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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5/02/15
    비정규직 철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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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2005/02/14
    워싱턴 합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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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2005/02/13
    <칼럼> 사회진보연대와 함께 돌아본 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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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똘레랑스란...(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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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 2005/02/05
    체 게바라의 ‘포코(foco)’ 이론
    산적-1

비정규직 철폐...

 

“우리는 새해 벽두부터 또 한번의 비극을 목도해야 했다. 박일수 열사, 비정규직의 이름으로, 비정규직의 철폐를 위해, 그는 그렇게 몸을 불사르고 우리 곁을 떠나갔다.

지금 민중운동 최대의 화두는 비정규직 철폐. 70년대의 양심이 ‘전태일’이었다면, 2000년대의 양심은 ‘비정규직’이다. 인간이 진정으로 존엄하다면 그것은 인간이 노동하기 때문, 노동하는 인간을 억압하는 자, 그리고 억압을 옹호하고 은폐하는 자여, 네가 그토록 집착하는 문명의 저주를 받으리라.

노무현의 보수양당은 앵무새처럼 기업하기 좋은 나라를 외우고 또 외운다. 늙은 노동자를 ‘노동귀족’으로 몰아 청년실업과 비정규직을 달래는 사육제를 벌이는 그들이, 비정규직 보호라는 미명 아래 정규직의 씨까지 말리려 한다.” ‘사건과 사진으로 본 2004년과 민주노동당’, 진보정치 206호(당원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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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싱턴 합의...

 

역사는 워싱턴 합의가 특정 시간과 장소와 관련된 현상이라는 것을 보여 준다. 워싱턴 합의는 장기간에 걸쳐 지속되는 IMF 거시 경제 안정화 정책, 세계은행이 채택한 시장 규제 완화와 레이건 초기의 워싱턴에서 유행한 공급 중시 경제 사고, 그리고 수 년 후 대서양을 건너간 런던의 열광적인 공기업 민영화를 융합시켰다.

동아시아의 기적 에피소드가 예시하듯이, 합의는 시간을 두고 발전해 당초의 극단적인 위치에서는 벗어났다. 그러나 기본적인 것은 변하지 않았다. 오래 지속되었으며, 주로 세계 경제 질서에 편입됨으로써 비롯된 빈국들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1980년대에 합성된 워싱턴식 치료법은 수 년 후까지 지속될 이 난제를 극복하지 못했다. 이 원인을 찾기 위해서는 전략을 세부적으로 검토해야 한다.

첫 번째로 시장 친화 패키지에는 명백한 분업이 있다. 그들은 우선 거시 경제를 ‘안정’시키고 다음에 시장을 ‘조정’함으로써 개혁이 더 효율적으로 수행되고, 결과적으로 신속히 산출이 증가하고 소득이 상승하는 결과를 낳는 경제적 ‘개혁’을 납득시키려 한다. 이러한 연속 조치들은 워싱턴 패키지가 조립되기 훨씬 전부터 기원한 BWI2)의 관심을 반영한다.


1. IMF의 기여


안정화는 언제나 IMF의 전문 분야였다. 40년 이상 변하지 않은 IMF의 중심 정책 처방은 총수요를 줄여서 무역 적자(특히 수입 규모)를 감소시키는 데 목표를 두고 있다. 인플레이션도 또한 목표이지만, 이는 종종 정책통제에서 벗어났다. IMF 프로그램의 가장 중요한 요소는, GDP 증가율 감소와, 아마도 낮은 인플레이션, 그리고 거의 항상은 수입 감소를 가져오는 재정과 금융의 긴축이다. 전형적인 정책으로는 공공 부문 지출 삭감, 높은 이자율, 그리고 (특히 공공 부문에의) 신용 제한이 포함된다. 국제 수지, 재정, 그리고 금융 계정에 근거한 ‘재무 계획’은 화폐 공급 증가율과 GDP 대비 재정 적자 비중 허용치와 같은 경제 지표 ‘성과 기준’을 책정하는 데 사용되었다. 폴락의 거시 경제 모델은 재정 적자 감소가 산출에 영향을 미치면서 자동으로 무역 적자 감소로 이어지는 것을 전제로 한다. 이 추정은 잘못되었다고 판명된 적이 자주 있다.

환율 조정은 대부분의 기금 패키지에 있어 두 번째 주요 요소이다. 이는 복잡한 문제를 제기한다.

명목 환율은, 다양한 경로를 통해 경제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핵심적인 ‘거시’ 가격 정책 수단이다. 개발도상국에서는 세 가지가 특히 중요하다. 무역 적자는, 해당국 통화를 평가 절하함으로써(약화시킴으로써) 수출 상품의 이윤을 더 높이고 수입 상품 가격은 더 비싸게 함으로써 공략될 수 있다. 문제를 복잡하게 하는 것은 수출이 빨리 반응하지 않을 수 있으며, 평가 절하가 무역 상품의 국내 가격을 상승시키고 구매력과 총수요를 감소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인플레이션 유발과 경제 위축과 같은 이러한 부수적 영향이 IMF의 국가 문서에는 거의 언급되지 않지만, 같은 이러한 부수적 영향이 IMF의 국가 문서에는 거의 언급되지 않지만, 실제로는 프로그램을 탈선시킬 만큼 충분한 정치적 파괴력을 가진다.

환율 조정이 가격 구조에 미치는 영향이 두 번째 경로이다. 이는 환율을 절상함으로써 국제적으로 거래되는 상품의 국내 가격을 낮추면 인플레이션을 통제하는 데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 고정 환율을 인플레이션에 대한 ‘명목 기준’으로 사용하는 것은 1970년대 이후 IMF의 지지를 받은 안정화 패키지(특히 라틴아메리카와 동유럽에서)의 주요 수단이었다.

