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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심결에 들어왔는데.

갑자기 하고 싶은 말을 모두 잊었다.

요즘 상당히 얼이 빠져있는데..특히 시험 날짜 잘 못 알고 시험시간에 놀고 있는달지.(이게 등록금 비싸고 단위가 일년씩인 의대에서는 얼마나 어이 없는 행각인지-) 결국 국시 날짜도 잘못 알고 있었다. 내가 왜 잘 못 알고 있었는지는 전혀 모르겠지만..

 

덕분에 내 시험 공부 계획에는 4일이나 더 생겼다. 허허..

뭔가를 향해 미친듯이 뛰고 있을 땐 세상이 이 길 밖에 없는 것처럼 느껴지고..

옆을 보지 않으면 나 혼자만 있는 것처럼 생각된다.

 

외로움이라는 것도 마찬가지인 듯 하다.

회피성 인격장애인 사람을 보면..

두려움이라는 마음의 벽에 갖힌 채 계속 자신이 혼자라고 믿고 상처 받지 않기 몸을 사리지만 계속해서 도망치고 싶은 마음과 싸우고 있는데 어찌 지치지 않을 수 있을까.

 

인격장애 파트 공부하다 보니 내가 아무래도 현재는 '분열성 인격장애'(이건 아주 어릴 때부터 고등학교 때까지 이랬다.) 와 '의존성 인격장애'의 사이에 있는 듯 하다...지금 내가 어떠한 나 자신에 대한 판단도 남들이 대신해줬으면 한다는 것과 몇몇 특별한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사람들에게 원천적으로 별 관심이 없다는 것 때문인 것 같다.

 

오랜 수험기간 때문인지 나의 본성이 깊은 곳에서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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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경에 대한 긴 긴 이야기.

월경은 참으로 반갑고도 귀찮다.

 

첫월경은 첫 성교육을 받은 달에 찾아왔다.

참고로 첫 성교육은 초등학교 3학년 때 받았다.

선생님은  영문도 모르는 남자아이들을 모두 운동장으로 내몰고 여자아이에게 성교육-생리대 선전? 을 받게 했다. 강사는 유한킴벌리에서 나온 직원이 아닌가 싶은 사람으로 낡은 영상 (웃고 있는 동그란 난자에 역시 웃고 있는 올챙이 모양의 정자가 다가가는..)을 보여주고  그 오래된 썰-"난자와 정자가 만나서 아기를 만들고"-을 풀고 생리대 사용법을 알려주고 유한킴벌리 관련 책자를 보여주었다.

 

이는 몹시 큰 도움이 되었는데-보통은 아무도 초등학교 3학년이 월경을 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에 다른 곳에서 그런 지식을 얻을 기회가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어쨌든. 자주색 피가 팬티에 더럽게(그리고 몹시 짜증스럽게-)묻어있는 걸 보고도 조금도 동요하지 않고 엄마의 오버나이트(무지무지 두껍고 불편하다는 특징이 있다.)을 능란하게 사용하였다.

 

그리고나서 엄마에게 이야기하지 않았는데 이유는 왠지 호들갑스러운 반응이 불편했기 때문이다. 결국 이야기하고 나서 엄마가 축하한다고 말해주고 꼭 끌어안아줬는데-엄마랑 사이가 내내 나빴기 때문에라도 너무 창피하고 싫었다. 그리고 그 "이젠 여자가 되었으니 몸 관리를 잘 해야 한다."는 식의 뻔한 스토리를 듣는 것도 너무 창피했다. (어짜피 그 '몸관리'가 뭔지도 전혀 모를 때였는데 말이다.)

 

그 때 읽은 각종 성교육 도서들은 거의 도움이 되지 않았으나 독일 여학생이 생리를 할 때면 탐폰을 사용하는 것이 아주 당연하게 되어있길래 탐폰을 사서 해보았으나 별로 질이 좋지 않아서 관두었던 기억이 난다. (엄마가 상당히 놀라했으나 하지 말라고는 하지 않으셨다.)

 

그 때 나의 심정은 이런 월경을 50대까지 해야 한다니-최악이야-였다.

공감하실 분이 많을 것같은데...그 때에 비하면 생리대 굉장히 많이 좋아졌다.

