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 북경(北京, Beijing), 모택동(毛澤東, Mao Zedong),대북(台北, Taipei 또는 Taibei), 인민일보(人民日報, Renminribao)
설명: 번역은 외국어를 외래어로 바꾸어 줌을 통해, 일정한 언어공동체의 언어생활을 풍부화해주는데 기여할 수 있다. 우리는 이러한 외래어를 우리말의 일부로 간주하며, 그 표기법은 대중들의 언어생활의 현실을 고려하여야 한다. 중국어의 고유명사를 한글로 표기함에 있어, 우리는 대중의 언어생활과 문자생활을 고려하여 한자음 표기를 원칙으로 한다. 이는 기존에 시행된 중국어 원음 표기법이 한글 표기와 한자가 궁극적으로 분리되어 외래어의 본래적 의미를 충분히 전달하지 못하는 반면, 한자음 표기는 중국어의 문자, 즉 한자와 우리 말의 한자가 일정한 호응성을 가지고 있어, 표의문자로서의 한자의 본래적 의미를 지시해줄 수 있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우리말의 일부로서의 외래어의 표기법은 응당히 대중의 언어생활 속에서 의미전달이 중시되어야 하는 바, 단지 음성적 유사성에 근거한 원음 표기법이 갖는 실익은 매우 작다고 보아 이를 대체하는 한자음 표기를 원칙으로 하였다.
한편, 고유명사가 처음 출현할 때, 기존의 원음표기와의 혼동을 감안하고, 알파벳의 국제적 통용를 고려하여 한어병음체계를 통한 중국어의 알파벳 표기를 병기함으로써, 중국어 고유명사와 관련하여 한자 문화권에서의 한자와 알파벳을 이용한 언어권에서의 표기의 연관을 밝혀주고자 했다.
전리군 선생의 '57년체제'를 음미하면서, 이른바 '87년체제'와 '97년체제' 등 근래 한국에서 논쟁의 중심이 되었던 역사적 개념들이 공통적으로 갖는 한계가 있지 않은가, 또는 역사적으로 87년에 대한 '과도한' 강조가 우리의 역사적 시좌를 제한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 본다. 87년 체제와 97년 체제는 공히 '민중'을 중심으로 한 '정치성'의 담론에 갇혀 있는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서는 '좌'와 '우'의 정치적 경향의 대립이 중심이 된다. '좌'와 '우'를 결정짓는 역사적 조건과 그 외연의 구체적 역사적 형성의 문제가 사라진다. 그래서 박현채 선생의 논의를 복원할 필요가 있는 것 같기도 하고, 비록 장기적 작업이지만, 여기에 왜 이러한 우회를 통해 전리군 선생의 작업을 조명하면서 동시에 다시 한국사회를 비추는 참조점으로 전리군 선생의 작업을 가져오려는지의 이유가 있다. 97년체제나 87년체제도 중요하지만, 어쩌면 48년체제 및 해방공간을 역사적으로 재해석하고 이 역사성을 재전유하는 작업이 결여되어서는 87년체제와 97년체제 등의 정치성의 논의는 궁극적으로 일정하게 한계적 또는 과소결정될 것 같다.
인터아시아 또는 구역(지역)적 시좌를 도입하면서 일정하게 보편성에 대한 성찰을 하지 않을 수 없다. 본래 보편성에는 기원이 없다. 서구적 보편성은 형용 모순이다. 그런데, 보편성에 기초하여 전개되는 논의가 다 보편적인 것은 아니다. 따라서 보편성을 거부하지 않되, 서구의 모든 논의들을 단지 그 보편성의 기초에 닿아 있다는 이유로 즉각 보편적인 것 처럼 받아들이는 것은 위험하다. 이는 아시아, 한국의 이론적 논의의 척박성의 원인이 되지 않는가 하는 성찰을 해 본다. 그런 의미에서 서방의 인문학이나 철학의 논의는 자유롭게 소개되고 충분히 논의되어야겠지만, 지나치게 과잉 의존하는 것 또는 매개와 전유 없이 직접 적용하는 것은 일종의 편향을 낳을 수 있는 것 같다.
[부연7]
'북경'과 '北京'을 병기하면서, '북경'으로 쓰고, 이를 '北京'과 연결시키는 것이 대중들의 언어 생활의 차원에서 볼 때 바람직하고 언어생활의 풍부화의 지식의 공유에 있어서 합리적이다.
만약 '뻬이징'과 '北京'을 병기하고, '뻬이징'이라고 쓰고, 이를 '北京'과 연결짓는 것은 중국어의 발음 법칙을 알고 있는 사람들이나 가능한 것이다. 따라서, 궁극적으로 이러한 방식은 대중적 층위에서 '뻬이징'이라는 '순우리말'만을 남기고 이를 '北京'과 연결시키지 못하도록 하게 되어있다. 결국 원음표기주의 외래어 표기법은 기본적으로 국어로부터 한자어를 배제하고자 하는 한글전용 방향에서 제정된 것이었다. 한글전용은 매우 포퓰리즘적이며 민족주의적인 경향을 갖는 것 같은데, 이 효과는 대중의 우매화일 것이다. 이는 대중들 속에서 지식의 확산과 공유를 지향하는 것과 거리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