이의 전형적인 결과가 아르헨티나 사례에서 치사리(Chisari), 파네리(Fanelli), 프렝켈(Frenkel)에 의해 분석되었다. 1990년대 초반의 안정화 이후 소비자 물가지수(비무역 상품이 지배적임)가 명목 임금 이상으로 상승했고, 명목 임금은 다시 도매 물가지수(국제 수지의 경상수지 계정이 상당히 자유화된 경제권에서의 수입 상품이 지배적임)를 넘어섰다. 따라서 노동자의 실질 구매력은 교역재 생산자의 실질 노동 비용이 상승함과 동시에 감소했다. 폴라니의 분배 문제뿐만 아니라 부적절한 인센티브가 그러한 상대적인 가격 체제에 직접적으로 기여했다.

대외 무역과 자본 이동에 대한 통제가 완화되면(이하에서 자세하게 다룸) 환율은 외국 투자가들이 관련 경제에 자금을 투자할지 결정할 때 주의 깊게 관심을 기울이는 자산 가격이 된다.―이것이 세 번째 경로이다. 어느 쪽으로든 환율 움직임은 국내 이자율과 자본 시장으로의 잠재적인 역(혹은 바람직한) 피드백을 통해 대부분 가난한 경제권의 수척한 자본 시장에 심각한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실질 환율이 인하될 경우, 무역 계정의 악화 조짐은 자금 유입을 보장하기 위한 조치가 취해져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 가지 명백한 움직임은 국내 실질 이자율을 인상하는 것인데, 결과적으로 투자 수요와 자금 축적에 악영향을 미치게 된다.

대체로 약소국에서의 IMF 패키지는 평가 절하를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이 목적은 위에서 논의된 메커니즘을 통해 무역수지를 개선시키는 것이다. 평가 절하는 투자자들이 자금을 국외로 반출하려 할 때 이들을 ‘재확신’시키는 책임을 맡게 된다. 이 시도는 매우 교묘해서 투자자들이 이미 소유한 국내 자산의 외환 가치를 감소시키지만 미래의 획득 비용도 감소시킨다. 때로는 ―1991년 인도에서처럼― 효과적이지만 때로는 ―1994~1995년 멕시코에서처럼― 재앙이다. 두 경우에 있어 차이점은 경제적 권위가 손상되기 이전에 멕시코에 이미 많은 투자를 했기 때문에, 월스트리트가 수십억 달러의 자본 손실을 입었다는 것이다.

인플레이션을 잡기 위해 환율을 사용하는 것은 양날을 가진 칼을 쓰는 것과 같다. 명목 기준으로 고정된 환율이 자산 가격으로서의 역할과 결합하여, 무역 역조와 생산에 미치는 영향은 안정화 노력을 뒤엎을 수 있다. 특히 경제 내외로의 자본 이동 통제가 해제될 경우 인상된(그러나 명목상으로는 고정된) 환율하에서 악화된 무역수지는 피할 수 없는 ‘최대한의’ 평가 절하, 연계된 가격 급등, 그리고 산출 감소를 초래하는 자본 도피를 가져 올 수 있다. 1970년대 후반 라틴아메리카의 남부 연방(Southern Cone, 아르헨티나, 브라질, 칠레―옮긴이)에서 1994년 후반의 멕시코, 그리고(또 다시!) 1996년의 아르헨티나까지, IMF와 세계은행은 실패할 운명이었던 환율 인상과 자본 시장 자유화의 결합을 반복해서 지원했다. 이것은 주유 주주라는 재무 공동체들이 그 방향으로 밀어붙였기 때문일까?

그러한 인플레이션 방지형 재난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IMF 패키지들의 기본적인 목적은 아직도 무역과 재정 적자를 GDP의 몇 퍼센트에 달하는 ‘견딜 수 있는’ 수준으로 감소시키는 것이다. 그러한 노력은 지극히 합당하다.―대외, 정부, 민간 부문 계정에 대규모 재무 결손을 안고 있는 경제는 얇은 얼음 위에서 스케이트를 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IMF가 너무 빨리 움직여서 몇 가지 상충적인 정책을 한 번에 부과한다. 이 충격은 종종 불경기를 초래해 수입을 줄인다.― 이 흔히 있는 결과가 왜 IMF가 ‘지나쳐 오히려 경제를 망치는 것’(overkill)에 대해 비난받는지에 대한 이유이다. 역사적으로 IMF의 주요 목표는 무역 불균형을 삭감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정책 패키지는 적중했다. 그 조치가 (때로는) 인플레이션을 경감시켰는지 아니면 (드물게는) 부활한, 적당한 경제 성장을 이끌었는지는 모두 다른 문제이다.


2. 세계은행 조정


세계은행의 특수성은 GDP 증가율 상승을 위한 ‘조정’ 에 있다. 1980년경 이후 세계은행은 시장 친화성으로 가난을 퇴치하기로 결정했으며, 세계은행의 주요 무기는 가격 체계의 배분 효율성을 증진시키는 데 있어 왔다. 기본 아이디어는 가격 ‘왜곡’을 제거하여, 즉 ‘인위적으로 높은’ 실질 임금을 삭감하여 기업으로 하여금 더 많은 상품을 만들 더 많은 노동자를 고용하도록 유도하는 등의 가시적인 결과물을 얻는 것이다. 대개의 경우 임금과 산출물간의 이러한 부의 상관 관계는 관찰되지 않는다. 두 변수가 함께 하락하는 정의 상관 관계가 더 일반적이다. 평가절하처럼 임금 삭감은 유효 수요를 감소시키고 소득 집중화를 한층 더 초래한다. 정치적 반응은 조정 프로그램을 쉽게 침몰시킬 수 있다.

더 상세히 보자면 자원 배분을 개선하기 위해 세계은행이 지원하는 조정 패키지에는 다음과 같은 정책 변화가 포함된다.

외국 무역이 자유화되어 수입 쿼터를 관세로 대체하는 데서 시작해서 추후 관세율 인하와 수출 지원금의 감소로 이어져야 한다. 이러한 시도는 국내 상대 가격을 세계 수준으로 유도함으로써 비용 절감과 효율 향상을 가져 와 수출을 보증하는 것으로 여겨지지만, 그렇게 된 경우는 거의 없다.