(자그마치 15년 전이야기니까.) 그 때 생리대는 너무 두껍고 팬티에 잘 고정되지 않아 움직이기 불편했으며 찝찝했다.

그리고 생리주기도 꼼꼼히 체크해야 했고 늘 생리대를 상비해야 했다. 게다가 아직 초딩 남자아이들이 같은 반이었기 때문에 그들의 장난과 소지품 뒤지기 등의 불법행위에 대해서도 신경이 곤두세워졌다. 그리고 놀랄만치로 규칙적으로 거르는 일 없이 나를 찾아왔다. 거의 28일 주기로 말이다. -_-

 

게다가 지금은 전혀 그렇지 않은데 그때는  월경통이 심해서 밤에 집에 오다가 길에 쓰러진 적도 있다. 아무도 없었기 때문에 나는 옷을 느슨하게 하고는 바닥에 누워서 한참 쉬다가 다시 일어나서 집에 왔다.

 

그리고 긴 시간이 흘러 의대에 오고 나서 첫월경이 빠르면 유방암 위험요인이라는 것(나는 가까운 친척 중에 유방암 환자가 있어서 위험요인이 이로써 두개다.)을 알게 되었고 또 기분이 나빴다.

 

월경페스티발을 할 때마다 나는 나의 월경에 대한 좋은 생각이나 긍정적인 생각을 하려고 애쓰고 또 좋은 제안을 많이 받았다. 하지만 역시 어색한 것은 어색하다. 그래도 지금은 월경과 많이 화해한 편이다.

 

그리고 "내가 월경한다는 사실"을 감추어야 할 것이라고 꼭 생각하는 건 아니지만 일상적으로 누구에게 (정치적인 의미로) 드러내기에는 또 많이 문제가 생긴다.(남자들이 자기에게 성적인 제안을 암시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_-;심각한 부작용이다.)

 

여성이 현재 월경에 대해 무엇을 해야 할까. 월경 페스티발때가 오면 꼭 한번씩 떠올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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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음악을 싫어한다.

언제부터인가 큰 소리가 귀를 울리는 것을 혐오하게 되었다. 나에게 댄스 뮤직을 표방하는 가요들은 소음에 가깝다. 내가 헬스클럽을 싫어하는 이유 중 하나가 크게 틀어주는 천박한-이런 '가치관을 드러내는 표현은 쓰고 싶지 않지만' 너무도 잘 어울리는 표현이다!- 댄스 가요들을 들으면 귀가 썩어버릴 것 같기 때문이다.

 

 피아노 선생님인 어머니 덕에 어릴 때부터 클래식을 듣고 자랐기 때문에 어린 시절  나는 서양의 클래식 음악을 좋아했다.(동양의 전통음악은..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차이코프스키니 모차르트, 쇼팽, 리스트, 바흐.. 잡식성으로 음악을 들으면서 머리 속으로 이미지를 떠올리는 것이 취미였던 어린 시절에는 정작 그런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또래 아이들 중에 클래식을 즐기는 사람이 없었던 것.

 

대학에 와서는 클래식에 대해 까맣게 잊고 민중가요에 심취했었으나 그것 역시 듣는 것을 즐기기엔 너무 많이 들었고 질려버렸다. 그리고 이 역시 mania들과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

 

결국 나는 음악에 대해 완전히 맹인이 되어버렸다. 누군가가 "지금 이 음악 좋지 않아? 이 노래는 누가 부른 거고 어쩌구.." 말을 시작하면..내 머리 속은 공학 수학 공식으로 된 대화를 나누는 듯 어지러워 진다. 심지어 난 음악이 틀어져 있다는 사실 자체를 의식하지 못한다.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어릴 때부터 클래식음악을 많이 들으면 절대음감이 생긴다던데.

난 아마 그런게 있어서 음악에 대해 취향이 까다로운 게 아닐까 잠시 위안을 삼아보고 싶었지만..아무래도 감수성이 메마른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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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음..첨 만든 블로그.

네이버에도 하나 만든 것도 같지만..(기억이 아련하네요.)

글을 하나도 안 쓴 관계로..무효.

그나저나

이 공간을 어떤 공간으로 가꿀 것인지 좀 생각해 봐야겠어요.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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