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藝術人生 (2011/11/07 17:18) 댓글에 댓글 달기 : 지우기
  • 일본어의 경우 어떤 과정을 겪었는지 따로 살펴보아야겠지만, 지금도 여전히 과거의 흔적과 새로운 시스템 사이의 갈등은 문득 문득 나타난다. 지난 봄 일본에 대지진과 쓰나미가 닥쳤을 때 과거의 지진을 언급하며 '관동(關東) 대지진'을 '칸토 대지진'으로 언론에서 보도하는 것을 보며 적어도 나는 매우 낯설었다. 물론 이 낯설음은 중국어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적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 내부에서 우리의 '한글전용'과 유사한 어떤 것이 성공하지 않는 이상, 의미 전달의 측면에서 여전히 매우 비효율적인 방식임은 분명하다. 이는 물론 이미 그 의미를 알고 있는 번역자/지식인에게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문제는 번역자/지식인이 번역을 방기하는 사이에 외국어로서의 일본어와 중국어를 알지 못하는 언중은 지속적으로 한글전용/원음주의적으로 표기된 한글과 그 원어인 한자를 결합시키는 일종의 외국어 학습을 강요받게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행태의 궁극적인 효과는 불보듯 뻔하다. 학문의 식민성의 문제는 어쩌면 대중과 지식인의 위계 공고화를 전제로 한 것일지도 모른다.
  • 藝術人生 (2011/11/04 00:03) 댓글에 댓글 달기 : 지우기
  • 중국으로부터의 '독립'이 제국주의의 식민에 동조하는 '친일'에 종속된 측면이 중요한 듯 하다. 이는 철저히 외부로부터 이식된 담론이며, 내재적 주체성을 확보하지 못하는 전형적 엘리트 중심의 식민주의 담론이라고 할 수 있다. '한글'은 본래 이러한 민중적 주체성과 내재성을 강화하는 동기로 만들어졌는데, '한글전용론'은 이와 정반대로 내재성의 파괴를 지향하는 맥락에서 제기되었다는 역설이 있다.
  • 藝術人生 (2011/11/03 23:11) 댓글에 댓글 달기 : 지우기
  • 뜻이 통하면 된다는 말씀에 공감합니다. 너무 원어의 맥락에 충실하려고 하다보니 논쟁도 지나치게 전문화되는 것 같구요. 저도 이것이 일정하게 식민성과 연관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공백을 채우고자 하는 욕망이겠지만, 그 욕망이 강해질 수록 늘 학문은 그들의 입만 쳐다보게 되는 것이지요. 곧 식민성은 더욱 강화됩니다.

    탈식민주의의 문제의식이 적지 않게 소개되었음에도 조선과 한국의 식민성의 문제가 갖는 종별성이 제대로 연구되지 못하고 있는 아쉬움을 많이 느낍니다.
  • 마리화나 (2011/11/02 21:47) 댓글에 댓글 달기 : 지우기
  • 아, 많이 참고가 되었습니다. 반성도 많이 하게 되네요. 한편으론 그간 이른바 '번역논쟁'이라 할 만한 것이 주로 영어나 유럽어 ... 특히 철학 텍스트들을 중심으로 일어나고 또 주목받는 현상이 좀 불편하기도 하고 그랬는데 ... 이런 논쟁들을 자꾸 접하다 보면 뭔가 번역은 해당 언어에 정통한 사람만이 손대야 하는 것처럼 느껴져 불편했던 것인데(저는 개인적으로 짧은 언어실력을 핑계로 '걍 뜻이 통하면 되지'라고 생각하곤 합니다만), 그것도 강한 식민성이 배태된 학계-출판계 중심 사고방식 때문일지 모르겠네요. '선저우-신주'와 같은 문제제기가 훨 중요하겠구나 하고 생각해봅니다. 말씀하신 것처럼 중국어와 일본어는 한국에서 상당히 다른 방식으로 다루어지는 것 같습니다. 중국어는 한자로 되어 있지만 영어나 불어 같이 다가오는 느낌이랄까.
  • 藝術人生 (2011/11/02 17:27) 댓글에 댓글 달기 : 지우기
  • 정치라는 정박점을 놓지 않으면서 진행되는 탈식민주의적 역사화 작업은 일정하게 기존의 사회운동의 정치성을 타자화하고 본질화할 위험이 있다. 정치는 원래 다 그렇다고 치부하면서 매진하는 역사화의 과정을 마치고 다시 정치라는 정박점으로 돌아갈 때, 진정한 정치가 기다리고 있을까? 그렇다고 믿고 싶을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렇게도 쉽게 민중의 이름으로 민중을 배신한다. 정치가 아니라고 부정되는 정치 속의 긴장을 부여잡고 역사적 재인식을 결합해야 비로소 정치를 인식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한 정치 자체에 대한 성찰 없는 역사화가 인식하는 정치는 그토록 거부하고자 했던 서구중심적 정치이거나 적어도 구체성이 결여된 이론중심적 정치에 불과하다.
  • 藝術人生 (2011/10/31 11:21) 댓글에 댓글 달기 : 지우기
  • 그동안 적어도 2년 동안은 '지적 유희'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일정하게 구체적 현실을 직접 마주하지 않으면서, 또는 경직된 규범성을 가지고 현실을 대하여 얻게 되는 구체성과 생생함과 결여된 지식생산의 위험을 경계하면서, 이론 지적 작업에 있어서의 방법론적 고민을 해 온 것 같다. 이제 이를 끝내고 다시 구체적 현실 앞으로 돌아와야 할 것 같다.
  • 藝術人生 (2011/10/17 19:18) 댓글에 댓글 달기 : 지우기
  • 과학(개념 및 이론)적 방향과 역사/문학적 방향 사이의 긴장을 안고 가자. 그러나 결국 니체 보다는 헤겔과 마르크스에 준거할 수 밖에 없다. 투박하게 말하자면 인문학 보다는 개명한 사회과학자가 나의 길인 것 같다. 물론 지금의 모양새는 인문학 안에서 개명한 사회과학을 하려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역시 궁극적으로는 사회과학을 위한 것, 거기로 돌아가기 위한 것이다.
  • http://zzacnoon1002.myid.net/ (2011/10/14 06:04) 댓글에 댓글 달기 : 지우기
  • 나도 요즘 다른 것들을 염두에 두고 있어서 좀 복잡해. 그래도 뭔가 변화가 있으면 되도록 거기에 맞춰 마음을 고쳐 먹는 것이 정신건강에도 좋은 것 같아. 되도록이면 가끔씩만 마음 아려하길 바라.
  • 藝術人生 (2011/10/13 16:20) 댓글에 댓글 달기 : 지우기
  • 생각해보면 나는 지난 4년간 나의 '계급 신분'을 거의 망각하고 살아 왔던 것 같다. 원래 가난해도 공부란 걸 할 수 있는 지, 해도 되는 지 물어보지도 않고 매우 독단적으로 결정했다. 게다가 지금 하는 공부는 더욱 그렇게 결정해서는 안 되었을 지도 모른다. 어쩐지 너무 잘 풀리는 거 아닌가 싶었다. 결국 한동안 말하지 않았던 '숙명'을 다시 말하게 된다. 그렇지... 언제든지 모든 것을 내려 놓은 준비를 해야지. 그것은 나의 숙명이니까. 그게 숙명임을 받아들이지만, 늘 가슴 깊이 아리다.
  • 藝術人生 (2011/10/10 10:54) 댓글에 댓글 달기 : 지우기
  • 달아주신 댓글은 본문과 관련이 없어 보입니다. 앞으로 이런 댓글은 사양합니다. 저의 댓글은 삭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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