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어 서적의 번역의 경우에 전근대의 사상이나 역사를 다루는 경우 기존의 한자어로 인명과 지명을 번역하고 근현대에 걸쳐있는 부분까지도 같은 방식으로 처리하고 있으며, 현대와 당대의 사상과 역사를 중심으로 다루는 경우 원음주의 표기를 하되 전근대에 대해서는 원음주의 표기 또는 한자음표기로 나뉘어지는 것이 근래의 대체적인 중국어 인명과 지명 등의 고유명사 표기방식인 듯 하다.
기본적으로 원음주의 표기는 전근대와 근현대의 역사적 전환을 파악하기 어렵게 하는 방식이다. 근대로의 전환이 단절적 성격을 갖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는 그렇기 때문에 더욱더 전근대에서 근대로의 전환을 보다 역사에 충실하게 접근하여 밝혀낼 필요가 있다. 여기에서 가장 절실하게 요구되는 것이 모종의 탈식민주의적 방법일텐데, 외부에서 주어진 기존의 방법과 그에 의해 형성된 지식과 재구성된 식민적 역사로는 우리 역사의 전환을 이해하기 보다는 왜곡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원음주의적 표기법은 바로 이렇게 우리 역사의 전환에 대한 지적 작업의 내용과 방법의 식민성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이다.
파농의 '검은 피부, 하얀 가면'을 꺼내서 확인해 보니 헤겔의 대논리학이 아니라 정신현상학을 인용한 부분이 눈에 들어온다. 내가 잘못 들은 것인지 강연자가 잘못 말한 것인지 모르겠다.
"자의식은 즉자적으로도 대자적으로도 존재한다. 그것은 자의식이 또 다른 자의식을 위해서도 존재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자의식이란 인정과 승인을 통해서만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일방적인 행위는 무의미하다. 왜냐하면 뭔가 생산적인 것은 쌍방을 통해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들 스스로를 마치 하나가 다른 하나를 인정하듯이 인정하기 때문이다."
"위험을 무릅써야만 자유를 얻을 수 있다. 그러므로 자의식의 본질적 특성이 완전히 벌거벗은 존재는 아니라는 것, 그 외양을 최초로 만들었던 그런 순진한 형태로 머무르는 것도 아니라는 것, 그리고 삶이 팽창함에 따라 자연스럽게 흡수되는 것도 아니라는 점은 강조되어야 마땅하다."
개체의 주체성 구성의 차원에서 action과 reaction의 통일적 이해는 헤겔을 원용하는 것이 가능할 것 같지만, 지금 문제가 되는 일정한 지속성과 역사적 구조를 갖는 한 사회의 집단적 주체로서의 대중의 action과 reaction은 헤겔의 논의로 설명이 가능할까? 사회 집단의 사회경제적 구조와 정신적 구조의 action의 측면은 결국 마르크스적 변증법이 필요한 것 아닌가? 탈식민주의와 마르크스주의의 결합 가능성은 이렇게 개체와 사회라는 서로 다른 주체를 설정하는 것과 관련되는 듯 하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개념의 변증법이라는 헤겔적 틀을 폐기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단지 인식 주체와 대상이 달라질 뿐이다.
nation에 대한 본질주의/특수주의적 또는 옥시덴탈리즘적 접근이 구체적 현실 속에서 모종의 인종주의/국민주의/국가주의적 위험으로 나타난다면, nation에 대한 포스트식민주의적 비판은 nation의 보편성을 전제함으로 인해 국가간의 역사구조적 차이를 무차별화하는 '이론적 국민주의'를 띠며, 구체적 현실 속에서는 외부적 보편주의와 공모할 위험으로 나타난다.
일정한 보편주의적 근대를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설정하고 계보학적/종적 역사성에 대한 탐구로 진입할 경우 불가피하게 옥시덴탈리즘의 혐의를 갖게 되는 문제로 인해 결국 '근대'는 폐기되는데, 그렇게 갈 경우 본래 탈식민주의가 비판했던 포스트모더니즘과 결과의 측면에서 다르지 않게 된다. 결국 변증법의 부재, 즉 정치성이라는 타자를 고려하는 방법과 기술이 중요하다.
