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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028 누구의 어떤 위기인가.

 

다시 '민주'를 중심으로 뭉치는 분위기다. 저들에 의해 빼앗긴 '민주'를 되찾아 오자는 것이다. 문제는 '민주'를 빼앗긴 것이지, '민주' 자체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듯 하다. 우선은 원칙론적이고 이론적인 비판이 제기되어야 한다. 신식민성을 문제화하는 입장에서 다음과 같은 비평이 가능할 것이다. 물론 이와 같은 비평은 주체적 지식사상의 언어와 개념이 아직 재획득되지 않은 상황에서 그와 같은 언어와 개념으로 재담론화되지 못했기 때문에 일면적임을 부정할 수 없다.

 

우선 작금의 '위기' 상황에서 민주개혁 세력과 그에 기생적인 자유주의/반공주의 좌익('정의당' 등의 의회주의 좌익)은 역사성을 갖는 매판적 보수우익의 위기를 기회로 아주 쉽게 스스로의 죄값을 망각하고, 성찰 과제들은 또 언제 있었냐는 듯 훌훌 털고, 다시 대오 앞에서 선동가가 된다. 오랜만에 자신의 역할을 다시 찾은 것처럼 흥분된 모습이 역력하다. 그러나 나는 무척이나 불편하다. 결국 또 얼마나 많은 에너지를 낭비하게 될지 매우 걱정된다. 촛불시위가 다시 떠올려진다. 민중은 다시 그들의 잔치를 위한 포퓰리즘적 동원 대상이 될 것인가.

 

정세의 변화는 무엇인가 무너졌기 때문에 발생한 것이었다. 우선 신식민적 대의 정치 내부에서 어떤 인내심과 자부심의 최저선이 무너졌던 것 같다. 이를 '봉건'이라고 불렀다. 대통령의 비서실장이라는 자가 남의 말 하듯이 내뱉은 '봉건'이 부메랑처럼 되돌아와 버렸다. 이제 '현대'적 정당 정치의 자부심과 인내심의 최저선이 무너지고, 좌/우를 막론하고 다 같이 이 '봉건성'에 대해 비난을 퍼부으며 뒤돌아 선다. 그들 스스로 참여해 만들었던 '봉건'적 체제에 대해 간단히 부정하는 것만으로도 다시 '민주'를 위한 전사가 된다. 잡음은 있겠지만 큰 틀에서 정치 내부에 결정적 분기나 모순은 아직 보이지 않는다. 없을 가능성이 높다.

 

무너진 최저선은 과거에 '민주'로 쟁취한 어떤 것 이상을 의미하지 않을 것이다. 익숙한 어떤 모델을 넘어서지 않는다. 우선 형식적으로 '민주'를 회복하고, 실질적인 민주를 추구하자는 것이 조금 진지한 접근일 수는 있다. 그러나 이는 형식적 민주와 실질적 민주라는 단계적 접근(이는 '권리'와 '구조' 담론와 평행된다), 근래의 담론 가운데는 이른바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와 거의 일치한다. 그러나 이는 역사와 현실 인식에 대해 미미하나마 진행된 기간의 탈식민주의적 성찰과 반성을 전혀 반영하고 있지 않다.

 

