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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816

조심스럽다.

내가 뭐라고 아무도 기억하지 않고 넘어가는 오늘을 기어이 기억해내는가.

아니, 기억할 뿐만 아니라 글씨로 남기는가.

기실 적지 않은 사람들 또한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그저 이제 더이상 어찌 기념해야 하는지 막막한 느낌일 것이다.

그러리라 믿고 싶다.

설마 망각의 대상으로 여기지는 않겠지...

 

20년전 오늘은 박현채 선생이 가시기 전 마지막 날이다. 내가 왜 그를 기억하는가.

 

아마 그의 삶과 글이 자아내는 그리움과 회한 때문일 것이다.

그 누구의 말처럼 '창백한 지식인들'이 박현채들을 밀어낸 적이 있었다.

그리하여 사상과 이론의 '과잉' 속 부재의 시대가 도래했었다. 

더이상 우리는 스승을 가질 수 없었다.

아니, 이제야 스승을 가질 수 없었음을 알게 되었다.

 

그 뿐인가?

박현채들이 밀려났을 때, 창백한 지식이 횡행했을 때,

함께 밀려난 이들은 민중이었다.

역사가 없는 지식은 그토록 무책임했던 것이다.

민족적인 것은 그래서 민중적인 것이라고 박현채는 강조했던 것이다.

 

역사가 없는 이야기는 감동이 없다.

거기엔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관념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관념은 주체를 만들어내지 못한다.

나는 박현채의 글을 통해 내가 역사 없이 현실만으로 세상을 바라봤음을 반성했다.

현실주의였으나, 역사가 없었으니 관념주의였던 것이다.

그렇게 스승을 만난 것이다. 그제서야...

 

앎은 곧 실천이고, 실천은 곧 앎이다.

'민족적인 것이 민중적인 것이고, 민중적인 것이 민족적인 것'이라는 말은 이렇게 번안된다.

따라서 실천의 구체적 힘을 사유하지 않는 앎은 진정한 앎이 아니다.

그러나 그런 허위의 앎은 곧 식민지적 지식체제가 원하는 것일테다.

게다가 역사적 앎을 부정하는 현실주의적 실천은 진정한 실천이 아니다.

그러한 실천은 궁극적으로 민중에게 있어서 자기 파괴적이다.

 

그렇게 투철한 앎과 실천의 변증법적 통일을 사유했지만,

박현채 선생은 이미 망각되었거나, 거의 망각될 위험에 처해 있다.

'창백한' 지성의 비극을 미리 인식하고 예언했지만,

그 자신의 비극은 어떻게 설명되어야 하나?

 

그의 말이 전달되지 않았듯이, 지금 나의 말도 전달되지 않을까?

그의 말은 내게 전달되는가?

그의 이름을 불러 본다.

그의 혼을 불러 본다.

 

막다른 길이었습니까?

 

나는 당신이 그 길에 어떻게 걸어 도달했는지 먼저 조사해보고자 합니다.

당신의 혼과 함께의 역사 속 희생당한 민중의 혼을 불러내어 다 같이 굿판을 벌이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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