동시적으로 혹은 약간 후에, 외부의 자금 공급자들로 하여금 지역 경제에 손쉽게 투자토록 하기 위해, 외환 거래나 과실 송금에 대한 통제와 같은 대외 현금에 대한 장벽이 제거되어야 한다. 최근까지도 BWI는, 외환(그 중에 일부는 ‘핫 머니’)이 들어온 속도만큼이나 빠르게 나갈 수 있다는 것을 중시하지 않았다.

세 번째 목표는 국내 금융 시장의 규제 완화 혹은 ‘억제 해제’이다. 목적은 서로 다른 금융 자산의 수익률을 균등하게 하는 것이다. 1980년대의 견해에 의하면 채무자에게 보조금을 지불하는 수단으로 ‘억제되었던’ 이자율을 올리는 것은 저축을 자극한다. 이러한 견해는 탐지될 수 없는 것으로 실증되었으며, 더 이상 강조되지 않는다. 그 대신에 현재의 워싱턴 견해는 양의 실질 이자율이 표준적인 신고전주의 방식에 따라 더 나은 자원 배분을 가져 온다는 것이다.

또한 1980년대에는, 위기에 처한 금융 기관의 제재와 관련하여 포트폴리오의 위험과 성과에 대한 당국의 주의 깊은 감사의 형태를 띤, 화폐와 자본 시장에 대한 세심한 규제 필요성에 대한 논의는 없었다. 이 누락은 놀라운 것이다. 왜냐하면 기관들이 지원하는 자유화 패키지가 제2세계와 제3세계 전체의 붐과 파멸로 이어졌기 때문이다.(1994년 멕시코의 페소 위기는 최근 사례의 하나이다.)

아큐즈(Akyuz)가 지적했듯이, 본래부터 불안정한 두 시장 체제―대외 자금 흐름과 내부 금융 기관―의 동시적인 통제 해제는 폭발할 수 있는 정책 결합이다. 공기업 민영화 운동과 부유한 국가들의 포트폴리오 투자 유입에 의해 팽창되어 온 신흥 주식 시장에서는 화약이 특히 더 잘 말라 있다. 국제 자본 시장에 대한 1995년도 IMF 보고서는 BWI가 이 문제에 손을 대기 시작해야 한다고 제안했지만, 1994년 멕시코 위기 이전에는 그들의 학습 곡선이 가파르지 않았다.

네 번째로 노동 시장과 경영 의사 결정의 규제 완화가 있어야 한다.

다섯 번째, 세금이 정당해야 한다. 사하라 이남 국가들의 경우에 크게 요구되는 시민 서비스 개혁을 재무적으로 지원하기 위해 세금이 인상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워싱턴의 화려한 웅변에도 불구하고(실제로는 BWI가 지원하는 프로그램에서) 그렇게 ‘성공적인 경우’인 가나와 우간다에서, 성장이 민간 부문이 아닌 국가에 의해 주도되었고, 정부의 규모가 가시적으로 증대되었다.

여섯 번째로 영국 보수당 정부로부터 실행되어 서방으로 퍼져 나간 공기업 민영화가 교리로서 1980년대 후반 세계은행을 선점했다. 이 노력은 사유화 기업이 국가 소유 기업보다 본질적으로 더 효율적이라는 생각에 근거한다. 이는 창과 상(Chang and Singh 1993) 같은 학자들이 증거들을 꼼꼼히 살펴보았지만 입증하지는 못한 명제이다. 실제로 국가 소유 기업의 판매는, 대개의 경우 급속한 세금 경감에 의해 초래된 예산 부족을 마감하기 위한 재정상 임시 변통이나 마찬가지이다. 위에서 언급한 대로 공공 소유의 새 지분이 또한 전세계적인 주식 시장을 안정시키는 데 필수적인 것은 아니다. 세계은행은 열광적으로 이 과정을 지원하였다.

마지막으로, 국가 개입의 감소와 경제의 ‘투명성’ 부가로 인해, 자유화와 민영화는 독점적 수입 쿼터 소유와 같은, 국가가 보증한 시장 지위에 대한 보답인 독직이나 ‘지대’ 추구에 기인한 비생산적인 자원 유용을 감소시키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보라타프(Boratav), 튜렐(Turel), 그리고 옐단(Yeldan)이 관찰했듯이, “대부분의 제3세계에서 자본가 계급 자신이 국가의 산물이다. 이러한 역사적 현상은 정책 모델을 변화한다고 해서 사라지지 않는 문화적․사회적 그리고 경제적 특성을 창조했다.

그들은 “지대를 추구하는 바로 그 과정이 국가가 아니라 자본가 계급에서 유래된 것이기 때문에” 자유화가 특정 기업 집단의 유리한 지위에서 유래된 지대를 없애지 못할 것으로 추론했다.

조정을 겪고 있는 나라들에서는 시장 친화적 정책을 통해 독직이 사라지기는커녕, 수출 보조금, 투기적 도시 금융(speculative urban finance), 민영화와 증권 시장 조작, 재정 보조금 등에 의해 발생하여 이러한 독직이 최근까지 더 늘어나고 있다. 멕시코의 (전)대통령 살리나스(Salinas) 가족이 출연하는 인기 연속극은 잘 알려진 사례이다. 이러한 사회 개발은, 전통적인 시장 규제가 억압될 때 지대와 독직이 사라지기는커녕 오히려 기승을 부리는 사실을 설명하지 못하는 워싱턴 모델의 소화 범위를 넘어선다. 많은 나라들에서 어떤 현저한 경제 성장 가속화로도 이 범죄들이 사면받지 않았다. ‘한국 사회에 주는 충고’, 「자유주의의 부활: 글로벌 경제하의 IMF와 세계은행」, 랜스 테일러(Lance Taylor), 이병천․백영현 옮김.