이를 요약하면 이렇다. 20세기를 세 단계, 즉 신식민 이전의 일제 식민, '민주화' 이전의 미제 신식민, 그리고 '민주화'이후의 미제 신식민으로 나누어 보면, 이른바 '민주화'는 사실상 신식민 매판/반봉건 체제가 상대적 자율성을 획득하였는지 여부를 의미한다. '민주화'는 신식민적 수탈 체제의 기초가 매판 대리자의 폭압에 있었던 '독재' 시기에서 '선거 제도'의 안정성을 바탕으로 자율성을 확보하는 '민주화' 이후의 시기로의 전환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가상적 '국가성'의 획득이 중요했고, 그 핵심 요소들이 '경제성장', '선거 민주화', '유엔 가입' 등으로 제시되었으며, 주지하다시피 이는 종주국 세력권에 의해 대대적으로 '선양'된 바 있다.['권리' 및 '민주' 담론의 맹목성에 대해서는 앞서 '역사적 공산주의의 인간론'에서 개괄한 바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번처럼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역사적 개방성'의 공간에 진정한 의미에서 '사상해방'과 '민중교육'은 출현하지 않을 것 같다. 이는 '개방성'이 가능성의 차원에서 이해될 뿐이며, 가능성을 구체화하기 위해서는 '적'의 위기에 따른 기회주의적 편승을 넘어 그 '위기'의 공간을 주체적으로 흡수/합병할 수 있는 준비가 선행되어 있어야 한다.[모택동의 '근거지론'] 사실 제대로 준비된 바가 없는데 사상해방을 기대하는 것이 염치 없기도 하다.

 

'봉건'을 역사적으로 체화하고 있는 매판적 보수우익 세력의 패착과 위기는 '현대'를 식민주의적으로 체화하고 있는 민주개혁의 '헌신'적 노력으로 일정하게 극복될 가능성이 높다. 무너졌던 '최저선'이 그 기준이 될 것이다. 그 '최저선'이 무너진 것이 마치 모든 문제들의 원인처럼 보이는 착시효과도 있을 것이다. 박근혜 정권하에서 벌어진 모든 문제가 마치 그 '최저선'을 지키지 못해서였다는 기만적인 논리가 의외로 크게 세를 형성할 것이다. 물론 이러한 정세에 숟가락을 올리는 것이 마치 적극적 개입인 듯 착각하는 자유주의적 좌익들의 기회주의적 행태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늘 그랬듯이 기회주의는 기생성을 의미하고, 결국 자기만족적 평가로 정리되기 쉬울 것이다.

 

그런데 아마도 우리가 읽지 못하는 사이에 보수우익 정권은 신식민주의적 '현대' 정치의 '매판성'의 유지를 핵심적 목표로 삼고 주도면밀하게 때로는 아주 큰 유연성을 발휘하면서 이를 관철해 나갈 것이다. '주요모순' 개념을 버린 후부터 우리는 이를 분석하지 못하고 있다. '국민국가'를 기반으로 한 자폐적 인식론으로는 이러한 관계적 차원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 출현하고 있는 '비선실세'와 박근혜를 버리는 행위는 그들이 이러한 '매판성'의 유지에 장애가 될 수 있음을 알고 미리 취하는 예방적 조치로 보인다.  그리고  이 조치를 잘 수행하기 위해서는 최대한 '박근혜'와 '최순실' 등의 '기이성'과 '비정상성'을 부각해야 한다. 미디어와 정치권은 이를 훌륭하게 수행하고 있고, 이에 기생적인 세력들은 숟가락을 얹고 있다. 수많은 지식엘리트들을 포함해서... 이를 단순히 친자본 또는 친재벌로 설명하는 것은 앞서 말한 '자폐적 인식론'의 좌익적 판본에 불과하다. 역사적 지속성의 맥락에서 정치, 경제, 군사 및 문화 등의 차원이 종합적으로 분석되어야 한다. 

 

이 맥락에서 대의 정치를 구성하는 두 세력을 보면, 보수우익 세력의 형성은 그 뿌리가 식민지 매판에 있기 때문에 적어도 역사적 사회 체제의 부정적 계승이라는 내재적 역사성을 가지는 반면, 민주개혁은 이와의 부정적/외재적 경쟁으로 형성되었다는 점에서 상대적으로 부박한 역사성을 가진다. 후자는 보수우익에 대한 부정적 정체성을 기반으로 한다는 점에서 어찌보면 '신식민' 체제의 필수불가결한 구성 요소로서 신제국주의에 의해 적극적으로 양성된 것이기도 했다. 제한적이나마 신식민 체제의 자기교정 능력 및 자율성의 배경은 이러한 것이다. 그런데 두 세력 모두 기본적으로는 역사로부터 단절되고 민중에게서 괴리되어 있기 때문에, 자기교정 능력이 근본적인 위기를 해결할 능력을 가지지는 못한다. 결국 신식민적 대리정치/대의정치의 결정적 위기가 언젠가 올 수 밖에 없다.

