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픈 몸에 머무르기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짜증이 일었다. 머리맡에 둔 시계에 팔을 뻗는 순간 어깨를 파고든 통증 때문이다. 다시 자세를 바로 하고 누운 자리에서 몸을 가볍게 풀기 시작했다. 마사지볼을 이용해 목과 어깨를 천천히 이완시켰다. 몸은 조금 편안해지는 듯했지만 머릿속은 복잡했다. 한달 여 동안 통증의 악화와 우울이 서로를 물고늘어지는 중이기 때문이다.
연극 <아파도 미안하지 않습니다>를 보면서 내 안에 차올랐던, 한달음에 써내릴 수 있을 것 같던 이야기들은 이제 거의 가라앉아버렸다. 그래도 무언가 써야겠다는 마음은 잊히지 않는다. 아픈 몸들이 무대에서 건넨 여러 빛깔의 이야기들로 누군가는 자신의 몸을 말할 방법의 힌트를 얻었고 그래서 고마웠다는 인사를 하고 싶었다. 쓰고 싶었던 이야기는 흩어져버렸지만, 뭐라도 쓰자며 컴퓨터 앞에 앉았다.
나는 아픈 몸을 미안하게 만드는 사람에 가까웠다. 동료가 요즘 쉽게 피곤해진다고 하면, 술을 줄이라거나 운동(스포츠)을 하라는 식으로 놀리곤 했다. 나는 체력으로 운동(사회운동)한다며 너스레도 자주 떨었다. 2년 전부터 시작된 오른쪽 어깨의 통증은 작년 말부터 심해졌다. 내가 하고 싶은 만큼 무언가를 할 수 없는 상황이 됐을 때 나를 가장 미안하게 만들었던 것은 나였다. 조금 다른 말로 하자면, 나는 내가 아프다는 걸 받아들이는 게 가장 어려웠다. 도대체 내가 뭘 잘못한 거지?!!! 크게 잘못한 것이 없으니 곧 좋아질 거야!!!
자기관리의 책임으로부터 겨우 벗어나고도(아직 온전히 벗어나지는 못했다/않았다) 아픈 몸에 머무르기는 쉽지 않았다. 한편으로는 아픔이 무시되기 때문이라면 다른 한편으로는 아픔이 과장되기 때문이다. 내가 아픈 걸 다른 사람들은 나처럼 알 수가 없다. 아파서 겪게 되는 소소한 곤란들을 일일이 설명할 수도 없다. 다행히 내 주위에 내 아픔을 무시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런데 걱정도 반갑지만은 않았다. 나는 내 상태를 두부는 썰 수 있지만 사과는 썰 수 없는 상태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러면 많은 사람들은 사과’도’ 썰 수 없는 상태라고 듣곤 했다. 상대가 안타까워하는 표정은 위로가 되면서도 부인하고 싶은 마음이 들곤 했다. 내가 무언가 ‘할 수 없는’ 상태로 인식되는 게 내키지 않았기 때문이다.
무언가 할 수 있고 무언가 할 수 없는 몸. 사실 모든 사람의 몸이 그렇다. ‘아픈’ 몸은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 사이의 경계가 조금 달라지는 몸이다. 그런데 달라지는 경계를 가장 먼저 겪을 나는 그때마다 출렁일 테고 겨우 가늠을 한들 내가 생각하는 경계와 사회가 받아들이는 경계는 어긋나기 쉬울 테다. 경계가 배려의 증표가 될지 배제의 낙인이 될지 정하는 힘도 내 손을 떠나있는 문제다. 그래서 내가 무언가 할 수 없다고 느껴질 때 두렵다. 아픈 몸이 진짜 아픈 이유인지도 모른다. 어긋남은 불가피할 수 있지만 적어도 나는 나를 조금 더 잘 말하고 싶다. 그래서 연극을 다시 떠올리며 아픈 몸에 머무를 용기를 조금 더 내어보고 있다.
아픈 몸에 머무르는 것이 내 상태를 그냥 받아들이겠다는 뜻은 아니다. 나는 내 어깨가 조금 더 부드럽고 가볍게 움직이기를 바란다. 그래서 연극이 건네는 화두인 ‘질병권’보다 ‘건강권’이 내게는 더 와닿지만 둘은 대립하는 개념이기보다 같은 것의 다른 이름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질병권’ 또는 ‘아플 권리’라는 제안이 건네는 균열을 되새긴다. 아프면 몸 걱정보다 돈 걱정이 먼저인 현실이 어떻게 비참한 경험인지 어깨와 함께 제대로 겪고 있다. 하지만 의료시스템 안에서 겪은 일들을 떠올리면, 돈 걱정 없애주며 몸 걱정도 가져가는 사회를 바라게 되지는 않는다.
돈 걱정 없이 몸 걱정 할 수 있는 사회, 내 몸과 갈등하고 화해하고 변화할 기회를 누릴 수 있는 사회를 바라며. 지금 나의 아픈 몸 안에서 끊임없이 해석되고 있을 아픔을 발견하기, 그걸 나의 언어로 말하기, 그래서 내가 이르고 싶은 상태 또한 나의 언어로 말하고, 그것이 건너뛰기가 아니라 지금 나의 몸에서 출발하는 변화라는 걸 잊지 않기… 나에게 하는 다짐이자 연극 <아파도 미안하지 않습니다>를 추천하는 이유다. 혼자서는 어려운 일이라. 연극을 만든 이들이 서로에게 그랬듯 또 다른 누군가-나를 포함해-의 이야기가 이어지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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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8/19 13:54 2020/08/19 1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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