 

 

1) 세계은행과 IMF 헌장은 뉴햄프셔의 스키 리조트에서 작성되었는데, 이 지역 이름을 따서 ‘브레튼우즈 체제’(Bretton Woods institutions) 또는 BWI라 불린다. 1944년 지원 이후 그들의 역사는 어떻게 그들이 제2세계와 제3세계에 대한 경제적 종주권을 장악했는지, 또 왜 그들이 지원 정책을 채택했고, 왜 정책이 실행시마다 자주 실패하는지를 보여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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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사회진보연대와 함께 돌아본 1년

백승욱 | 운영위원, 중앙대 사회학과

 

2004년은 2003년부터 지속된 대내외적 지각변동이 이어지면서 그 파장이 더욱 커진 한 해였다. 밖으로는 미국의 신보수파가 주도하는 세계질서의 재편이 이라크 전쟁으로 시작된지 두해 째 되면서 그 파장이 줄어들줄 모르는 채 확장되고 있다. 이라크 전쟁이 발발한지 한해가 아니라 두해가 지나고 있다는 사실에 새삼 놀랄만큼 무장한 세계화의 영향력은 일상 속에 뿌리를 내려가고 있다. 전쟁에 대한 반대와 저항이 적지않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다른 영역에서 벌어지는 삶을 위협하는 것에 대한 저항으로 확산되지 못하면서 어느덧 반전은 삶의 문제가 아니라 도덕적 비판의 문제로 바뀌어버린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2004년 초 한국의 정치판에 벌어진 대통령 탄핵이라는 해프닝은 사실 이 문제와 뗄 수 없는 관계에 있었다. 탄핵을 둘러싼 논란 속에서 사회진보연대는 이 문제를 바라보는 세가지 기준점을 제기한 바 있다. 신자유주의에 대한 반대, 무장한세계화와 전쟁에 대한 반대, 그리고 민주주의에 대한 전면적 위협에 대한 저항이라는 기준점이 그것인데, 이 세가지가 서로서로를 받쳐주는 운동으로 연결되어야만 지속적 생명력을 가질 것임은 다시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탄핵과 그 이후 과정에서 나타난 수많은 동요는 이 것들중 어느 하나의 부분적 측면만을 붙잡거나 또는 낡은 방식으로 그 속성을 이해하기 때문에 생긴 문제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2002년 대선 이후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국내 정치지형의 변화는 냉전의 틀이라고 부를 수도 있을 낡은 틀이 빠르게 무너지는 대신 변신한 자유주의와 보수주의가 새롭게 형성되는 과정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그 이데올로기적 기반은 여전히 취약하며, 그 취약성이 쉽게 극복되지는 않을 것이고, 지속적인 동요와 상호폭로가 일시적으로 그 취약성을 지탱하는 정치가 지속될 것이지만, 외형이 쇄신된 자유주의와 외형을 쇄신하려는 보수주의는 진보세력의 쟁점제기를 선점하려 노력할 것이다. 그에 비해 쇄신되지 못한 진보세력은 여전히 익숙한 과거의 틀 속에 갇힐 수도 있을 것이다. 대중의 힘의 분출을 봉쇄한 1987년의 망령은 탄핵국면만 덮어싼 것이 아니라 민주노총도 민주노동당도 덮어 쌀 수 있고, 윤기나는 고립을 찬란한 성공으로 오해하도록 만들 수도 있을 것이다.


김진균 전 대표께서 돌아가신지도 한 해가 되었다. 민중형성과 연대는 김진균 대표께서 붙잡고 있던 두가지 화두였는데, 연대를 통해 어떻게 민중이 민중으로서 형성되는 길을 찾아갈지는 남은 사람들의 몫이 되었다. 성과에 머무르지 않고 앞으로 돌진하면서 새로운 운동방식과 새로운 조직형식을 고민하는 것은 불나비 김진균 선생 만이 아니라 사회진보연대의 자세이기도 하다. 지난해의 만민공동회와 전범민중재판은 민중의 자기 발언권을 되찾는 작은 출발점이 될 수 있었다. 그 계기를 더욱 확대해가는 한 해가 될 것을 기원해 본다.


(2.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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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주의의 부활...

 

전세계 인구의 반과 국가의 3분의 2는 자국 경제를 완전히 통제하지 못하고 있다. 선진 산업국 국민에 의해 조종되며 워싱턴 DC에 근거를 둔, 고국을 저버린 ‘전문가’들이 거시 경제, 투자 정책, 그리고 사회적 지출을 관리한다. 멀리서 온 이 명령들의 기본 방침은 ‘워싱턴 합의’로 알려져 있다.

개발 도상 국가와 포스트 사회주의(post-socialist) 국가를 위해 정책 패키지를 들고 날라 온 외국인들은 두 개의 세계 기구, 곧 세계은행과 IMF의 스태프들이다. IMF와 세계은행이 각국 정부에 ‘추천한’ 많은 조치들이 실무적으로는 이성적인 근거가 취약하고 비생산적인 것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그들의 제안은 몇 가지 이유로 주목을 받고 있다. 양대 기구는 미국뿐만 아니라 영국이나(덜 열광적이기는 하지만) 일본과 같은 경제대국의 지지를 얻고 있다.

그들 밀사들은 실질적인 경화 대출 한도를 손에 들고 해당국 수도에 도착한다.―그들의 제안을 충심으로 받아들이도록 권위를 부여하는 강한 인센티브이다. 이 제안들은, 지난 십여 년 동안 지배적인 위치에 이르게 된 ‘신자유주의’ 또는 ‘시장 친화’ 상표를 부착한 정책 분석에 근거하고 있다. 어떤 경우에는―멕시코의 1982년 이후가 두드러진 예이다― 해당국 정책 입안자들이 워싱턴에서 온 친구들보다 신자유주의에 더 열광적이었다.

