제국주의에 봉사하고 있다. 이와 대조적으로 현재 쿠바의 의료인 1만4천 명은 남미와 아프리카의 최빈곤 지역에서 그곳 정부와 협력해 봉사활동을 펼치고 있다. 쿠바는 하이티에도 의료인 5백 명을 파견했다.

산업 측면에서 보면 쿠바에서는 대다수 산업이 국민적이거나 공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지만 시장 부문도 존재하며, 외국자본과 합작한 벤처회사도 영업활동을 하고 있다. 그러나 옛 사회주의 국가들의 경우 거의 모든 기간 산업과 언론매체, 문화산업 등의 소유권을 해외로 넘겨 버렸다. 쿠바는 기초 식량, 주택, 보건, 교육, 스포츠 등에서 사회적 안전망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신생 자본주의 국가'들에서는 실업자와 저소득자들이 재화와 서비스로의 접근에서 배제되고 있다.

사회주의 운동의 새로운 전망

이렇게 경제․사회 지표들을 비교해 보면 쿠바의 ‘개혁 사회주의’는 동유럽과 러시아, 중앙아시아의 ‘신생 자본주의 국가'들 보다 훨씬 낫다. 윤리, 문화적 측면에서 봐도 쿠바의 경우 비록 1990년 이후 관광 부문의 성장으로 여러 가지 문제가 불거지고 있지만, 마피아가 주도하는 ‘신생 자본주의 국가'들(마약, 성매매, 미제국으로 종속 때문에 부패한)보다 우월하다. 러시아와 동유럽에서 수백만 명을 감염시킨 에이즈에 대해서도 쿠바는 세계에서 가장 예방중심적이며 인간적인 의료 시스템으로 대처하고 있다. 에이즈에 대한 무료 의료, 무료 약품, 광범위한 공공 보건 프로그램 및 교육은 쿠바의 에이즈 발병률이 개발도상국 중 가장 낮은 이유를 설명해 준다. 분명히 관광산업과 저소득으로 인한 성매매가 존재하고 있는데도 말이다.

사회주의와 자본주의에 관한 논쟁은 계속될 것이다. 소련 붕괴 이후 러시아와 동유럽에 도입된 자본주의가 그 이전의 체제 보다 모든 경제, 사회적 부문에서 훨씬 열악하기 때문이다. 사회주의와 자본주의에 관한 논쟁은 계속 될 수밖에 없다. 쿠바의 성과가 ‘신생 자본주의 국가'들을 뛰어 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남아메리카에서 시작된 사회운동들이 자치(사파티스타), 토지소유 민주화(브라질의 MST 운동), 자원에 대한 민주적 통제(볼리비아)에서 실질적인 변혁을 이뤄내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미 제국주의가 제공하는 것, 그리고 ‘신생 자본주의 국가'들이 시민들에게 제공하는 것 보다 훨씬 우월하다.

이렇게 새롭게 등장하고 있는 사회주의는 과거의 복지국가에 쿠바식 인간적 사회 프로그램과 사회 안전망, 사파티스타와 MST의 자치 실험을 결합한 새로운 전망을 제시하고 있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