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 아직 행복할 여지는 남은 거지?

개인적으로 꼽는 <연애시대> 최고의 명장면은 동진과 함께 살던 집 곳곳에 서린 기억을 더듬는 은호의 모습이었다. 남들에게 말도 못할 만큼 사소한 그 기억들은 그것이 절대로 반복될 수 없는 순간이라는 이유로 어마어마한 비극이 되어버린다. 주체할 수 없는 감정의 파고 속에 무너져 내리는 은호를 따라 나 역시 엉엉 울었다.

그 기억에 나도 울었다

남산 산책로를 함께 걷던 어느 늦가을 그의 손의 따뜻함, 추운 겨울 길거리에서 그와 함께 사먹던 계란빵의 말랑말랑함, 언젠가 그와 함께 지켜봤던 평범한 일몰의 마지막. 남산에 가거나 계란빵을 먹거나, 일몰을 목격하면 문득문득 지금도 생생하게 들이닥치는 그 감각들이, 누구나 그렇듯 나에게도 있기 때문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사적인 순간을 되새김질하게 만드는 캐릭터와 상황과 대사를 곳곳에 품은 <연애시대>는 마주하는 것이 때때로 너무 힘든 드라마였다.
언제부턴가 은호와 동진의 일거수일투족에 사정없이 감정이입을 해버리게 된 것은 예정된 수순이었다. 그런 상태에서 나는, 진심으로 은호와 동진의 재결합을 반대했다. 애틋하고도 무심하게 서로를 응시하는 그들은 이미 벌어진 어떤 사태와 그로 인한 변화는 절대로 돌이킬 수 없음을 알고 있었다. 일상적인 만남 속에 미묘하게 흔들리면서도 계속해서 서로의 삶에 개입하는 그들은 ‘따스한 쿨함’의 완벽한 모델이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평범했다.
실연 뒤 폐인으로 살다가 이내 멀쩡히 일상을 영위하고, 언제 그랬냐는 듯 새로운 짝을 찾는 친구들과도 닮았고, 열정과 권태와 모진 결심과 허전함과 후회가 지나간 자리에 또 다른 열정이 들어앉는 경험 끝에 심드렁해진 우리와도 닮았다. 최고의 파트너임이 명백한 상대를 옆에 두고도 계속해서 새로운 사람을 만나려는 노력을 게을리 않는 그들이 안타까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란 듯이 자신들의 운명적인 사랑을 증명하는 모습을 차마 보고 싶지 않았던 것은 그 때문이었다.

그래서 지루한 건 아니라고 말해주길…

그들도 우리처럼 놓치고 후회하고, 또 수긍하면서 살기를 바랐던 것이다. 그때 내가 내렸던 선택 혹은 포기 때문에 지금의 내가 이처럼 지루한 것은 아닐 거라고 말해주길 바랐다. 시시하고 쓸쓸하지만 여전히 빛나는 각자의 사랑을 찾아가는 완벽한 결말을 향해 기꺼이 박수를 쳐주리라 작정하고 기다렸다.
그런데 마지막 순간 그들은 기어코 다시 만났다. 행복해지기 위해 모질게 노력하는 그들은 브라운관 앞의 나를 지진아, 혹은 성격파탄의 냉혈한으로 만들어버렸다. 그들의 마지막 선택에 따르면, 좋다는 사람을 고민 없이 뿌리치고, 상대에게 빠져드는 스스로의 감정이 거추장스러워 작정하고 무덤덤해지는 나에게 ‘연애시대’는 영원히 오지 않을 시대다. ‘여기가 내 시간의 끝이 아니기에 지금의 우리를 해피엔딩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던 은호의 마지막 내레이션을 애써 곱씹는다. 그 어디도 내 시간의 끝이 아니기에 나는 완벽하게 불행해지지는 않을 거라고. 혹은 아직도 행복할 여지는 남아 있다고.


 

글: 오정연(블로그: http://blog.cine21.com/lovesucks)
 

 

-----------------

 

몇 년 전 이 멋진 글을 보고, 꼭 <연애시대>를 봐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어느새 시간이 이렇게 흘러버렸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Posted by 아포리아

2009/07/07 13:22 2009/07/07 13:22
Response
No Trackback , No Comment
RSS :
https://blog.jinbo.net/aporia/rss/response/69

Trackback URL : https://blog.jinbo.net/aporia/trackback/69

Leave a comment
« Previous : 1 : ... 38 : 39 : 40 : 41 : 42 : 43 : 44 : 45 : 46 : ... 73 : Next »

블로그 이미지

당연하잖아 비가 오면 바다 정도는 생긴다구

- 아포리아

Tag Cloud

Notices

Archives

Calendar

«   2024/06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Site Stats

Total hits:
275975
Today:
158
Yesterday:
5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