경제 정책의 이러한 ‘글로벌화’가 전적으로 새로운 것은 아니다. 1990년대 아르헨티나에서는 중앙 은행을 ‘통화위원회’로 대체함으로써 영국 식민지의 고대 통화 관습을 복제하고 있다. 그리고 프린스턴의 ‘화폐의사’(money doctor) 켐머러(E.K. Kemmerer)의 1920년대 사명은 오늘날 IMF에서 구축해 놓은 것들과 아주 닮아 있다. 1980년대 경제 사회 정책의 극적인 전환은, 켐머러를 넘어 대공황 이전의 환경을 재형성하는 방향으로 깊숙이 들어갔다. ‘신’자유주의 옹호론자들은 현재의 논쟁이 수십년 전의 논쟁과 다르지 않다고 말한다.

진보적 비평 또한 존재한다. 위대한 사회주의 과학자 폴라니(Karl Polanyi)는, 아이러니컬하게도 세계은행과 IMF가 창설된 1944년에 발간된 『거대한 변환』(The Great Transformation)이라는 책 속에 다음과 같은 비평을 하나 실었다.


“변화의 문제를 이해할 때만큼 자유주의 철학이 확실하게 실패한 적은 없었다. 자생성(spontaneity)에 대한 감성적 신뢰감에 불타올라, 변화에 대한 상식적인 태도를 버리고 경제적 개선에 의한 사회적 결과를 그 여부에 상관하지 않고 신비할 정도로 쉽게 받아들였다.”


폴라니에 따르면, 1920년대에 “경제적 자유주의는, 시장의 자유를 위협하는 모든 개입주의 정책을 제거함으로써, 시스템의 자기 조절력을 복원하기 위해 최대의 노력을 기울였다.”

이 ‘노력’에 대한 1930년대와 1940년대에 나타난 비극적인 반응은, 완전히 자유화된 시장 시스템은 사회적으로․정치적으로 불가능하다는 폴라니의 위대한 테마를 예증해 주었다. ‘자기 조절’ 시장은, 특히 노동, 금융 그리고 국제 무역과 같은 주요 부문에서는 오래 갈 수 없다. 규제를 완벽히 철폐하기 위한 시도는 불안정하고 투기적인 행동을 야기시키거나, 또는 소득과 부의 집중을 초래함으로써, 잠재해 있는 통제권을 국가에 다시 부과할 것을 요구하는 사회적 반발을 불러일으킨다. 폴라니의 명언에 따르면, 하나의 규제 완화를 향하고, 또 하나는(금융 불안정과 사회적 긴장이 고조되면) 그 역방향으로 움직인 ‘이중 운동’이 존재한다.

폴라니의 이론은, 시장과 사회적 모순을 중재하는 국가의 능력이 글로벌화된 경제 하에서의 외부 경제와 금융 속박 때문에 점점 더 손상되는 오늘날에 있어 글로별화에 대한 논쟁에 시사하는 바가 있다. 제2차 세계대전이라는 재앙 이후 “각국 정부간의 경제적 협동과 자유 의지로 국민의 삶을 조직할 수 있는 자유”에 대한 국제적 합의가 이루어졌다. 글로벌 조정 기능을 구축하려는 의지는 세계은행과 IMF의 설립으로 유도되었다. 역설적인데, 개방도상국에게는 오늘날의 이 기구들이 1940년대 유토피아적 사고의 파괴 뒤에 숨어 있는 지적 근간과 정치 세력을 나타낸다. ‘한국 사회에 주는 충고’, 「자유주의의 부활: 글로벌 경제하의 IMF와 세계은행」, 랜스 테일러(Lance Taylor), 이병천․백영현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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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금상승과 노동시간 단축...

 

“과거의 농업사회에서는 가족 중 가장(家長) 한 사람만 노동에 전념하면 가족의 생계가 가능했지만 자본주의 사회로 넘어오면서 가족 모두 노동에 종사하지 않으면 생계가 어렵게 되었다는 것이다. 10여 세 소년들이 하루 14시간 동안 탄광에서 일하지 않으면 먹고 살기 어려웠다는 점은 엥겔스의 말이 과장이 아니었음을 증명한다. 가족 모두 하루에 14시간 동안 일하지 않으면 가족의 생계가 어려울 만큼 자본은 최저의 임금과 최장의 노동시간으로 인간 노동을 수탈했던 것이다. 이 점은 임금 조건과 노동시간이 최저생계비와 연계되어 있음을 말해준다. 뒤집어 말하면, 노동자들의 임금 상승 투쟁과 노동시간 단축 투쟁은 동전의 양면이었던 것이다.” ‘악역을 맡은 자의 슬픔’, 홍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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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닥을 향한 경주...

 

경제적 실적의 부진과 사민주의적 신념에 대한 회의, 그리고 세계화로 인해 더욱 치열해져 가는 국제경쟁 등이 유럽 나라들로 하여금 신자유주의로 눈길을 돌리게 함……그리하여 신자유주의적 구조개편은 노동자들이 자본에 대한 고난에 찬 투쟁을 통해 역사적으로 쟁취해 온 것들을 자본이 회수해가는 과정이라고 일컬어지게 됨. 이름하여 ‘자본의 노동으로부터의 해방’임. 여기에서 생산입지를 옮기겠다고 하는 자본의 위협은 민족국가와 노조에 대한 초국적자본측의 효과적인 무기가 되어 ‘바닥을 향한 경주’를 낳음. 거기에는 복지와 환경에 대한 자본측의 고려가 약화되는 것도 포함됨. ‘오늘날 세계의 여러 가지 노조운동론 : 사회운동적 노조주의를 중심으로’, 사회진보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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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똘레랑...

 

“의약분업 과정에서 불거진 의사 폐업 사태와 롯데호텔과 사회보험 노동자들의 파업에 대한 공권력의 대응을 보면서 나는 카뮈와 엠마누엘 토드의 말을 돌이키지 않을 수 없었다. 프랑스에서라면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사회적 불의1)였고 차별이었다. 생존권이 아닌 기득권을 지키려는 의사들의 폐업에는 전전긍긍했던 공권력이, 생존권을 요구하는 사회적 약자들에 대해서는 강경 진압을 통하여 ‘질서’를 강제했다.”

