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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드레 고르, '자유 시간이 진정한 해방의 원천'

아르님 덕분에 고르의 새 글이 번역되었다는 것을 알게됐다.

전문은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한국어판을 구독해야 볼 수 있나보다.

밑줄 강조는 모두 아르님의 것.

 

 

  경제의 임무는 일자리 제공이나 창출이 아니다. 경제의 임무는 가능한 한 효과적으로 생산요소들을 작동시키는 것이다. 이를테면 최소의 자원 및 자금과 노동을 투입해 최대의 부를 창출하는 것이다. 날이 갈수록 산업화 사회는 이 임무를 잘해낸다. 따라서 1980년대 말 선진국 경제는 각국이 필요로 하는 노동량을 연간 12% 감축하면서도 부의 창출을 연간 30% 끌어올렸다. 경제적 부의 창출활동은 노동투입시간을 점점 감축시켰다.
  즉, 자유시간이 노동시간을 크게 초과한 것이다. 1946년에 20세의 샐러리맨은 향후 활동 시간의 평균 3분의 1을 노동으로 보내야 했던 반면, 1975년에는 4분의 1, 그리고 요즘은 5분의 1에도 채 못 미친다. 최근의 일이지만 심각한 이 단층들은 지속될 테니, 생산과 무역의 다른 논리들을 도입해야 한다.
  설상가상으로 재산과 서비스의 규모가 커져, 요즘 경제는 대량으로 이 핵심 자원(자유 시간)을 생산해내고, 근대 이론의 창시자들은 이 자원, 즉 경제적 필요와 구속에서 해방된 시간을 지표로 “진정한 부를 측정”하고 있다.
  경제학자 데이비드 리카도의 한 제자는 1821년 다음과 같이 언급한 적이 있다.
  “사람들이 12시간 일하는 곳에서 6시간만 일한다면, 그것이 바로 국가의 부, 국가의 번영이다. …부는 자유다. 부는 마음대로 쓸 수 있는 시간, 그 이상 아무것도 아니다.”
  이렇듯 새로운 비전이 우리 앞에 다가오고 있다. ‘자유 시간’이라는 문명이 그것이다. 하지만 우리 사회는 이를 고무적인 시각으로 보지 않고, 그러한 장래에 등을 돌린 채 자유 시간을 마치 재앙처럼 소개하고 있다. 대부분의 지도자들은 어떻게 하면 향후 모든 이들이 사회적으로 창출된 부에서 각자의 몫을 가지면서도 일을 더 많이 줄일 수 있을지를 고민하기보다는, 어떻게 하면 자신들의 사회 시스템이 노동을 더 많이 소모할 수 있을지, 또 어떻게 하면 생산에서 비축된 막대한 노동량이 고용 창출이라는 단순한 목표만을 지닌 소소한 일자리(예를 들면 비정규직)에 이용될 수 있을지를 생각한다.
  그런데 소소한 일자리가 풀타임 완전고용을 충분히 보장해주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이제 사람들은 노동시간 단축을 마치 해방의 시간이 아니라, 필요한 희생, 일자리와 월급 나누기 같은 어쩔 수 없는 일처럼 소개하며, 임금 수준을 노동시간과 같은 비율로 줄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독일 사회민주주의의 대표적 사상가 중 한 명인 피터 그로츠가 1987년경 유럽 좌파에게 던진 호소문에는 실망감이 가득 배어 있다.
  “유럽 좌파는 손 닿은 곳에 수백만 명을 동원할 수 있는 구체적인 유토피아를 두고 있다. 노동시간 단축을 단순히 노동 분배의 기술적 도구로만 여긴 것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더 많은 시간을 제공하는 또 다른 사회를 향해 가는 길처럼 여겼다. 지금 우리에게 부여된 역사적인 이 기회는 인류에게 여태껏 단 한 번도 주어진 적이 없다. 개개인이 자신의 의미를 찾는 데 쓰는 시간은 개개인이 노동, 오락 그리고 휴식을 위해 필요로 하는 시간보다 더 중요하다. 좌파는 더 이상의 목표를 갖고 있지 않은가? 소득을 축내지 않고 운동의 가장 중요한 목표인 노동의 해방을 당당하게 요구할 수 있어야 하고, 노동시간의 체계적인 감축을 위해 투쟁이 가능해야 한다.”
  여기에서 그로츠는 ‘소득을 축내지 않고’라고 강조한다. 바로 그 순간부터 경제 시스템은 갈수록 줄어드는 노동으로 더 많이, 더 잘 생산해내고, 소득수준은 개개인이 제공하는 노동량의 변동에 더 이상 의존하지 않게 된다. 그에 반해 생산성 향상의 재분배가 모든 이들에게 일을 줄여준다. 심지어 낮은 생산 증대는 개개인의 실질소득은 감소시키지 않은 채, 많은 활동 인구에게 일자리를 제공한다.
  하지만 노동, 자유 시간 그리고 사회적으로 창출된 부의 재분배는 노동시간과 관련된 전반적인 정책을 필요로 한다. 재분배는 필연적으로 두 종류의 소득을 도입시키게 된다. 하나는 노동시간과 함께 감소하게 될 소득이고, 다른 하나는 직접 임금과 노동시간이 단축됨에 따라 상대적 가치가 상승하는 사회적인 소득이다. 실제 노동시간만 기업이 비용을 부담하면 되기 때문에, 기업이 부담해야 하는 비용에는 영향이 없다.

