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물들을 분류하고, 구별하는 방식으로서의 언어는 사물들에 대한 인식을 수반한다. 그런데 그러한 인식은 과학적 결정보다는 실용적 결정에 의존한다. 사물들의 원인과 본성에 대한 인식이 아니라 그 결과들에 기초하고 있다는 점에서, 언어는 본성상 부적합한 인식으로서의 상상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의 부적합성은 언어에서는 중화되어 나타난다. 그 이유는,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언어가 전통의 결산, 공통의 경험을 담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언어는 과학적 인식의 보고는 아니지만, 공통의 실천적 인식을 표현한다.
  요컨대, 언어가 사물들을 질서화하는 방식, 즉 사물들을 분류하고 분리하는 방식으로서 세계에 대한 우리 이해를 구성하는 조직자라면, 이 조직자는 사람들의 공통의 경험에 기초하고 있다. 물론 이 공통의 경험은 사물에 대한 적합한 인식을 우리에게 주지는 않지만, 단순히 허위의식으로서의 이데올로기로 간주될 수도 없다. 그것은 어떤 공통적인 삶의 논리, 오랫동안 존속해 왔고 또한 앞으로도 쉽게 변할 수 없는 공통의 삶의 논리를 표현한다. 따라서 그것은 한편으로는 주관적이고 상상적인 인식,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합리적인 방식으로 획득된 인식과 동시에 구별된다. 그것은 적합한 인식 그 자체, 즉 원인에 대한 인식은 아니지만, 삶에 유용한 정보, 즉 결과에 대한 공통의 인식을 함축하고 있다.
  스피노자에게 철학은, 따라서 정치는, 바로 이 공통의 자산으로부터 출발하고 있으며, 그것을 대상으로 삼고 있고, 그것을 변화시키고자 하는 노력이다.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 바로 이 공통의 자산을 담지하고 있는 언어는 철학의 출발점이며, 철학의 대상이고, 철학적 작업의 장을 구성한다. 그리고 동시에 그것은 정치의 장이기도 하다.  정치가 관념들을 전화하고, 그것을 통하여 사회를 전화시키는 데 있다면, 그것은 전통적이고 보편적인 관념들이 육화되어 있는 ‘언어에 대한 작업’(le travail sur le langage)과 ‘언어의 작업’(le travail du langage)을 통해서만 가능할 것이기 때문이다.
  철학과 정치는 문화 혹은 전통이라고 불리우는 공통의 유산을 무로 만들고자 하는 시도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실친적으로 유용하지만 부정확한, 뿌리 깊은 우리의 일반적 세계이해에, 따라서 언어의 일반적 쓰임에, 어떤 정확성(précisions)을 부여하려는 노력이다. 정확함의 부여는 결과적으로 단어들의 의미를 변이시키고, 미끄러뜨리게 한다. 그러나 이러한 작은 변이들이 아무 것도 아닌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정확성의 부여는 철학 전체계의 변화를 수반하지 않고서는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스피노자는 ‘적합한 관념’(idea adaequata) 대상과의 일치로서 규정하고 있는 전통철학을 비판한다. 그에게 적합함이란 참된 관념이 갖는 내적 성질들을 지시하는 것이다. 내가 우연히 비가 올 것이라고 말했을 때, 비록 실제로 비가 와서 현실과 일치한다 하더라도 나의 생각은 적합성 혹은 진리를 표현하지 않는다. 적합성은 외적 일치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적합성이 외적 일치를 함축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모든 적합한 관념은 그 대상과 반드시 일치한다. 요컨대, 스피노자가 비판하고 있는 것은, 진리 혹은 적합성의 ‘본성’을 일치로 규정하는 견해이다. 일치는 본성이 아니라 적합성의 한 ‘결과’ 혹은 ‘성질’에 불과하다.
  이러한 새로운 개념화 작업은, 더 이상 사물들의 특정한 결과에 대한 인식이 아니라 그것들의 본성과 원인에 대한 인식에 의지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그것은 공통의 경험적 인식에 대한 완전한 부정이 아니라, 그것을 설명하고 그것에 ‘정확성’을 부여하는 행위이다. 따라서 스피노자의 철학적 작업은 새로운 용어를 창조해내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대중의 언어에 대한 재정의에 있다. 이와 관련해서, 스피노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의 목적은 단어들의 의미가 아니라 사물들의 본성을 설명하는 것이고, 그 사물들을 어떤 용어들로 지시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용어들의 통상적 의미는 내가 그것들을 사용하면서 부여하고자 하는 의미와 완전히 떨어져 있지 않다. 이는 한 번 말하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요컨대, 스피노자에게서 새로운 개념화는 기존의 개념과 너무 동떨어진 것이 되어서도 안 되고, 너무 가까워서도 안 된다. 너무 가까우면, 차이를 볼 수가 없고, 너무 멀면 그것은 다른 사람들이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사적 언어가 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스피노자에게 그것은 모든 사람들이 공유하고 있는 공통의 자산과의 단절이 아니라, 그것의 전화이며 미끄러뜨림(glissement)이다.>

