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센치함

  • 등록일
    2007/01/07 02:29
  • 수정일
    2007/01/07 02:29

오늘 여기서 자는 것을 마지막으로

이 지긋지긋한 집을 떠난다.

이 집 자체를 떠나는 것보다 이 동네를 떠나는 것이 더 큰 의미가 있다고 본다.

그런데, 속이 시원할 것만 같았던 것이, 그게 또 그렇지만은 않다니...

 

99년 2월부터 이 동네에서 살기 시작하여,

중간에 2년동안 군대 다녀온 거 빼더라도 거의 6년을 이 동네에서 살았다.

 

 

그때 내가 살던 집

처음 1년은 몇수생들의 수능시험 준비현장이었고,

그 다음 1년은 아직 나와 같은 집에 머물러 있는 불편한 인간들의 연애현장이었다.

그 다음 1년은 내 곁에 아무도 없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게 해주었고,

그 다음 1년은 내가 어디론가 도망가고 싶을 때의 마지막 도피처였다.

 

그 4년동안에는 나를 알던 사람들 중에 그 집을 알던 사람은 몇 명이나 될까?

처음 1년에는 수능시험 준비현장에 협조하겠노라고, 집에 사람들을 못오게 했다.

그 다음 1년은 불편한 인간들의 연애현장때문에, 내가 집에 잘 들어가지 않았다.

(지금 나보고 나가라고 하는 이 인간들, 그때를 다 잊은 거겠지.)

그 다음 1년중에 한달은 어떤 친구가 짐싸들고 내 집으로 쳐들어와서 살아버리는 바람에

또 집에 잘 안들어가게 되었고,

7월에 집중호우로 수해를 입은 뒤에는 집을 아예 버려둔 채로 스타만 하면서 살았다.

그것이 이듬해 4월까지 이어졌다.

버려두었던 이 집을 대충 보수해서 살게 된 후에도,

한참동안은 사람들이 내 집에 오는 것을 꺼려했다.

아니, 내가 사람이라는 것들을 기피하고 있었다.

 

2003년이 되면서, 내가 보드게임에 열광하기 시작했고,

그제서야 보드게임을 할 공간으로서 내 집을 사람들에게 개방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어떤 친구와 같이 살게 되었고, 그 친구를 생각해서

놀때 놀더라도, 내 집에서 사람들이 자고 가는 것은 허용하지 않았다.

 

2004년 초에 그 친구가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가게 되었고,

이때부터는 술을 마신 몇몇 친구들이 내 집에서 가끔씩 자고 가기도 했다.

그리고 나는 그해 8월에 입대하면서, 그 집을 정리했고,

전역한 후에는 오늘까지 살고 있는 이 집으로 오게 되었다.



오늘 애인님과 이사계획을 이야기하면서,

애인님이 얼마 되지도 않는 짐을 나르는 거 도와주겠다는 것을 거절했다.

물론 애인님이 이곳까지 올라면 엄청 멀기도 하고, 꽤 힘들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리고 멀리 온 것에 비해서, 할 수 있는 일이 많지도 않을 것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꼭, 그것때문만은 아니었다.

 

 

집은 나에게 의미가 매우 큰 공간이다.

사람들이 내 집에 오는 것을 꺼려했던 것은 그때마다 다른 이유들이 있었지만,

한가지 공통된 이유가 있었다. 그건 바로, 나를 보여주기 싫었던 것이었다.

 

나는 나 자신이 사람들과 많이 다르다고 생각하면서 살아왔다.

다르다는 것이 나쁜 것은 아닌데도, 나는 그 '다름'에 떳떳하지 못했다.

나에게는 그것에 대해 떳떳한가의 질문을 결코 던지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것에는 인색했다.

 

내가 보여주는 것은 화투나 스타크래프트의 전략과도 같은 것이었고,

보드게임의 초반 운영법 같은 것이었고, (차라리 그런 게 더 쉬웠다.)

꼭 내가 말하지 않아도 되는 정치적인 구호들이었다.

나의 마음, 나의 집, 나의 생각... 이런 건 내 안에는 존재하지만,

밖으로는 결코 나가지 못하게 할 온갖 핑계들에 둘러싸여 있었다.

 

반대로 이야기하면,

내가 내 집을 어떤 방식으로 공개하지 않았는지,

그리고, 내가 다시 공개하게 된 시점과 그때의 관계들을 놓치지 않고 기억하고 있는 건

내가 그때의 사람들에게 가졌던 진심과 한계를

아직도 동시에 붙잡고 있다는 의미가 될 것이다.

 

 

기억의 고리를 하나 꺼내자면,

2004년의 어느 봄날 쯤에, 어떤 친구와 내 집에서 같이 잤는데,

다음날에도 이 친구가 내 집을 떠나려고 하지 않는 것이었다.

그 친구는 계속 드러누워서 TV를 보며, 당시의 6년째 애인의 전화도 대충 받으며,

내 집이 편하다고 하면서 좋아라했다.

그게 내게 어떤 의미가 될 지 그 친구는 알고 말했을까?

 

그 해에 여러 친구들과 싸웠는데, 유독 그 친구만은 그 싸움을 피해갔다.

내가 보여주는 것이 어떤 것인지 모르더라도,

내가 관여하고 있는 그 무엇에 대하여

자신의 느낌으로 긍정하던 친구와는 싸울 일이 없었던 것이다.

내가 군대를 간 뒤 어느날 밤에 서울로 무작정 도망나와서

그 친구를 찾아간 적도 있다.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아무 이야기라도 좋으니...

그 후에 내가 그 친구에게 동성애에 대하여 처음으로 이야기하게 되기까지

그리고 이 블로그를 시작하기 전까지, 그 친구는 내가 유일하게 열어놓은 채널이었다.

물론 지금은 내게 좀 처참한 결론만이 남아있지만...

 

 

어쨌든 이사갈 집은 정해졌는데, 아직 애인님에게도 보여주지 않았다.

(이건 물론 의도한 것은 아니었으나...)

이사할 때 보여줄 것이고, 또 앞으로 자주자주 드나들 것이다.

내가 살고 있는 곳을 보여준다는 것이,

그리고 내가 애인님과 같이 살고 싶어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이해해 주길 바라는 마음에서 이 글을 쓰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짐을 같이 나르는 것을 거절한 이유는

지금은 기억하기조차 싫어져 버린 곳에서 그 짐이 출발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 출발조차 내가 기억하기 싫은 만큼,

누구에게도 보여 주고 싶지 않고, 누구의 도움도 받고 싶지 않다.

 

나는 아직까지도 두려움이 있다.

내가 선택한 집을 보고 애인님이 실망할까봐 겁나기 때문이기도 하고,

나를 좀 더 열어서 보여주는 것에 대한 막연한 불안감이 엄습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그 불안감에 비례하여,

이번의 이사로 인한 나의 변화가 커다랗게 나타날 것으로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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