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 민족/민중은 모두 인식론적 범주이다. 따라서 역사로의 우회 역시 인식론적 기획에 근거한 시도이다. 이러한 인식론적 기획은 인식론적 공백에 의해 추동된다. 이러한 우연/공백 자체는 '역사적으로' 필연적으로 발생한다고 전제된다. 따라서 이 공백은 '문학적'이지 않다. '문학'이라는 타자를 필요로 하지도 않는다. 문학이라는 범주가 박현채 안에서 등장하는 것은 윤리학적인 범주로서인 듯 하다. 여기서 이데올로기는 인식론적 범주와 윤리학적 범주로 쪼개지는 것 같다. 구조로서의 이데올로기가 전자라면, 정치화/주체화의 공간으로서의 이데올로기가 후자인 듯 하다. 문학/문화/예술은 아마도 후자와 관련되는 것 같다. 이러한 맥락에서 박현채 선생의 '경제평론'은 사실상 문화적 실천이라 할 수 있다.
우왕 축하(?)해요 ㅎㅎ 저는 주위에 능력자가 많아서 주로 쫌 해보다가 안 되면 울면서 물어보지만 -ㅅ- 물어볼 사람이 없을 때 혼자 해결해내면 그게 어찌나 자랑스러운지..; 저도 컴맹에 가까운데 하는 일 때문에 점점 업그레이드됐지만 여전히 컴맹 요소가 있어서...-_-
전 어릴 때 컴퓨터 학원 다니면서 베이직인지 뭔지 그거도 다 뗐는데 기억이 안 나고 그저 컴맹이에요. 하하...<
[부연9]
원음표기를 주장하는 국어학자의 발표를 들어보니 외국어와 외래어의 구분 뿐만 아니라 언어와 문자의 구분이라는 또 다른 하나의 중요한 관건이 드러난다. 원음주의 표기를 주장하는 분들은 한글을 문자를 넘어서 '언어'로 간주하고 있는 것 처럼 보인다. 한글이라는 문자의 사용을 통해 우리 말을 사용하는 사람들이 충분히 효율적으로 의미표현과 전달을 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이는 곧 한글전용론이다. 따라서 우리 언어 생활에서 한자는 이미 불필요한 것이고, 부재한 것이 된다. 한자어적 기원을 갖던 말던, 한글 표기 만으로 의미 변별과 전달이 가능하다고 보기 때문에, 한자 자체는 외래어가 아닌 외국어가 된다. 이렇게 해서 기존에 우리 말의 한자와의 관련성은 모두 제거되어야 한다. 이게 가능한 일인가? 한글이 사용하기 쉽기 때문에 이를 활용하여 보다 효율적으로 문자생활을 영위할 수 있음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우리 언어 생활이 한글전용으로 가야하는 필요성과 갈 수 있는지의 가능성에 대해서는 매우 회의적일 수 밖에 없다.
글쎄요. 위안을 주기도 합니다. 그런데 문학적인 것은 그런 목적성을 가지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우연적인 것과 같은 조금 역사적인 것에 가까운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건 일종의 숙명적인 것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실천적이고 윤리적인 장을 제공하는 것 같습니다. 살면서 만나는 수 많은 사람들이 나의 일정한 목적과 계획, 즉 정치 안에 다 들어와 있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입니다. 물론 나이를 먹어가며 울타리를 치게 되고 문학적 인간관계는 더욱 협소해지는 것이 일반적인 것 같습니다.
뭐.. 어쩔 수 없지요. 침울에서 빠져나와 다시 인간관계를 생각해 보는데, 고질병 처럼 문학적 인간관계와 정치적 인간관계가 다르지 않은가 생각해 봤습니다. 정치적 입장과는 아주 거리가 멀지만 일정하게 나의 삶의 역사 속에서 자리를 차지하면서 무언가 지속적으로 만들어내는 가족과 친구 및 지인들과는 정치적으로 그 관계가 유지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이를 문학적으로 받아들이고자 하는데 아직 쉽지 않은 것 같아요.
문학적/정치적 인간관계의 구분 기준이 어떤 것인지 잘 모르겠지만 제가 직관적으로 이해한 대로 받아보자면, 저는 요즘 '정치적 인간관계'야 말로 차라리 근심의 근원이 아닌가 라는 생각을 했었는데요. 거기서 받은 상처를 도리어 '문학적 인간관계'에서 위안받고는 했었는데, 이것도 한 때인가 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