 

- 박기순, 「스피노자에서 언어와 정치」, pp. 236~238, 241~242, 『시대와 철학 2007 제18권 2호』(강조는 나)

 

많은 사람들이 스피노자에 관심을 가졌고

그에게서 유래한 몇 가지 개념을 의식적/무의식적으로 사용하곤 했다.

그 중 하나가 '적합한 인식' 또는 '원인에 대한 인식'

(그런데 스피노자가 쓴 정확한 표현은 '원인에 의한 인식'이다.

문제는 대상에 대한 정확한 인식이 아니라,

자신이 그 대상의 능동적 일부, 곧 '원인'이 될 때 얻을 수 있는 인식이므로.)

일 것이다.

 

하지만 혹자의 용법을 보면

그 개념을 통해 스피노자가 제기하려 했던 비판적 쟁점은 사라지고

어느덧 그 개념이, 자신이 알지 못하고 해결하지 못하는 수많은 문제들과의 대결을 회피하며

자신의 무지와 무능, 결국 불성실에서 비롯한 불안감을 어루만져 주는

'무지의 도피처'로 전락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스피노자는 이런 효과를 내는 것들을 다름 아닌 '미신'이라고 불렀다.

과학주의적, 계몽주의적 미신이라는 이 도착적 역설.

 

여기서 문제는 스피노자의 용법에 맞게 이 언표를 사용하느냐가 아니다.

대중운동의 객관적 상태와 그 분기 방향에 관한

말의 강한 의미에서 '유물론적' 분석과 입장이 있느냐가 문제다.

'원인에 대한 인식'이라는 언표가 희대의 유물론자 스피노자와 직간접적으로 연관되어 있더라도

많은 경우 그것은 말 그대로 '관념론적'이며, 또한 관념론에 고유한 '폭력적' 효과를 산출할 뿐이다.

 

나는 스피노자를 잘 알지 못하지만

적어도 그를 통해서

부르주아 계몽주의(결국 엘리트주의)와 혁명적 자생주의(오늘날 네그리가 대표하는)

에 대한 이중 비판을 발견할 수 있다고 들었고, 실제로 그런 점을 발견했다(고 믿는다).

 

문제는 원인에 의한 인식이라는 언표를 주문처럼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어떤 과정(process)으로써 실현할지 사고하고 실행하는 것이다.

이 정언명령은 물론 나에게도 해당된다.

여기서 나의 문제는, 이 정언명령을 받아 들여 한 발 더 나아가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이 정언명령에 미치지 못하는 스스로에게 자괴감을 느끼면서

점점 더 말하지 않고 주동적으로 행동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내가 이런 글을 쓰는 것도, 나의 이 창백한 돌맹이의 도덕을 넘어,

내가 지금 내뱉은 비판만큼의 공적 책임을 져야 한다고 스스로에게 다짐하기 위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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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아포리아

2008/10/21 13:58 2008/10/21 1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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