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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간을 앞두고... 단상.

중국 대륙의 작가가 '문화대혁명'을 핵심 주제로 삼아 쓴 소설을 번역했다. 몇 가지 정리할 사유의 고리들이 있다.

 

우선 우리는 왜 중국 대륙의 문학 작품을 번역해서 읽는가. 여기에 중국 대륙이라는 타자, 그리고 그곳에서 창작된 소설 작품이라는 두 지점이 문제시된다.

 

소설은 중국 대륙 나름의 역사를 살아온 민중의 삶을 문제적으로 형상화하고 있다. 일차적으로는 중국 내부에서의 '망각을 거부'하는 문학적 실천이라는 의미를 갖는다. 그러면 우리에게 이 소설은 분명 낯선 것일테다. 우리가 아는 중국 사람의 삶과 역사와는 다른 무엇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기존의 중국 인식의 구도를 흔들게 될 것이다. 

 

그런데 이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라는 문제가 던져진다. 만약 기존의 구도를 따르는 경우에 '중국인은 이렇게 불쌍한 존재였구나'라는 동정론으로 빠지거나, 또는 반대로 '중국인은 이렇게 위대했구나'라는 낭만화로 빠질 수 있다. 둘다 중국인을 기존 관념에 맞추는 독해법이다. 사실 이러한 독해는 '중국 사람'에 대해서는 무관심하다. 그 사람들을 알고 싶어하지 않는다.

 

왜 그런가? 이유인 즉은, 중국 사람을 '사람'이라는 보편적 범주에 가두게 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기존의 구도는 곧 보편적 시좌였다. 그래서 사람은 어떻게 평등할 수 있는지라는 질문이 제기된다. 만약 사람을 보편의 범주, 다시 말해서 '세계 내의 존재', 또는 '세계에 내 맡겨진 존재'로 간주한다면, 얼핏 보기에 똑같은 인간으로 간주하는 것 같고, 그래서 '평등'한 접근 같아 보이지만, 그러한 접근은 사실상 '추상화된 보편 인간'에 '구체적 삶을 가진 인간'을 억지로 꿰맞추는 것이다. 그러한 인식틀에서 중국의 사람은 존재론적으로 '삶'을 갖지 않는다. 따라서 '역사'도 갖지 않는다. 

 

그렇게 '중국 사람'을 사람으로 대하지 않는 우리는 '우리'를 사람으로 대할 수 있을까? 또는 우리 스스로 '사람'이 될 수 있을까? 사람을 사람으로 대한다는 의미는 그 사람을 추상적 범주로서의 사람에 맞추어 무차별화하지 않는 것이다. 사람은 구체적인 사람이기 때문에 차이를 갖는다. 차이를 갖는 구체적인 인간만이 역사를 창조한다. 역으로 무차별화된 추상적 인간을 전제할 경우, 그러한 인간은 역사를 갖지 못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역사가 없어지는 것은 아니니, 사실상 지적인 기만 행위가 되어버린다.

 

그래서 우리가 '중국의 사람'에 대해 열려진 관심을 갖는다면, 그것은 하나의 말 걸기가 되어야 할 것이다. 말을 걸고, 대화를 하려면, 우선 대상을 고정화하지 않아야 한다. 그런데 그것은 단순히 대상에 대한 태도의 문제는 아니다. 말을 걸고, 소통을 하려면 결국 자신이 열려 있어야 한다. 그럼 자신을 개방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그래서 자기 성찰이 문제가 된다.

 

우리가 진지하게 중국인의 삶에 대해 관심을 가지려면 중국인에 대한 이해와 인식이 어떻게 나의 삶에 의미있는지 성찰적 고민이 전제되어야 한다. 그래서 세계는 울퉁불퉁하게 열린 채로 주어진다. 역사적 다원주의는 그래서 단순히 평면적 다원주의, 즉 상대주의와 다르게 된다. 세계와 민족/사회 사이에서 권역적 인식의 매개적 의미를 강조하게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렇게 될 때, 중국인의 삶은 분명 우리의 삶과 다르면서도 사실 우리의 삶을 대신 살았던 측면이 확인되고, 결국 우리 자신의 역사적 망각을 확인하고 성찰하는 계기가 된다. 