“‘받기 위해 주는 것은 모든 교환의 원칙인가?’라는 물음은 ‘남북한 사이의 상호주의’와 구체적으로 관련시킬 수 있겠으며, ‘모든 권력은 폭력을 동반하는가?’라는 질문은 ‘국가폭력’에 관한 질문과 함께 ‘한국에서 파업을 거의 모두 불법으로 규정하고 탄압하는 국가폭력’의 문제로 발전시킬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자유는 거부하는 권리로 정의되는가?’라는 물음에는 ‘자유와 파업권’을 연관시킬 수 있다. 파업권을 노동자들의 ‘거부하는 권리’로 정의할 수 있을테니까.”

“나는 ‘불법파업’이라는 프랑스 말을 들어본 적도, 읽어본 적도 없다. 파업은 사회적 약자인 노동자들의 최후 선택이고 ―그 어떤 노동자가 무조건 파업을 좋아하나?― 노동3권의 하나인 단체행동권의 핵심으로서 당연히 보장되어 마땅한 것이다. 오히려 파업 사업장에 대해 인력을 투입하는 게 불법이다. 그만큼 노동자의 파업권은 보장되어야 한다는 의지가 관철되고 있다. 지하철이나 기차 등 공공부문에서 최소한의 서비스를 확보하기 위해 파업권을 제한해야 한다는 일부의 목소리조차 메아리 없는 외침으로 끝난다.

한국의 상황은 잘 알다시피 이와 정반대의 모습을 보인다. 거의 모든 파업이 ‘불법’이고, 대체인력 투입이 불법이기는커녕 ‘구사대’까지 활개치고 있는 실정이다. 이런 상황임에도 이른바 국민의 정부는 역대 정권의 똑같이 관계부처 대책회의라는 것을 거쳐 ‘불법파업 단호대처’를 운운하고 있고, ‘조중동’ 등 수구 신문들은 누가 대화에 나서지 않는지 묻지도 않은 채 ‘노동자들은 대화에 나서라’면서 국가경쟁력과 국가 신인도를 앵무새처럼 떠들고 있다.”


“일찍이 볼테르는 ‘앵똘레랑(불관용하는 자)’2)을 「우리와 똑같이 생각하지 않는 자를 선험적으로 유죄라고 평가하도록 유도하는 자」라고 말했다. 또 루소는 앵똘레랑을 가리켜 「자기가 믿는 것을 믿지 않으면 선의의 인간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자기와 똑같이 생각하지 않는 자들 모두에게 냉혹하게 저주를 내리는 자」라고 말했다. 21세기초 한국 사회는 17세기에 바나주 드 보발이 말한 「견해의 대립을 통해 이성을 눈뜨게 하지 않으면 인간을 무지와 오류로 몰아가」는, 그런 사회와 멀지 않다. 이를테면 물질은 21세기를 살고 있지만 이성과 정신은 17세기에 미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악역을 맡은 자의 슬픔’, 홍세화.

 

 

1) “사회정의는 질서에 우선한다” 볼테르.

 

 

2) 억압적 관용(repressive tolerance) : ‘억압적 관용’은 마르쿠제가 1965년에 쓴 논문 제목이기도 한데, 간단히 말해 “합법적 권위에 의해 결정된 틀 안에서만 반대파를 용납”하는 지배 계급의 태도를 지칭하는 개념이다. 가령, 지배 계급이 사상․결사․언론의 자유를 보장한다고 해도, 실제에 있어서 이는 기존의 행정 체계의 틀 내에서만 인정받기 때문에 피지배자들의 저항을 흡수하기 위한 수단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마르쿠제는 외견상 순수해 보이는 기존의 관용을 ‘추상적 관용’이라고 비판하면서, 역설적이게도 자유의 범위와 내용을 확장시킬 뿐만 아니라 편파적으로 피지배자의 입장을 옹호하는 ‘차별적’ 관용의 필요성을 주장한다. 차별적 관용을 실천할 때에만, “파괴와 억압을 관용하는 행위 규범을 관용하지 않는, 아니 절대로 관용하지 않으며 이에 복종하지 않는 소수”와 더불어 현존 체제를 분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신좌파의 상상력(세계적 차원에서 본 1968)’, 조지 카치아피카스 지음, 이재원․이종태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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쏠리다리떼...

 

“프랑스에서 종이1) 없는 이주노동자들이 종이를 얻기 위해 단식 투쟁을 할 때 그들과 항상 함께 하는 인류학자 에마뉘엘 테레는 인류에겐 흑인종, 황인종, 백인종의 인‘종’이 없고 다만 인‘류’뿐이라고 외친다. 지금까지 인류는 뒤섞이면서 문화적 다양성을 획득해 왔다” ‘악역을 맡은 자의 슬픔’, 홍세화.

 

 

1) “‘노동허가증’이라는 이름의 종이” ‘악역을 맡은 자의 슬픔’, 홍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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똘레랑스란...(1)

 

“‘서로 다른 체제와 이념을 인정한다는 것.’ 이것이 똘레랑스 정신이다. 나와 다른 남을 다른 그대로 인정한다는 것, 즉 나와 다른 남에게 나와 똑같이 될 것을 강요하지 않는다는 것, 그리하여 서로 다르다는 것을 인정한 바탕 위에서 대화와 토론을 통해 최선의 길을 모색해 나간다는 것, 이것이 바로 똘레랑스의 정신이다.”

“다시금 강조하거니와 똘레랑스의 부드러움은 앵똘레랑스1)에 대한 단호한 앵똘레랑스를 조건으로 하는 것이다.” ‘악역을 맡은 자의 슬픔’, 홍세화.