 

'봉건성'을 다시 거론하는 이유는 역사적 사회구성을 단순히 현대성과 대비되는 봉건성으로 본질화하고자 하는 데 있지 않다. 우리가 식민지 상황을 주체적으로 인식하는 과정 속에서 구사했던 '半봉건성'이라는 실천적 개념을 다시 제기하는 것이다. 이는 식민성으로 인해 역사적 모순의 주체적 해결이라는 과제가 제기되었으나 완수되지 못한 상황을 보다 더 적극적으로 주체적으로 인식하고자 하는 창조적 문제설정이다. 단순히 '봉건적인 것'을 제거하는 것, 또는 '현대적인 것'을 도입하는 차원에서 해결을 모색하는 것이 아니라, 내재적인 역사 모순(종축)과 관계적인 현실 모순(횡축) 양자의 동시적 해결을 시도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반봉건'적 모순은 항상적으로 주어져 있고, 주기적으로 폭발한다. 그러나 모순의 폭발은 거의 대부분 우익적으로 봉합되어 왔다. 그 원인이 아직 규명되지 않고 있다. 이는 신식민 체제의 안정성을 역으로 증명하고 있다. 아마도 신식민체제의 핵심원리로서 '지식'과 '교육'을 기초로한 평균주의적으로 원자화된 개체의 양성, 그리고 이에서 연유되는 엘리트주의/포퓰리즘적 공민 사회가 핵심적 메카니즘이 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의 작동을 구체적으로 분석할 필요가 있다.

 

사실상 신식민적 상황에서 매판적 정치경제 기제 자체의 재생산 위기가 아니라면 제국주의의 개입은 매우 소극적이다. 우리는 모순을 정확하게 분석하지 못하게 되면서 모순의 심화 또한 인지하지 못하게 되었다. 이 상황을 주체적으로 인식하기 위한 분석 범주들이 무엇인지 어떻게 운용되는지 여러 차원에서 심도 있는 연구들이 요구된다. 결국 작금 정치 체제의 위기는 어느 정도의 위기일까? 위기는 모순의 폭발이다. 역사적 삶의 양식과 이식된 정치경제 및 지식문화의 괴리가 모순의 핵심 원인이 된다. 그리고 이 모순은 제국주의와 매판 정권에 의해 신식민적 방식으로 관리되고 있다. 현재 우리의 지식사상적 수준에서 이 모순의 양상을 정확히 판단하기는 어렵다. 아마도 아직 식민적 대리인의 자기해결에 맡겨진 상황이라는 차원에서 보면 심각한 위기는 아닐 것으로 보인다. 종종 위기는 의도적으로 과장되기도 한다. 이는 하나의 '교육' 효과를 가지기 때문에 신식민 체제에 의해 장려되기도 한다.

 

그러나 지구적 차원에서 진행되는 정치적 전환이 남한에 가하는 압력이 상당히 상승하고 있음이 느껴지기도 한다. 이는 분명히 진정한 위기의 도래를 암시하는 것이다. 현재 드러난 '위기'의 가상성에 대한 인식이 오히려 진정한 위기의 도래를 인지하고 준비하는 데 큰 도움이 되지 않을까.

 

* '세월호'가 마음에 걸린다. 우리 지식사상계는 세월호를 역사화할 수 있는가? 마치 광주처럼, 세월호를 다시 하나의 기원과 목적으로 삼는 비극이 없기를 바랄 뿐이다. 우리 지식사상계는 '광주'를 탈역사적 기점으로 삼으면서, 광주를 식민적 지식을 위한 사적소유물로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광주를 낳았던 거대한 역사적 전통을 잃어버렸다. 세월호에 대한 우리의 언어가 가진 부박성은 이와 같은 역사적인 원인을 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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