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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자와 식민-지리-역사유물론

사실 현대화는 어떤 의미에서 고전의 부재화 또는 소외/대상화의 과정이기도 했다. 특히 '식민적 현대성'에 사로잡혀 여전히 빠져 나오지 못하는 남한의 현실에서 기본적으로 이는 문제화되지 않지만, 종종 중국과의 진지한 대비에서만 자신의 공허함을 징후적으로 발견하게 되는 듯 하다. 마치 꿈과 같이 잔상만 남고 사라지기 쉽지만...

 

시간은 공간을 뚫을 수 있다. 그렇지만 일단 뚫어버리면 만사만물은 생명을 잃게 된다. 그래서 우리가 진리를 인식함에는 끝이 없는 것이다. 

 

조정로 작가가 내놓은 <장자>의 '혼돈칠규混沌七竅'에 대한 나름의 해석이다. 사실 조정로 작가는 아주 오랫동안 9월 31일이라는 생일을 가지고 살아 왔다. 태어난 해는 1949년... 그래서 "신 중국이 반드시 겪어야 하는 곡절과 시련을 거부할 이유가 내게는 없다"고 조정로 선생은 말한다. 그 곡절과 시련은 무엇이었을까? 기본적으로는 역사 속에서 '우파'로 몰렸던 부친, 그러한 배경 속에서 중학시절부터, 심지어 지금까지도 의심과 비판의 눈길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자신의 아픈 경험일 것이다. 그것은 '불확실성'이 낳는 모순이다. 9월 30일이나 10월 1일이 아닌, 9월 31일로 살아온 그의 삶은 바로 이 '불확실성'을 웅변하고 있다. 9월 31일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은 생명의 근원으로서의 혼돈이 갖는 풍부성을 보존하는 것이다. 그것이 고통스럽더라도... 

 

이를 장자의 말을 대비시켜 의미화하면 다음과 같을 것이다. 생명의 근원으로서의 혼돈은 공간성을 의미하고, 시간에 의해 파편화된 공간은 더이상 생명을 지속시키는 근원으로서의 의미를 갖지 못하게 된다. 다시 말해서 시간적 균질화(탈역사화)는 공간적 균질화(무차별화/탈주체화)를 가져온다는 뜻이다.

 

이와 관련한 신영복 선생님의 해설도 있다. 참고할만 하다. 

http://www.pressian.com/news/article.html?no=41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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