 

……

 

  시간의 해방이 제 이름값을 하려면 광범위한 방법 중에서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 즉, 하루·주당·월간(퀘벡에서처럼) 혹은 연간 노동시간을 단축할 권리, 안식년에 대한 권리, 혹은 캐나다에서처럼 5년마다 1년간의 휴가를 누릴 권리, 광범위하게 실시되고 있는 육아휴가(옛 체코슬로바키아는 36개월, 스웨덴은 12~15개월)를 최종 봉급 대비 70~90%의 유급으로 누릴 권리, 그리고 그 휴가를 부모들이 마음대로 쪼개 쓰고 서로 나눠 쓸 수 있는 권리, 프랑스에서처럼 최종 봉급 대비 70% 유급으로 24개월까지 개인적인 교육을 위해 휴가를 쓸 수 있는 권리, 병든 부모나 자식의 병간호를 위해 유급 휴가(스웨덴 모델)를 누릴 권리 등등이다.
  이를 위해 개개인의 계획이나 가족 상황에서 맞춰 시간과 업무 시간표를 스스로 관리해야 하고, 특히 “기업주들의 착취를 막기 위해 스스로의 자율적 결정에 따른 행위를 중시하는 문화를 발전시켜야 한다.”
  이제, 시간의 해방이 서비스 일자리를 무한 창출할 것이라는 희망은 버려야 한다. 반대로 시간의 해방이 개개인과 공동체를 통해 자신의 존재, 삶의 틀, 도시 생활 그리고 자신의 포부 및 욕망 충족의 정의와 방식, 사회적인 협동 방법의 책임을 증대시킨다는 데 의미를 두어야 한다. 시간의 해방이 “이웃 간의 상호 혜택을 활성화시키고, 유급 노동과 무급 생산 활동 사이에서 새로운 균형”을 확립해주길 기다려야 한다.
  이러한 넉넉한 사회조직이 금전소득의 중요성을 상대화해줄 것이다. 시장경제의 공간을 줄임으로써, 유급 노동과 돈과 무관한 활동, 소비 수준과 자율성의 정도, ‘소유’와 ‘존재’ 사이에 항구적인 중재가 생기게 될 것이다. <선택한 시간의 혁명>의 저자들은 이 중재가 마침내 ‘알뜰한 풍요’를 낳게 할 수 있을 것이라 했다. 이를테면 모든 이들에게 실질적으로 증대된 자율성과 보안을 보장해주며, 점차적으로 시간 부족, 공해, 낭비 및 실망의 근원이 되는 과소비를 없애, 편안하고 즐겁고 자유로운 삶을 즐길 수 있게 해준다는 의미다. 결국 이 중재가 환경 보존 및 선진국과 개도국 간의 관계 변화 측면에서 필요한 바람직한 규범이 될 것이다.

─앙드레 고르, '자유 시간이 진정한 해방의 원천',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한국어판 2009년 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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