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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수라고 당당하게 말하세요

 

 

여러분도 이쯤되면 대충 눈치채셨다시피 저는 백수입니다.

이런 저런 이유로 카드 한 장 손에 쥐고 근근히 살아가고 있어요. 카드 한 번 긁을 때마다 조금씩 더 우울해져가는 제 마음 아실는지요..

처음엔 놀고 있다는게 챙피하고 부끄러웠죠. 사지육신 멀쩡한 젊은 여자가 자기 밥벌이도 못 하고 산다는게 부모님께도 너무 송구스럽고 내가 굉장히 못난 애인 것 같기도 하고, 세상에도 떳떳치 못 하고 뭐 그랬어요. 거의 매일 꿈을 꾸는 저는 꿈 속에서 정말 출근 안 해 본 사업장이 없었어요. 이런 사무실, 저런 사무실, 편의점, PC방, 간밤엔 카페에 출근해서 얼마나 열심히 돈까스를 만들고 있던지요.

 

하지만 여러분! 저같이, 저희 같이, 백수로 분류되는 인간이 이미 대한민국에 300만명입니다. 우리는 더 이상 소수도 아니고 약자도 아니에요. 씁쓸하지만 젊은 실업자 역시 우리 사회의 무시할 수 없는 하나의 세력이고 집단이 되었습니다. 우리 더 이상 숨지 말아요. 상처는 드러내놓고 까발릴수록 빨리 낳는 법입니다. 머리가 아픈 사람은 머리가 아프다고 말해야 아스피린 한 알을 구할 수 있어요. 우리 사회에 이렇게 많은 젊은이들이 자아 실현과 생계 수단으로써 너무나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중학교 도덕시간부터 배워왔던 직업이라는 것 없이, 이렇게 힘들어하고 있다는 것을 세상에 널리 널리 알려야 해요. 그래야 세상은 조금이라도 더 빨리, 더 깊이, 이런 아픈 현실들을 인식하고 치유하고자 할 겁니다.

 

아직도 세상 돌아가는 물정 모르고 누군가 당신에게 경망스럽게도 무슨 일을 하냐고 묻는다면, 그 사람의 두 눈을 똑바로 보고 당당하게,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세요. 백수라구요. 하릴없이 매일매일 티비를 보거나 게임을 하며 무기력하게 살고 있다구요. 그 경망스런 누군가가 이렇듯 당당한 우리의 대답을 듣고 한심하다는 반응을 보인다면, 이토록 분위기 파악 느린 그 사람의 인생을 되려 우리가 걱정해줘야 할 겁니다.

개인의 인생역정에 따라 인격은 다른 것이니, 자신에게 사회생활을 하지 못할 만큼 심각한 문제가 있는 소수의 경우를 제외하면, 우리에게 직업이 없는 것은 우리 잘못이 아닙니다. 젊은이들에게 마땅히 주어져야 할 일자리가 없어진 사회의 책임이 큽니다. 우리의 윗세대는, 한국 전쟁후에 잿더미뿐인 이 땅위에 한강의 기적을 이룩했고 그 후에는 독재자에 목숨걸고 저항해 정치적인 민주화를 이루었지만, 거기까지 뿐이었습니다. 거기까지가 우리 윗세대들의 몫이었던 거죠. 격동의 근현대사를 지내오는 동안, 그들은 경제적인 민주화에까지는 신경 쓸 기력이 없었어요. 빛나는 경제 성장의 뒤안길에서 빈부의 격차는 극단으로 치달았고, 시장만능주의 정권들은 자기들과 대기업의 이익 챙기기에만 열심이었습니다. GNP는 증가했지만, 서민 소득과 일자리는 줄었습니다. 윗세대들이 이룩했던 업적의 후유증을 우리가 지금 온전히 떠안고 있는 것입니다.

 

2008년의 대한민국에서 직업이 없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닙니다. 나의 무능력이나, 게으름의 표식도 아니에요. 고용없는 경제성장 기조를 철썩같이 지켜온 한 사회에서 실업자가 넘쳐나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요. 우리가 우리의 아픔을 당당히 드러내고 아프다고 얘기할 때 우리는 소중한 아스피린 한 알을 구할 수 있을 겁니다. 힘든일이겠지만 우리, 상처를 드러내요. 그리고 당당히 치료를 요구하자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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