역사에 가정은 의미 없다지만, 전 20세기 냉전이 현실 사회주의 블록의 승리로 끝났다면 남과 북이 어찌 달라졌을까 싶기도 합니다. 그놈의 자본주의 덕분으로, 남한은 미국 일본 없이 저 혼자서도 저런 참상 안겪고 잘 먹고 잘 살 수 있었겠죠? 인권도 쑥쑥 증진되고?
당연히 일인 권력자에 대한 추종을 좋은 것으로 볼 수야 없죠. 그러나 사회주의를 지지한다는 이들이, 20세기 현실 사회주의 국가들은 왜 하나같이 다들 일인, 일당에게 권력을 집중했는가, 그렇게 만든 현실적 조건은 무엇이었나 우리는 그걸 어떻게 극복해야하나 고민 없이 그냥 쟤넨 독재자다 왕조세습이다 피상적으로 욕하는게 책임있는 자세인지는 모르겠네요. 카스트로는 왜 욕 안하는지. 거긴 삼대세습이 아니라 형제세습이니까?
북에 사는 사람들은 참 어리석은 사람들입니다, 저런 극악무도한 체제를 지금껏 지지해온 이유는 그저 철저히 세뇌되었기 때문이겠죠.
식민과 분단의 문제는 이미 문제가 아니라고 여겨지는 듯이 보이는 남한의 사회운동과 진보좌파 지식계의 보편주의적 시좌가 문제의 핵심이라고 보입니다. 이러한 시좌의 적용 대상은 남한을 넘어 북한 그리고 다른 어딘가까지 계속 확대될 수 있습니다. 위험하지요. 물론 제가 보기에는 식민과 분단, 나아가 근대성의 문제를 극복하지 않고서는 평등 자유와 같은 보편주의적 가치들도 궁극적으로 실현되지 않을 것 같습니다. 말씀하신 것처럼, 역사적 맥락과 동시에 그 속에서 형성된 복잡한 관계들을 제거하고 남한과 북한을 자기만족적 체제로 타자화해서 비교하는 방식은 남한에서 내부를 인식하는데도 장애가 됨은 불문가지입니다. 마르크스주의를 포함하여 현대와 당대의 유럽기원적 정치사상이나 이론들에 대한 참고도 필요하겠지만 먼저 급선무인 것은 이러한 역사구조적 관계를 지금 토론되는 이러한 문제들과 연결지어서 내부적으로 풍부하게 발굴하고 해석해내는 작업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그 안에서 북한에 대한 우리 내부로부터의 인식도 가능할 것 같습니다. 좋은 의견 고맙습니다.
용어사용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결국 주체사상을 어떻게 볼 것인가가 문제인 것 같습니다. 우선 이북사회와 주체사상의 연관성이 문제가 되겠죠. 달리 표현하면 이북사회가 주체사상이 관철된, 주체사상으로 지탱되는 사회인가를 검토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북 연구가 사실 송두율 이후 90년대에 들어서 일부 그렇게 진행되었다고 봅니다. 저는 이북이 주체사상이 관철된 사회라고 봅니다. 그래서 이곳 블로거 gynacosmos님과는 달리 „북한은 중국에게 브라자 빤쓰 다 벗어던져가면서 애걸“ (http://blog.jinbo.net/gynacosmos/trackback/30)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어느 정도까지는 중국에 의지할 수 밖에 없겠지만 주체사상을 브라자 빤쓰인양 벗어던져 버리지는 않을 것이라고 봅니다. 옷이야 갈아 입을 수 있겠지만 자기 뼈를 포기할 수는 없으니까요.
„식민과 분단의 문제는 이미 문제가 아니라고 여겨지는 듯이 보이는 남한의 사회운동과 진보좌파 지식계의 보편주의적 시좌가 문제의 핵심이라고 보입니다.“ 절대 동감합니다. 냉전 종식으로 독일은 통일을 이룩했습니다. 근데 냉전구도가 종식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한반도는 아직 분단상태입니다. 그래서 한반도의 분단은 냉전외 다른 요인이 있다고 봅니다. 그게 식민/제국주의가 아닌가 합니다.