 

 

1) “저항을 포기한 주체는 이제 자기 정당화의 근거를 찾아야 한다. 이때 주체는 이문열이 <선택>에서 권장한 그 독특한 인생철학, 즉 ‘어차피 그러안아야 할 강제라면 긍지와 자부심을 갖고 주체적으로 그러안자’는 해괴한 논리를 내면화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조선일보 내에서 권력이 작동하는 독특한 방식이다. 가령 동아일보의 경우에는 사내에서 편집방향에 대한 불만의 소리가 터져 나오고 다만 이 ‘말’이 ‘행동’으로 옮겨지지 못하고 “온건론”으로 귀결되는 데에 반해, 조선일보의 경우에는 아예 비판은 나올 수가 없고 평기자들마저도 사측을 옹호하는 논리를 개발하기에 바쁘다. “디제이 신문은 어쩔 수 없다.” “보도 내용이 다소 의심스럽다.” “디제이의 언론개혁은 계급투쟁적 성격이 있다.” “또 마이너 신문들의 메이저 신문들을 위한 공세의 측면도 있다.” 이들의 태도는 이렇게 자발적, 주체적, 공격적인 구사대 룸펜 프롤레타리아의 그것이다.” ‘아웃사이더’, 「존재미학, 비루한 자들의 미적 에토스」, 진중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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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 게바라의 ‘포코(foco)’ 이론

 

대중운동을 움직이게 하는 한 방식으로서 요청된, 소수의 헌신적인 게릴라 집단인 ‘포코’1)가 시골 지역에서 수행하는 무장 투쟁은, 도시에 기반을 둔 노동자 계급의 전위 세력들을 구축한다는 공산당의 전략에 대해 일련의 대안적인 전략을 구성해줬다. 공산주의자들이 가장 발전된 생산 부문의 사람들 내에서 자신들의 기반을 구축하고자 했다면, 게릴라들은 군사적․정치적․경제적으로 집중되어 있는 기성의 권력 조직과 가능한 한 멀리 떨어져 있는 농민들에게 들어가려고 했다. 또한, 공산당이 가능한 한 현존의 정치 일정 내에서 움직이려 했고, 평화적인 변화의 가능성을 믿었다면, 게릴라들은 현존 국가를 분쇄하기만을 원했다. 넒은 의미에서 보아, 공산당은 혁명에 유리한 조건들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꾸준히 강조하면서 사회주의로의 점진적 이행을 주장했던 반면, 게릴라들은 “포코라는 작은 원동력을 통해 대중운동이라는 큰 원동력을” 움직이게 함으로써, 이런 조건들을 창출하려고 했던 것이다.

비록 볼리비아, 콜롬비아, 베네수엘라에서 체의 포코 이론이 현실화되지 못했지만,2) 포코 이론은 니카라과 혁명에서 그 가치를 인정받았다. 이 전략을 채택함으로써 쿠바 혁명의 성공을 따르려고 했던 시도들은, 라틴 아메리카 혹은 제3세계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미국에 있었던 <웨더 언더그라운드 Weather Underground>와 <흑인 해방군 Black Liberation Army>, <아일랜드 공화군 Irish Republican Army>, 서독의 <적군파 Rote Armee Fraktion>, 이탈리아의 <붉은 여단 Red Brigades>, 캐나다의 <퀘백 해방전선 Front de Liberatíon Quebequois>(FLQ), 스페인의 <바스크 토지와 해방 Basque Land and Liberty>(혹은 Euzkadi Ta Askatasuna, ETA), 또한 프랑스의 <프롤레타리아 좌파 Gauche Proletarian> 등은 모두, (마리겔라,3) 마오,4) 지압5) 등은 물론) 체와 드브레6)를 신중하게 연구했으며, 쿠바의 전략을―성공했든지 못했든지 간에― 자신들의 나라에서 실행에 옮겼다.

쿠바 게릴라들의 성공으로 인해, 핵심부와 주변부의 급진적 운동들 내에서 게바라주의자들Gevarist Wing이 등장하게 되었는데, 이로 인해 급진 좌파와 소련 공산당은 심각하게 갈라서게 됐다. 1961년 경에는 브라질 공산당이 무장 투쟁 찬성파와 소련파로 분할됐으며, 이와 유사한 시기에 볼리비아, 베네수엘라, 페루, 칠레, 그리고 콜롬비아의 운동들 내에서 이런 분할이 발생했다. 몇 년이 지난 이후, 이와 똑같은 일이 미국의 <블랙 펜더 당>, 독일의 <독일 사회주의 학생연맹 Sozialistischer Deutscher Studentenbund>(SDS)에서 발생했다. 비록 이 당시 공산주의자들의 입장은 소련이 아니라 마오주의였으며, 무장 투쟁 찬성파 내에도 맑스주의자들이 있었지만 말이다.

전략과 전술상의 차이 외에도, 소련 공산주의와 새로운 급진주의 간의 간극에는 새로운 차원도 있었다. 이는 ‘새로운 사회주의적 인간의 창출’을 위해 인간을 변혁시키라는 체의 요청으로 정리됐다. 오랫동안 소비에트 맑스주의는 사회의 기본 구조를 변혁시키면 필연적이고 자동적으로 문화적․사회적 변혁이 찾아온다고 생각해 왔다. [하지만] 새로운 급진주의는 정치, 경제, 문화를 변혁시킴과 동시에, 사회 구조 및 개인 주체를 변혁시킬 것을 요구했다. 추상적으로 볼 때, 비혁명적인 객관적 조건들은 변화될 수 없는 것이라는 주장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기 거부했다는 점은, 새로운 급진주의가 일상 생활의 변혁은 ‘혁명 이후’에까지 미뤄져야만 한다는 주장을 받아들이기 거부했다는 점과 유사하다. 제3세계의 게릴라들과 핵심부의 급진적 운동들은, 직접 행동과 문화적―정치적 혁명(여성해방을 포함하여)을 요구했다는 점에서 이론적으로 긴밀히 묶여 있었다. 또한 실천적으로는, 공동의 적(미 ‘제국주의’)과 공동의 경쟁자(소련식 ‘급진주의’)에 대항해 단결을 이뤄냈다. 쿠바가 꾸준히 소련과 유대 관계를 맺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혁명적 운동들은 미국의 침공과 경제 봉쇄 이후에까지, 공산주의자들의 지도도 받지 않았고 소련과 유대 관계를 맺지도 않았다. 또한, 쿠바는 신좌파에게 강력한 자극을 주기도 했다. 가령 피델 카스트로7)의 연설문이 미국에서 출간됐을 때, 북아메리카의 한 편집자는 다음과 같이 썼다.