 

중국은 이미 낯설지 않다. 눈으로 보면 그렇다. 본다는 행위는 문자화되지 않은 풍부한 것을 접하는 계기가 되지만, 역으로 보이는 것이 가진 무한한 풍부성 때문에 일정한 시각에 의해 편집되어 인식된다. 그래서 아무리 중국을 보아도 그것은 매우 수동적인 '보는' 행위가 된다. 보고 싶은 것만 보는 것은 사실 그렇게 수동적인 행위인 것이다. 그러나 글로 보는 중국은 어떨까? 아마 글도 둘로 나뉘지 싶다. 사실 풍부성과 구체성에 대한 인식을 제한하는 보는 행위의 수동성에는 일정한 지식이 전제되어 있다. 아마도 중국 사람에 대해 관심을 갖지 않는 수많은 지식들이 하나의 시좌로 그렇게 제공되어 있다. 그리고 이러한 탈인간적 지식은 곧 실천과 유리된 지식이며, 나아가 주체의 능동성을 박탈함으로 인해 역으로 실천을 제약하는 지식이 된다.

 

그러나 문학은 다르다. 이론과 시좌에 구속되어서는 문학이 형성되지 않는다. 문학은 본래적으로 문화의 표현이며, 말 걸기의 시도이기 때문이다. 문학은 이야기다. 따라서 이야기를 듣는 사람은 그것의 내용과 형식 등에 대해 선택하지 못한다. 오히려 '보고 싶은 것만 보는' 행위에 비해 훨씬 수동적인 것처럼 보이는 행위가 '이야기를 듣는' 행위이다. 그러나 누군가의 이야기를 듣는 행위는 역시 말 걸기를 위한 예비 작업이기 때문에 그만큼 자신을 상대방에게 내줌을 통해 자신의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준비를 하게 된다. 오히려 능동적인 행위다.

 

그래서 결국 다시 왜 우리에게 '중국'이고, '중국의 사람'인가 라는 질문으로 되돌아온다. 아마도 문학에 대한 평론 또는 비평이 가능하다면 그것은 바로 이와 같은 질문에 대한 논의에서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문학 비평은 문학의 영역이 아니라 이론의 영역이다. 우리에게 말을 걸고 있는 작품에 대해 그것을 순수하게 말 걸기로 받아들이고, 중국 사람에 대한 우리의 이해의 노력이 어떻게 우리 자신에 대한 이해로 귀결될 수 있는지를 이야기해야 한다. 그래서 문학 비평의 영역을 이론 일반의 영역에서 분리하여 문학 작품 옆에 설정하는 행위는 겉으로 보기에는 문학의 독자성을 주장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이론이 문학의 자율성과 능동성을 외재적으로 규정한다는 의미에서 反문학적이다. [따라서 '민족 문학'은 본래적인 흠결을 갖는다. '민족 문학'이라고 명명하는 순간 그것은 문학이 아니라 이론이 된다. 그래서 '민족경제'의 짝은 '민중문학'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문학에 대한 진지한 비평은 사실 문학의 내용에 대한 비평은 아닐 것이다. 오히려 문학이 적극적으로 말 걸고 있는 지점으로부터 기존의 인식의 구도 자체의 맹목 지점을 확인하는 노력이 진정한 비평일 것이다. 그리고 그 말 걸고 있는 지점은 궁극적으로 실천지향적이라는 의미에서 단순한 기존 인식의 내용의 문제로 구성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러한 맹목을 재생산하는 어떤 형식적 틀 자체까지 문제시하는 미학적 비판이 예술적으로 실천되어 있을 것이다. 감동의 성패는 바로 이 실천에 달려 있다.

 

그런데 이번에 출간될 작품은 번역 작품이라는데서 좀 더 복잡성을 띠게 되는 듯 하다. 국내 작품과 달리 '번역자'를 거치게 된다는 의미에서 매개 고리가 하나 더 추가된다. 물론 작품이 번역을 거치기 때문에 기본적으로는 민족/사회적 담론 공간에서 논의되고 효과를 낳는다는 점에서는 국내 작품과 차이가 없다. 그러나 번역자의 개입적 실천이 일정하게 바탕에 깔려 있다는 측면에서 보면 저자의 말 걸기에 역자의 말 걸기가 겹쳐진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저자의 말 걸기가 특정한 대상을 설정하고 있기 때문에, 세계라는 보편으로 직접 나아가지 않지만, 한국어라는 매개를 통해서 오히려 구성적 보편성에 참여하는 기회를 가질 수 있게 됨을 말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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