이와 관련 주체사상과 식민/제국주의의 연관성을 검토해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이북 주체사상의 경로와 함께 그 발전가능성을 검토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주사파’란 용어사용을 문제시하는 핵심은 한반도 분단의 극복이 (인권증진 등을 다 포함한) 자본주의의 우월성이란 (물리적 power/violence 포함한) 담론의 틀안에서 이루어질 것인가 아니면 제국주의의 (전세계적인) 극복이란 틀안에서 이루어질 것인가라는 생각이 듭니다.
아태지역에서 식민/제국주의 문제는 다른 양상으로 대두될 것이라고 봅니다. 관련
작년 11월 „미국은 태평양 국가“라는 오바마의 호주 의회 연설이 시사하는 바가 큰 것 같습니다. 이후 미안마 등에서의 미국의 행보도 눈여겨 봐야 할 것 같구요.
이론적 인식틀을 통해 사회를 볼 때, 그 사회의 역동성과 역사적 궤적이 포착된다면 그 인식틀은 무용하지 않다. 그러나 우리의 이론적 인식틀은 전지구화되어 있지만, 사회의 역동성은 제각기인 상황에서, 역동성이 포착되지 않는 사회의 지식인은 새로운 인식의 필요성을 절박하게 느낀다. 그래서 그들은 횡적 인식틀을 넘어 종적으로 역사로의 우회를 감행한다. 그러나 그들은 종종 이러한 자신의 구체적 상황을 종종 일반화하여 너희도 그렇지 않느냐고 문제제기하지만, 사실 적어도 한국 사회의 역동성은 제한적이지만 일정하게 포착되고 분석된다. 그렇지 않았다면 운동과 이론의 분리는 훨씬 일찍 완결되었을 것이다. 미조구치가 중국을 참조하면서 일본을 볼 때, 진광흥이 한국을 참조하면서 대만을 볼 때 아마 비슷한 상황이었을 것이다. 따라서 내가 보기에 그들이 방법적으로 '탈정치'적일 수 있었던 것은 사실 개별적 특수 상황에 근거한 것이다.
어제 蔡孟翰이라는 대만 출신, 영국 수학, 일본 대학 재직 중인 연구자가 와서 '동아시아의 과거는 서방의 현재와 미래'라는 제목의 강연을 했다. 캠브릿지에서 정치경제학과 국제관계를 전공했다고 하는데, 근래에 동아시아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일정하게 유럽중심주의에 대한 반발심에 기초해서 이런 논의를 진행하고 있는 듯 하다.
그런데 동아시아를 얘기하는데 자기 이야기는 한 마디도 없고, 그저 왕휘가 어쩌고, 미조구치가 어쩌고, 타케우치가 어쩌고 하는 독후감 수준의 이야기를 가지고 장난스런 유치한 발표를 한다. 게다가 그걸 제대로 이해하고 있다고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진광흥 선생에게 한방 먹었다. 유럽/서구중심주의에 대한 반발이 같은 구조르 유치한 채 거울놀이를 하고 있다는 충고였다. 암튼, 동아시아가 유행이긴 한 모양이다.
그것보다도 진광흥 선생이 첨언한 부분이 중요한데, 미조구치는 후기에 다다르면 '근대'라는 개념 자체에 대해 극도로 회의적이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는 곧 보편주의에 대한 회의이기도 하다. 그가 종축과 횡축의 긴장을 유지했었는데, 어쩌면 횡축이 점차 사라지는 추세를 보이지 않았는가 추적해볼 수 있겠다. 이는 진광흥도 거의 유사하다. 모든 개념은 실재와 불일치 할 수 밖에 없는데, 그렇다고 개념 자체를 거부할 수는 없다. 결국 예를 들어 '국민국가'라는 개념이 적합하지 않다면, 개별 '국민국가'의 특수성을 드러내는 방향과 '국민국가' 자체를 대체하는 새로운 개념을 제시하는 방향이 있을텐데, 후자를 제시할 단계가 아니라면 우선 전자의 차원에서 논의를 만들어가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