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공의들이 20년 만에 무기한 파업을 선언했다. 코로나19 확산세가 불안을 증폭시키는 중에 벌어지는 일이라 조바심이 난다. 의대 정원 확대를 반대하는 의사들의 입장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이런 혼란을 감수하면서까지 의대 정원 확대를 밀어붙이려는 정부 입장도 수긍되지 않는다. 파업을 지지할 수도 반대할 수도 없어 곤란하다. 의사집단과 정부가 ‘의대 정원’을 놓고 힘 겨루기 하는 자리를 조금 멀리 돌아 가보자.  
오래 전 일이다. 친구들을 오랜만에 만나 근황을 나누던 중 한 친구가 “분유값이 걱정”이라며 사는 이야기를 꺼냈다. 나는 선뜻 고개를 끄덕일 수 없었는데 그 친구가 전공의였기 때문이다. 전공의 월급이 넉넉하지 않은 것은 사실이지만 ‘분유값 걱정’은 과하다 싶었다. 하지만 불안정한 미래를 걱정하는 거라는 짐작도 됐다. 4년의 전공 과정을 마치고 전문의가 되는 늦은 나이에 ‘일자리’ 걱정을 시작해야 하는 신세니 말이다. 
앞날을 모르겠는 것도 힘든데 앞날을 걱정할 시간도 없는 상황. 전공의 시절이 딱 이렇다. 전공의는 의사가 노동자 신분으로 사는 거의 유일한 시기다. 임금은 정해져있고 노동시간은 몸의 한계를 시험한다. 게다가 사용자나 관리자들은 선배이자 스승인 셈이니 문제제기의 방향을 찾기도 쉽지 않다. 분노가 향하기 쉬운 상대는 정부다. 정부가 ‘현장을 모른다’고 생각할 이유는 넘쳐난다. 한편으로는 진료를 하면서 실제로 부딪치는 문제들이 있기 때문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 문제들을 넘어서는 전반적인 틀을 고민할 여력이 없기 때문이다. 
의사 수가 늘어나는 건 의미있지만 의사 수만 늘리는 건 의미 없다. (시민건강연구소, 인권운동사랑방 등의 글을 참고하시라.) 여기에 코로나19를 갖다대는 것은 더욱 황당하다. 이제 의대 정원을 늘리기 시작하는 것으로 감염병 대응의 전망을 대체한다? 위험하다. 의사 수를 늘리는 게 답이 아니라는 전공의들의 지적은 타당하다. 전공의들이 참을 수 없게 느끼는 것도 온당하다. 코로나19로 의사집단이 지게 된 부담의 상당한 부분이 전공의에게 쏠렸을 것이다. 그런데 정부는 뜬금없는 정책을 밀어붙이며 반발하는 의사들에게 오히려 코로나19의 심각성을 들이밀고 있으니 대화가 통할 리 없다. 
하지만 대화가 어려운 이유는 의사들에게도 있다. 의대생들이 ‘덕분에 챌린지’를 비튼 이미지를 만들어 퍼뜨리는 걸 보고 깜짝 놀랐다. 폭력적이라고 느낀 건 내가 수어를 배우는 중이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자기들만의 세상에 갇혀 세상과 대화하는 법을 잃어가는 모습으로 보기에는 충분했다. 의대생이 되면서부터 소속감을 느끼게 되는 ‘의사 집단’의 세상이 그렇다. 그래서 의사들이 보건의료정책에 적절한 문제를 제기할 때에도 의사들은 자기들의 세상’만’ 보면서 말한다. 병원의 도산은 걱정해도 환자의 파산까지 걱정하지는 않는다. 
억울할 것이다. 환자에게 최선을 다하는 의사들이 많다. 진료실로 찾아온 이들의 건강을 진심으로 걱정하는 의사들도 많다. 하지만 ‘의사 집단’의 사회적 위치를 보지 않은 채 진정성을 믿어달라는 말만 되뇌인다면 사회적 대화는 불가능하다. 어깨가 아파서 비급여 치료를 받는 중이다. 실비 보험이 없다고 하니 의사가 더 걱정해줬다. 하지만 나로서는 급여 항목이 되기를 바랄 때 ‘의사 집단’은 그렇지 않다. 어떤 의사는 동의하겠지만 ‘의사 집단’으로서는 “의료수가가 너무 적다”는 오래된 한탄에 항목 하나가 추가되는 일일 것이다. 의사와 환자는 현재의 보건의료시스템에서 이렇게 만나고 있다. 
내 친구처럼 분유값 걱정을 하고 있을지 모르는 전공의들이 덜 오해받으면 좋겠다. 의사라는 직업이 선망과 비난 사이를 오가는 ‘남의 일’이 아니라 내 곁에서 내 몸을 함께 이해해주는 ‘이웃의 일’로 여겨질 수 있기를 바란다. 하지만 지금으로서는 의사집단도 정부도 환자와 시민을 대표하지 않는다는 점이 명백하다. 
의대 정원 등의 정책이 의사집단 대 정부 간의 문제로 굳어지게 두어서는 안 된다. 다른 테이블이 필요하다. 환자와 시민을 대표할 집단은 물론이고 의사가 아닌 의료인 집단의 참여도 필수적이다. 의사와 정부 중 어느 쪽이 이런 제안을 꺼낼 수 있을까. 의사들에게는 기대하고 싶다면 정부에는 요구하고 싶은 게 내 입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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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8/24 20:49 2020/08/24 2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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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goya001 2020/09/10 09:30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공공의대 반드시 막아야 합니다.

    【공공의대 설립】 의료계 사회주의화 움직임ㅣ그림자 정부
    https://youtu.be/lZK0rdTUFVs

    • 미류 2020/09/14 14:00 고유주소 고치기

      공공의대 정책에 의문이 있기는 하지만 반드시 막아야 할 정책이라고까지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사회주의화'라는 진단은 현 정책에 과분한 평가 같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