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은 새벽마다 새로 밥을 지었다. 압력밥솥에 갇혔던 증기가 뿜어나오는 소리를 들으며 일어나곤 했던 나는 세수를 하고 식탁 앞에 나가 앉았다. 김이 폴폴 올라오는 밥과 서너 가지 되는 반찬들을 앞에 놓고 아침식사를 마치면 양치를 했다. 교복을 입고 책가방을 챙겨 현관 앞으로 나서면 도시락이 살포시 놓여있었다.

"다녀오겠습니다."

하루는 일어났는데 부엌에서 아무런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너무 일찍 일어났나보다 하며 시계를 보는데 그리 이르지도 늦지도 않은 시간이었다, 나에게는.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순이 놀라며 안방에서 나왔다. 허둥지둥 부엌으로 들어가 라면을 끓여주었다. 어기적대며 라면먹고 집을 나서는데 서운했다. 아침부터 라면이라니... 갓밝이에 학교나가는 나에게 라면을 먹여 보내다니...

 

지금 와서 정작 놀라운 것은 어떻게 매일같이... 순은 1년에 한 번 정도나 늦게 일어났다.  

그때는 그녀가 '엄마'라, 그게 야속하고 섭섭했다. 그리고 그녀는 '엄마'라, 못내 미안해했다.

 

(류미례 감독의 <엄마...> 를 보고나서 쓴 글이다. 글을 쓰고나서 트랙백했더니 표시가 안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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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12/28 14:50 2004/12/28 14: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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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jaya 2004/12/28 21:24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동생이 낙성대쪽에서 자취를 시작했어요. 엄마가 무척 서운해하세요. 저도 연말고사라 한달째 집에 못갔는데, 오늘 저녁에 새로산 두꺼운 점퍼랑 들고 올라오신다는걸 오시지 말라고 했어요. 피곤해서 오셔도 즐겁게 재롱부리구 그러지 못할꺼 같아서.. 근데 엄마가 엄청 서운해하시는거예요 ㅠㅠ

  2. 미류 2004/12/29 14:13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학교 다닐 때는 엄마가 가끔 반찬들을 보내주셨어. 김치랑 밑반찬들... 열심히 먹어치우다가도 꼭 맛있게 못 먹고 썩히는 음식들이 생겨서 언젠가부터 음식 보내신다면 괜찮다고, 보내지 마시라고 그랬다. 엄마가 엄청 서운해하셨지...

  3. 콩아줌마 2004/12/30 16:21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울엄마는 자취할 때 반찬 한번도 안보내주셨고, 방에 한번 와보지도 않으셨고, 결혼한 뒤에도 찾아오시지도 않고, 모처럼 집에 가도 반찬같은거 먼저 싸주시지는 않는데... 난 그게 참 좋더라구요.ㅎㅎ

  4. 미류 2004/12/30 18:38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눈도장 찍는다고 전화했더니 여기와서 도장찍으시네~ ^^;; 어제는, 그냥 갑자기 언니 보고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5. nodame 2005/01/01 08:34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언니-자야랑 나란히 한통씩 전화한 적 있었죠? 오호..자구 있었지비..요즘 완전 미쳐서..-_-; 자는 시간이 엉망이에요.

  6. 미류 2005/01/01 14:29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혹시 한달전쯤 전화했던 거 얘기하는 거냐? ㅡ.ㅡ
    엊그저께도 전화 한통 날렸는데 안 받더구만.
    공부에 미쳤다는 이야기로 알아듣겠슴, 일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