쿠바의 사례는 신좌파에게 영감을 주었다. 단호한 민중들과 강력한 지도력이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군사력을 패배시킬 수 있었던 것이 그 살아 있는 증거이다. 투쟁을 강조하고, 새로운 사회와 ‘새로운 인간’이라는 전망을 던져주는 피델의 연설은, 쿠바인들뿐만 아니라 오늘날 미국의 젊은이들에게 전달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이 책의 헌사는, 그 역사적 가능성을 이해하는 데에 있어서 당당하리마치 낙관적이었다. “북아메리카인들에게 혁명의 완수 가능성을 전해준 쿠바인들과 베트남인들에게, 그리고 이 가능성을 이용하고 있는 북아메리카의 젊은이들에게 이 책을 바친다.” ‘신좌파의 상상력(세계적 차원에서 본 1968)’, 조지 카치아피카스 지음, 이재원․이종태 옮김.

 

 

1) ‘포코(foco)’는 스페인어로, ‘중심’ 혹은 ‘중핵’을 의미한다. 게바라는 특정한(즉, ‘소수의 헌신적인,’ 혹은 ‘전문적이며 혁명적인’) 게릴라 세포들을 이렇게 불렀다. 이들의 전략은 시골과 산간 지역에 해방구를 형성한 후, 이를 도시에까지 확장시키는 것이었다. 다음을 참조하라. 체 게바라, 편집부 옮김, 「게릴라 전쟁」, 『체 게바라』, 오월, 1988, 103~162쪽.

 

 

2) 이런 운동들이 겪었던 유혈 진압을 ‘현실화되지는 못한’이라는 단어로 표현하는 건, 너무 너그러운 일이다. 하바나에서 열린 <3대륙 회의 Tri―Continental Conference>에서 반복적으로 대두된 무장 봉기 요구(1996년 1월)와 1967년의 OLAS 회의에 대해, 라틴 아메리카 정부와 미국은 신속한 대응을 취했다. 1967년, <미주 기구 Organization of American States>는 쿠바를 비난했으며, 쿠바에 대한 경제 제재를 주창했다. 유일한 조정자이자 군사 원조의 출처(그 당시에)였던 미국은, 파나마에 남부 사령부를 건설했다. 1968년경에는, 파나마에서 반게릴라 훈련을 받은 특수 군대가 52차례나 작전을 수행했는데, 1966~1967년에 이 군대는 과테말라, 베네수엘라, 니카라과는 물론, 볼리비아에도 개입했다. Houtart․Rousseau, op. cit., pp.206~207.

 

 

3) Carlos Marighella(1911~1969). 브라질의 도시 게릴라. 마리겔라는 1965년 2월 <10월 8일의 혁명 운동 Revolutionary Movement of October 8>(MR―8)을 결성, 그 다음 해에 결성된 <인민의 혁명적 전위 People’s Revolutionary Vanguard>, <민족 해방을 위한 행동 Action for National Liberation>과 함께 도시 게릴라전을 감행했다. 1969년 12월 30일, 경찰의 매복에 걸려 사살당했다. <붉은 여단>과 <적군파> 등이 그의 저서인 『도시 게릴라 소책자 The Minimanual of the Urban Guerrilla』(1969)를 공식 훈련 입문서로 사용했다.

 

 

4) 毛擇東(모택동; Mao Zedong, 1893~1976). 중국의 혁명가. 이른바 ‘대장정 Long March’(1934~1935)을 통해서 일본군을 패퇴시켰으며, 결국 1949년에 중국인민공화국을 세웠다. 마오는 자신의 게릴라 이론과 문화 대혁명(1966~1969)을 통해, 제3세계는 물론이고 유럽에도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5) Vo Nguyen Giap(1912~ ). 베트남의 군사 전략가이자 정치가. 1939년 9월, 중국에서 호치민을 만나, 그와 함께 ‘베트민’을 결성했다. 그 유명한 ‘디엔비엔푸’ 전투나, ‘구정 공세’가 모두 그의 주도 아래 이뤄진 것이었다. 그는 『큰 승리, 큰 임무 Big Victory, Big Task』(1967) 등과 같은 저서를 통해 군사 전략과 게릴라 전술을 체계화했다.

 

 

6) Régis Debray(1940~ ). 프랑스의 철학자. 1967년 3월, 체 게바라와 게릴라 활동을 하기 위해 볼리비아로 갔다. 이때에 드브레는 라틴 아메리카에서의 무장 투쟁과 정치적 투쟁을 기록한 『혁명 속의 혁명? Révolution dans la révolution?』(1967)을 발간했다. 이 책은 게바라의 ‘포코 이론’을 체계적으로 분석한 내용을 담고 있다. 그의 저서 중, 『이미지의 삶과 죽음 Vie et mort de l’image』(1994)이 국역되어 있다.

 

 

7) Fidel Castro(1926~ ). 쿠바의 대통령. 1956년 12월 2일, 약관 32세의 나이로 체 게바라와 같은 동지들과 쿠바 해안에 상륙, 12명의 게릴라들을 이끌고 시에라 마에스트라 산에서 게릴라 투쟁을 전개했다. 1959년 쿠바 혁명을 완수, 그 해 2월에 수상 자리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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