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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

  • 등록일
    2006/12/11 15:21
  • 수정일
    2006/12/11 15:21

나는 기억하기 싫은 것들에 대하여,

글을 쓰지 않으려고 했고, 말하지 않으려고 했고,

그 어떤 순간에도 남에게 보여주지 않으려고 했다.

내 이야기들은 철저하게 암호화하고,

어느 순간 그 암호들을 되돌아보며...

가끔 그 암호를 나조차 기억하지 못할때쯤 되면,

어느 순간부터의 기억을 다 하찮은 것으로 취급하여,

쓰레기통에 쑤셔넣어버릴 휴지처럼...

어느날 새벽에 구석에 쳐박혀서 모두 태워 버린 추억처럼...

그 까만 연기 앞에서 울어야 할 것 같은데, 눈물 한모금 나지 않았던 순간처럼...

그렇게 내가 만들어냈던 흔적을 없애버렸다.

 

내가 나의 기억을 그렇게 다루는데,

남이 나의 기억을 비슷하게 다룬다고 해서

내가 그를 어떻게 비난할 수 있겠나...

그런데, 또 남이 나에게 비난하는 건 죽어도 싫었던 이 성깔하고는...

 

 

어린 시절의 방학숙제로 일기를 쓰던 때 이후로

잠깐동안 정말 혼자만의 의지로 매일매일 일기를 쓰던 때가 있었다.

나중에 누구에게 보여줄 생각을 하면서,

그 기대감을 혼자 즐기고, 또 혼자 즐기고...

그러다가, 결국 그 누구에게는 보여주지 않았다.

그리고 이제는 나도 그때의 내용을 기억하지 못한다.

다만, 그때 내가 일기를 썼다는 것만을 기억할 뿐이다.

 

몇년을 잠궈두다가, 없애버리겠다고 마음속으로만 생각하다가,

어느날 정말로 작정하고 없앴다. 그래야 할 것 같았다.

내가 사랑하던 시간도, 또 내가 먼저 단절을 일으켰던 순간도

그렇게 하면 없어질 거라고 생각했을 지도 모른다.

말하지 않을 뿐이었다고, 말할 수 없었을 뿐이었다고,

그리고 이제 우리마저 기억하지 못하면, 그만이지 않냐고...

그렇게 생각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결코 그만이지는 않았던 게다.

내게 그 사람과의 추억은 실존의 문제에 근접하여 다가왔고,

나의 정체성을 스스로 추궁하면서 견딜 수 없게 만들었다.

내가 오직 당시의 현재적인 자신안에만 갇혀버리고 나니,

어떤 문제도 해결되지 않고, 고통만 커져갔다.

지나간 일들은 이제는 시간적 흐름을 연결할 수 없을만큼

잔상으로만 남아서 제대로 기억하지도 못하면서도

나는 또 그것에 아파하고, 지쳐버리고, 끊임없이 도망가기에 바빴다.

더이상 내 삶을 기억하고 싶지 않다는 자책이

몇 번이고 자살에 대한 생각을 키워내기까지 했다.

 

(어느날부터

내 머리속에서 자살에 대한 생각이 없어졌는데, 그 이유는

'살고 싶어서'가 아니라, '죽어도 소용없는 문제라서'였다.)

 

 

그런데,

진보블로그를 알게된 후부터 지금까지

나는 최소한 3번 이상의 전환점을 맞이했다.

(이거 너무 진보네에게 아부하는 듯한 느낌인데...)

 



첫번째는 블로그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블로그는 그냥 블로그일 뿐이지만,

그것을 통해, 여전히 내가 나를 확인하고 싶어하고,

또 누군가에게 나를 보여주고 싶어한다는 것을 느꼈다.

 

두번째는 블로거들을 오프라인으로 만나는 뻔뻔함을 가졌다는 것이다.

여전히 내 안에 크게 자리잡고 있던 두려움을 하나씩 깨뜨려가는 작업이었다.

(이것 역시 끝나지 않는 일이고, 앞으로도 어려운 일들이 많이 있을 거라고 보지만...)

여러 사람들에게 직접, 그리고 더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다는 것은

나에게 아주 기쁘고 즐거운 일이었다.

 

그리고, 세번째는... 바로 지금이다.

여태까지의 내가 남기던 기록도 나에 대한 이야기이지만,

나를 다시 돌아보려는 의지가 담겨 있던 것은 아니었다.

그냥 사람들도 한귀로 듣고 한귀로 흘려버렸으면 좋겠고,

나도 내 이야기를 그렇게 다루고 싶었던 것이다.

 

그런데, '우리'라는 이름으로

나보다 나를 더 기억해주는 사람을 보고, 너무너무 미안했다.

부채의식 같은 것이 생겼다.

내가 그 사람을 기억해야겠다는 생각이 아니라,

나도 나를 기억해야겠다는 것이었다.

이제서야, 내게도 다시 일기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이제는 매일 쓰는 것에 얽매이지는 않을 것이다.)

 

시간이 가도 우리가 행복해하던 순간들을 떠올릴 수 있도록.

 

그때가서 행복하지 못하다면,

지나간 기록을 보고 반성하고 평가하여, 좀 더 행복해질 수 있도록.

처음 같은 마음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내게 다시 이런 거 없을 줄 알았는데..ㅋ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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